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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화폐 변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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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원은 대한제국에서 유통하려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통되지 못했던 법정통화[1]이다.
대한제국 원은 기존화폐인 상평통보[2]와 백동화[3][4]를 대체하기 위하여 고안되었으며, 근대적인 화폐체계와 화폐 양식을 도입한 최초의 한민족의 화폐로 현대적인 지폐가 처음으로 도입된 화폐[5]이다. 따라서 똑같은 한 종류의 동전을 숫자에 따라서 단위(호칭)를 다르게 했던 기존의 화폐체계[6][7]와 다르게, 화폐 쳬계 내의 다른 종류의 동전/지폐에 숫자만 다르고 호칭은 같은 현대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백동화가 실패했고 백동화를 유지하면 일본의 경제침탈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한제국이 1900년에 전환국의 위치를 한성에서 용산으로 옮긴 뒤부터 대한제국 신 화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1년에 독수리를 새긴 반원 은화. 5전 백동화 1전 동화 3종을 발행한 것이 시작이었다.[8] 자체적인 시도는 이 때가 마지막으로 1904년에 제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권이 박탈당한 뒤인 1905년부터 일본제일은행의 주도로 일본의 오사카 조폐국에서 대한제국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 때는 20원과 10원과 5원 금화, 반원과 20전과 10전 은화, 5전 백동화, 1전과 반전 동화를 찍었는데, 이 화폐는 화폐정리사업과 함께 진행되어, 사실상, 기존 대한제국에서 생산한 모든 화폐를 부정하여, 한국인들을 몰락시키고 한민족의 민족자본을 말살하는데 쓰였다. 대한제국의 민족경제를 몰락시키고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한국경제를 지배하는데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금화를 발행했는데, 1906년에는 20원과 10원 금화를 1908년에 5원 금화를 발행하였지만, 명목상으로나마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던 화폐는 일제가 회수해서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남아있는게 별로 없다.
한자로는 圜이라고 썼다. 그런데 40여 년 뒤에 발행된 대한민국 환도 圜이라는 한자를 붙여썼다. 그 이유는 圜이 '둥글 원', '돌 환'이라는 두 가지 훈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폐로 쓰일 때는 그 시절에도 원이라고 쓰고 환이라고 읽어서, 원이라는 독음은 잊혔다.
동전의 도안 중에 대한제국의 국가수리를 도입한 도안도 있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2. 제일은행권과 구 한국은행권
고종 13년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에 따라 인천, 부산, 원산항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해관 업무를 취급해오던 일본 제일은행은 1901년 해관세를 저당하는 댓가로 은행권 발행권을 획득하고자 하였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반대로 획득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무역 촉진과 해관세 출납을 원활히 하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본 대장성에 발행 허가를 신청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는 제일은행에 은행권 발행을 허가한다. 1902년 5월 20일 일본제일은행에서 1원권 부터 발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제일은행권이 유통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 요인이나 재야 지식인들은 일본인들이 자국 화폐를 유통시킴으로써 경제 침탈과 침략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제일은행권 유통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도안에 들어있는 남자는 당시 일본제일은행의 소유주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다.[9]
후면에는 영어로 dai ichi ginko limited promises to pay the bearer on demand ○○yen in japane currency at any of its branches.(다이이치 은행 법인 소지인이 요구할시 지급을 약속함 ○○엔
한국 지점 에서 일본 환율로 교환이 가능함.)
그리고 아래 한자로 지배인인(支配人印), 두취지인(頭取之印) (은행장의 도장) (지점장의 도장) 이 있다.
일본이 발행한 제일은행권 |
1908년 일본 제일은행은 새로운 도안이 담긴 제일은행권을 발행했는데, 일원권은 화홍문, 오원권은 광화문, 십원권은 창덕궁 주합루를 도안으로 삼았다. 이후 1909년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 간에 제일은행권의 권리 의무 계승에 관한 각서가 교환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이후 (구) 한국은행에서는 기존의 제일은행권에서 명칭, 행장, 지급 근거 문구를 변경한 (구)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앞면 | 뒷면 | ||
일원 (1910.12.21) | 화홍문 | 채문 | |
오원 (1911.08.01) | 광화문 | ||
십원 (1911.08.01) | 창덕궁 주합루 |
이 구 한국은행권은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로 합병된 이후에도 발행되다가, 조선은행이 설립됨에 따라 유통 정지되고, 조선 엔으로 넘어간다.
참고로 1원, 5원, 10원은 기본 수십만원부터 비싸면 수천만원까지 올라간다. 그러니까 살 생각은 일절 접고 참고품으로 만족하자 그리고 일본제일은행권은 신권까지는 가격이 비슷하나 구권으로 가면 고수도 구하기 굉장히 힘들고 훨씬더 비싸다.
그러나 전단위 지폐인 봉황권은 그나마 가격이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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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통과정
대한제국 원이라지만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권은 1904년 한일협정서에 의하여 박탈당했고, 한일협정서로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 된 메가타 다네타로에 의해 1904년 11월 28일 전환국을 폐지하고 대한제국의 각종 화폐를 오사카 조폐국에서 생산케 하여 대한제국의 주조권 또한 박탈당했다.3.1. 화폐정리사업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재정적으로 동화하고 완전히 귀속시키기 위해 당시 대한제국 내에 있던 백동화와 엽전 등의 화폐를 회수하고 일본 화폐를 유통하여 일본제국 엔의 한반도 내 입지를 확장하려 했다.[10]화폐 제도 정리 작업이 준비가 끝나자 메가타는 고종의 재가를 얻어 조선 엔을 법화로 지정하게 했다. 그리고 화폐개혁의 실무를 일본 제일은행에 맡기게 했고 1905년 1월 31일 탁지부 사무국장 이중석, 메가다와 제일은행 서울지점 지배인인 시미즈 다이키치와 다음과 같은 계약을 맺었다.
첫째, 대한제국의 화폐 개혁에 관한 사무는 일본 제일은행이 담당한다.
둘째, 대한제국 정부가 관세를 담보로 하여 10년 분할 상환, 연율 6%로 화폐 정리 비용 3백만 엔을 일본 제일은행으로부터 차입하여 동행에 교부토록 한다.
셋째, 일본 제일은행이 공·사 거래에 무제한 통용토록 한다.
그리하여 제일은행은 일본 조폐국과 화폐제조계약을 맺었고 그리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권은 완전히 일본제국에 귀속되었다.둘째, 대한제국 정부가 관세를 담보로 하여 10년 분할 상환, 연율 6%로 화폐 정리 비용 3백만 엔을 일본 제일은행으로부터 차입하여 동행에 교부토록 한다.
셋째, 일본 제일은행이 공·사 거래에 무제한 통용토록 한다.
제일은행 조선지점이 대한제국의 사실상 중앙은행이 된 것이었다.
그 이후 1905년부터 병합 때까지 모든 백동화와 엽전은 회수됐고 현행 대한제국 화폐의 생산량 또한 급격히 감소했다.
3.2. 최후
1910년 대한제국이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화폐로에 법적인 지위 또한 사라졌으며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원은 회수되어 현대에도 흔치 않게 되는 큰 이유가 됐다. 이는 지폐도 마찬가지이다.[11]4. 여담
- 20원 액면가의 금화가 화폐 경매에 나왔는데, 평가액이 1억 5000만원에 달한다. 기사
[1] 모든 화폐는 신뢰를 기반으로 그 가치가 유지되는데, 구 화폐인 상평통보에게 조차도 신뢰로 승부가 안되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2] 당백전과 당오전도 상평통보의 일부로 여긴다. 두 화폐 모두 근대화폐로의 변혁을 꾀하지 않고 단위만 뻥튀기하여 가치만 높이려고 하다가 인플레이션만 유발했다.[3] 백동화도 근대화폐를 도입하기 위해서 만든 화폐인 것은 맞다. 하지만 백동화를 만들기위한 근대적 화폐주조기계는 일본에서 제작된 초기형 모델이어서 위조를 하기 대단히 쉬웠기에 위조동전이 넘쳤고, 화폐의 운용 자체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운용되었기에 결국 근대적 화폐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신민들이 애국심으로 백동화를 꾸역꾸역사용했지만 결국 화폐정리사업으로 민족자본이 몰락하게 된다.[4] 다만 대한제국 원을 백동화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5] 교초나 저화와는 활용 방식부터가 다르다.[6] 조선의 기본 화폐단위는 동전 한 개가 1푼(分)이었고 10푼이 1전(錢)이었으며, 10전이 1냥(兩)이었고 10냥이 1관(貫)이었다. 조선의 화폐단위를 냥/양으로 잘못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냥은 고액권으로 현대로 치면 만 원권 정도로 생각하면 좋다. 다만 백동화의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푼이란 단위는 일본에 통화권이 완전히 넘어가기 전부터 사장되었다.[7] 조선 외의 동양에서는 푼(문) - 돈(전) - 양(냥) - 원(위안/엔)체계를 썼기 때문에 한국이 기존 단위를 버린 것과 다르게 중국이나 일본은 기존 단위 중에 하나로 통일한 격이 되었다. 한국이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화폐체계를 확립했으면 현대 한국은 원화가 아니라 냥화나 관화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8] 결국 이 때도 완전히 근대적인 화폐체계를 만드는 것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달러처럼 동전과 지폐의 단위를 나누려고 이원화한 것이 아니다. 그냥 화폐 운영을 옛날방식으로 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9] 여담으로 2024년에 새로 바뀌는 일본 10000엔권 지폐 도안에 시부사와가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국 돈에 얼굴이 들어간 사람이 120여년이 지나 일본 돈에 다시 들어가는 셈이다.[10] 다만 엄연히 백동화와 엽전 등 당시 법적 지위를 상실한 구화폐를 처리한 것이지 당시 현행 화폐를 처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동화와 엽전은 실질적으로 유통됐기 때문에 구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제국 엔을 백동화와 엽전에 빈자리에 넣으려한 것이었다.[11] 여담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백동화의 가치가 사라지게되자 동전들을 녹여 그릇, 쟁반, 대야로 만들어지는 비극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