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0:28:24

로베르 2세(노르망디)

파일:노르망디 문장.svg
노르망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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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F25><colcolor=#fff>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Robert II
파일:로베르 2세(노르망디).jpg
이름 로베르 2세(Robert II)
별명 짧은 바지(Curthose)
출생 1054년
노르망디 공국
사망 1134년 2월 3일 (향년 79~80세)
잉글랜드 왕국 카디프
지위 노르망디 공작
1087년 ~ 1106년
배우자 시빌 드 콘베르사노 (1100년 결혼)
자녀 기욤 클리토
아버지 윌리엄 1세
어머니 플랑드르의 마틸다
형제 리샤르, 아델리자, 세실리아, 윌리엄 2세, 콩스탕스, 아델, 헨리 1세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아버지와의 갈등2.3. 윌리엄 2세와의 첫번째 분쟁2.4. 일시적인 휴전2.5. 윌리엄 2세와의 두번째 분쟁2.6. 십자군 원정2.7. 헨리 1세와의 분쟁과 타협2.8. 앨턴 협정의 결렬2.9. 몰락과 수감 생활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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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국 제5대 공작.

2. 생애

2.1. 초년기

1054년경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잉글랜드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 맘스베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 1090 ~ 1142/1143)과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은 그의 키가 작고 땅딸막했으며, 이 때문에 '짧은 바지(Curthos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밝혔다.

1051년 멘 백작 위그 4세가 사망한 뒤, 그의 미망인인 베르테 드 블루아와 어린 자녀 위베르 2세, 마르그리트는 멘 주민들에게 추방되었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 마르텔이 멘을 장악했다. 기욤 2세는 베르테 드 블루아와 두 아이들을 받아준 뒤, 조프루아 2세 마르텔과 대적했다. 그러다가 1060년 조프루아 2세가 사망한 뒤 멘 백작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지자, 기욤 2세는 위베르 2세가 멘 백작으로 선임되도록 주선한 뒤,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으며, 위베르 2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를 자신의 장남인 로베르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1062년 위베르 2세가 사망한 후, 멘 귀족들은 기욤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 3세가 이들을 지원해 아미앵과 백상 백작 고티에 3세가 멘 백작이 되도록 했다. 기욤 2세는 이에 대응해 1063년 멘 백국을 공격하여 각지를 황폐화하고 르망을 공략했으며, 고티에 3세와 그의 아내 비오타를 생포했다. 뒤이어 마엔 시를 포위하여 함락한뒤 초토화했다. 고티에 3세와 비오타는 팔레즈 성에 투옥되었고, 같은 해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여기에 기욤 2세의 장남 로베르와 약혼했던 마르그리트도 급사하자, 기욤 2세는 스스로 멘 백작을 칭했고 나중에 아들 로베르에게 물려줬다.

1066년 잉글랜드 원정을 떠났을 때, 기욤 2세는 노르만 귀족들을 소집한 뒤 로베르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밝히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로베르는 1067년부터 헌장에서 "노르만 백작"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11세기 노르만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가 된 부친은 1067년 12월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전에 로베르를 노르망디의 임시 통치자로 임명했다고 한다.

1069년, 윌리엄 1세의 지배에 반감을 품은 멘 주민들이 전임 멘 백작 위그 4세의 여동생 게르센다와 결혼한 밀라노 변경백 알베르토 아초 2세의 부추김에 넘어가 노르만 기사들을 물어냈다. 이후 알베르토 아초 2세는 게르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 휴 5세를 멘 백작으로 세우고, 마옌 남작 조프루아 2세를 후견인으로 세운 뒤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프루아 2세는 멘 주민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휴 5세를 아버지에게 보냈고, 1072년 앙주 백작 풀크 4세에게 밀려났다. 이후 멘 백작령은 앙주 백작의 수중에 넘어갔다. 로베르는 이렇듯 멘에서 분쟁이 벌어지는 동안 별다른 조치하지 않았는데, 대다수 병력이 아버지를 따라 잉글랜드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2.2. 아버지와의 갈등

1073년 3월,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로 돌아온 뒤 멘을 탈환했고, 로베르를 멘 백작에 다시 앉혔다. 그러나 윌리엄 1세는 로베르에게 별다른 권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했고, 자기가 노르망디를 떠나 있을 때는 로베르가 아니라 아내 마틸다를 섭정으로 삼았다. 이후 로베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충분한 영토를 맡기지 않아 자신의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했고, 자기에게 통치할 기회를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로베르는 아버지에게 멘과 노르망디 귀족들이 자기에게 충성을 서약한 바 있으니, 그 땅을 통치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윌리엄 1세는 죽을 때까지 그 땅의 주권자로 남겠다고 답하면서, 아들에게 자신이 합당한 상속자임을 입증하고 인내심을 갖고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이에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여긴 로베르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1078년, 로베르는 로베르 2세 드 벨렘, 기욤 드 베르퇴유, 로저 피츠리처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한 뒤 티메레 성에 파산해 그곳에서 농성했다. 윌리엄은 성을 포위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공략했고, 로베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1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어머니 마틸다는 아들을 가엽게 여겨 자금을 보내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윌리엄은 격분해 마틸다의 명령에 따라 플란데런으로 자금을 가져갔던 전령 한 명을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다. 그 후 로베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궁정으로 이동했다. 필리프 1세는 로베르가 강력한 군대를 모으는 걸 도왔고, 노르망디 국경지대인 제르베로이 요새를 넘겨줬다. 이후 로베르는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아버지에 대적했다.

파일:윌리엄 1세에게 상처를 입힌 장남 로베르.jpg
에드먼드 에반스 작,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힌 로베르 커트호즈>, 1864.

1079년 1월, 윌리엄이 제르베로이 성을 포위했다. 이에 로베르는 극비리에 성에서 출격해 포위군을 습격해 많은 병사를 사살했다. 연대기 작가 우스터의 존(John of Worcester, ? ~ 1140)에 따르면, 로베르는 전투 도중에 아버지의 팔에 상처를 입힌 뒤,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늦게 인식하고 말에서 내린 뒤, 자기 말을 타고 떠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기 보다는 다윗이 아돌람 굴에서 사울을 살려준 성경의 일화에서 착안해 창조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윌리엄은 3주간 포위 공격을 퍼부었지만 공략에 실패해 루앙으로 후퇴했고, 로베르는 플란데런 백국으로 이동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자기 아들들이 로베르의 반란에 가담한 것에 심적 부담을 느낀 노르만 대귀족들은 윌리엄에게 로베르와 화해하고 그의 동료들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양자는 1년간 협상한 끝에 1080년 4월 12일에 화해했다. 윌리엄은 로베르를 상속인으로 확인했고, 로베르는 삼촌인 오돈 드 바이외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할 책무가 주어졌다. 1080년 7월 아버지와 함께 노르망디를 떠나 런던으로 간 로베르는 그 해 가을 아버지로부터 스코틀랜드를 응징하는 원정을 이끌 권한을 맡은 뒤,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로디언 일대를 황폐화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했고, 런던으로 귀환하던 중 뉴캐슬어폰타인에 새로운 성을 세웠다.

1081년, 멘 백작령 남부의 라 플레슈 성이 앙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윌리엄 1세는 무력으로 대응하는 대신 앙주 백국과 평화 협정을 맽기로 했고, 로베르는 앙주 백작 풀크 4세를 멘 백작령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1082년 아버지 윌리엄과 권한 배분 문제를 놓고 또 다시 갈등을 벌인 끝에 노르망디를 떠나 프랑스 국왕 피리프 1세의 궁정에 피신했다. 이후 5년간 프랑스 궁정에서 망명 생활하던 로베르는 1087년 9월 9일에 사망한 윌리엄 1세가 죽기 전에 그를 용서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긴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으로 등극했다.

2.3. 윌리엄 2세와의 첫번째 분쟁

윌리엄 1세 사후, 셋째 아들 윌리엄 2세는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윈체스터의 왕실 재무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 후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고 모든 일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조언을 따르겠다고 약속한 끝에, 켄터베리 대주교 랑프랑크의 대관식 집전을 통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노르만 귀족들은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동시에 두 명의 주군을 섬겨야 하는 걸 몹시 껄끄러워했고, 윌리엄 1세 생전에 윌리엄 2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언질도 없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대관식을 갑작스럽게 감행한 처사에 불쾌해 했다. 그들은 1066년 잉글랜드 원정 때 윌리엄 1세의 후계자로서 충성을 서약한 대상인 로베르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공국의 유일한 군주로 받들기로 마음먹었다.

1087년, 지난날 윌리엄 1세에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로베르에게 풀려난 바이외 주고 오돈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윌리엄 2세의 궁정에 참석한 뒤, 잉글랜드 영지와 켄트 백작이라는 칭호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로베르를 유일한 군주로 받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 노퍽과 서퍽의 보안관 로저 비고트, 러스터셔와 햄프셔 보안관이자 대지주인 휴 드 그랑메닐, 런던, 미들섹스, 에식스, 하트퍼드셔 보안관이자 런던 탑 순경인 조프루아 드 맨더빌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강한 거물 10인 중 윌리엄 드 워렌, 앨런 더 레드, 휴 다브랑슈 만이 윌리엄 2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를 비롯한 거물 7명은 오돈과 함께 로베르를 받들기로 했다. 로베르 역시 잉글랜드 침공을 위해 함대를 해안지대에 집결했다.

1088년 4월 부활절, 귀족들은 왕의 호출에 응하지 않고 바이외 주교 오돈의 지도하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각자의 성채의 방어력을 강화하면서, 노르망디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렸고, 오돈은 런던과 켄터베리 사이에 위치한 로체스터에 군대를 집결했다. 여기에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와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아들들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파견된 선봉대가 오돈과 합세했다. 윌리엄 2세는 이에 맞서 런던에서 군대를 소집하면서, 전국에 모든 불공정한 세금을 폐지하고 공정하게 통치할 것이며, 평민들이 숲에서 나무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는 걸 허용하겠다고 약속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윌리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톤브리지를 신속하게 점령했고, 오돈과 오돈의 동생이자 모르탱 백작 로베르가 피신한 펜버시 성을 포위했다. 로베르가 파견한 구원군은 잉글랜드 함대에 의해 차단되었고, 펜버시 수비대는 6주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뒤이어 로체스터도 함락되자,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많은 반란군은 목숨을 건졌고, 그 중 많은 이가 윌리엄 2세의 용서를 받고 영지를 누릴 수 있었다. 반면 오돈 주교는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당하고 잉글랜드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한편, 로베르와 윌리엄 2세의 동생인 헨리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3천 파운드를 바치는 대가로 코탕탱 백작이라는 칭호를 로베르에게서 받아냈다. 그 후 헨리는 어머니가 물려준 글로스터셔와 버킹엄셔의 영지를 얻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이미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로버트 피츠하몬을 켄트 보안관으로 선임해 그 땅을 다스리도록 했고, 헨리는 빈손인 채 로베르 드 벨렘과 함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노르망디로 쫓겨난 오돈 주교는 로베르의 고문이 된 뒤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을 체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로베르 드 벨렘이 지난날 윌리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기가 소유한 모든 성에서 윌리엄 1세가 배치해둔 공작 소속 부대를 쫓아낸 전적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이 윌리엄 2세와 손잡고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로베르는 이에 설득되어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했다. 그 후 헨리 왕자는 바이외에 감금되었고, 로베르 드 벨렘은 뇌이레베크로 보내졌다. 헨리는 곧 풀려났지만, 로베르 드 벨렘은 1년 이상 감금되었다.

아들 로베르 드 벨렘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는 즉시 노르망디로 가서 자기가 소유한 모든 성에에 로베르 공작에 맞서 대항할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이에 오돈 주교는 로베르 공작에게 로베르 드 벨렘의 모든 성을 무력으로 점령하라고 사주했고, 로베르 공작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발롱을 공격해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함락했다. 뒤이어 생세네리 성을 포위했지만, 수비대가 악착같이 저항하면서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생세네리 수비대가 식량이 바닥나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항복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에 분노한 로베르 공작은 수비대 지휘관 로베르 카스텔란을 실명형에 처했고 수비대 장병들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이후 로베르 공작은 더 이상 로베르 드 벨렘의 성을 점령하는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대를 해산한 뒤 루앙으로 돌아갔다. 그 후 로저 2세 드 몽고메리가 보낸 사절로부터 아들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받자, 로베르 2세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1089년, 멘 백작령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로베르는 이를 진압할 군대를 마련하는 데 애를 먹자, 앙주 백작 풀크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풀크 4세는 에브뢰 백작 기욤의 조카 베르트라다 드 몽포르가 자신과 결혼하고, 윌리엄 1세의 삼촌이었던 랄프 드 가스가 소유했던 땅을 자기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한편, 로베르는 통치 초기에 프랑스 왕의 영토 근처에 위치한 아이브리 성을 기욤 데브뢰의 조카인 기욤 드 브레퇴유에게 하사했고, 그 대가로 전 카스텔란인 로저 드 보몽에게 브리온 성을 하사했다. 하지만 아이브리 성은 곧 아셀린 고엘의 소유로 넘어갔다. 아셀린 고엘은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아이브리 성을 자신의 유전적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로베르 공작이 자기를 정당한 소유자로 임명하기를 바라며, 아이브리 성을 로베르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로베르는 기욤 드 브레퇴유에게 1,500 리브르를 받고 아이브리 성을 판매했다. 이에 격분한 아셀린 고엘은 반란을 일으켰고, 1091년 2월에 기욤 드 브레퇴유를 체포했다. 여기에 로저 드 보몽의 아들인 로베르 드 멜룬도 로베르 공작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베르 공작은 로베르 드 멜룬을 체포한 뒤 로저 드 보몽에게 넘겼던 브리온 성을 클레어 가문의 대표인 로저 드 비엔페에게 넘겼다. 로저 드 보몽은 로베르 공작의 궁정에 찾아가서 막대한 돈을 넘기고 나서야 아들이 풀려나게 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로베르 공작은 브리온 성을 로베르 드 멜룬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로저 드 비엔페는 이에 반발해 브리온 성을 넘겨주길 거부했지만, 로베르 공작은 로저 드 보몽과 함꼐 공세를 개시해 브리온 성을 빠르게 접수했고, 로베르 드 멜룬에게 클레어 가문으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넘겨줬다. 한편, 랄프 드 콘테스와 기욤 데브뢰 사이에도 전쟁이 벌어졌다. 랄프는 로베르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에게 개입해달라고 청원했다.

이렇듯 노르망디에서 잇달아 분란이 터졌지만, 로베르는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에 대해 오더릭 바이탈은 그가 권력을 잡은 순간부터 무척 방탕하고 나태한 모습만 보였다고 기술했다. 이 주장은 20세기 초반까지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현대 학자들은 로베르가 이끈 노르망디 공국은 이전에 잉글랜드로부터 상당한 수입을 받았지만 이제는 끊어진 데다, 윌리엄 1세가 프랑스와 마지막으로 전쟁을 벌일 때 들어간 군사 비용, 헨리 왕자에게 유산으로 나눠줄 막대한 돈을 지불하느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로베르 공작은 이 때문에 군대를 집결하고 모집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러는 사이,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노르망디 귀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막대한 뇌물을 제공했고,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 내 반 로베르 세력을 회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1090년 10월 말, 코난 빌라도라는 이름의 유력자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망 기사들을 루앙으로 끌어들였다. 11월 3일, 코난 빌라도의 추종자들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만 기사 레이날드 드 바렌스의 기사단을 루앙에 진입하도록 했다. 뒤이어 로베르 공작에게 충성하는 길베르 드 라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시민들은 성문을 닫고 거부했다.

한편, 루앙에 있던 로베르 공작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루앙에서 병사를 급히 모은 뒤 레이날드 드 바렌스와 대적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시에서 탈출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로베르 공작은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수도를 떠나 센 강 반대편에 있는 노트르담뒤프레 수도원에 들어가서 반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루앙으로 진군해 남쪽 문을 돌파하고 루앙 시내로 쇄도했다. 피비린내 나는 접전 끝에 코난 빌라도가 체포되었고, 탑에서 던져졌다.

2.4. 일시적인 휴전

1091년 초,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로베르 공작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필리프 1세는 이에 응해 프랑스군을 이끌고 노르망디로 진군했지만, 도중에 윌리엄 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철수했다. 이후 로베르 공작과 윌리엄 2세는 서로의 입장차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걸 선호해 무력 대결을 자제했고, 더럼 주교인 기욤 드 생칼레의 중재로 1091년 2월 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캉 평화 협약에 따르면, 양자 중 한 사람을 지지했던 영주들은 몰수되었던 영지를 돌려받으며, 로베르는 노르망디, 팔캉 수도원, 세르부르와 몽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종주권을 자기 소유물로 삼았고, 헨리 왕자가 소유하던 코탕탱 반도 영지를 몰수하며,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받았다. 또한 두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상호 지원하기로 했으며, 로베르는 윌리엄의 상속자로 지명되고, 윌리엄 역시 로베르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헨리 왕자는 이 조약에 반발해 몽생미셸 성에서 용병을 끌어모아 농성했지만, 두 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몇 주간 항전한 끝에 4월에 성이 함락되자 브르타뉴로 망명했다. 또한 지난날 윌리엄 1세와 맞서 싸웠다가 1086년 윌리엄 1세에게 귀순한 뒤 노섬브리아의 소규모 영지를 다스리던 에드거 2세 역시 영지를 몰수당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1091년 5월,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가 노섬브리아를 침공하자, 그 해 여름 로베르가 윌리엄 2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이동했다. 그 해 가을, 윌리엄 2세는 로베르의 중재를 통해 말 콜룸 3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로베르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윌리엄 2세의 궁정을 떠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1092년 봄, 로베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함께 기욤 드 브레퇴유가 브레발을 공략하는 걸 도왔고, 아셀린 고엘을 몰아붙인 끝에 아이브리 성을 다시 양도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헨리 왕자가 노르망디 서부 귀족들을 포섭해 로베르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확보하려 들었고, 윌리엄 2세도 헨리 왕자를 지원했다. 얼마 후, 헨리 왕자는 지역 주민들의 지원으로 동프롱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로베르 공작은 동프롱이 당시 노르망디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인 로베르 드 벨렘의 영지이므로, 동생이 그곳을 취하는 건 노르망디 공작에게 도전할 수 있는 위험한 봉신을 약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에 동생과 싸우지 않았다.

2.5. 윌리엄 2세와의 두번째 분쟁

1093년, 로베르는 자기가 동생 윌리엄 2세를 위해 잉글랜드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기도 했건만, 윌리엄 2세는 자기를 위해 병력을 지원해주지 않을 뿐더러 자기에게 대드는 헨리 왕자를 지원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그해 크리스마스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조약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할 거라고 선언했다. 윌리엄 2세는 조약 서명에 참석한 증인들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루앙에 출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윌리엄 2세는 중재인들을 매수하기 위한 상당한 자금을 모은 뒤 1094년 3월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이후 루앙에서 열린 재판 결과, 거물들은 공작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평결에 동의하지 않고 센 강 북쪽에 거주하는 노르만 귀족들을 끌어모은 뒤, 3월 11일 외에 상륙한 후 로베르를 따르던 부레스앙브레이를 접수했다.

한편, 로베르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는 지난 해 잉글랜드에서 사망한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영지를 회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아들인 로저 드 푸아테뱅은 군대를 아르장탕에 소집해 맞서 싸우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프랑스 국왕에게 항복했다. 그 후 윌리엄 2세가 부레스앙브레이를 접수하고 여러 노르만 귀족이 가세했다는 소식을 접한 로베르는 프랑스군과 함께 윌리엄 2세가 거점으로 삼은 외로 진군했지만, 외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필리프 1세가 태도를 바꿔 윌리엄 2세의 편을 들자, 결국 무력으로 윌리엄 2세를 꺾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1094년 말, 윌리엄 2세는 그루퍼드 압 키난이 웨일즈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가서 그루퍼드 압 키난의 반란군을 토벌했다. 뒤이어 로베르 드 몽브레유가 주동한 또다른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했다. 1095년 봄, 윌리엄 2세는 헨리 왕자에게 자금을 쥐어주고 노르망디로 보내 로베르 공작에 맞서 군사 활동을 벌이도록 했다. 이에 대응한 로베르 공작의 활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우르바노 2세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 후 1096년 초 교황 특사가 노르망디로 파견되어 윌리엄 2세와 로베르 사이의 평화 협정을 맺도록 종용했고, 두 형제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이후 로베르는 명예를 드높여서 형제들과의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몸소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2.6. 십자군 원정

1096년 초, 로베르는 블루아 백작이자 사위인 에티엔 드 블루아, 브르타뉴 백작 알란 4세, 사촌인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착수했다. 이 원정에는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했으며, 프랑스 북부에서 가뭄이 닥쳤기 때문에 식량을 마련하는 게 곤란했다. 당시 십자군 기사들은 자기가 가진 영지를 수도원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리느라 애썼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기사들이 수도원에 담보로 맡긴 것을 알려주는 헌장의 수가 비교적 적었다. 이는 로베르가 원정에 필요한 대부분의 돈을 직접 지불했음을 암시한다. 이때 로베르는 형제 윌리엄 2세에게 10,000 마르크를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국을 대신 다스리도록 했다.

로베르가 동원한 노르만군은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부대 중 규모가 가장 큰 군대로 손꼽혔다. 학자들은 그들의 규모가 6,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정에는 오말레 백작 에티엔, 바이외 주교 오돈, 에브뢰 주교 길버트 피츠 오스베른 등 지난날 잉글랜드 왕위를 그에게 넘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노르만 귀족 및 주교들이 대거 가담했다. 로베르는 노르만군을 직접 이끌고, 브르타뉴군과 함께 프랑스 프랑스콩테 지방의 퐁타리에 항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플랑드르군 및 블루아군과 연합했다. 총 10,000명으로 불어난 연합군은 '비아 프랑키게나(Via Francigena, 프랑크의 길)를 따라 진군해 알프스산맥을 넘었고, 11월 중순에 루카에 도착해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축복을 받았으며, 1097년 1월 바리에 도착해 아풀리아 공작 로제 보르사의 영접을 받았다.

이후 플랑드르군은 아드리아해를 건너갔지만, 나머지 군대는 칼라브리아에서 날씨가 좀더 나아지길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그 동안 다수의 이탈리아, 노르만 출신 장병들이 추가로 가세했다. 1097년 4월 초 지중해로 출항한 로베르의 군대는 디라히온에 상륙한 뒤 비아 에그나티우스(Via Egnatius,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5월 중순에 도착한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알현해,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공략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주겠으며, 황제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넌 로베르의 십자군은 6월 첫째 주에 니케아에 도착해 이미 니케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십자군과 합세했다. 당시 십자군은 전투원, 비전투원과 민중 십자군의 생존자들을 합쳐 6만 명에 달했다. 6월 중순, 니케아 수비대는 도시를 동로마 황제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십자군은 니케아를 접수한 뒤 2개 그룹으로 나뉘어 레반트를 향해 출발했는데, 로베르는 그중 첫번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1097년 7월 1일에 발발한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그는 좌익을 맡아 튀르크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로베르는 십자군 주력과 함께 타우루스 산맥 주변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튀르크군이 버린 요새들을 하나둘씩 접수했다. 10월 말, 로베르가 지휘하는 부대가 데미르코프뤼(Demirköprü)를 접수했다. 이후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공방전에 착수했을 때, 로베르는 라오디게아 항에 주둔하면서 키프로스로부터 군수물자를 수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1098년 2월 알레포 에미르 리드완이 지휘하는 군대가 안티오키아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자, 보에몽과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가 이들을 격퇴했고, 로베르는 아데마르 주교와 함께 숙영지를 지켰다.

1098년 6월 4일, 십자군은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안티오키아를 접수했다. 그 해 6월 28일,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기 위해 달려온 모술의 아타베그 카르부가의 대군과 맞붙었을 때, 로베르는 성 앞 평원에 최초로 도달하여 오론테스 강 근처에 자리를 잡은 프랑스 북부군의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카르부가의 군대는 수적으로 월등했지만 내부분열이 심각했던 터라 십자군의 결사적인 돌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1099년 1월, 로베르는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와 함께 홈스로 진군했다. 그 후 그들은 서쪽으로 향하던중 히신 알아크라드(Hisn al-Akrad) 수비대의 급습을 받았지만 격파했고, 다음날 수비대가 떠난 요새를 접수했다.

1099년 2월 14일, 로베르와 레몽은 아르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3월에 리오디게아에서 출발한 고드프루아와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가 합세했다. 십자군의 총 병력은 기사 1,200명과 보병 10,000명에 달했다. 그해 5월, 파티마 왕조의 사절이 아르카에 찾아와서 셀주크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해 8월에 파티마군에게 접수된 예루살롐을 넘기라는 십자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십자군 수뇌부는 파티마 왕조가 군대를 모으기 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기 위해 서둘렀다. 5월 13일, 십자군은 아르카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 트리폴리의 에미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시돈 수비대의 급습을 격퇴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이동했다.

1099년 6월 7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군대는 북쪽 요새 벼의 나블루스 문 맞은편에 배치되었다. 이곳은 예루살렘 요새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으며, 1년 전에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도시에 침투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6월 13일, 십자군은 현지 은둔자의 예언을 믿고 사다리 하나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그들은 공성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했고, 7월 15일 총공격을 펼친 끝에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8월 1일, 로베르의 목사인 아르눌프가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선임되었다. 12세기 잉글랜드 연대기에는 로베르가 예루살렘의 왕으로 등극해달라는 제안을 거부했다고 기술되었지만, 학자들은 교차검증되지 않는 점을 근거로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얼마 후,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탈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99년 8월 9일, 고드프루아와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의 군대가 이들을 막기 위해 람라로 향했고,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와 로베르는 몇몇 기사들을 그들에게 보냈다. 이후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아스칼론에 이르렀다는 것이 확인되자, 로베르는 레몽 4세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고드프루아, 플란데런 백작과 합세했다. 8월 12일, 약 1,200명의 기사와 9,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시밪군이 아스칼론에 도착했다. 이후 십자군은 전투 대형을 형성했는데, 로베르는 중앙 부대를 지휘했다. 파티마 왕조의 군대는 성벽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십자군은 적 경보병과 기병의 공격을 막아내고 파티마 진영을 공격했다. 파티마군은 속절없이 와해되었지만, 아스칼론은 레몽과 고드프루아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십자군이 제대로 된 공성을 하지 못하면서 함락되지 않았다.

1099년 8월 말, 로베르는 귀국길에 올랐다. 라오디게아에 도착한 노르망디 공작은 플랑드르의 로베르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항해하여 알렉시오스 1세의 영접을 받았다. 그 해 겨울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콘베르사노의 영주 고프레도의 딸 시빌과 결혼했다. 그 후 1100년 여름에 노르망디로 항해했고, 늦어도 9월에 도착했다.

2.7. 헨리 1세와의 분쟁과 타협

로베르가 십자군 원정을 떠난 동안, 그를 대신해 노르망디를 맡은 윌리엄 2세는 공작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의 결정 중 일부는 로베르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윌리엄 2세의 섭정 기간 동안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은 로베르 드 벨렘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1097년 사망한 바이외 주교 오돈을 대신해 윌리엄 2세에게 선임된 투롤 드 브레모이는 성직자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 오돈 주교가 이전에 영향력을 누렸던 베생의 지배권은 헨리 왕자에게 넘어갔다.

그 후 노르망디에 도착한 로베르는 1100년 8월 2일에 윌리엄 2세가 사냥하던 도중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했고, 헨리 왕자가 곧바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에 불만을 품었지만, 일단 노르망디의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주민들이 불만을 제기했다는이유로 투롤의 권력을 박탈해 바이외를 사실상 통치했고, 리지외 교구를 윌리엄 2세의 총신이었으나 헨리 1세에게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해 노르망디로 망명한 라눌프 플램바드의 통제하에 두게 했다. 또한 세 교구는 로베르 드 벨렘의 통제하에 두도록 했다. 이로 인해 교구 수입이 대거 넘어가자, 세 주교인 세를롱 도르제르는 로베르 드 벨렘을 파문한 뒤 지역 수도원장과 대 집사와 함께 헨리 1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1101년 6월, 로베르는 200척의 대함대를 르 트레포르에 집결해 잉글랜드로 진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로베르 드 벨렘, 페벤시 성주 윌리엄 드 모르탱,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 등 잉글랜드 거물들이 그를 지지했고,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와 에브뢰 백작 앙리도 그를 지지했다. 헨리 1세는 이에 맞서 샤이어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병사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용 병력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페벤시 인근에 숙영지를 세웠다. 7월 20일, 로베르의 함대는 잉글랜드로 출항했다. 그는 영국 해협에서 헨리가 보낸 배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곧장 로베르 편으로 돌아섰다. 노르만 함대는 서쪽으로 항해해 8월 초에 포츠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로베르의 군대는 윈체스터를 향해 진군했지만, 윈체스터 시민과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고 농성하자 공략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앨턴에서 헨리 1세의 군대와 조우했지만, 로베르는 전투를 벌이는 대신 평화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연대기 작가들은 왕위를 주장하는 두 사람의 동맹자들의 노력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오더릭 바이탈은 거물들은 전쟁을 열망했지만, 헨리 1세가 로베르와 직접 만나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름부음받은 군주를 상대로 무기를 든 로베르를 파문할 준비가 되어 있던 안셀무스 대주교의 강경한 태도가 로베르로 하여금 헨리 1세와 타협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두 형제는 앨턴에서 1091년 로베르와 윌리엄 2세가 체결한 캉 조약과 유사한 조건의 조약을 맺었다.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고, 헨리도 노르망디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또한 두 형제는 적법한 후손이 없을 경우 서로를 상속자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매년 은화로 3천 마르크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수입의 10분의 1에 달했다. 그리고 분쟁에 참가한 모든 당사자는 자기 영지로 돌아가며, 형제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 돕기로 했다. 로베르는 미카엘의 날(9월 29일)까지 잉글랜드 궁정에 머무른 뒤 노르망디로 귀환했다.

2.8. 앨턴 협정의 결렬

1102년 봄, 헨리 1세는 로베르 드 벨렘이 45개의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규탄했다. 그 후 그는 몇 달간 로베르 드 벨렘이 속한 몽고메리 가문의 잉글랜드 영지를 모조리 압수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앨턴 협정에 따라 반역자 로베르 드 벨렘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따라 로베르 드 벨렘이 숨은 비니 성을 포위했지만, 그의 진영에 있던 공모자들이 자기 천막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면서 군대가 와해되었다. 이후 로베르 드 벨렘의 군대는 이웃 영주들의 영지를 약탈했다.

그 후 헨리 1세는 노르망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노르만 귀족 라울 3세 드 토스니가 아버지 사후 잉글랜드에서 상속받은 땅을 접수하기 위해 찾아오자, 헨리 1세는 노섬브리아 백작 월테오프의 부유한 상속녀인 아델리자와 라울 3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1103년 1월 12일, 기욤 드 브레퇴유가 적법한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사생아 외스타슈가 이 땅을 접수했다. 그러자 기욤의 조카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외스타슈는 헨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1세는 그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의 사생아인 줄리아나 드 퐁트브로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1세의 지시를 받은 로베르 드 멜룬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조카들이 외스타슈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더해, 헨리 1세는 또다른 사생아인 마틸다를 로베르 드 벨렘의 정적인 페르샤 백작 로트루 3세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헨리 1세가 노르망디 정계에 광범위한 개입을 행사하는 동안, 로베르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1103년 로베르 드 벨렘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아르눌프 드 몽고메리가 알메네스 성을 접수한 뒤 로베르에게 넘겨주자, 로베르 드 벨렘은 반격을 가해 알메네스 성을 접수하고 그곳의 수녀원을 불태웠으며, 수비대 일부는 위생이 좋지 않은 감옥에 감금되어 기나긴 옥살이를 해야 했고, 나머지는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 뒤이어 로베르 드 벨렘은 로베르와 그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주변의 여러 성을 접수했다.

1103년 여름, 제2대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이 핸라 1새애개 영지를 몰수당한 뒤 로베르를 찾아와서 왕을 설득해서 재산을 돌려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응해 잉글랜드로 가서 헨리 1세와 접견했다. 그 결과 헨리 1세는 서리 백작에게 영지를 돌려주는 걸 받아들였지만, 그 대신 로베르는 1101년 침공 이후에 받았던 연금 3,000마르크를 포기해야 했다. 1104년, 헨리 1세는 윌리엄 드 모르탱이 왕국 남동부의 영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윌리엄 드 모르탱은 노르망디로 망명했고, 헨리 1세는 그의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했다. 그 해 8월, 헨리 1세는 노르망디에 있는 자기 영지를 방문했고, 그의 가신들로부터 명예로운 영접을 받았다. 그 후 헨리는 로베르와 만나서 그가 자기 가신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 조건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로베르는 기욤 데브뢰가 헨리 1세의 봉신이 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가 이토록 헨리 1세에게 무기력하게 끌려다닌 이유는 불분명하나, 아마도 1103년 3월 아내 시빌이 아들 기욤 클리토를 낳은 지 5개월 만에 사망한 것에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1] 그러던 1105년 초, 칼바도스 지역의 크룰리 영주이자 노르망디 망슈 지역의 영주이며, 글로스터 남작인 로버트 피츠하몬이 노르망디로 가서 바이외 근처의 조상 영지 근처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다가 로베르의 지지자들에게 패배해 생포되었다. 헨리 1세는 자신의 주요 추종자인 로버트 피츠하몬의 생포 소식을 듣자 로베르에게 그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가 받아들이지 않자, 헨리 1세는 앨턴 협정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노르망디 침공을 단행했다.

2.9. 몰락과 수감 생활

1105년 4월, 헨리 1세는 노르망디 원정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은 바르플뢰르에 상륙한 뒤 부활절에 카랑탕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멘 백작 엘리 1세,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 마르텔의 군대와 합세했고, 노르망디의 주요 거물들의 지원을 받았다. 로베르에게 가담한 거물은 로베르 드 벨렘과 윌리엄 드 모르탱 뿐이었다. 로베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에게 원군을 욫어했지만, 헨리 1세가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보내며 중립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4월 중순 바이외에 도착한 헨리 1세는 로버트 피츠하몬을 석방한 뒤 바이외 수비대에 항복을 요구했다. 수비대가 이를 거부하자, 헨리 1세는 무력으로 공략한 뒤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 후 캉으로 진군한 헨리 1세는 캉 시민들이 성주를 추방하고 도시를 넘겨준 덕분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헨리 1세는 여세를 이어가 팔레즈 성을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1105년 5월 말, 헨리 1세는 생토에서 로베르의 사절단과 협상했지만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직자 서임권 논쟁으로 인해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 갈등이 생기자, 헨리 1세는 일단 원정을 중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해 겨울 로베르 드 벨렘과 로베르 공작의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해 평화 협상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했다. 1106년 봄, 안셀무스와의 분쟁이 해결되자 원정을 재개한 헨리 1세는 팔레즈 근처 생피에르쉬르디브의 요새화된 수도원을 재빨리 점령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팅슈브레 성을 포위했다. 팅슈브레는 노르망디 남서쪽, 모르탱 백작의 국경에 있으며, 로베르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노르만 거물인 윌리엄 드 모르탱이 지키고 있었다. 이에 로베르 공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 1세와 대치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평생 연금을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의 권력을 넘겨달라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은둔 수도자 비탈 드 사비니도 로베르에게 형제와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더 이상 헨리 1세에게 우롱당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팅슈브레이 전투는 한 시간 동안 벌어진 끝에 수적으로 우월한 헨리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로베르의 군대 대부분은 포로가 되거나 사망했고, 로베르는 윌리엄 드 모르탱과 함께 생포되었다. 로베르 공작의 후위대를 지휘했던 로베르 드 벨렘은 탈출에 성공한 뒤, 노르망디 전역을 지배하게 된 헨리 1세에게 귀순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를 생포한 뒤 팔레즈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낸 후, 로베르의 4살된 아들 기욤 클리토를 자신의 부하인 아크라 백작 엘리아 드 생상스의 관리하에 두도록 했다. 1106년 10월 중순, 헨리 1세는 노르만 귀족들을 리지외 회의에 소집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고, 로베르는 얼마 후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웨어햄 성에 수감되어 솔즈베리 주교 로저의 감독을 받았다. 나중에 윌트셔 데바이지스 성으로 이송되어 가택 연금되었다. 1126년 말 노르망디에서 기욤 클리토를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난 후, 로베르는 헨리 1세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감독하에 놓였으며, 브리스톨로 옮겨졌다가 카디프로 이송되었다. 1130년에 발행된 왕실 보고서에 따르면, 그를 가두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예산으로 연간 35파운드 10실링이 할당되었다.

파일:로베르 2세의 석관.jpg
글로스터 대성당에 보관된 로베르 2세의 석관.

1134년 2월 3일, 로베르는 향년 79~80세의 나이로 카디프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글로스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헨리 1세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제단에 항상 촛불을 켜도록 명령했다.

3. 가족 관계

  • 시빌(? ~ 1103): 콘베르사노의 영주 고프레도의 딸.
    • 기욤 클리토(1102 ~ 1128): 잉글랜드 국왕과 노르망디 공작 주장자. 1127년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로부터 플란데런 백작 칭호를 수여받았다.
  • 사생아
    • 리샤르(? ~ 1100): 1100년 5월 뉴 포레스트 숲에서 사냥하던 중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3개월 후 윌리엄 2세도 같은 숲에서 사냥하던 중 역시 화살에 맞아 죽었다.
    • 기욤(? ~ ?): 팅슈브레이 전투에서 아버지가 패망한 뒤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사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아크라 백작 엘리아 드 생상스의 부인.


[1]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버킹엄 백작이자 노르망디 롱그빌의 영주 고티에 기파르의 미망인인 아녜스 드 리베몽이 공작부인이 되기 위해 시빌을 독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