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나라, 청나라 시기 재상격[1]에 해당하는 관직2. 명나라의 내각
명나라 시기 홍무제가 중서성을 폐지하면서 재상을 두지 않고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황제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자,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전각대학사를 두었다. 그러나 제도로서가 아닌 임시적인 것이었고 본격적으로는 그의 아들인 영락제 시기부터 한림원 학사들을 자금성 내의 문연각(閣)에 입직시켜 황제에 조언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內閣)화개전(華蓋殿 가정제 때 중극전으로 개칭), 근신전(謹身殿 건극전으로 개칭), 무영전(武英殿), 문화전(文華殿), 문연각(文淵閣), 동각(東閣)에 입직하며, 처음 실시 때는 정5품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다른 직을 겸직하면서 품계가 올라갔으며 홍희제 시기부터 정3품으로 올랐고 선덕제 시기부터는 상소에 의견을 첨부하는 표의권을 통해 정치현안에 대한 발언권이 생겼고, 공고관[2] 및 상서와의 겸직이 이루어졌고 품계 또한 정2품으로 올랐다. 명 중기 이후 황제와의 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내각대학사는 상서와의 겸직을 통해서 권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표의권이 없었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내각에 왕림해야만 내각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런 체제가 영락제 시기까지 유지되다가 홍희제 시기 황제의 자문기구인 홍문각(홍무제가 설치한 홍문관을 홍희제가 개칭)에 표의권이 부활했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 시기 홍문각이 폐지되면서 표의권이 비로소 내각으로 이전되었고, 더욱이 정통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보좌를 위해 내각에서 상소에 의견을 첨부하여 황제에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으뜸이 천순 연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이후 수석내각대학사(수보 首輔)라 했고, 융경 연간부터는 내각수보가 사실상의 재상이 되었다. 수보 밑에 次輔, 群輔가 존재한다.
내각대학사는 보통의 경우, 한림원에서 입각한다. 한림 출신의 대학사는 상서, 시랑을 겸직하는데, 이때의 겸직 관직은 품계를 높이는 수단일뿐 실제 그 직무를 맡는 것은 아니다.
예외적인 경우로 정덕, 가정 연간에는 외관(外官) 즉 이미 다른 관직을 맡은, 한림이 아닌 자들이 황제의 의지를 받들자 내각대학사를 겸직하게 된다. 이 경우는 본직이 이미 상서, 시랑이므로 해당 관직의 권력을 행한다.
정덕, 가정연간 이후 수보가 9경의 으뜸인 이부상서를 겸하는 것이 예가 되었다. 장거정은 수보를 오래 지내 권력이 이미 막강하여 자파 인물을 이부상서에 앉혔다.
내각대학사는 상서와 겸직을 하긴 했으나 자체적으로 육부에 대한 직접적 명령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내각대학사는 재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각 부에 대한 명령권을 갖는 국무총리격의 재상직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권한을 빌어 재상의 역할을 수행할 뿐 원칙적으로는 황제의 비서에 불과했던 것. 명나라의 정무체계에서 모든 결정권은 황제에게만 존재하고, 상서는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기구의 수장정도 밖에는 안된다.
즉, 내각대학사가 관련 업무를 황제에게 상주하여 결재를 받으면, 이를 상서가 통보받아서 집행하는 체계이다. 때문에 의외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각대학사는 상서의 상관이 아니었으며, 상대적으로 대학사가 업무 중요도가 높은 요직이기는 해도 각 부의 상서들과는 상호 존중하는 관계였다.
대학사는 원래 조회 시에 상서의 아래 위치였는데, 가정 연간 이후 정1품이 되며 상서의 위에 서게 되었다.
내각에서는 황제가 내각을 방문하지 않는 이상 상주서를 보내야했는데, 그 과정을 황궁 내 상층 환관들의 조직인 사례감이 장악했으므로 이들과 협조해야했다. 이때문에 명나라 시기 환관들이 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만력제 시기 장거정이 이 관직에 오른 상태로 황제의 스승 자격과, 환관과의 타협을 통해 고성법, 일조편법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도하였다.
3. 청나라의 내각
청나라의 내각은, 순치 연간까지 있던 내삼원을 내각과 한림원으로 분리시키고 명나라 제도를 답습한 것에서 시작한다. 명나라 후기로 갈수록 내각대학사는 점차 재상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자연스럽게 내각대학사의 역할이 커질수록 황제권을 제약했기에 청나라에서는 내각의 존재를 견제하였다.내각대학사는 순치연간 이전에 한인(漢人)이 2품이다가 순치연간에 만, 한 모두 2품으로 했고, 강희연간부터 둘다 정1품으로 했다. 만, 한 각각 2명씩으로 했고, 그 밑에 육부상서가 겸직하는 형태로 종1품 협판대학사 만, 한 각각 1명씩 두었다.
강희 연간에는 내각 외에 남서방에 한림원 학사를 두어 자문하게 하였고 주접을 관리하였다. 옹정 연간에는 강희 말기 제위 다툼에 간여한 남서방 대신 군기처를 두어 그 기능을 계승하였다. 군주가 직접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군기처의 출현으로 내각은 유명무실해졌다.
군기처는 건륭 시기를 거치며 그 역할이 강화되었는데, 군기대신이 있다하더라도 황제가 군기처를 직접 통할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비서기구로 명말의 내각대학사같은 재상의 위치와는 엄연히 달랐다. 다만 건륭 후기에 이르면 황제가 나태해지고 총신이 나타나며 군기처가 중간에서 권력을 잡아 군기대신이 재상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청대 내각대학사는 보화전, 중화전(건륭 때 폐지하고 대신 체인각), 무영전, 문화전, 문연각, 동각에 두었는데, 보화전에는 건륭 후기 이후 두지않았다. 청대 내각대학사는 권력을 가진 군기대신 등의 위상을 위한 겸직수단으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