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1:25:21

김용식호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김용식(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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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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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전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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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1991년
초대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정휘
2대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이영민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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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화집
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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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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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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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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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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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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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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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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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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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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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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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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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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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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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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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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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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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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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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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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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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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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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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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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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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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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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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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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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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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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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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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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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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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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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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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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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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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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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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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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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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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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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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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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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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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전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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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감독
김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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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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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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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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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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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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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주영광
계약 기간 1954년 6월[1]
계약 종료
성적 A매치 2전 0승 0무 2패 (승률 0%)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강 / 조별리그)[2]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5대 감독 김용식의 대표팀에 대해 정리한 문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본선 2경기를 지휘했다.

2. 활동

2.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월드컵 예선은 전임 이유형 감독이 지휘하였다. 당시 피파는 아시아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채 아시아끼리만 예선을 진행하였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예선을 치루지 않고 본선에 참가하였고,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대만이 기권하면서 대한민국과 일본이 진출권 1장을 두고 2경기를 진행하였다.[3]

경기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이었으나, 당시 일본 선수들이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두 경기를 다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이때, 한국 대표팀은 만약 패한다면 귀국하지 않고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결사의 각오로 경기를 치렀다. 결국 2경기에서 1차전 5:1 승리와 2차전 2:2 무승부, 1승 1무로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지역예선 문서
2.13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1.1. 본선

2.1.1.1. 선수 명단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한민국 출전 선수 명단
포지션 등번호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생년월일 A매치 출장 / 득점 소속팀
GK 1 홍덕영 Hong Deok-young 1926.05.05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선방직 축구단
12 함흥철 Ham Heung-chul 1930.11.1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
FB 2 박규정 Park Kyu-chung 1924.06.1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병참단 축구단
3 박재승 Park Jae-seung 1923.04.0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6 민병대 Min Byung-dae 1918.02.2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3 이종갑 Li Jong-kap 1920.03.1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4 한창화 Han Chang-wha 1922.11.0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HB 4 강창기 Kang Chang-gi 1927.08.2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선방직 축구단
5 이상의 Lee Sang-yi 1923.09.0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선방직 축구단
11 정남식 Chung Nam-sik 1917.02.16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5 김지성 Kim Ji-sung 1924.11.0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6 주영광
C
Chu Yung-kwang 1920.12.0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해군 축구단
FW 7 이수남 Lee Soo-nam 1927.02.0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8 최정민 Choi Chung-min 1930.08.3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9 우상권 Woo Sang-kwon 1926.02.0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
10 성낙운 Sung Nak-woon 1926.02.0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병참단 축구단
17 박일갑 Park Il-kap 1926.03.2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8 최영근 Choi Yung-keun 1923.02.0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해군 축구단
19 이기주 Li Ki-joo 1926.11.1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선방직 축구단
20 정국진 Chung Kook-chin 1917.01.0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해군 축구단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용식 (Kim Yong-sik)
2.1.1.2. 스위스로 가는 길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 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세 닳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본 외신 기자 중 한 명이 "당신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조롱이나 다름 없는 질문을 했다. 이때 헝가리전에서 전설적인 선방쇼를 선보인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나라라서 물자를 절약하는 것을 애국하는 일로 여겨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받아넘겼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일단 미군수송기를 얻어타고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도쿄 국제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일본 도쿄-태국 방콕-인도 콜카타-파키스탄 카라치-이탈리아 로마-스위스 취리히로 이어지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방불케 하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4][5] 그나마도 1진만 먼저 출발했고 2진은 좌석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라며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일정을 미루고 좌석을 양보한 덕에 2진도 뒤늦게 에어 프랑스 항공편으로 출발해서 경기 날짜만 간신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은 다른 팀들이 전부 다 개막 한 달 전부터 모여서 현지 적응 훈련을 하는 동안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경기 10시간 전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에 도착해서 숙소를 쉽게 찾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가고 나서도 경기 하루 전날까지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 바느질을 한다거나 축구화 손질을 한다거나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컨디션 관리는 고사하고 온갖 고생만 잔뜩 한 끝에, 거의 유니폼만 갈아입는 수준으로 결전의 준비를 마치고 바로 세계 최강 헝가리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2.1.1.3. 조별리그
대한민국은 헝가리, 터키, 서독과 2조에 편성되었다. 당시 규칙상 시드 배정국[6], 미배정국[7]으로 나누어 시드 배정국과 미배정국 간에 2경기를 실시하며 시드 배정국과 시드 배정국, 시드 미배정국과 시드 미배정국 간의 경기는 진행하지 않았다.
2.1.1.3.1. 1경기: 헝가리 9: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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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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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3.2. 2경기: 터키 7:0 대한민국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2조 문서
5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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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3.3. 결과
순위 팀명 경기수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1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2 2 0 0 17 3 +14 4
2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2 1 0 1 7 9 -2 2
3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2 1 0 1 8 4 +4 2
4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토너먼트 진출 | 탈락

3. 평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이라도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 출전하기에 앞서 선수들을 불러 전의를 다지며 한 말.
애초에 세계의 벽이 높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용식은 위와 같은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하지만 조편성에 너무나도 운이 없었던 대한민국. 당시는 물론 역대 월드컵을 따져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최강팀인 '매직 마자르' 헝가리를 만나서 0:9로 대패하였다. 그리고 다음 튀르키예와의 경기에서 진이 빠진 대한민국은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고 역시나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점수만 보면 실망스러울 경기였지만, 사실 한국대표팀의 저 결과는 그야말로 투혼을 불태운 결과였다. 그럴만한 게 당시 대표팀은 제대로 된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화물기를 얻어타 구석에 처박혀 겨우 스위스로 와서 제대로 연습도 못하고 경기에 임했다! 이러다 보니 외국기자들은 '한 20:0으로 헝가리가 이기겠지?' 이랬고 실제로도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드러누워 잠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구' 이랬던 것이다.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 라며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헝가리는 이탈리아나 잉글랜드 같은 당대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7골씩을 때려박고 안드로메다로 보낸 전력이 있던 말 그대로 공포의 팀이었다. 별명이 괜히 '매직 마자르'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표팀이 한 자릿수 실점으로 막은 건 엄청나게 선전한 셈이었다.[8] 더군다나 헝가리의 다른 경기를 보자면 장난이 아니었는데 그 유명한 서독을 8:3으로 눌러버려 한국전 못지 않게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헝가리는 이 서독을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되려 2:3으로 패하고 만다.

4. 여담

파일:KFA Kit (1954~2022).jpg
  • 당시 대표팀이 착용한 유니폼은 하늘색 상의에 하얀색 하의였다.


[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본선만 지휘.[2] 16개 진출팀 중 16위, 당시 월드컵 본선 진출국은 16개국이었다.[3]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는 1차전에서 헝가리에게 0:6 대패, 대한민국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게 0:9 패배, 튀르키예에게 0:7 패배하며 이후 예선은 타 대륙과 함께 묶여 진행되었다.[4] 노선이 저렇게 복잡한 이유는 간단하다. 1950년대에는 기술 부족으로 민항기들의 항속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성국이었던 중국소련의 영공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유럽을 가려면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크게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카라치진나 국제공항은 당시 아시아-유럽 항로의 거점으로 각광받았으나, 냉전이 종료되어 구공산권의 영공이 활짝 열리고 파키스탄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5] 비슷한 고생담이 1948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대한민국 선수단에게도 있다. 다만 이때는 여러 종목의 선수진이 함께 출발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 출발한 편이었다.[6] 헝가리, 터키[7] 서독, 대한민국[8] 여담으로 스위스에선 한국에 대하여 여러 사정이 방송 보도 되었고, 현지인들이 온갖 생활용품을 전해주었으며 홍덕영 골키퍼는 현지인들이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정말로 20골을 먹혀도 될 경기를 선전했다며. 심지어 저 당시에는 규정상 골키퍼를 제외하고 선수교체를 할 수 없었는데, 한국은 탈진과 부상 등으로 경기 중 4명이 이탈하여 종료 시점에는 7명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