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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1891)

파일:김동진1.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경중(景仲) / 백관(白官)
본관 장동 김씨[1]
출생 1891년 11월 29일[2][3]
충청도 홍주목 고남상도면 상촌리
(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사망 1938년 3월 13일 (향년 46세)
충청남도 홍성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45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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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백야 김좌진의 친동생이다.

2. 생애

1891년 11월 29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상도면 상촌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의 명문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형규(金衡圭, 1864 ~ 1892. 3. 11)[4]와 어머니 한산 이씨 이상희(1863 ~ 1949. 8. 30)[5]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 돌이 된지 얼마 안 되어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팔판동(현 종로구 팔판동) 등지에 거주하면서 미곡중개인으로 일했다.
1920년 6월 경기도 경성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교통국 설치와 관련한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이 조직되고, 소진형이 단장에 추대되자 이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 그해 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공갈취재, 강도미수, 살인·강도교사 등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다행히 면소 석방되었다. 1922년 10월에는 다시 경상도 일대에서 신태식(申泰植)을 단장으로 하여 조직된 의용단(義勇團) 조직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7년 만주에서는 각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이 한창이었는데, 그는 1928년 1월 김동삼이 위원장으로 추대된 군민회의(軍民會議)의 민사위원(民事委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길장연로서방(吉長沿路西方)에 참의부·신민부(新民府)·정의부(正義府)의 3부대표가 모여 유일대독립당을 조직하여 각 단체를 통합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그는 김좌진 등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9년 초에는 김좌진과 함께 만주 중동철도(中東鐵道)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에 모진 고문을 당하는 옥고 끝에 1938년 3월 13일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동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2011년 12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1] 문충공 상용파 26세 진(鎭) 항렬.[2] 양력 12월 29일.[3] 1921년 판결문에는 11월 3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족보명 김명균(金銘均).[5] 이윤직(李潤稙)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