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4:09:42

괴철

괴통에서 넘어옴
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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蒯徹
생몰년도 미상

1. 소개2. 생애3. 평가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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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진나라 말기 전한 초기의 모사로, 한신의 책사로 활동했다. 원래 이름은 괴철이 맞는데, 사기의 저자 사마천한무제의 이름이 유철이라서 피휘를 하기 위해 철(徹)과 뜻이 같은 통(通)이라는 글자로 이름을 바꿔어 기록하였다.[1] 그래서 후에 기록된 대부분 역사서엔 괴통(蒯通)이라고 기록되었다.[2]

2. 생애

괴철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진나라(秦)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나라의 학정으로 인해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에서 진승의 부장 무신의 책사로 처음 등장한다. 진승은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즉위한 후, 수하 무신에게 옛 조나라 영역을 평정하고 범양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 이때 범양령(범양현의 현령) 서공(徐公)의 휘하에 있던 괴철은 서공을 설득해 무신에게 투항하도록 했는데, 스스로 사자가 되어 무신을 찾아가 범양령을 무신의 수하로 포섭하되 후히 대우하면 주변 지역들도 무신에게 귀부할 것이라고 설득했다.[3]무신은 이를 받아들여 범양령의 서공에게 제후의 인수를 주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옛 조나라와 연나라 땅의 30성이 싸움 없이 무신의 세력에 들어갔다. 무신은 이렇게 얻은 세력을 바탕으로 진승에게서 독립하여 조나라를 세우고 자신은 조나라의 왕이라 일컬었다. 자세한 것은 진승·오광의 난 항목으로.

이후 기원전 208년, 무신이 이량에게 죽을 무렵의 괴철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기원전 204년, 한신이 위나라, 조나라, 대나라를 차례로 격파하고, 제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 한신 곁에 다시 나타난다. 한왕 유방은 한신에게 제나라 공격을 맡겼지만, 이를 잠시 중지시키고,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 왕 전광을 설득시켜 자신의 편으로 이미 포섭했다. 괴철은 이대로라면 역이기가 한신보다 큰 공을 세우게 된 것이라며 한신을 꼬드겨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고, 한신은 이미 한나라와 손잡기로 해 대비가 없던 제나라 군대를 손쉽게 무찌르고 제나라를 장악했다.[4]

흔히 한신에게 유방을 믿지 말고 독립해 항우, 유방, 한신의 3국정립을 권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천하삼분지계. 괴철은 한신에게 관상을 봐주겠다며 접근한 후, 한신을 설득하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에서 처음으로 어려움이 일어나면서 걱정거리는 진(秦)을 멸망시키는데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는 초(楚)와 한(漢)이 나누어 다투게 되어, 천하 사람들의 간담(肝膽)이 땅에 나뒹굴게 되었고, 부자의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초인(楚人)들은 팽성(彭城)에서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싸우고 북쪽으로 쫓아가면서 승리한 것을 타고 자리를 말 듯하며 천하에 위엄을 떨쳤지만, 그러나 그들의 군사는 경(京)과 색(索) 사이에 갇혀 있고, 서쪽 산을 압박하려고 하여도 나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이 여기서 3년입니다.

한왕은 수십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공(鞏)과 낙(洛)에서 막으면서 산하의 요새(要塞)에서 막혀서 하루에 여러 번 싸워도 한 자 한 치의 땅을 빼앗는 공로를 세우지 못하여 좌절하여 달아나면서 스스로 구원(救援)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지혜와 용기가 모두 곤란하게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피로가 극도에 달하여 원망하지만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데, 신(臣)이 이를 헤아려 보건대, 그 형세는 천하의 현명하고 성스러운 사람이 아니고는 천하의 재난과 화를 종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두 군주(유방과 항우)의 운명은 족하(足下)에게 달려 있어서, 족하(足下)가 한(漢)을 위한다면 한(漢)이 승리하고, 초(楚)와 함께한다면 초(楚)가 승리합니다.

진실로 신(臣)의 계책을 들으실 수 있다면, 둘이 이롭고 함께 남아 있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으니,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족(鼎足, 정(鼎)은 고대의 솥으로 다리가 셋이 있다. 보통 세 개의 세력이 버티고 있는 상황을 형용할 때에 쓰는 말이다.)으로 있게 한다면, 그 형세는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무릇 족하(足下)의 현명함과 성스러움으로 많은 갑병을 가지고 강한 제(齊)를 점거하여 조(趙)와 연(燕)을 좇아서 텅 빈 땅으로 나아가서 그 뒤를 제압하고 서쪽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명령을 듣게 한다면 천하의 풍문은 돌아 따라올 것이니 누가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또 큰 것은 자르고, 강한 것은 약하게 하여서 제후를 세우는데, 제후들이 이미 세워지고 나면 천하는 복종하여 말을 들을 것이며, 그 공덕은 제(齊)로 돌아올 것입니다. 제(齊)의 옛날을 생각해 보건대, 교수(膠水)와 사수(泗水)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깊이 손을 잡고 읍(揖)하고 사양한다면 천하의 군왕들이 서로 이끌면서 제(齊)로 조현(朝見)할 것입니다.

대체로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허물을 받고, 때가 이르렀는데 시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족하(足下)는 이를 깊이 고려하십시오.

한신이 말했다.
한왕이 나에게 아주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내가 어찌 이익을 향하여 의(義)를 배반할 수 있겠소?

괴철이 다시 말했다.
처음에 상산왕(常山王, 장이)과 성안군(成安君, 진여)이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였을 때에 서로 문경(刎頸)의 교제를 하였지만, 뒤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의 일로 다투다가 상산왕이 성안군을 지수(泜水)의 남쪽에서 죽여서 머리와 발이 다른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사람이 서로 더불어 한 것은 천하도 지극히 즐거워하였으나, 그러나 끝내 서로 사로잡으려 하였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걱정거리는 많은 욕심에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제 족하가 충성과 신의를 실천하면서 한왕과 교제하려고 하지만 반드시 이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는 것보다는 단단할 수 없고 일은 장염과 진택의 경우보다 더 많고 크니, 그러므로 신(臣)이 생각하건대 족하(足下)는 한왕이 자기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역시 잘못입니다.

대부 문종(文種)이 망해가는 월(越)을 부흥시켜서 구천(句踐)에게 패권을 갖도록 하여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쳤으나 그 몸은 죽었으니,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무릇 친구를 사귀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장이가 성안군에 대한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충성과 신의를 가지고 말하건대 대부 문종이 구천에게 한 것을 넘지 못합니다. 이 두 사람의 경우는 충분히 볼 만한 것이니 바라건대 족하께서 깊이 이를 고려하십시오.

또한 신(臣)이 듣건대, "용기와 지략이 주인을 놀라게 하면 몸은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족하(足下)는 주인을 놀라게 한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상을 받을 수 없는 정도의 공로를 끼고 있으니 초(楚)에 귀부하면 초인(楚人)들이 믿지를 않고, 한(漢)에 귀부하여도 한인(漢人)들이 두려워 떱니다. 족하(足下)는 이것을 가지고 어디로 돌아가려 합니까?

한신이 사과하면서 말했다.
선생도 쉬시오. 내가 앞으로 이를 유념하겠소.

며칠 뒤에 괴철이 다시 말했다.
무릇 말을 듣는다는 것은 일의 징후이고 계획한다는 것은 일의 기틀인데, 듣고서 지나치고 계획하였다가 잃고서 오랫동안 편안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은 이를 과감하게 결단하고, 의심하는 것은 일의 해가 됩니다.

터럭같이 작은 계책을 살피다가 천하와 같은 큰 운수를 남겨버리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면 이를 알 것인데, 결정하고도 감히 실행하지 못하면 백 가지 일이 재화(災禍)입니다. 무릇 공(功)이라는 것은 이루기는 어렵고 실패하기는 쉬운 것이며, 때라는 것은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데, 지금이 때입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권중달 자치통감 2권. 111~114쪽

그러나 한신은 미루면서 차마 한을 배반하지 못하였고, 또한 스스로 공로가 많다고 생각하여 한이 끝내 제를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괴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자기가 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괴철은 거짓으로 미친 척하면서 무당이 되었다.

한신이 죽으면서 탄식조로 "괴철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죽는구나!" 말하자, 당연히 유방은 괴철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괴철은 붙잡히면서 "한신이 결국 내 말을 듣지 않아 죽었구나."라고 탄식하며 붙잡혀갔다. 결국 유방에게 팽형을 당해 삶아져 죽을 운명에 놓인 괴철은 유방 앞에서 말한다.
진나라가 제위를 잃은 다음, 영웅들이 앞다투어 패권을 차지하려 나섰고, 마침내 발빠르고 재주 좋은 자가 손에 넣었습니다.[5] 를 생각해보십시오. 제 주인이 아니라면 요 임금 앞에서조차 짖는 동물입니다. 옛날 도척의 개가 요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결코 어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개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6]

제 주인은 한신 장군이었으며 저는 그때 폐하를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황제가 되고 싶어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이 모자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삶아 죽이시겠습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괴철을 사면했다. 다만 하는 말이 괜찮다 싶으면 벼슬이나 재물을 하사하는 유방의 행적에 비해[7] 괴철은 그저 돌려보냈을 뿐임을 보면 썩 유방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듯 하다.[8]

초한지에서는 주인을 바꾸지 않고 한신의 제사를 지내주고 묘지기로 살았다고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참이 상국(相國)의 자리에 올라 제나라로 부임하는 과정에 괴철을 초청하였고, 이에 응하면서 말년을 제에서 보낸다.

괴철이 한신을 설득하는 부분은 한신 전기인 <회음후열전>의 4분의 1에 달한다. 실제로 회음후열전을 읽어보면 분명히 밀담으로 오갔을 이야기가 마치 현장에서 직접 들은듯 상세한데, 이 부분에서 사마천의 문학적 창작이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있다. 일단 괴철이 자신이 천하삼분을 한신에게 간했다는 내용은 괴철이 실토한 부분이므로 실제로 그런 말을 했겠지만.

뒷날 반고가 <한서>를 편찬할 때 이 부분을 따로 떼어내서 <괴통전>이라는 별도의 괴철 전기를 만들었을 정도인데, 어차피 괴철은 말년을 한의 신하로 보냈기 때문에 자기가 한신과 나눈 이야기를 남김없이 불었어도 이상할 건 없다.

먼 훗날 후한 때 유표의 모사가 되었고 후에 조조에게 항복한 괴월(蒯越)이 괴철의 후손이라고 한다.

3. 평가

한신의 모사로 지냈기 때문에 괴철의 평가는 한신의 행보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신이 워낙 전략가로서 먼치킨이다보니 병법이나 전략에 대해 괴철이 귀띔해 줄 일은 없었다.[9] 괴철이 한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처세술, 정치, 외교 등이었으나, 여기서도 별로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괴철은, 군공으로 한나라 최고 공신 반열에 오른 한신의 말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괴철의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괴철의 진언 덕분에 애꿏은 사람들[10]이 많이 죽었으므로 후대의 역사가들이 괴철의 얄팍한 계책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고 괴철을 비난하거나 비평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괴철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장군으로써 탄탄대로를 걷던 한신을 부추겨 트롤러의 비참한 말로로 진입시켰기 때문이다. 한신 이전에도 괜히 무신을 부추겨서 장초 세력을 분열시킨 전적이 있었다. 결국 무신은 진승과 함께 사이좋게 죽었다.

아무리 한신이 주변 눈치 안 보는 빵점짜리 처세술의 인물이라지만, 몇번 신뢰를 잃었을 뿐이지 유방과의 정면충돌로까지 번진 적은 없다. 게다가 대부분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유가 있었기에 나중에 눈감아 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괴철을 만나기 전까지의 한신은 전쟁에서 만큼은 아주 충실한 신하였다. 그런데 괴철이 한신의 모사로 된 이후 역이기의 서신을 받고 공격을 중지하려는 한신을 부추겨 제나라를 돌격시키는데 일조하는 바람에 유방의 명으로 보낸 역이기의 활약을 무의미하게 만듦과 동시에 죽게 만들었다. 제나라의 민심을 잃었으며 장량, 진평과 더불어 최측근 참모였던 역이기를 잃으면서 유방도 한신이 자신의 명을 어기는 행위를 하는 위험분자로 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나라 평정 이후 유방의 긴급 구원요청을 받고도 제나라 임시왕을 요구하며 왕 시켜달란 말까지 해버렸으니 유방 쪽에서 '이 새끼가 신하 주제에 임금에게 딜을 걸어? 이거 가만둬서는 안되겠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한고조 입장에서는 이런 한신의 태도에 눈 감아주려고 했기에 전쟁 이후 제나라보다 영토가 넓고 항우가 다스렸던 강국 초나라의 왕으로 임명시켰다. 이는 한신이 아니었으면 초한전쟁에서 승리를 잡기도 힘들었고, 관중대전부터 시작해 한신의 수많은 공적이 있던 것과 한신을 죄를 묻기에도 미안하고 설령 그랬다간 팽월을 비롯한 제후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도 있었다. 더욱이 유방은 한신이 정말 반란을 일으킬 사람인지도 불확실했기 때문에 회음후로 강등시킬때도 반란을 일으키진 않겠지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전후 재상 소하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한신의 행동을 보고 다 숙청을 청하는데도 유방은 유야무야 흘려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이 반란군을 잡으러 떠난 사이에 결국 여후의 손에 의해 숙청당하고 만다.

한신이 살아 있었다면 어떤 행보를 걸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한신은 한삼걸 중에서 가장 안 좋은 말로를 걷게 된 것이다. 한신의 결정적 실수가 괴철을 참모로 뒀다는 것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괴철의 민폐 정도를 알 수가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 진짜 공격해버리고 "왕 시켜주쇼."하고 뻗댄건 한신이기에 무조건 모든게 괴철 때문이라고 할 순 없다.

일단 괴철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해주자면 괴철의 이같은 조언은 유방의 이성왕 숙청을 미리 예견한 것이라고도 볼수 있다. 현대고 고대고 토사구팽은 정말 흔한 일이였고 특히나 한신은 공을 많이 세웠으니 견제 대상인건 확실했다. 공신 1위인 소하도 견제당한 만큼. 그리고 유방은 별다른 증거도 없던 팽월을 일족을 몰살시키는것도 모잘라 본인의 몸뚱아리로 젓갈을 담궈 제후들에게 보내는 충공깽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말년에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평생을 본인과 함께하던 번쾌조차 죽이려는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유방의 행동에 질린 영포는 진짜로 반란을 일으켰다. 거기다 여후는 아예 공신들을 죄다 숙청하려는 시도까지 했고 결정적으로 유방이 살려주려던 한신을 여후가 나서서 기어이 죽여버렸던 만큼 한신이 암만 얌전히 군다고 해도 언제까지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결과적으론 한신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는데 잡혀 죽었으니 괴철의 말이 아예 틀린말은 아니었다. 다만 소하는 충실히 유방을 섬긴 것을 모두가 아는 만큼, 주변인들의 적극적인 변호로 풀려날 수 있었다. 팽월 또한 유방을 그렇게 충실하게 섬기지 않았던 게 파멸의 근원이 되었으므로, 만약 한신이 유방에게 딜을 건다거나 하지 않았다면 한신도 무조건 숙청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사기에서 제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괴철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甚矣蒯通之謀,亂齊驕淮陰,其卒亡此兩人!蒯通者,善為長短說,論戰國之權變,為八十一首。通善齊人安期生,安期生嘗干項羽,項羽不能用其筴。已而項羽欲封此兩人,兩人終不肯受,亡去。田橫之高節,賓客慕義而從橫死,豈非至賢!余因而列焉。不無善畫者,莫能圖,何哉

심하다, 괴통(蒯通)의 계략이여, 제나라를 어지럽히고 회음후(淮陰侯)를 교만하게 만들어 끝내 전횡(田橫)[11]과 한신(韓信) 두 사람을 죽게했으니! 괴통이란 자는 종횡가의 장단설에 능숙하여 전국시대의 권모술수를 논한 글을 81편으로 만들었다. 괴통은 제나라 사람 안기생(安期生)과 친했는데 안기생은 일찍이 항우에게 벼슬자리를 얻기 바랐지만 항우는 그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 얼마 뒤 항우가 이 두 사람을 봉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받지 않고 달아났다. 전횡은 고상한 절개를 가지고 있었고, 그 빈객들이 그의 의리를 흠모해 따라 죽은 것은 어찌 더할 수 없는 현명함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런 까닭에 그를 열전에 넣었다. 당시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 텐데, 그들의 용모와 업적을 묘사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까닭인가?
사기 전담열전 마지막 부분

반고한서에서 한술 더 떠 역이기까지 포함해 세 사람을 망쳤다며 더 신랄한 비판을 남겼다.

4. 창작물에서

  • 고우영 초한지 - 한신이 자신의 충고를 듣지않자 내가 사람을 잘못 골랐다. 한신은 천하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그런 한신에게 충언했으니 유방이 나를 절대로 살려둘리가 없다며 후회하다가 똥물에 들어가 신선의 목욕이라고 가짜로 미친 척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한신이 죽자 그 시체를 거두러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여담으로, 후대의 리뉴얼판에서는 위의 유방에게 한 발언을 두고 유방이 "나를 요 임금에 비하고 있으니 죽이기 어렵겠구나" 하고 생각하여 살려주었다고 해석했다.)
  • 고우영 십팔사략 - 한창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던 유방이 한신을 죽이고 괴철을 잡은 뒤 '네놈, 니 죄를 알렸다, 한신놈이 니 말을 들었으면, 나는 항우도 잡지 못하고, 삼국시대가 열렸을 것 아니냐!, 너를 죽이겠다' 하자, 괴철이 '허나 저는 그 때 폐하를 몰랐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라고 한다. '또한 혹여 천하를 얻어도 그것을 나누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에 벗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권한 것뿐입니다. 만약 제가 폐하를 먼저 알았다면 저도 폐하를 돕는 조언을 했을 것입니다' 한다. 이 말에 유방이 할 말이 없어서, 풀어주는 것으로 나온다. [12] 옆에서는 여후가 죽일 놈을 왜 안 죽이냐고 날뛰고 있다.
  • 문정후 초한지 - 한신의 하북평정전 당시 연왕 장도 휘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장도가 한신에게 항복한 뒤 한신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한신에게 천하삼분지계를 말해서 자립해야 한다고 말하며, 유방에게 숙청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래 역사대로 미친 척을 하면서 저잣 거리를 떠돌아다니게 된다. 한신이 사망한 뒤, 유방의 명으로 붙잡히는데 자신은 한신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돕는 계책을 냈던 것이라고 변론한다. 이후 유방이 그를 풀어주었는데, 괴철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신의 무덤 묘지기가 되게 해준다.
  • 초한지 - 한신이 한나라의 대장군이 된 이후 그 옆에서 보좌하는 책사로 등장한다. "한신에게 책사가 왜 필요하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의 한신은 군에 관한 일이라면 굉장히 뛰어나서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군 이외의 다른 분야[13]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는걸로 묘사된다. 괴철은 이런 쪽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특히 처세술에 관하여 조언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괴철을 모사로 두고 나서 초반부에는 한신이 별로 조언을 들어먹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이후 괴철의 능력을 알아본 한신도 틱틱 거리긴 해도 큰일이 있을 땐 나름 조언을 많이듣고 참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신을 따라다니며 크고 작은 계책을 내주었으며 한신이 제나라를 점령하자 제나라 왕이 되라는 조언과 함께 유방 소속에서 독립하여 신세력을 만들라는 조언을 한다. 하지만 한신이 받아들이지 않자 후에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극에서 퇴장, 미쳐버리고(혹은 미친척) 만다. 사실 한신의 신세를 망친 주범이다. 한신은 처음부터 독립까지는 생각이 없었으나 괴철은 독립을 전제로 한 충고를 계속했고, 그 방면에는 무지한 한신이 괴철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면서 독립은 독립대로 못하고 고제의 어그로만 끌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 또한 이와 비슷했지만, 이 작품 속에선 한신의 본심을 더욱 확실하게 그렸는지라, 아무 꿍꿍이도 없었는데 괜히 의심만 사서 죽게된 꼴이니..
  •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서는 한신의 토사구팽 때 같이 제거를 당한다. 괴철을 제거해야 한다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닌 장량이다. 워낙 말빨이 세고 한신 지지자들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체포될 때 "한신이 내 말을 듣지않나 죽게 됐구나"라고 한다.
  • 라디오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 성우 강수진이 배역을 맡았다. 한신에게 작가가 만든 인물 닌자영[14]과 함께 재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간혹 한신[15] 에게 천하를 얻으라는 이야기와 슬쩍 옆구리 찌르며 조언을 해주지만 말을 듣지 않는 한신 때문에 머리에 꽃을 꽂아 버리고는 미친사람 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잡힌다. 유방[16] 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한신의 목을 내어 달라해 한신과 목앞에서 울던 닌자영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 중이다.

[1] 희한하게도 한무제의 도 통(通)이다.[2] 피휘를 당한 괴철의 경우처럼, 초나라의 군주 초무왕한무제와 이름이 같아서 피휘 때문에 이름이 통(通)으로 기록되었다.[3] 이 와중에 언급된 고사성어가 '튼튼하고 강한 방어태세'를 뜻하는 '금성탕지'.[4] 그러나 역이기가 항복시킨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공적을 쌓기보다 오히려 유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위험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괴철의 목적은 한신이 더 큰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보다는 유방에게서 독립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방과의 관계가 벌어지는 것까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5] 원문에서는 제위를 '사슴'에 비유한다. 괴철의 비유에서 유래하여 축록(逐鹿, 사슴을 뛰좇다.)이라는 말은 제위 또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든다는 뜻으로 쓰였다.[6] 여기서 유래한 말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작정 굴종하고 맹종맹동하는 얼뜨기'를 일컫는 '도척의 개(도척지견/도척지구)'이다. 이후 후한 말 삼국시대 때 환관의 아들이란 가족력부터 시작해 조조를 호되게 꾸짖는 격문을 써 그 본인조차 감탄시켰던 원소의 모사 진림은 훗날 원소 멸망 후 조조를 만난 자리에서 "시위에 올려진 화살은 활 주인의 뜻에 따라 날아갈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한편, 먼 훗날 아돌프 아이히만법정에서 비슷한 논리("나는 그런 것은 모른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다.")를 펼치다가 처형당한다.[7] 비슷한 경우로 팽월의 처사에 대해 항의한 난포는 그자리에서 도위가 되었다.[8] 아래의 평가 문단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신을 그렇게 만든 것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난포의 경우에는 부당한 것에 항의한 것이나 괴철은 무슨 대의가 있는 것도, 불의를 보고 맞선 것도 아니니 유방 입장에선 딱히 좋게 볼 이유가 없다.[9] 한신이 병법과 계책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의논했던 사람은 이좌거였다.[10] 역이기, 제나라 사람들, 제왕 전광, 전횡과 전횡의 수족 등등[11] 역이기를 죽인 제왕 전광의 삼촌으로, 전광이 역이기를 튀김으로 만들 때 같이 있었다. 이후 숨어살다가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장안으로 초청하는데, 역이기의 동생인 역상에게 저 사람은 내가 부른 손님이니 복수한답시고 난리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 소식을 들은 전횡은 장안으로 향하던 중 내가 죽인 사람의 동생을 미안해서 어떻게 보겠냐고 하며 자살했고 같이 숨어 살던 그의 식객 500명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2] 실제로 유방은 끽해야 부유한 평민 정도 였지만 자신의 인간적 매력으로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된 사람이다[13] 특히 정치와 처세에 관한 부분은 문외한 수준.[14] KBS 40기 성우 이자영.[15] KBS 40기 성우 이정민.[16] 성우 홍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