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고영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고영근 高永根 | |
<nopad> | |
출생 | 1853년 |
평안도 | |
사망 | 1923년 4월 1일 (향년 69세)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
묘소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39-2번지[1] |
본관 | 제주 고씨[2] |
호 | 해조(海釣) |
가족 | 배우자 김해 김씨, 한양 조씨, 슬하 3남 3녀 차남 고시정, 손자 고대진 |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개화파의 지식인, 항일운동가.
2. 생애
1853년 평안도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초년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다.[3] 다만,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청지기로 일하며 궁중에 드나들다 고종의 눈에 들어 출사하게 되었다고 한다.[4]이후 무관으로 출사하여 1884년 4월 오위장(五衛將)·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884년 10월 친군후영(親軍後營) 참령관(參領官)·부령관(副領官), 1884년 11월 친군후영 우부령관(右副領官)·영관(領官), 1885년 8월 풍덕도호부사(豊德都護府使), 1885년 10월 장진도호부사(長津都護府使), 1885년 12월 겸(兼) 장단진 병마첨절제사(長湍鎭兵馬僉節制使) 친군우영후영장(親軍右營後營將) 토포사(討捕使)·겸(兼) 장단진 병마첨절제사(長湍鎭兵馬僉節制使) 기연해방아문후영장(畿沿海防衙門後營將) 토포사(討捕使), 1886년 9월 친군우영(親軍右營) 별초 영관(別抄領官)·친군우영 영관, 1888년 5월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영관·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 1888년 12월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 1889년 12월 통진도호부사(通津都護府使), 1891년 4월 함경도 매광감리(煤礦監理), 1891년 8월 친군통위영 중부령관(中副領官)·정령관(正領官), 1892년 7월 동지훈련원사(同知訓鍊院事), 1893년 8월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친군(親軍) 총어별장(摠禦別將), 1894년 6월 호군(護軍) 등을 지냈다.
동학 농민 혁명 시기 전봉준은 격서에서 고영근과 민영준, 민영환을 탐관오리로 지목했었다.
하지만 을사조약에 자결한 민영환을 생각하면 전봉준 등 동학교도들이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위해 정적인 명성황후 세력을 무조건 적으로 돌린 것으로 신뢰하기 어렵다.전봉준 판결문과 공초 기록문 달리 고영근과 민영환이 부패를 저질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정황과 증거가 없어 의문이 있다. 다만, 이러한 논란 때문인지 동학 농민 혁명 이후에는 1897년 11월에 전선사 숙설소 감동(典膳司熟設所監董)을 지낸 것 외에는 따로 관직생활을 한 정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관료의 입장으로 황국협회에 가담하였고 다시 독립협회로 이동하여서 활동하였다.[5]. 1898년 3월 대한제국 중추원 1등 의관(議官), 1898년 10월 중추원 의관 등으로 임명되었고, 1898년 11월부터 독립협회 부회장,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냈는데,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가 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래서 독립협회 몫의 중추원 의원 17인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중추원 건으로 독립협회는 개박살이 났고, 고영근은 독립협회의 재건을 노렸다. 그 과정에서 반대파 대신들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였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6]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박영효, 안경수 등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게 대표적으로 역적 취급 받던 이들과 함께 독립 협회의 복설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윤효정을 통해서 역시 일본에 있던 우범선이 을미사변의 일본 측 협력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우범선을 처단하기 위해 일부러 접근해서 친하게 지내다가, 기회를 봐서 처단해버렸다. 우범선을 죽인 직후 경찰에 자수,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면을 요청하는 등,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결국 징역 5년으로 감형, 복역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 경찰의 계속되는 감시와 추적을 피해 경기도 여주군[7]에서 신분을 감추고 갓과 망건을 파는 보부상으로 일했다. 이후 충청도로 가서 관직생활 중에 친분이 있던 지인에게 의탁하며 지냈다.
그러던 1921년 3월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능참봉에 자원하여 이왕직 소속으로 일하였다. 고종 사후 조선 왕조가 이왕가로 격하된 상황에서 1922년 12월 11일 오전 9시에 홍릉 비각에 "대한(大韓)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홍릉(洪陵)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부좌(祔左)"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는데, 이 때문에 1923년 3월 19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파면되었다.[8] 이후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졌고, 결국 1923년 4월 1일 오후 8시에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9] 자택에서 천식의 악화로 사망했다.[10] 유해는 당초 홍릉 아래에 안장되었으나 곧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11]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으로 인해 수원군 일형면 이목리[12] 산39-2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른다.[13] 현재 행정구역상 주소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39-2번지이다.
3. 후손
- 배우자로 김해 김씨, 한양 조씨가 있었고, 한양 조씨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일찍 죽었고, 차남 고시정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1941년경 사망하였다. 3남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기도 경성부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상회의 점원으로 근무하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4. 평가
그간 친일반민족행위자 우범선을 처단했고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일운동가로 알려졌으나 반면 지나치게 미화된 인물이라는 평도 듣는다.독립협회 부회장 겸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개화파 지식인으로 볼 수도 있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았다는 점에서 충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인생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하기 위해선 우범선을 암살한 계기에 대해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당장 고영근 본인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우범선을 죽였다고 주장을 하였으며, 조선에 보낸 글에서도 이를 강조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충성하여 그래서 명성황후가 죽은 다음에는 매국노를 처단하였고 개화파 지식인으로도 활동을 하였다. 한일합방 후에 모든 관직을 버린것도 일종의 독립운동가라 볼 수도 있다.
5. 관련 문서
[1] #[2] #의 영상을 보면 묘소 앞에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 홍릉참봉(洪陵參奉) 제주고공영근지묘(濟州高公永根之墓)'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 디지털구로문화대전에 의하면, 서북 지방의 상민 출신이라고 한다.[4] #[5] 독립협회로 이동한 배경에 대해서 황국 협회가 폭력적 단체로 변해서 이동했다고 나와있는데, 이후 독립 협회도 만만치 않은 과격 단체로 변했다.[6] 이 시기 고영근은 한국에서 암살자가 올 것을 두려워하고있었다라고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서 기록된 요시찰 한국인 거동에서 기록하고 있다.[7] 현 여주시[8] 1923년 3월 21일 동아일보 기사[9] 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10] 1923년 4월 3일 동아일보 부고 기사[11]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12] 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13] #[14] #[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