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9 10:44:09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파일:1세대 트로이카.jpg
왼쪽부터 문희, 남정임, 윤정희.

1. 개요2. 상세3. 트로이카 시절에 인기를 끈 다른 배우들4. 1세대 이전의 원조 트로이카?

1. 개요


1960년대 중반부터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한 (여)배우 윤정희, 문희, 남정임을 일컫는 말. 이들 3명이 영화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에 트로이카라 일컬었다.

2. 상세

1세대 트로이카가 등장하기 직전인 196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계는 주증녀, 최은희, 문정숙, 조미령, 도금봉 같은 1920년대생 여배우들이 30대 중후반[1]까지도 충무로의 주축으로 활약했으며[2], 김지미엄앵란 정도를 제외하면 후세대 여배우들이 영 힘을 못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해방 직후에 태어난 세대인 남정임유정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시작되는데[3], 처음에는 남정임이 압도적이었으나 1967년 윤정희의 등장 이후 한동안 윤정희가 압도적인 흥행력을 이어간다. 1968년 문희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대박을 치는 동안에도 상위권 영화의 상당수가 윤정희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1970년부터 1971년에는 문희가 더 많이 영화를 흥행시켰다. 1971년에 문희, 남정임이 결혼함으로써 트로이카 시대는 끝을 맺게 되었으나 윤정희는 여전히 활동을 하여 무녀도, 야행 등의 영화를 흥행시켰다.

2.1. 남정임

파일:남정임트로이카.jpg
[4]

2.2. 윤정희

파일:윤정희트로이카.jpg

2.3. 문희

파일:문희트로이카.jpg

3. 트로이카 시절에 인기를 끈 다른 배우들

3.1. 고은아

고은아는 1세대 트로이카가 데뷔하기 전에 이미 데뷔함과 동시에 두번째 영화인 갯마을의 히트라는 내적 요소와 엄앵란의 결혼과 최은희, 태현실의 하락세 등과 같은 외적 요소의 결합에 따라 톱 여배우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 결과로 1966년 청룡영화상 인기상 수상에서 나타날 수 있었는데(당시 남녀 각 3인 수상) 기성배우였던 김지미, 최은희를 제치고 1위로 뽑힌 점이었다.[5][6]
그렇기에 자신이 더 노력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더 나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듬해 1967년 합동영화사 사장 곽정환과 결혼이라는 내적 요소와 남정임의 각광, 윤정희의 데뷔라는 외적 요소로 인하여 트로이카 후보에서 탈락하게 된다.[7][8][9]
그렇지만 여전히 이전의 커리어와 남편의 영향력이 있기에 영화계에서 완전히 탈락하지 않았지만 1968년 이후부터 사실상 트로이카의 서브 주연 격으로 등장해야 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당시 세트촬영이었던 드라마 출연이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영화보다 드라마 출연을 더 활발히 했다고 한다.
영화 출연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세대 트로이카가 붕괴된 이후에도 영화활동을 계속하며 1972년, 1978년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과 1972년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계속해서 연기자로서의 길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기만은 여전해서 2세대 트로이카의 전성기인 1978년까지 각종 인기조사에서 홍세미, 김창숙 등과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10]

3.2. 김지미

김지미는 나이는 트로이카들과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지만[11] 일찍 데뷔하여(1957년 데뷔) 나이 차이가 큰 선배들과 공연(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등)하거나 경쟁(최은희, 문정숙, 주증녀, 도금봉 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 결혼(1958년 결혼)으로 인하여 20대 초부터 노역을 맡기 시작했다.
이후 치열하게 경쟁하던 엄앵란의 결혼과 최은희의 하락으로 원톱으로 나설 수 있었으나 얼마 안가 트로이카가 등장하면서 주춤하게 된다. 이후 김지미는 트로이카와 공연에 있어 서브 주연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이들의 엄마 역할로도 나오게 되었다.
한 해에 작품이 200여 편 이상 나오던 1960년대 후반, 김지미 역시 트로이카와 공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문희나 남정임과 같이 공연할 경우 대부분 주인공으로 나섰지만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여겨진 윤정희와의 공연에서는 주로 서브 주연 심지어 조연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었고, 후일 1971년 무녀도 주인공 파동과 1975년 내일은 진실 출연료 경쟁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또한 당시 인기의 척도로 불리던 청룡영화상 인기상 수상 역시 트로이카의 등장으로 인해 밀리게 되는데 1967년은 수상했으나[12] 1969, 1970년은 트로이카 전원이 독식하는 바람에 수상하지 못했고[13], 1971년 남정임의 은퇴로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1971년 남정임과 문희의 결혼으로 1세대 트로이카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다시 빛을 볼 수 있었고, 1973년 윤정희의 유학으로 인하여 이전만큼은 못해도 톱 여배우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며 1974년, 1975년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과 1974년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1975년 파나마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80년대에도 제작자로 진로가 변경되었지만 배우 활동과 겸하여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다.

3.3. 전계현

배우성우였지만, 1968년에 미워도 다시 한번에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하여 인기를 얻으면서 본격적인 흥행배우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4. 1세대 이전의 원조 트로이카?

이들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을 일부 언론에서는 (50년대) 원조 트로이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트로이카라는 말은 이 1세대를 트로이카로 가리키기 위해 처음 만들어진 말이었기에, 원조면 이들이 원조지 다른 배우들에게 원조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시니어 트로이카

게다가 최은희는 1926년생, 엄앵란은 1936년생, 김지미는 1940년생으로 태어난 시기나 데뷔년도, 영역, 위상 등에서 서로 묶일거리가 부족한게 사실이다.[14] 냉정하게 보면 엄앵란을 최은희나 김지미와 동급으로 치부하기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평가한 블로거도 있다.# 엄앵란은 본인이 돋보인 작품으로 이름을 남겼다기보단 남편 신성일로 부각을 얻은 면이 없지 않았다는 것.

어찌됐든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 덕에 만들어진 트로이카라는 말은 이후의 언론이나 영화계에서도 시대별 유명 여배우들을 묶어서 표현할 때 일제강점기(...) 트로이카 등으로 고루고루 쓰이고 있다.[15] 심지어 1980년대에는 가요계에도 쓰인 흔적이 있는데, 당시 인기가 많았던 여가수 3명인 이선희, 정수라, 나미를 여가수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위상 측면에서 봐도, 당시 대중적으로 1950년대의 영화 위상과 1960년대의 영화 위상을 생각하면 1세대 트로이카에게 원조 트로이카라고 붙이는 게 적당하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는 관람객 동원력 등에서 사실상 처음 맞는 한국 영화 산업의 전성기 시절이였기 때문. 그러니 당연히 대중의 눈에서 보는 여배우의 위상도 1세대 트로이카가 이전 시대의 유명 배우들보다 더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2세대 트로이카도 1세대 트로이카의 영향력에 견주기엔 부족한 측면이 있는데, 신트로이카라 불리며 1970년대 후반부터 활약한 2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들은 기존의 트로이카와는 다른 매력을 가졌지만, 이는 당시 방송계를 장악했던 TBC언플개입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16] 즉,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대중이나 언론에서 자발적으로 이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트로이카라고 부른 것.
[1] 당시에는 중년으로 인식될 수도 있는 나이였음에도 전쟁 전에 데뷔하여 익숙한 이미지와 극단(이들은 모두 (악)극단 출신이다)에서 올라온 절륜한 연기력으로 전후에도 전쟁을 이겨낸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2]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부일영화상 등 주요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그녀들이 60년대 중반까지 돌아가면서 수상했다.[3] 이때 남정임의 라이벌로 고은아가 있었다. 1967년까진 이 두 배우가 인기 1,2위를 다투었는데, 고은아의 결혼과 윤정희의 대박으로 구도가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1968~69년 이후부턴 남정임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인기도는 문희≒윤정희>남정임의 순서가 된다.[4] 오른쪽 남자는 배우 신성일이다.[5] 당시 신인급이었던 남정임과 문희는 각 7위, 8위였고, 이전 수상자였던 태현실은 4위로 내려갔었다.[6] 참고로 윤정희는 데뷔 전.[7] 당시 여배우에게 있어 결혼은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완전히 은퇴, 다른 하나는 조연으로 나오는 것이었다.[8] 엄앵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임신과 갑작스러운 체중 증가라는 요소도 있었지만 엄앵란의 경우 결혼하면서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9] 김지미와 최은희의 경우에는 결혼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연급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김지미의 경우 초혼 상대가 영화감독이었는데다 이전부터 쌓아온 커리어와 '젊음'과 '의리'라는 요소로 인하여 유지할 수 있었고, 최은희는 남편이 신상옥 감독이었으니 사실상 말 다했다고 볼 수 있다.[10] 단, 1980년 이후 연기자로서의 생활을 마감했으며 이후 단 두 편의 드라마에서만 연기활동을 했다.[11] 김지미는 1940년 생, 윤정희, 남정임, 문희는 각자 1944년, 1945년, 1947년 생이다.[12] 문희가 완전히 각광받기 전[13] 단 1969년에 주춤하기 시작한 남정임 대신 1970년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수상[14] 이런 식이면 김혜수전지현도 같은 세대로 묶을 수 있다.(...)[15] 참고로 일제강점기 여배우 트로이카로 언급되는 여배우는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이라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오늘날 사람들은 누군지도 모른다.[16] 2세대 여배우 트로이카TBC 출신이었기에 TBC의 지원 하에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TBC의 도움으로만 뜬 건 아니다. 정윤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외모는 연예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그리고 외모를 바탕으로 타 여배우들보다 인기를 쉽게 가져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