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14:44:08

필리포 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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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필리포 네리
Filippo Neri
파일:네리.jpg
<colbgcolor=#a24026><colcolor=#fef4d6> 본명 필리포 로몰로 네리
(Filippo Romolo Neri)
출생 1515년 7월 22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595년 5월 26일 (향년 79세)
교황령 로마
종교 가톨릭
직업 성직자(사제)
소속 오라토리오회
부제서품 1551년 3월 29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조반니 루넬리 주교 주례
사제서품 1551년 5월 23일
산 톰마소 인 파리오네 성당
조반니 루넬리 주교 주례
재임 기간 초대 오라토리오회 총장
1575년~1593년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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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오라토리오회 총장
초대 2대
필리포 네리 (1575년~1593년) 체사레 바로니오 (1593년~16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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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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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24026><colcolor=#fef4d6> 칭호 2번째 로마의 사도, 기쁨의 성인
성인명 필립보 네리
[언어별 명칭]
라틴어: 필리푸스 네리우스 (Philippus Nerius)
영어: 필립 네리 (Philip Neri)
프랑스어: 필리프 네리 (Philippe Néri)
독일어: 필리프 네리 (Philipp Neri)
스페인어: 펠리페 네리 (Felipe Neri)
폴란드어: 필리프 네리 (Filip Neri)
일본어: 휘릿포 네리 (フィリッポ・ネリ)
시복 1615년 5월 11일, 교황 바오로 5세
시성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축일 5월 26일
수호 기쁨, 웃음, 미 육군 특전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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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사업에서 종교로2.3. 로마에서의 선교 생활2.4. 삼위일체회의 설립과 사제서품2.5. 오라토리오회의 설립과 발전2.6. 말년과 죽음
3. 유명한 일화
3.1. 기적
3.1.1. 부풀어오른 심장3.1.2. 파올로 마시모의 부활3.1.3. 이 밖의 기적들
3.2. 체사리아의 유혹
4. 사후 공경과 영향5. 7대 성당 도보 순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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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번째 로마의 사도
Secondo Apostolo di Roma
이탈리아가톨릭 사제.

그는 유쾌한 성격과 재치 있는 말솜씨, 그리고 방대한 지식까지 겸비했던 인물이자,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을 정성껏 도와주고 이들과 즐거이 어울렸던 선인으로서 베드로 이후의 2번째 로마사도라는 칭호와 함께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각 지역마다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재속 사제 공동체인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함으로써 고압적이고 경직된 교회 분위기를 완화하고 사제 및 신자들이 보다 융통성 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 대항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가톨릭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5월 26일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필리포 네리는 1515년 7월 22일 피렌체 공화국공증인 프란체스코 디 네리(Francesco di Neri)와 가족원들이 대부분 피렌체의 군인이었던 귀족 집안의 딸 루크레치아 다 모시아노(Lucrezia da Mosciano)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리 부모에게는 2명의 자녀가 더 있었는데, 1513년에 태어난 큰딸 카테리나(Caterina)와 1518년에 태어난 작은딸 엘리자베타(Elisabetta)이다. 한편 안토니오(Anton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모는 네리를 피포 부오노(Pippo Buono)[1]라는 애칭을 부르며 소중히 아꼈다.

1520년 네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는 알레산드라 디 미켈레 렌지(Alessandra di Michele Lensi)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새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3남매를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네리는 부모의 열정에 따라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부터 일찍이 교육을 받았다. 그중 제노비오 데 메디치(Zenobio de’ Medici)와 세르반치오 미니(Servanzio Mini)라는 2명의 수도자가 그의 학업 발전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훗날 네리가 종종 언급했다.

네리가 8살이었던 때, 그는 사소하지만 묘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 그가 홀로 사색의 시간을 즐기던 중 여동생이 나타나 이를 방해하자, 그는 홧김에 그녀를 계단 아래로 밀쳐 넘어뜨렸다. 이윽고 그는 여동생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들판에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메고 있는 당나귀가 풀을 뜯어먹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좀 전에 여동생을 밀친 것에 대한 인과응보였던지 그가 당나귀에 올라타자마자 갑자기 당나귀가 거칠게 날뛰어 그는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어 크게 놀란 그의 부모는 네리를 구하고자 서둘러 우물로 달려갔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 분명 심각하게 다쳤으리라 여기고 우물 안으로 내려다보았지만, 정작 네리는 깊은 바닥에서 그 어떤 상처도 나지 않은 멀쩡한 상태로 있었다.

2.2. 사업에서 종교로

네리에게는 큰아버지 바르톨로메오 로몰로(Bartolomeo Romolo)가 있었는데, 그는 산 제르마노에서 활동하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줄곧 네리의 명석한 두뇌를 높이 샀던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자신의 사업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에 1533년 18살의 건장한 청년이 된 네리는 산 제르마노로 가 큰아버지의 업무를 보조하면서 사업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가기 시작했다.

산 제르마노 근처에는 몬타냐 스파카타, 즉 갈라진 산이라는 명칭을 지닌 장소가 있었다. 몬타냐 스파카타의 크게 갈라진 부분에는 성삼위일체를 위한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지난날 수도자들의 가르침 덕분에 어느 정도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네리는 기도하러 그곳을 종종 방문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중, 갑자기 네리 앞에 밝은 빛이 나타나더니 "거룩한 삼위일체회를 세우라"는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를 체험한 네리는 '나의 인생을 신앙에 바쳐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지체 없이 로마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평소에 큰아버지의 신임을 받았던 네리는 이대로면 약 2만 스쿠디라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사업을 이을 수 있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 순례자로서 로마로 향했다.

2.3. 로마에서의 선교 생활

로마에 도착한 필리포 네리는 운 좋게도 피렌체 출신의 교황청 세관 책임자 갈레오토 카치아(Galeotto Caccia)의 두 아들, 미켈레(Michele)와 이폴리토(Ippolito)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근무했지만 오히려 검소한 생활을 했다. 가정교사에 대한 수입은 네리의 요구에 따라 오직 밀 1자루였고, 그 밀로 집안의 제빵사가 약간의 올리브를 넣어 빵 한 덩어리를 만들어 주면 네리는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또한 그가 살았던 방은 협소했으며 가구라고는 침대, 탁자, 그리고 옷을 걸어 둘 수 있는 벽에 매달린 밧줄이 전부였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난 1535년부터 그는 가정교사 일을 유지하는 동시에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아우구스티노회 건물에서 철학신학을 틈틈이 공부했다. 그러나 1537년 말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책들을 판 돈으로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산 자코모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네리는 가정교사 일을 완전히 그만둔 뒤, 로마의 성당 입구나 후미진 골목마다 숨어 있는 빈 건물들에서 밤을 보내며 선교활동을 개시했다. 그의 선교 방법은 무모했는데, 바로 아무 길거리나 시장 바닥에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에 미온적이었던 로마 주민들은 처음엔 그를 무시하거나 조롱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이들에게 “기뻐하고 웃고, 원하는 만큼 농담을 하되, 죄는 짓지 마십시오!”라고 외쳤다.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와 함께 로마 거리에서 마치 취객들처럼 싸움이 난 듯 가장하여 구경꾼들을 불러모으는 방식으로 설교를 위한 청중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네리의 성실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은 젊은이들부터 시작해 차차 그의 설교를 들으러 많은 주민들이 모였다. 네리의 설교는 여느 사제들이 하는 설교와는 달랐는데, 그는 유쾌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유머를 적절히 섞어 가면서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파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웃음 없이는 그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고, 설교가 끝나면 언제나 기분 좋게 교리의 내용을 되새길 수 있었다.

로마의 영성적 삶을 부흥하고자 했던 네리는 그렇게 무려 17년 동안 병원, 은행, 상점, 집창촌 등을 방문해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고, 주민들은 이러한 그에게 로마의 사도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1544년경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도 친분을 쌓았다.

2.4. 삼위일체회의 설립과 사제서품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생각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몸소 체감한 필리포 네리는 1548년 자신의 영적 아버지이자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Persiano Rosa)와 함께 ‘순례자와 요양객의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회’를 설립했다. 네리가 이전에 몬타냐 스파카타의 성당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설립 초반에는 15명의 남성들로 구성되었으며, 로사 신부의 집을 본거지로 삼았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해당 단체에 참여해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이들은 네리를 주축으로 기도생활을 널리 전파하고 궁핍한 생활에 놓인 순례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며 활발한 봉사활동을 전개했고, 당시 로마에 막 유입된 콰란토레[2]를 알리는 데에도 힘썼다.

네리가 단순히 평신도로만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여겼던 로사 신부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사제가 되기를 권유했고, 이에 네리는 뒤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1551년 3월 29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세바스테교구의 주교인 조반니 루넬리(Giovanni Lunelli)로부터 부제로 서품되었고, 같은 해 5월 23일 산 톰마소 인 파리오네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연 네리는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의 사제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성별과 신분 상관없이 자신을 찾아온 모든 이들을 위해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그는 누구든지 따뜻하게 맞이하는 온화한 태도와 아무리 긴 이야기라도 쭉 경청하는 인내심을 발휘해 뛰어난 고해신부로 널리 알려져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조해 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데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네리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따라 동인도 선교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트레 폰타네 수도원에 있는 한 수도자의 조언으로 그 뜻을 단념한 후, 자신이 머물고 있는 로마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5. 오라토리오회의 설립과 발전

그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제들이 늘어나자, 필리포 네리는 이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 및 청년 사목에 전념했다. 그들은 저녁에 신자들을 오라토리오라고 하는 성당의 부속 경당으로 불러모아 다같이 기도를 하고 성가를 부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오라토리오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564년 피렌체 공화국 출신 사람들이 로마에 산 조반니 데이 플로렌티니 대성당의 축조를 완공하자, 피렌체 정부 측에서 네리에게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을 떠나 자신들의 새로운 성당으로 옮기길 요청했다. 네리는 처음엔 그 요청이 꺼렸지만, 당시 교황 비오 4세가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을 떠나더라도 오라토리오회만큼은 계속 관할할 수 있도록 허가해 결국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편 이 정기적인 모임은 체사레 바로니오(Cesare Baronio), 프란체스코 마리아 타루지(Francesco Maria Tarugi), 오타비오 파라비치니(Ottavio Paravicini), 안토니오 갈로니오(Antonio Gallonio), 그리고 조반니 조베날레 안치나(Giovanni Giovenale Ancina) 등 유능한 성직자들이 가입함으로써 그 규모가 늘어나 매번 모임을 할 때마다 공간이 남아돌지 않게 되었다. 이에 피렌체 공화국 사람들은 네리가 주임신부로 있는 산 조반니 데이 플로렌티니 대성당 옆에 오라토리오회를 위한 큰 성당을 지었고, 모임의 본거지는 그곳으로 이전했다.

모임은 더욱 커지고 이들의 활동 반경도 더욱 넓어지자, 네리는 아예 오라토리오회만을 위한 성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로마 한가운데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 측에서 이를 제안해 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당이 기대와는 달리 워낙 작고 노후해 네리는 기존 건물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피에르 도나토 체시(Pier Donato Cesi) 추기경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도움을 받은 네리는 1575년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한 성당을 건설했고, 이후 교황은 같은 해 7월 15일 오라토리오회를 재속 사제들을 위한 공동체로 승인했다.

2.6. 말년과 죽음

오라토리오회의 일원들은 1577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에서 생활했지만, 필리포 네리만큼은 초심으로 돌아가 한때 자신이 일했던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에서 1584년까지 머물렀다.

1590년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14세가 되는 니콜로 스폰드라토(Niccolò Sfondrato) 추기경은 네리에게 그의 명성에 견줄 만한 추기경 자리를 제안했으나 네리는 이를 거절했다.

건강이 많이 악화된 네리는 결국 1593년 오라토리오회의 총장직을 공동체의 열성스러운 일원이었던 체사레 바로니오에게 이양했다. 그리고 그는 여생 동안 작은 기도실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아, 불편한 몸을 지녔음에도 사제로서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네리의 병세는 이후로 번번이 위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등 수차례의 기복을 거쳤다. 1594년 그는 극한의 고통을 느꼈으나 그의 눈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그를 치유해 주었다. 1595년 3월 말 그는 고열에 시달렸으나 그의 간절한 기도로 5월 1일 성 필립보성 야고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할 때는 거짓말처럼 말끔히 나았다. 같은 해 5월 15일 네리는 "나의 삶은 이제 10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예언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었던 5월 25일,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미사에 참여하고자 성당을 방문한 사람들을 맞이했다. 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그는 마치 환시를 본 듯 바깥의 언덕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대영광송을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열창했다. 노래를 마친 후 그는 여느 때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 날 밤, 네리는 기도를 한 후 잠에 들고자 침대에 누웠고, 그의 건강이 우려되어 그를 찾아온 오라토리오회 동료들에게 자신이 죽을 시각을 예언했다.

다음 날인 5월 26일 자정, 네리는 각혈을 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침대 밑에서 자고 있던 안토니오 갈로니오에게 “안토니오, 저는 갑니다”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갈로니오는 곧바로 의사와 오라토리오회 일원들을 불렀다. 자신의 영적 아들들이 병상 주위로 몰려들자 네리는 이들에게 한 명씩 한 명씩 성호를 그어 축복해 준 뒤 천장을 바라보고선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오라토리오회의 본원인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3. 유명한 일화

3.1. 기적

3.1.1. 부풀어오른 심장

1544년 성령 강림 대축일이 오기 며칠 전, 필리포 네리는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베에서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불에 휩싸인 지구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이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머지않아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함과 뜨거움으로 인해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고 몸속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서둘러 자신의 맨가슴을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 차츰 안정이 되자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른 극도의 기쁨이 네리의 전신을 통과했으며 그는 온몸이 떨리는 와중에 자신의 심장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아무런 고통이나 외상이 없었고, 네리의 심장은 그가 기도와 같은 어떤 영적인 행동을 취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인지할 정도로 아주 크게 뛰었다.

네리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의사들은 부검을 실시했는데, 네리가 생전에 느꼈던 것처럼 그의 심장은 실제로 많이 팽창해 있는 상태였다. 얼마나 부풀어올랐는지 심장을 감싸던 주변 갈비뼈가 부러졌을 정도였다.

그의 심장이 과도하게 커진 것에 관해서 부검 이후 갑론을박이 일어났는데, 네리 자신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믿은 반면,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동맥이 팽창함으로써 발병하는 증상인 동맥류의 일환이라고 일축했으며, 루이 퐁넬(Louis Ponnelle)과 루이 보르데(Louis Bordet)는 자신들이 집필한 필리포 네리의 전기를 통해 자연적인 질병으로 인한 현상이자 동시에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단정지었다.

3.1.2. 파올로 마시모의 부활

필리포 네리가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에서 지내고 있던 1583년, 로마의 유력가 파브리치오 마시모(Fabrizio Massimo) 대공에겐 14살짜리 아들 파올로 마시모(Paolo Massimo)가 있었다. 파올로는 오랜 기간 동안 갖은 병치레를 했지만 신앙심만큼은 굳건했으며, 네리는 그런 소년을 정성스레 대해 주었다.

1583년 3월 16일, 여느 때처럼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네리가 뒤늦게 파올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년의 부고에 곧이어 마시모 궁전을 부랴부랴 방문한 그는 죽은 파올로가 누워 있는 침대 곁에서 약 7분 동안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도를 마친 네리는 자신이 가져온 성수를 소년의 얼굴에 뿌리고 숨을 부드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소년의 이마에 얹고 큰 소리로 “파올로야, 파올로야!”라고 외쳤다. 그러자 소년의 몸에 천천히 혈색이 돌더니 이내 네리에게 “신부님!”이라고 대답하며 완전히 되살아났다.

눈을 뜬 파올로는 자신의 침상 옆에 있는 네리에게 "제가 진작에 고백했어야 했는데 잊어버린 죄가 있다"며 고해성사를 요청했다. 네리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으며, 소년의 고백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사죄경을 내려 주었다. 이후 네리는 파올로와 몇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와 누나에 대해 약 30분 간 대화를 나누었다.

네리는 파올로에게 "다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기꺼이 "그러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네리는 다시 한 번 더 동일한 질문을 소년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는 “천국에 있는 저의 어머니와 누나를 보고 싶습니다”라고 완강하게 답했다. 네리는 파올로에게 “가거라, 축복을 받거라, 그리고 나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려무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년은 평화롭게 네리의 팔에 안긴 채 세상을 떠났다.

3.1.3. 이 밖의 기적들

필리포 네리가 미사를 집전할 때면 이따금씩 그의 몸 주위로 기이한 빛이 나타나곤 했으며, 때로는 황홀감과 함께 눈에 불꽃을 내뿜으며 공중부양을 하기도 했다.

네리는 독심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능력은 특히 고해성사 때 발휘되었는데, 그는 고해소를 방문한 신자가 고백하기도 전에 그 신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미리 언질을 주었다.

네리는 예언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그는 "3명의 젊은이가 코르시카로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익사하지만, 이들의 유해가 로마에 다다라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네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3.2. 체사리아의 유혹

필리포 네리가 로마 길거리의 설교자로 활동하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꺾고자 다분히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어느 날, 당시 로마에는 체사리아(Cesaria)라고 하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를 지닌 매춘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함락시켰던 자신의 유혹 기술에 네리가 굴복하게 만들 수 있다며 친구들과 내기를 걸었다.

체사리아는 우선 아픈 척을 하고선 고해성사를 부탁하고자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이윽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 네리는 그곳에서 그녀가 알몸과 다를 바 없는 아주 투명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자신이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네리는 그 자리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자신의 유혹이 실패했다는 것을 감지한 체사리아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 무거운 의자를 그에게 던졌다. 시간이 흘러 네리는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웬만한 유혹은 저항함으로써 극복되지만, 육체적인 유혹만큼은 예외이기에 오로지 도망쳐야만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일러두었다.

4. 사후 공경과 영향

“유머러스한 성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예수님처럼, 그는 르네상스 시대 로마의 고귀한 궁전들부터 골목길들까지 그곳에 있는 모든 인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람들에 대한 신뢰, 어둡고 음울한 영향을 물리친다는 것, 흥겨운 정신과 기쁨, 그리고 은총은 자연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고 강화하고 완벽하게까지 한다는 신념이 특징인 그의 영적인 부성(父性)은 그가 일구었던 모든 업적들로 빛났습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필리포 네리는 1615년 5월 11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그로부터 약 7년 뒤인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그의 기일인 5월 26일로 지정되었다. 성공회에서도 가톨릭과 동일한 축일에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필리포 네리가 설립한 오라토리오회는 현재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전 세계에 70개 이상의 오라토리오회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프랑스사제 피에르 드 베륄(Pierre de Bérulle)은 필리포 네리의 오라토리오회를 모델로 삼아 1611년 파리에 프랑스 오라토리오회를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프랑스 오라토리오회는 체계적인 사제 양성 제도로 17세기 중반 가톨릭교회의 쇄신에 크게 기여한 프랑스 영성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프랑스 오라토리오회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해 자취를 감췄다가 1852년 페테토 신부(Père Pététot)에 의해 '예수와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오라토리오회'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부활했다.

영국추기경 존 헨리 뉴먼은 당시 가톨릭 사제였던 시절인 1849년 버밍엄의 세인트 앤 성당에서 잉글랜드 최초의 오라토리오회인 버밍엄 오라토리오회를 창단했다. 이들은 오라토리오회의 기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론 불우하고 소외받는 가톨릭 신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는데, 훗날 반지의 제왕 작가가 되는 J. R. R. 톨킨도 그 수혜자들 중 하나였다.

5. 7대 성당 도보 순례

필리포 네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음악을 듣고 부르며 여러 성당들을 돌아보는 일종의 소풍을 종종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1553년 네리는 로마에 있는 7개의 성당을 도는 1일 순례의 전통을 만들었다. 네리는 순례라는 행위가 단순히 무겁고 엄숙하다기보다는 즐겁고 재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리고자 각각의 성당들을 방문할 때마다 초기 기독교의 성인들이 남긴 유산들을 알려 줌으로써 관광의 요소와 신앙적 체험을 통합했다.

전체적인 코스는 이러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출발해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산 세바스티아노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 대성당,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그리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여정을 마쳤다.

네리는 자신의 몇몇 친구들과 지인들을 불러 꼭두새벽부터 걷기 시작해 일곱 성당들을 찾아갔는데, 매 성당마다 이들은 기도를 하고 성가를 불렀으며 네리의 짤막한 설교가 이루어졌다. 순례자들은 당시 로마의 귀족이었던 마테이(Mattei) 가문의 저택인 빌라 마테이에서 식사를 즐겼다. 마테이 가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저택의 넓은 정원으로 순례자들을 초대해 빵, 포도주, 치즈, 달걀, 사과, 그리고 살라미로 구성된 식사를 베풀었다.

6. 여담

  • 가톨릭 신자였던 반지의 제왕의 작가 J. R. R. 톨킨은 필리포 네리를 존경해 자신의 견진명으로 그의 이름[3]을 택했다. 이에 1931년 그가 요정어로 쓴 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견진명까지 포함한 존 로널드 필립 루엘(John Ronald Philip Reuel)로 표기한 적이 있다.


[1] 착한 작은 필리포라는 뜻.[2] Quarantore. 미사를 시작하기 전 여러 신자들이 모여 40시간 동안 끊임없이 기도를 하는 것이다.[3] 영어로는 필립 네리(Philip Ne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