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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커크 전투 영어: Battle of Falkir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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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298년 7월 22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폴커크 | |
원인 | 윌리엄 월레스의 항쟁과 에드워드 1세의 진압 시도.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6,000명에서 20,000명 사이 | 14,000명에서 28,000명 사이 |
피해 | 큰 희생 | 2,000명 사상 |
결과 |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윌리엄 월레스의 수호자 사임,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 지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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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298년 7월 22일,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격돌한 대규모 회전.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윌리엄 월레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직위에서 사임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2. 배경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윌리엄 월레스는 동지 앤드류 모레이가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2달 만에 사망한 뒤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졌고,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던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을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수호자'를 자칭했다. 1297년 10월과 11월, 그는 국경을 넘어 노섬벌랜드를 습격해 코커머스와 뉴캐슬 사이의 지역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육하고 여인들을 강간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은 이들을 피해 타인 강 남쪽의 더럼 주로 도피했다.1297년 크리스마스 직전,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로버트 클리퍼드는 각자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클리퍼드는 에넌데일로 들어가서 마을 10개를 불태웠지만, 기병대 일부가 매복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보았다.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동부로 가서 베릭을 탈환하고 록스버러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298년 3월, 윌리엄 월레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백작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스털링 성을 포위해 식량이 떨어진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공성 무기가 없어서 에든버러, 베릭 및 기타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플란데런 백국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대적하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따는 소식을 접하자 1298년 3월 필리프 4세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존 드 워렌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가 친히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원정을 떠날 테니, 그때까지 독자적으로 출진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6월 25일, 에드워드 1세의 소집령을 접수한 잉글랜드군이 록스버러에 집결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에 관한 정보는 다양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기병 2,000명, 보병 12,000명(이중 10,000명은 웨일스에서 소집되었다고 한다.)에 달했다고 하며, 또다른 기록에서는 기병 3,000명, 잉글랜드 보병 15,000명, 웨일스 보병 1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기병 2,000명과 보병 12,000명이었다는 기록이 좀더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윌리엄 월레스는 예상되는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을 집결했다. 하지만 그는 전면전을 회피하고 청야 전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주민들을 산악지대로 피신시켜서 아무도 잉글랜드 왕에게 스코틀랜드군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못하게 했고, 잉글랜드군이 지나갈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했다. 잉글랜드의 링컨셔와 요크셔에서 식량이 운송되었고, 아일랜드 영지에서 칼라일로 해상 수송이 이뤄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대규모 군대에게 지급해야 할 식량을 충분히 마련할 수 없었다. 겓아가 동부 스코틀랜드 항구로 식량을 운반하기로 했던 선박 몇 척이 역풍으로 인해 운항이 중단되었다.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면서 굶주림에 시달린 잉글랜드 군인들에게 전달된 몇 안 되는 물품 중에는 왕이 군대에 나누어 준 와인도 있었다. 이 와인을 둘러싸고 규율을 잃은 웨일스 보병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더니 급기야 폭동으로 이어졌고, 에드워드 1세는 기병대를 투입해 웨일스인 80명을 처단했다. 그렇게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 진입한 이래 윌리엄 월레스를 찾지 못하고 헤매면서 식량난에 시달리는 현 상황에 회의를 느낀 끝에 에든버러로 철수하려 했다. 이때, 제7대 던바 백작 패트릭 던바와 제7대 앵거스 백작 길버트 드 움프라빌이 찾아와서 스코틀랜드군이 폴커크 인근의 칼렌다 숲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이곳은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윌리엄 월레스는 아마도 여기에 숨어 있다가 잉글랜드군이 철수할 때 기습 공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1세는 드디어 스코틀랜드군을 섬멸할 호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폴커크로 진군했다. 7월 21일 밤 린리스고 인근의 평원에서 야영하던 에드워드 1세는 한 기병이 말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말발굽에 치여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왕의 비명을 들은 장병들은 "왕이 죽었다!", "스코틀랜드 놈들이 야습했다!"라고 외치며 동요했다.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말에 올라탄 뒤 군중을 돌며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줬고, 장병들은 곧 진정했다. 7월 2일 새벽,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가 미사를 주관했고, 잉글랜드군은 미사가 끝나자마자 린리스고를 떠나 폴커크로 이동했다. 얼마 후,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이 이미 전투를 벌이기 위해 대열을 갖춘 사실을 목격했다. 이리하여 폴커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1298년 7월 22일 아침, 윌리엄 월레스는 잉글랜드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전투 대열을 편성하고 적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스코틀랜드군의 전력은 최소 6,000에서 최대 20,000명으로 알려졌다. 학자들은 최소치가 현실에 근접할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언덕 측면의 견고한 지형에 남동쪽을 바라보는 형태로 군대를 배치했으며, 군대의 후방에는 칼렌다 숲이 있었고, 언덕 앞에는 웨스트쿼터 개울이 흐르면서 스코틀랜드 방어선 앞에 습지가 형성되었다. 또한 왼쪽 측면은 폴커크에서 스털링으로 가는 길이 지나는 가파른 경사로 보호되었으며, 오른쪽 측면에는 숲이 있었다. 스코틀랜드군 대부분은 창병으로, 4개의 쉴트론[1]으로 배열되었다. 윌리엄 월레스는 적 기병대의 돌파력을 억제하기 위해 땅에 나무 말뚝 및 여러 장애물을 설치했으며, 부하들에게 기사보다 말을 먼저 죽이라고 지시했다. 쉴트론 사이에는 본킬의 존 스튜어트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궁수병이 있었으며, 후방에 귀족들의 수행원으로 구성된 경기병대가 예비군으로 배치되었다.에드워드 1세는 우선 군대를 정지시킨 후 아침 식사를 제공하려 했다. 그러나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레이시는 적이 이미 전투 대형을 형성했는데 장병들을 주저앉히면 적에게 급습당할 수 있다며, 즉각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에 따라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기병대를 2개 부대로 나눠서 돌격하게 했다. 노퍽 백작, 헤리퍼드 백작, 링컨 백작이 이끄는 첫번째 기병 부대는 정면에서 돌격하려 했지만, 습지가 펼쳐진 걸 알게 되자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편,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가 이끄는 2번쨰 기병 부대는 역시 습지를 우회해 동쪽 방면으로 진군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2개 기병 부대가 스코틀랜드군 쉴트론과 격돌했다.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적 기병대의 압도적인 기세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포던의 존은 코민 가문 소속 기병대가 윌리엄 월레스를 배신하고 가장 먼저 도주했다고 기록했는데, 학계에서는 로버트 1세의 정적이었던 코민 가문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한다. 이렇게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패주한 뒤,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스코틀랜드 궁수를 공격해 대부분 사살했다. 이로 인해 쉴트론 4개는 고립되었고, 잉글랜드 기병과 보병, 장궁병, 석궁병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가벼운 갑옷을 입은 스코틀랜드인 다수가 사살되었고, 방어선이 점점 와해하면서 더 이상 잉글랜드 기사들의 돌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전의를 상실한 스코틀랜드인들이 사방으로 도주하다가 적 기병들의 추격으로 학살당했다. 수천 가량의 스코틀랜드 보병들이 사살되었고, 본킬의 존 스튜어트, 파이프의 맥더프를 포함한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이 전사했다. 잉글랜드 측에서는 보병 2,000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군마 110마리가 시살되었으며, 기사 브라이언 르 제이와 소트리의 존이 전사했다. 윌리엄 월레스는 배틀액스 2개를 양손에 쥐고 밤까지 분전헀지만,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숲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폴커크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4. 이후
폴커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에드워드 1세는 파이프 지역으로 진군했다. 그는 성 앤드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세인트앤드루스를 약탈하지 않았다. 그 대신 퍼스를 철저히 약탈했으며, 스털링에서 식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 병력을 먹이기에는 부족했기에, 그는 군대를 나누었다. 보병대는 칼라일로 파견되었고, 에드워드 1세 본인은 기병대와 함께 에어로 진군해 윌리엄 월레스를 추종하는 마을들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에어 성을 지키던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에어 성을 불태운 뒤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산악지대로 후퇴했다.에드워드 1세는 에어 성을 파괴한 뒤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해 9월 잉글랜드 북부의 칼라일로 이동했다. 9월 25일,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에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의 영지를 몰수해 잉글랜드 귀족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편, 윌리엄 월레스는 폴커크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수호자 자리에서 사임했고, 1299년 이전에 스코틀랜드를 일시적으로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이후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이 새로운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폴커크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스코틀랜드 반군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성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반군의 손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행정부가 반군 지도자들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과 모레이 주교 데이비드 모레이가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존 3세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와의 항쟁에 전념했고,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남부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북부까지도 심각한 파괴와 약탈에 직면했다. 그들은 폴커크 전투 이후 잉글랜드군에 함락된 스털링 성을 포위했고, 1299년 여름에는 록스버러 성도 공략하려 했지만, 그곳 수비대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취소했다. 그 대신, 셀커크 숲을 점거했고, 에든버러를 습격해 주변 민가들을 약탈했으며, 에드워드 1세를 따르던 몇 안 되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한 사람이었던 사이먼 프레이저를 설득해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9년 6월 6일 새로운 원정을 위해 군대를 소집한 뒤 여름에 노섬벌랜드로 향했지만,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로 진군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털링 성 수비대는 장기간 이어진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1299년 말에 무장을 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렇듯 스코틀랜드인들은 폴커크의 패전 이후에도 꿋꿋이 저항을 이어갔고, 에드워드 1세는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수 년간 전쟁을 이어가야 했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