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7 02:04:46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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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영어: Bruce campaign in Ireland
파일:Bruce-Campaign-without-overlay-of-activity.jpg
시기 1315년 ~ 1318년
장소 아일랜드
원인 아일랜드를 공략하려는 브루스 가문의 야망.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게일인 토착 세력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아일랜드 영지
지휘관 파일:Arms_of_Bruce.svg.png 에드워드 브루스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토머스 던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
펠림 맥휴 오코너
타드그 막 돔날 오 셀라흐
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리처드 드 버러
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에드먼드 버틀러
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존 피츠토머스 피츠제럴드
파일: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로저 모티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호담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드 버밍엄
결과 브루스 가문의 아일랜드 정복 실패.
영향 잉글랜드 왕국의 아일랜드 통제 지속.
1. 개요2. 배경3. 경과
3.1. 1315년3.2. 1316년3.3. 1317년3.4. 1318년

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15년 ~ 1318년, 로버트 1세의 형제인 에드워드 브루스가 아일랜드를 공략하기 위해 단행한 원정. 에드워드 브루스는 한때 잉글랜드군과 아일랜드 영지 소속 군대를 연파하고 아일랜드의 패권을 확보하는 듯했지만, 잉글랜드군의 지속적인 반격과 기후 악화로 인한 민심 이반 등으로 인해 끝내 패망했다.

2. 배경

파일:Lordship_of_Ireland,_1300.png
1300년경 아일랜드 영지.

1160년대, 렌스터의 왕 디어마르마이트 막 무르차다는 아르드리인 루아이드리 우아 콘코바이르가 결성한 강력한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 디어마르마이트는 1167년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 헨리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헨리 2세는 그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걸 허용했다. 디어마르마이트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를 포섭했고, 웨일스-잉글랜드 변경 지대에서 모집한 앵글로-노르만 기사단과 플란데런 용병 부대를 모았다. 그 후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렌스터를 탈환했지만, 1171년에 급사했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이 기회를 틈타 렌스터를 접수했다.

헨리 2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아일랜드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승인을 받아낸 뒤, 1171년 10월 펨브로크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항해했다. 헨리 2세의 개입은 성공적이었고, 아일랜드 남부와 동부의 아일랜드인과 앵글로-노르만인들은 모두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리처드 드 클레어 역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렌스터의 주권을 승인받았다. 그는 새롭게 확보한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성채를 대거 건설했다. 1175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인 루아이드리 우아 콘코바이르는 헨리 2세와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조약에서 아일랜드의 아르드리로 인정받는 대신에 헨리 2세를 주권자로 받들고 경의를 표하며, 매년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 후 아일랜드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역대 군주들과 노르만족 영주들의 지속적인 공략과 아일랜드 게일인 소왕국들의 반격으로 오래도록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게일인들은 압도적인 전투력과 무장 수준을 갖춘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점점 밀려났다. 14세기 초, 아일랜드 동부 대부분은 잉글랜드 왕국이 설치한 아일랜드 영지의 직접 또는 간접 통치를 받았고, 게일계 소왕국은 아일랜드 서부의 일부 지역에서 근근히 버티거나 아일랜드 영주의 봉신을 자처하는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던 1315년, 지난해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는 전쟁의 무대를 확장하기로 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는 동시에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을 기획했다. 학계에서는 이 원정이 감행된 동기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기했다. 우선,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잉글랜드군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꾸준히 공급했다. 특히 더블린, 던독, 드로이다 항구는 잉글랜드 선박이 스코틀랜드 서해안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곳을 공략한다면,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할 때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는 경로를 상실하게 되며,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스코틀랜드에 곡물과 가축을 공급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일랜드 내 반 잉글랜드 정서를 품은 게일인들이 로버트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전승에 따르면, 타르 에오가인(현재 북아일랜드 타이론 주)의 소왕인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이 에오간의 남동쪽 소왕국인 베르됭과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가신들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가신 및 동맹자 12명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실제로 원정군 총사령관 에드워드 브루스는 얼스터에서 스코틀랜드 서부 귀족 앵거스 오그 맥도날드의 동맹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에드워드 브루스 본인의 개인적인 야심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를 정복한 뒤 형이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군림하는 동안, 본인은 아일랜드의 아르드리로 군림하며, 두 형제가 힘을 합쳐 잉글랜드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1315년 4월 26일, 스코틀랜드 의회가 에어 성에서 개최되었다. 로버트 1세는 이 자리에서 본인에게 아직 적법한 아들이 없다는 걸 상기하며,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를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스코틀랜드 왕위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왕위 후계자의 권한으로 병력과 함대 소집령을 스코틀랜드 전역에 반포했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3.1. 1315년

1315년 5월 26일, 에드워드 브루스는 앤트림의 라른에 상륙했다. 일부 연대기는 그가 이끈 병력이 5,000명에 달하며, 함대는 300척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배넉번 전투 당시에 동원된 스코틀랜드군이 5,000 ~ 8,000명인데, 아일랜드 원정에 그만한 병력을 파견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면서, 에드워드가 아일랜드로 출진한 병력은 1,000명도 채 되지 않는 소규모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잉글랜드군과의 오랜 전쟁에 단련되었으며,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존 드 소울스, 필립 드 모브레이 등 숙련된 장교들이 이끌었다. 아일랜드로 파견된 스코틀랜드 전력의 핵심은 헤브리디스 제도 출신 장병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1315년 6월 6일, 에드워드 브루스는 얼스터에서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 및 여러 게일인 귀족들과 접견한 뒤 그로부터 아르드리를 대대로 세습할 권리를 양도받고 아르드리로 즉위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성인 캐릭퍼거스 성을 포위했다. 6월 29일, 스코틀랜드인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던독을 공략하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는 게일인 주민 중 스코틀랜드군에 가담하기를 주저하던 자들에게 "계속 주저한다면 적으로 간주하고 쓸어버리겠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조치였다.

제2대 얼스터 백작으로서 아일랜드 영지를 이끌었던 리처드 드 버러는 에드워드 브루스에 대항하여 가신들을 동원했다.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와 마을과 촌락의 파괴가 벌어진 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1315년 9월 10일 코너 전투에서 리처드 드 버러를 격파했다. 그 후 리처드 드 버러는 전력 손실이 막심했기에 더 이상 스코틀랜드 침략자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남은 영토를 방어하는 것만 주력했다. 이제 얼스터에서 근거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에드워드 브루스는 이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315년 9월 중순,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아일랜드에서 전리품을 실은 선박 5척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배 1척은 항해 도중 침몰했지만, 나머지 4척은 무사히 도착했고, 스코틀랜드 전사 500명을 태운 뒤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다만 토머스 랜돌프는 스코틀랜드에 그대로 남았다.

스코틀랜드군이 아일랜드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1315년 9월 1일, 링컨에서 열린 의회는 에드워드 2세의 대집사 존 호담을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한 바 있었던 존 호담은 이제 스코틀랜드군에 대한 저항군을 조직할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토머스 던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해적들이 앵글시의 홀레히드 항구를 약탈한 뒤 존 호담이 타고 있던 왕십 선박인 카나번의 제임스 호를 습격했고, 제임스 호는 이들을 가까스로 뿌리친 뒤 체스터에 한동안 정박했다. 11월 5일이 되어서야 더블린에 도착한 존 호담은 도시 방어군을 조직했다. 한편, 웨일스 카디건셔의 왕실 집사 그루피드 르위드는 에드워드 브루스가 보낸 밀사와 접촉한 사실이 발각되었고, 1316년 12월부터 1318년까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얼스터에서 자기 지위를 공고히한 후 남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며 농장과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였다. 1315년 12월, 에드워드 브루스는 켈스에서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후 트림 성을 포위했지만, 성의 방어 시설이 강력했기에 함락하지 못했다. 로저 모티머와 전직 보안관 테오발드 드 베르됭은 패전 후 잉글랜드로 도피했다. 이로 인해 미스는 사실상 방치되었고, 더블린 역시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존 호담은 공포에 질려 잉글랜드로 도피하려던 잉글랜드인 귀족들을 설득해 스코틀랜드군에 맞서 영지를 지키라고 설득했다.

3.2. 1316년

1316년 1월, 에드워드 브루스는 더블린 인근에 이르렀지만, 그곳의 방어가 굳건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더블린을 우회하여 아일랜드 남부의 킬다르로 진군했다. 그해 1월 26일, 스코틀랜드군은 아시 인근의 아즈컬에서 에드먼드 보안관과 아일랜드 남부 귀족들이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과 마주쳤다. 이 연합군은 잉글랜드 측이 아일랜드에서 소지발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기에, 여기서도 완패한다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수 개월간의 전역으로 지쳐 있고 보급품이 부족하다는 걸 간파하고, 전면전을 회피하고 방어에 주력했다. 스코틀랜드군은 그들을 공격했지만 쉽사리 압도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단한 뒤 다음 날 얼스터로 철수했다.

그 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1316년 내내 얼스터에 머물면서 정부를 세우고 순회판사를 선임하려고 노력했다. 그해 봄과 여름, 스코틀랜드군은 그린캐슬과 노스버그 성을 점령했다. 1316년 7월 말이나 8월 초, 로버트 1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아직까지도 버티고 있던 캐릭퍼거스 성 공방전을 지원했고, 캐릭퍼거스 성은 구원군이 좀처럼 오지 않는데다 식량마저 바닥나자 1316년 9월에 항복했다. 로버트 1세는 곧 돌아갔고, 에드워드 브루스는 1316년 9월 30일 스코틀랜드로 가서 파이프의 쿠퍼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1316년 11월, 에드워드 2세는 로저 모티머를 왕의 부관으로 선임하고 아일랜드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했다. 로저 모티머는 먼저 웨일스로 가서 군대를 모집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과 귀족에게만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일부 아일랜드 프란치스코회 성직자들도 설교에서 신자들에게 에드워드 브루스를 지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아일랜드는 오직 교황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잉글랜드가 불법적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잉글랜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아일샴의 제프리는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해 프란치스코회 총장인 체세나의 미카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미카엘은 아일랜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에드워드 브루스를 옹호하는 설교를 하는 걸 금지했다. 교황 요한 22세도 이 금지 조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현지 수도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를 이어갔고, 1316년 하반기에 렌스터, 데스먼드, 토몬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에 반항하는 아일랜드 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3.3. 1317년

1317년 1월, 로버트 1세는 동생의 원정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과 아일랜드 동맹군은 캐릭퍼거스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새로운 작전을 논의했다. 이후 그들은 더블린을 정복하거나 에드먼드 버틀러가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을 섬멸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해 2월 초, 에드워드 브루스는 토머스 랜돌프, 로버트 1세,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과 함께 약탈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미스의 슬레인을 불태운 뒤, 2월 23일 이전에 더블린 인근으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에 있는 모든 마을을 약탈했다.

잉글랜드 수비대는 더블린 성벽 바깥의 건물들을 불태워서 적이 쓰지 못하게 했고,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는 더블린 성벽 뒤에서 버텼다. 그러나 얼마 후, 잉글랜드 당국은 그가 로버트 1세의 장인이라서 로버트 1세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체포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보급품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어서[1] 더블린 공방전을 벌일 수 없음을 인지하고, 더블린을 우회한 뒤 남서쪽으로 이동해 렌스터와 먼스터를 거쳐 4월 초에 리머릭에 도착했다. 에드먼드 버틀러가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이 그들을 추격해 스코틀랜드군의 진군을 방해했지만, 전면전은 회피했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동맹군은 리머릭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1317년 4월, 국왕의 부관을 맡은 로저 모티머가 지원군을 이끌고 아일랜드 남부에 상륙했다. 이후 로저 모티머는 에드먼드 버틀러와 합세한 뒤 반격하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군은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로 곤경을 겪다가 얼스터로 철수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이 원정에서 길고 힘든 작전을 치르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지만,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 많은 손실을 입었다. 1317년 5월 22일, 로버트 1세와 토머스 랜돌프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 남았지만, 더 이상 아일랜드 소왕 및 귀족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얼스터에서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1317년 여름, 잉글랜드군에 소속되어 있던 이탈리아인 용병 안토니오 페사그노는 아일랜드 해의 해상권을 스코틀랜드로부터 탈호나하기 위해 승무원 1,000명을 태운 제노바 갤리선 5척을 고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정부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이 부족해서 그의 제안을 따르지 못했다. 잉글랜드-아일랜드계 남작 존 다시는 아일랜드 해에서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 위해 선박 15척을 건조하려 했다. 자금이 부족해서 6척 밖에 건조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 선박들만 가지고 출항을 감행했고, 1317년 7월 2일 스코틀랜드의 악명 높은 해적 토머스 던을 처단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해를 장악했다. 1317년 10월,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브루스를 추종하는 미스의 라시 가문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3.4. 1318년

1318년 1월, 여러 아일랜드 소왕과 족장들이 아비뇽에 있던 교황 요한 22세에게 항의서를 발송했다. 그들은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걸 허가한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칙서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일각에서는 항의서를 보낸 주체는 아일랜드 소왕과 족장들이 아니라 스코틀랜드를 지지하는 아일랜드의 프란치스코회 성직자들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요한 22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1318년 가을, 에드워드 브루스는 10월 초 원정군을 재차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에서 지원군이 곧 올 예정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동맹 세력을 전부 상실하고 완전히 고립될 거라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작정 원정을 감행했다. 에드먼드 버틀러와 존 드 버밍엄이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은 적이 출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출진하여 에드워드 브루스에게 접근했다. 10월 14일, 양측은 던독 인근의 포하트 언덕에서 대면했다.

아일랜드 동맹군이 더욱 강력한 적군과 맞서는 걸 반대하자,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들을 언덕 꼭대기에 가까운 후방에 배치한 뒤, 2,000 가량의 스코틀랜드군만 이끌고 적 진영에 접근했다.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은 세 개 대열로 나뉜 채 진군했지만, 서로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이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3번째 대열을 이끌고 진군했다가 적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그의 수급은 참수되었고, 사지가 4개로 잘려나가 아일랜드의 네 지역으로 보내졌고, 머리는 요크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2세는 아일랜드를 수 년간 휩쓸었던 스코틀랜드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존 드 버밍엄을 라우스 백작에 선임했다. 존 드 소울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기사 30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헤브리디스의 족장 막 루아리드리, 아가일의 족장 막 돔날도 전사했다.

포하트 언덕 전투 후 얼스터에 있던 스코틀랜드 세력은 붕괴되었고, 캐릭퍼거스 성은 12월 2일에 잉글랜드군의 수중에 돌아왔다. 1319년 3월, 로저 모티머가 아일랜드 총독에 선임된 뒤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라시 가문을 코나흐트에서 크게 격파하고 라시 가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후 1321년까지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일랜드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 당시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 지역이 소빙하기로 인해 기근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