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eaa 0%, #005eb8 30%, #005eb8 70%, #003eaa);"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던바 전투 | 스털링 다리 전투 | 폴커크 전투 | 로슬린 전투 | 해프루 전투 |
메스번 전투 | 달리그 전투 | 라이언 호 전투 | 글렌 트룰 전투 | 라우던 힐 전투 | |
인버루리 전투 | 브랜더 고개 전투 | 배넉번 전투 |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 베릭 공방전 | |
마이톤 전투 |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 올드 바이랜드 전투 | 웨어데일 전역 | }}}}}}}}}}}}}}} |
로슬린 전투 영어: Battle of Roslin | ||
| ||
시기 | 1303년 2월 24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미들로디언 로슬린 | |
원인 |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왕국 정복 시도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알려지지 않음. | 기병대라고만 전해짐. |
피해 | 미미함. | 큰 피해. |
결과 |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스코틀랜드군의 일시적인 사기 증진. |
[clearfix]
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03년 2월 24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미들로디언 지역 로슬린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기병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벌어진전투.2. 상세
1302년 1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향한 연이은 원정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자 스코틀랜드 정부와 임시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전임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였던 존 드 소울스는 1302년 가을에 프랑스 왕국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이 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수호자가 되었다. 1302년 11월 휴전 협정이 만료되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터라 군대 동원을 미뤘다.1303년 1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 국경을 습격해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총독 존 시그레이브에게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든버러 서쪽 지역을 향한 약탈 원정을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존 시그레이브는 왕의 지시에 따라 기병대를 동원한 후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첫번째 부대는 시그레이브 본인이 이끌었고, 두 번째 부대는 랄프 맨튼이, 세 번째 부대는 로버트 네빌과 윌리엄 라티머가 이끌었다. 네빌과 라티머는 기사였고, 랄프 맨튼은 왕실의 '옷장 관리인'으로서 스코틀랜드 점령지에 주둔한 잉글랜드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병력 규모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기록은 3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터무니없는 수치로 간주한다.
시그레이브가 이끈 원정대는 처음에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원정을 순탄하게 이어갔다. 그러던 1303년 2월 22일, 잉글랜드군은 에든버러에서 약 8km 떨어진 로슬린에 도착했다. 각 잉글랜드 부대는 숙영지를 따로 건설했다. 진지를 세운 지역은 구릉 지형이었고, 부분적으로 숲이 깔린 개울이 둘러싸고 있었다. 한편, 적군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접한 존 3세 코민은 사이먼 프레이저와 함께 출진했다. 그들은 낮에 은신하고 밤에 행군하는 방식으로 적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이들이 이끈 병력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2월 24일 새벽, 로슬린의 잉글랜드 진영 근방에 이른 스코틀랜드군은 즉시 공격했다. 존 시그레이브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병대는 삽시간에 와해되었고, 시그레이브를 포함한 다수의 잉글랜드인이 생포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어둠이 짙게 깔린 탓에 시그레이브가 이끈 제1부대가 전부라고 오판하고, 전리품을 분배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 사이, 2번째 잉글랜드 부대가 급보를 접하자마자 스코틀랜드인들을 향해 진격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그제야 적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즉시 그들을 향해 돌격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했고, 두 번째 진영을 공략했다.
한편, 로버트 네빌과 윌리엄 라티머가 이끄는 3번째 잉글랜드 기병대는 다른 2개 기병대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들은 2개 부대가 연이어 격파된 이후에야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존 3세 코민과 사이먼 프레이저는 장병과 군마 모두 탈진했기에 후퇴해 봐야 제 속도가 나오지 않아 적의 추격으로 와해될 거라 여기고, 적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 결과, 이번에는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고, 시그레이브는 풀려났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피해가 컸기 때문에 퇴각하는 적군을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뒤, 잉글랜드군은 로슬린 숲속에 필 타워를 건설했고, 알렉산더 발리올이 이곳을 지켰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아일랜드 파견대 및 로버트 브루스가 지원한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록스버러에서 집결한 뒤 5월 30일 출진했다. 그는 비숍스 린에 배다리를 건설한 뒤, 스털링 성을 우회하여 포스만을 건넌 후 파이프 일대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해 7월 브레친에 도착한 뒤 마울레 성을 포위해 8월 9일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어콰트와 크로마티 성을 함락한 뒤, 에버딘을 거쳐 모레이 퍼스 연안에 있는 킨로스 수도원으로 진군해 9월 14일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이 도달한 최북단 지점이었다. 그러나 보급품이 부족했고, 스코틀랜드군이 전투를 회피하자, 잉글랜드군은 철수했다. 에드워드 1세는 11월 5일 파이프에 있던 던펌린 수도원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로슬린 전투의 승리에 고무되었지만, 잉글랜드군의 뒤이은 침략으로 영지가 파괴되어 수입이 끊겨버리면서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다. 게다가 필리프 4세가 플란데런 백국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마음먹고 1303년 5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프랑스의 지원을 더 잇아 받지 못하게 되자, 현 상황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게다가 에드워드 1세가 지난 원정과는 달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코틀랜드 한복판인 던펌린 수도원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드러내자, 그들은 전의를 잃고 협상하기로 했다. 존 3세 코민은 1304년 2월 5일 퍼스 북쪽 스트래소드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 헨리 퍼시 등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다만 그는 무조건 항복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반란을 이끌었던 귀족들에 대해 제재하지 말라고 요구했으며, 양측 모두 무조건 포로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존 3세 코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304년 2월 9일,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3세 코민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뒤이어 스코틀랜드 귀족 대부분이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오직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 만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세리크 숲에서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유격전을 이어갔지만, 1304년 2월 20일 해프루 전투에서 참패했다.
1994년, 로슬린 유산 협회 임원들이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