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3 20:11:14

존 시그레이브(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

성명 존 시그레이브
John Seagrave
생몰년도 1256년경 ~ 1325년 5월 8일에서 10월 4일 사이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시그레이브 남작령
사망지 가스코뉴
아버지 니콜라스 시그레이브
어머니 모드 드 루시
형제 니콜라스, 헨리, 제프리, 사이먼, 길버트, 스티븐, 아나벨, 엘리노어
아내 크리스티나 드 플레시스
자녀 스티븐, 크리스티나, 존
직위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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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시그레이브 가문의 시조 길버트 피츠헤어워드는 레스터셔 지주였다가 1166년 워릭 벡작으로부터 레스터셔에 있는 시그레이브 영지를 받고 기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스티븐은 헨리 3세 치하에서 잉글랜드의 재판관이 되었고, 많은 재산과 영지를 확보했다. 스티븐의 손자 니콜라스 시그레이브는 초대 시그레이브 백작이 되었고,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서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와 대적한 일로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나중에 사면되어 영지를 돌려받은 뒤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1277년과 1282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해 웨일스 정복에 일조했다.

니콜라스 시그레이브는 켄트의 뉴잉턴, 쿠블링턴, 버킹엄셔, 달링턴 및 슬랩턴, 노샘프턴셔 등지에 영지를 둔 기사 제프리 드 루시의 딸인 모드 드 루시와 결혼해 여러 자식을 두었는데, 존은 장남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1287년에는 아일랜드에서, 1291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국왕을 위해 복무했다. 1270년 휴 드 플레시스[1]의 딸 크리스티나 플레시스와 결혼해 슈롭셔의 스토츠던 영지를 받았고, 1275년 아버지로부터 워릭셔의 칼베던 기사 영지를 받았으며, 1282년에는 링컨셔의 또 다른 영지를, 1289년에는 링컨셔의 블리버러, 그리고 버킹엄셔의 펜을 받았다. 1281년 슈롭셔에 있는 킹스우드의 영지를 자신의 작은 소유지 여러 개와 교환했다.

1295년 이후 아버지의 기록이 끊긴 뒤, 그는 여러 주에 있는 모든 가족 소유지를 물려받았다. 그 해 12월 10일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했고, 1296년 8월 26일부터 시그레이브 남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1297년 1월, 존은 요크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같은 해, 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인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와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시그레이브는 16명 또는 20명의 기병을 이끌고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 평화시와 전시 모두 노퍽 백작을 섬겨야 하며, 그 대가로 노퍽에 있는 로던의 영지를 받았다. 로저 비고드는 그 해에 에드워드 1세에 대한 반대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1297년, 로저 비고드는 가스코뉴로 파견하려는 에드워드 1세의 지시에 불복하고,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존은 제3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 제8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등과 함께 로저 비고드를 지지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와 반대 귀족들간의 내전이 벌어지는 듯 했지만,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자는 화해하고 스코틀랜드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존은 1298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를 격펴하는 데 일조했고, 1300년에는 케러버록 공방전에 참여했다. 1301년 왕실 마셜로 선임된 뒤 연봉 100파운드를 받았으며, 잉글랜드 귀족들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스코틀랜드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청원한 서신에 서명했다.

1302년 초 베릭 성주에 선임되었고, 그 해 말에는 국왕의 부관으로서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모든 잉글랜드군의 지휘를 맡았다. 1303년 2월 24일 로슬린 전투에서 존 3세 코민과 사이먼 프레이저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패배해 일시적으로 생포되었지만, 후속 부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1304년 2월 20일 초대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함께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군을 해프루 전투에서 격파했으며, 그 해 7월 에드워드 1세의 스털링 공방전에 참여했다. 스코틀랜드의 거의 모든 영주가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한 뒤에는 숲속에 은신하는 윌리엄 월레스를 잡는 임무를 맡았다. 1305년 여름 스코틀랜드 기사 존 드 멘티스의 협조로 월레스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 뒤, 월레스를 직접 수레에 실어서 런던으로 데려왔다. 월레스는 런던에서 재판을 받고 반역자로 선고된 뒤 교수형에 처해진 후 사지 절단형에 처해졌다. 시그레이브는 처형 후 월레스의 유해를 스코틀랜드로 가져가서 대중에 공개했다.

1305년 8월 1일 왕실 부관 직에서 사임했다. 그 후 1306년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하자,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응징하고자 스코틀랜드로 북상했고, 시그레이브도 여기에 참여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뒤 왕위를 물려받은 에드워드 2세 치하에서, 시그레이브는 많은 관직을 맡았다. 그는 새 왕의 총티 첫 몇 달 동안 트렌트 강 너머 산림의 감독관이 되었고, 노팅엄 성의 치안관이 되었으며, 1309년 3월 10일에는 스코틀랜드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거의 석권했기 때문에, 그는 잉글랜드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만 맡았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 참여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했고, 칼라일로 도피했지만 적에게 포위되자 수비대가 항복한 뒤 생포되었다. 그 해 말 큰 몸값을 지불하는 대가로 풀려났고, 1316년 7월 16일 군 복무에 드는 비용에 대한 보상으로 에드워드 2세로부터 1,000 파운드를 받았다. 이후 에드워드 2세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었을 때, 그는 토머스를 따랐고, 무장병 30명을 공급하는 대가로 연간 50마크의 연금을 받았다. 1318년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이 리크 조약을 체결해 일시적으로 화해했을 때, 새로운 왕립 위원회에 시그레이브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1321년 랭커스터 백작이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부자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시그레이브는 랭커스터 백작과의 관계를 끊고 에드워드 2세 편에 섰다. 그 후 에드워드 2세의 지시에 따라 워릭셔, 레스터셔, 스태퍼드셔에서 군인을 모집해 반군과 싸웠다. 1322년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랭커스터 백작이 패배하고 생포된 뒤 참수형에 처해진 후, 그는 요크에서 토머스에게 가담했던 영주들의 재판에 판사로서 참여해 엄중히 처벌했다.

1324년 아키텐 공국을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맞붙은 생사르도 전쟁이 벌어지자, 시그레이브는 에드워드 2세로부터 아키텐의 현지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1324년 여름 가스코뉴에서 프랑스군의 침공에 맞서다가 1년 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날짜는 기록마다 엇갈리는데, 5월 8일에서 10월 4일 사이로 추정된다.

3. 가족

  • 크리스티나 드 플레시스: 제7대 워릭 백작 존 드 프레시스의 아들인 휴 드 플레시스의 딸.
    • 스티븐 시그레이브(? ~ 1325): 제3대 시그레이브 남작. 1325년 아버지로부터 작위를 계승했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후 스티븐의 아들이자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 존의 손자인 존 시그레이브가 제4대 시그레이브 남작으로 선임되었다.
    • 존 시그레이브: 폴크스톤의 영주 존 드 센드위치의 딸 줄리아나와 결혼했다.
    • 크리스티나 시그레이브: 초대 모훈 남작 존 드 모훈의 아들 존 드 모훈의 부인, 제2대 모훈 남작 존 모훈의 어머니.


[1] 제7대 워릭 백작 존 드 프레시스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