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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프루 전투 영어: Battle of Happrew | ||
시기 | 1304년 2월 20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피블스 인근 해프루 | |
원인 | 잉글랜드군의 스코틀랜드 반란군 추적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알려지지 않음. | 알려지지 않음. |
피해 | 궤멸. | 미미함. |
결과 |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일시적인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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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04년 2월 20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피블스 인근 해프루에서 잉글랜드군이 윌리엄 월레스 등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섬멸한 전투.2. 상세
1304년 2월 9일,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3세 코민 및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는 저항을 계속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세리크 숲에서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유격전을 이어갔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부관인 존 시그레이브와 윌리엄 라티머, 그리고 1302년부터 잉글랜드군에 복무하던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에게 스코틀랜드 반란군 잔당을 추적해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잉글랜드군은 세리크 숲을 수색한 끝에 2월 20일 피블스 인근 해프루에서 적군을 발견했다. 이후 전투의 진행 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가 대다수 병사를 살실하고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것만 알려졌다.그 후 윌리엄 월레스는 1305년까지 숨어 다니며 저항을 이어갔지만, 글래스고 근방의 로브로이스턴에서 에드워드 1세 밑에 있던 스코틀랜드인 기사 존 드 멘티스에게 체포되어 잉글랜드군에 넘겨졌다. 그 후 런던으로 압송된 뒤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은 후 살인 및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옷이 벗겨진 채 말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당하다 스미스필드 마켓에서 능지형에 처했다.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런던 다리에 효수되었고 장기는 불태워졌으며 찢긴 사지는 4개의 지역에 나뉘어서 전시되었다.
사이먼 프레이저는 산악지대에서 추적당하는 나날에 지쳐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복종하려 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가 충성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3년 동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에 발을 들이지 않는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프레이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귀순했고, 1305년 9월 연봉의 3배를 지불하고 몰수한 재산을 다시 사들이는 것을 인정받는 대가로 4년간 추방되어야 했다. 1306년 로버트 브루스가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를 칭하자, 추방령을 어기고 로버트 1세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1306년 6월 19일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할 때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