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eaa 0%, #005eb8 30%, #005eb8 70%, #003eaa);"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던바 전투 | 스털링 다리 전투 | 폴커크 전투 | 로슬린 전투 | 해프루 전투 |
메스번 전투 | 달리그 전투 | 라이언 호 전투 | 글렌 트룰 전투 | 라우던 힐 전투 | |
인버루리 전투 | 브랜더 고개 전투 | 배넉번 전투 |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 베릭 공방전 | |
마이톤 전투 |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 올드 바이랜드 전투 | 웨어데일 전역 | }}}}}}}}}}}}}}} |
글렌 트룰 전투 영어: Battle of Glen Trool | ||
시기 | 1307년 5월 10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에이셔주 라우던 힐 | |
원인 |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탈환 의지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600명 | 3,000명 |
피해 | 미미함. | 상당함. |
결과 |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 지배력 약화 |
[clearfix]
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07년 5월 10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에이셔주 라우던 힐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
2. 상세
1307년 봄,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의 헤브리디스 제도와 아일랜드에서 전사 300명을 끌어모은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서남쪽의 갤러웨이에 상륙한 뒤 잉글랜드군을 향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군림하던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는 1,500명 가량의 토벌대를 이끌고 그를 잡으려 했으나, 그 해 4월 글렌 트룰 전투에서 글렌 호숫가 협곡에 숨은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군대를 북쪽으로 진군해 에어 성을 우회하면서 병력을 600명으로 증강했다.발랑스는 3,000 가량의 병력을 재차 규합한 뒤 로버트 1세를 추격했고, 5월 10일 에어셔의 라우던 힐에서 적군을 따라잡았다. 로버트 1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라우던 힐 정상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칼마녹 시 동쪽에 있는 라우던 힐 서쪽에는 어바인 강이 흐르는 습지대가 형성되었고, 동쪽에도 습지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양쪽 습지대 사이의 길 하나가 고원을 가로질렀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장에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세 개의 참호를 파고 담벽을 쌓아 영국 기병대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더욱 제한했다. 그 결과 전장에는 약 90m 너비의 틈새가 남았고, 잉글랜드 기병들은 오직 이 틈새를 통해서만 스코틀랜드 창병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기병대가 제대로 된 돌파력을 발휘하기에는 전장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발랑스는 돌격 한 번이면 오합지졸인 스코틀랜드 민병대가 와해할 거라고 오판하고, 기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90m 너비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려다가 돌격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창병들은 그런 그들을 손쉽게 격퇴했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는 <운율 연대기>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왕의 부하들이 제방에서 그들(잉글랜드 기사)에 맞섰다.
너무나 강인해서 가장 호전적이고
가장 강한 자가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갑옷 위의 창이 거칠게 부서지는 무서운 소리가 들렸고,
부상당한 자들이 울부짖고 신음했다.
먼저 싸움에 나선 자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들의 함성과 비명은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듣기에 끔찍한 소리였다.
너무나 강인해서 가장 호전적이고
가장 강한 자가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갑옷 위의 창이 거칠게 부서지는 무서운 소리가 들렸고,
부상당한 자들이 울부짖고 신음했다.
먼저 싸움에 나선 자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들의 함성과 비명은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듣기에 끔찍한 소리였다.
잉글랜드 기병들이 불리한 전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함성을 힘껏 내지르며 내리막길을 따라 돌진했다. 잉글랜드 후위대는 아군이 무너지고 적이 돌진하는 걸 보고 전읠을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미처 또망치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살육당했다. 발랑스는 군대를 수습할 생각 조차 못하고 보스웰 성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로버트 1세는 3일 후 발랑스와 합류하기 위해 진군하던 글로스터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를 급습해 에어 성으로 몰아냈다. 이후 잉글랜드의 압제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인들이 로버트 1세가 완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그의 군영에 잇달아 합류하면서, 로버트 1세의 병력은 수천 명으로 삽시간에 불어났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가 아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동안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게 역효과를 야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1307년 3월 13일, 그는 발랑스 및 다른 관료들에게 서신을 보내 브루스의 협박을 받고 지원한 자들을 사면하라고 명령했다. 1307년 7월 초, 에드워드 1세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기 위해 군대를 칼라일로 소집했다. 그러나 7월 7일,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했고, 장남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2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의 충성 서약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원정을 이어가지 않고 군대를 해산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로버트 1세는 그 동안 군대를 훈련시켜서 전투력을 증강한 뒤 스코틀랜드 재정복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