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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머 드 발랑스

파일:에이머 드 발랑스.jpg
성명 에이머 드 발랑스
Aymer de Valence
생몰년도 1270년에서 1275년 사이 ~ 1324년 6월 23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아버지 기욤 드 발랑스
어머니 조안 드 먼첸시
형제 장, 기욤, 마르그리트, 아녜스, 이자벨, 잔
배우자 베아트리스 드 클레르몽, 마리 드 샤티용
직위 제2대 펨브로크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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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귀족 중 한 명으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에드워드 2세와 대귀족 사이의 갈등이 벌어질 때 처음에는 귀족들 편에 섰지만 나중에는 에드워드 2세 편을 들었다.

2. 생애

초대 펨브로크 백작 기욤 드 발랑스와 조안 드 먼첸시[1]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헀다. 형제로 장[2], 기욤[3], 마르그리트[4], 아녜스[5], 이자벨[6], 잔[7]이 있었다.

아버지 쪽에서 보면, 그는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앙굴렘의 이자벨의 손자였으며, 앙굴렘의 이자벨은 존 왕의 왕비이기도 했기에, 에이머는 헨리 3세, 콘월의 리처드, 스코틀랜드 왕비 조안,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이사벨라, 펨브로크와 레스터 백작부인 엘리노어의 조카였다. 어머니 쪽으로 보면, 그는 스완스컴 남작 워렌 2세 드 먼첸시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후손이었다.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학계에서는 1270년과 1275년 사이에 출생했을 거라고 보며, 그의 아버지가 1271년부터 1273년까지 에드워드 1세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기에 그보다 전이나 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에이머의 큰형 장은 1277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고, 또 다른 형인 윌리엄은 1282년 12월 6일 란데일로에서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추종하는 웨일스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따라서 그가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 상속자가 되었다. 1296년 1월, 아버지 기욤은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사이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에이머도 아버지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협상이 실패한 뒤 귀국하던 기욤은 1296년 5월에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펨브로크 백작위는 어머니 조안 드 먼첸시가 맡았고, 1307년 9월 20일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야 정식으로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다. 그는 펨브로크셔 외에도 글로스터셔에서 동잉글리아까지 잉글랜드 각지에 흩어진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아일랜드 남동부(웩스퍼드)와 프랑스의 푸아투와 칼레 지역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297년 에드워드 1세의 플란데런 백국 원정에 참여해서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에드워드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총독에 선임되었다. 1298년 파이프의 뉴버그 동쪽에 있는 오리나무 숲인 블랙어른사이드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습격당해 패배했다. 하지만 왕의 신임을 잃지는 않았고, 스코틀랜드 남부 국경 근처의 땅을 부여받았고, 1301년 셀커크에 성을 지었다. 한편, 프랑스 왕실과 인연이 있던 그는 프랑스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하던 에드워드 1세에게 귀중한 외교적 자산으로 취급되었다. 1302년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었고, 1303년 필리프 4세와 평화 협약을 이루는 데 공헌했다.

1306년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국왕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에드워드 1세는 그 해 4월 5일에 에이머를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때 에이머는 '드래곤 깃발'을 들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걸 용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곧 반란 주모자 로버트 브루스, 추방령을 어기고 브루스에게 가담한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반란에 또다시 가담한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을 생포해 런던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1306년 6월, 에이머는 퍼시 남작 헨리 퍼시,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클리퍼드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 주에서 모은 3,000명을 이끌고 퍼스로 이동해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6월 18일, 로버트 1세는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병사 4,500명을 이끌고 퍼스 서쪽의 구릉 지대를 넘어 퍼스로 진군했다. 연대기 작가 기스버러의 월터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기사들에게 문장 위에 흰 옷을 입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기사들의 문장과 반군의 정체성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로버트 1세는 적진에 사절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에이머는 전투를 벌이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날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로버트 1세는 에이머의 말을 믿고 알몬드 강 남쪽의 메스번 평원에 숙영지를 세우고 야영했다. 이때 일부 스코틀랜드인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다른 이들은 더 나은 거주지를 찾아 흩어졌다. 에이머는 적이 무질서해졌다는 걸 눈치채고, 6월 19일 새벽에 스코틀랜드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저항헀지만, 금세 압도당해 사방으로 패주했다. 로버트 1세는 수백 명의 군인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의 부하 다수는 죽거나 생포되었다. 이리하여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에이머는 반란을 지지했던 램버튼 주교와 위셧 주교를 체포했다. 두 주교는 스콘의 수도원장과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혔다. 또한 로버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그와 딸 마조리를 생포해 잉글랜드로 압송했으며, 킬드럼미 성에서 로버트 1세의 동생 닐 브루스를 체포한 뒤 베릭 성으로 보내 교수형에 처했다.

1307년 봄, 로버트 1세가 헤브리디스 제도와 아일랜드에서 모집한 병사 300명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남서쪽으로 항해해 갤러웨이의 캐릭 일대에 상륙해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에이머는 그를 끝장내기 위해 친히 장병 1,500명을 거느리고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를 예상하고 글렌 호수변 협곡인 글렌 트룰에 본부를 세우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글렌 트룰은 천혜의 요새였다. 호수가 협곡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사람들은 가파른 경사로 둘러싸인 좁은 길로만 통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중간쯤에서 언덕이 험준한 교각에 가로막혀서 통행이 무척 힘들었다. 여기에 로버트 1세는 일부 부하를 경사로 보내 레버와 쇠지렛대를 사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화강암 바위들을 분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07년 4월, 에이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글렌 트룰 협곡에 접근했다. 그들은 길이 무척 좁아서 일렬로 전진해야 했다. 로버트 1세는 호수 건너편에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신호를 보냈고, 그의 부하들이 경사면을 따라 바위를 밀어냈다. 잉글랜드군이 이 때문에 혼란에 휩싸이자, 로버트 1세의 부하들이 경사면을 따라 돌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길이 너무 좁은 데다 갑작스러운 바위 세례에 혼란에 빠진 터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협곡에 들어갔던 잉글랜드 병사 대부분이 살해되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글렌 트룰 전투 이후, 로버트 1세는 군대를 북쪽으로 진군해 에어 성을 우회하면서 병력을 600명으로 증강했다. 에이머는 3,000 가량의 병력을 재차 규합한 뒤 로버트 1세를 추격했고, 5월 10일 에어셔의 라우던 힐에서 적군을 따라잡았다. 로버트 1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라우던 힐 정상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칼마녹 시 동쪽에 있는 라우던 힐 서쪽에는 어바인 강이 흐르는 습지대가 형성되었고, 동쪽에도 습지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양쪽 습지대 사이의 길 하나가 고원을 가로질렀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장에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세 개의 참호를 파고 담벽을 쌓아 영국 기병대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더욱 제한했다. 그 결과 전장에는 약 90m 너비의 틈새가 남았고, 잉글랜드 기병들은 오직 이 틈새를 통해서만 스코틀랜드 창병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기병대가 제대로 된 돌파력을 발휘하기에는 전장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에이머는 돌격 한 번이면 오합지졸인 스코틀랜드 민병대가 와해할 거라고 오판하고, 기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90m 너비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려다가 돌격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창병들은 그런 그들을 손쉽게 격퇴했다. 잉글랜드 기병들이 불리한 전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함성을 힘껏 내지르며 내리막길을 따라 돌진했다. 잉글랜드 후위대는 아군이 무너지고 적이 돌진하는 걸 보고 전읠을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미처 또망치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살육당했다. 에이머는 군대를 수습할 생각 조차 못하고 보스웰 성으로 도주했다.(라우던 힐 전투)

1307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후 집권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에게 연이어 패전한 책임을 물어 에이머를 스코틀랜드 총독에서 해임하고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를 새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 후 영지로 돌아간 에이머는 왕의 총애를 받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무척 싫어했고, 개버스턴의 키가 크고 얼굴이 창백하다는 이유로 "유대인 요셉"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1307년 12월 2일, 왕은 월링포드 성 에서 그의 총애를 받는 사람을 기리는 토너먼트를 개최했다. 이때 개버스턴은 부정직한 수단으로 우승을 차지해 여러 백작을 모욕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지휘하에 개버스턴에 대적했다.

1309년, 에이머는 스탬퍼드에서 열린 의회에 다른 영주들과 함께 참석하여 클레멘스 5세에게 서신을 보내 교황의 왕좌를 찬탈한 것을 비난했다. 그 다음해, 그는 갑옷을 입고 의회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영주로 지명되었지만, 이를 묵살하고 여러 귀족과 함께 억지로 들어갔고, 왕에게 개혁 위원회의 임명을 요구했다. 그는 2명의 백작을 주교로 선출하고(에이머는 그 중 한 명이 될 예정이었다), 두 백작은 19명의 성직자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나기 위해 개버스턴과 함께 군대를 모집했을 때,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만 따랐고, 에이머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1311년, 에이머가 이끄는 개혁 위원회는 41개 조항으로 구성된 결의안을 발표했다. 왕의 권한을 심각하게 제안하는 법령이 많은 이 결의안의 핵심은 제20항으로, 왕에게 나쁜 조언을 서슴지 않은 피어스 개버스턴을 잉글랜드에서 영원히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2세는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랐다. 그 해 말에 개버스턴이 에드워드 2세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오려 하자, 에이머는 1312년 5월 19일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함께 스카버러 성에서 개버스턴을 포위했다. 이때 에이머는 자기가 책임지고 목숨을 보전해줄 테니 항복하라고 권했고, 개버스턴은 이에 따랐다.

에이머는 개버스턴을 옥스퍼드셔로 이송하여 데딩턴 교구에 남겨뒀다. 그런데 에이머가 없는 사이에 토머스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모의해 개버스턴을 워릭으로 끌고 간뒤 1312년 6월 19일에 처형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이머는 자기가 책임지고 개버스턴의 생명을 보장해주기로 했는데 토머스 등이 제멋대로 어겨버렸다며 이를 모욕으로 간주했고, 개버스턴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토머스를 적대한 에드워드 2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 후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이 벌어졌을 때, 그는 왕의 입장을 대변하면서도 귀족과 왕 간의 화해를 모색했다. 1312년 9월 20일, 에이머는 길드홀에서 런던 시민 회의에 참석해 런던 시가 왕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그 후 폭동이 진압된 뒤 에드워드 2세의 인정을 받고 런던에 있는 뉴 탬플과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받았다. 1312년 11월 16일, 에이머는 에드워드 2세의 갓난아들인 에드워드 왕자대부가 되었다. 그 후 왕립 위원 중 한 명으로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지지자들과 왕실 간의 분쟁을 오래도록 중재한 끝에, 1314년경에 겨우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로버트 1세가 급격히 세력을 키우면서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에드워드 2세는 에이머를 국왕의 부관으로 선임한 뒤 북부 변경에서 스코틀랜드군의 침략을 막도록 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지만, 배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의 대군이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군에게 완패하는 걸 지켜본 뒤 에드워드 2세가 전장에서 탈출하도록 도왔다. 1315년 베틀스미어 남작 바르톨로뮤 베틀스미어와 함께 스코틀랜드 국경 방비를 맡았으며, 브리스톨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1316년 교황청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1317년 귀국하던 중 잉글랜드 왕이 자신의 봉사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부르고뉴의 장드 라물리에게 체포되었다. 라물리는 에이머를 독일로 데려가서 몸값이 지불될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지만, 10,400 파운드에 달하는 몸값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된 심각한 재정 문제를 야기했다.

배넉번 전투 이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사실상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에드워드 2세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통치자임이 드러났고, 곧 인기를 급격히 상실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 지지 세력과 토머스의 추종자들 간의 내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에이머는 어떻게든 이를 수습하려 애썼다. 1317년 9월 에드워드 2세에게 토머스를 도발하지 말라고 설득했고, 11월 24일 데이모리 남작 로저 데이모리, 베틀스미어 남작 바르톨로뮤 베틀스미어와 함께 제3 세력을 셩성해 에드워드 2세와 토머스 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그 결과 1318년 8월 9일, 에드워드 2세와 토머스는 리크 조약을 체결해 화해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 조약을 통해 왕권을 되찾았고, 토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면받았다. 새로운 왕립 위원회가 창설되었는데, 에이머는 이 위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319년 3월 24일, 에이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런던 주민들 사이의 분쟁을 수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에 지난해 스코틀랜드군에게 공략당한 베릭 성을 탈환하려는 에드워드 2세의 원정에 참여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을 이끄는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고, 1319년 크리스마스에 스코틀랜드와 2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은 휴 르 디스펜서 부자의 권세가 갈수록 드높아지면서 또다시 분란이 생기자, 에이머는 디스펜서 가문을 몰아내려 하는 대귀족들과 그들을 두둔하는 왕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자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에이머가 비밀리에 자기들과 결탁해 디스펜서 가문을 축출하기로 합의했는데 이제와서 말을 바꾼다고 비난하며, 영주들에게 그와 어떤 거래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결국 에이머의 중재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1321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주도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발했다. 에이머는 에드워드 2세 편을 들었고, 1322년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랭커스터 백작을 물리치고 사로잡는 데 한몫 했으며, 랭커스터 백작의 처형을 요구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래하여 토머스가 처형된 뒤, 에이머는 노샘프턴셔에 있던 토머스의 영지를 받았다. 1321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으며, 1323년 5월 30일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정을 재차 맺는 데 기여했다. 1324년 6월 23일 프랑스에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피카르디에 머물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잉글랜드로 옮겨진 뒤 1324년 8월 1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초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그는 생전에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펨브로크 백작위는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1339년 에이머의 둘째 누나 이자벨의 손자인 로렌스 헤이스팅스에드워드 3세에 의해 펨브로크 백작에 선임되었다.

중세 시대의 잉글랜드 역사를 연구한 토머스 프레데릭 타우트(Thomas Frederick Tout, 1855 ~ 1929)는 에이머를 "편협하고 무능한 지도자가 판치는 시대에서 유일한 예외로,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의 극단 사이의 온건한 입장을 대표하면서 국가를 극심한 혼란에서 구제하고자 노력했다"고 호평했다. 반면, 존 롤랜드 세이무어 필립스(John Roland Seymour Phillips, 1940 ~)는 에이머가 오로지 에드워드 2세의 편에 섰으며, 중도파로서 활동한 게 아니라 단순히 왕권 회복만 꾀했다고 주장했다.

3. 가족

  • 베아트리스 드 클레르몽(? ~ 1320): 네슬 영주이자 프랑스 무관장 라울 드 클레르몽의 딸.
  • 마리 드 샤티용(1303 ~ 1377): 생폴 백작 기 4세 드 샤티용의 딸.


[1] ? ~ 1307, 스완스컴 남작 워렌 2세 드 먼첸시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손녀인 조안 마셜의 딸.[2] ? ~ 1277,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3] ? ~ 1282, 몽티냐크와 벨락 영주. 1282년 12월 6일 란데일로에서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추종하는 웨일스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피살되었다.[4] 유년기에 사망[5] ? ~ 1310, 담팔리즈의 여성 영주. 제3대 오펄리 남작 모리스 피츠제럴드와 초혼, 보웰 남작 휴 발리올과 재혼, 보몽 영주 장 데봉과 삼혼.[6] 헤이스팅스 남작, 에버게브니 영주 존 헤이스팅스의 부인.[7] 바데녹과 로카버의 영주 존 3세 코민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