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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그 전투 영어: Battle of Dalrigh | ||
시기 | 1306년 7월 또는 8월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퍼스셔의 틴드럼 시 인근 달리그 | |
원인 | 로버트 1세의 존 3세 코민 살해에 대한 맥두걸 가문의 분노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500명 | 1,000명 |
피해 | 궤멸. | 미미함. |
결과 | 맥두걸 가문의 승리. | |
영향 | 로버트 1세의 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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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06년 7월 또는 8월, 스코틀랜드 왕국의 퍼스셔 틴드럼 시 인근 달리그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맥두걸 가문의 지도자 아가일의 존에게 참패한 전투.2. 상세
맥두걸 가문은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 소머래드(Somerled)의 후손으로, 아가일 일대를 지배했다. 이 가문의 수장인 아가일의 알렉산더르는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의 누이와 결혼해 아가일의 존을 낳았다. 즉, 아가일의 존은 존 3세 코민의 외조카였다. 1306년 2월 10일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서 존 3세 코민이 로버트 브루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맥두걸 가문은 자연히 로버트 브루스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1306년 6월 19일, 로버트 1세는 퍼스 서쪽의 메스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를 대신해 토벌 임무를 맡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완패했다. 그 후 장병 500명을 수습한 뒤 서쪽으로 퇴각해 아가일 산맥을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스트라스필란에 이르렀을 때, 아가일의 존이 이끄는 맥두걸 가문 사병 1,000명이 스코틀랜드군이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틴드럼 시에 주둔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잉글랜드군이 뒤에서 바짝 쫓고 있어서 물러날 수도 없게 된 로버트 1세는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존과 전투를 벌일 때까지 대담하게 기다렸으며, 적군이 수적 우위를 앞세우며 몰려오자 다른 장병들이 무사히 후퇴할 때까지 분전했다고 밝혔다. 로버트 1세가 그때까지 가지고 다녔던 모든 말이 맥두걸 가문 도끼병들에게 사살되었고,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길버트 드 라 헤이가 부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어느 순간 언덕과 호숫가 사이에서 홀로 남아서 적에게 에워싸였다. 공격자들은 그를 잡아 끌어내리려 헀지만, 그의 망토와 못이 박힌 브로치만 벗겨졌고, 로버트 1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 브로치는 일명 '론의 브로치'로 일컬어졌으며, 맥두걸 가문의 수중에 넘어가서 두놀라 성에 보관되었다가 영국 내전 때 케레라 섬의 가일런 성으로 옮겨졌다가 1647년 뉴어크 영주 데이비드 레슬리가 가일런 성을 함락한 뒤 캠벨 가문의 수중에 들어갔다. 1824년 로크넬의 던컨 캠벨 장군이 맥두걸 가문에 브로치를 돌려줬다.
달리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로버트 1세는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병사들을 해산한 뒤,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그, 동생 닐 브루스,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 알렉산더 린제이,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산을 넘어 애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고,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그 후 아솔 백작은 브루스 가문의 여성들과 함께 도주하다가 테인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동생 닐 브루스도 체포되어 베릭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처남 크리스토퍼 세튼은 로크둔 성에서 체포되어 덤프리스에서 처형되었고, 크리스토퍼의 동생 존 세튼과 버나드 모왓은 8월 4일 뉴캐슬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왕비 엘리자베스는 홀더니스에서 가택연금 되었고, 자매인 크리스찬 브루스는 뷰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와 함께 록스버러와 버윅의 성벽에 매달린 철창에 갇혔다.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는 당시 12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런던 탑에 갇혔다가 나중에 요크셔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한편, 로버트 1세는 렌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도주했다. 이후 두나버티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몰려오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가 그다음 6개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섬들이나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것이다. 14세기 연대기인 <게스타 아날리아>(Gesta Annalia)에 따르면, 킨타이어 반도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의 여성 영주인 크리스티나가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주한 로버트 1세를 섬에 숨겨줬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 에드워드 1세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 원정 중에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여성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제 로버트 1세는 완전히 끝장난 듯 했지만, 그는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기로 마음먹고 1307년 4월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비밀리에 상륙한 뒤 글렌 트룰 전투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가 파견한 추격대를 격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