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5 20:04:48

로저 비고드(제5대 노퍽 백작)

성명 로저 비고드
Roger Bigod
생몰년도 1243년/1245년/1246년 ~ 1306년 12월 6일 또는 12월 1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퍽 백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퍽 백작령
아버지 휴 비고드
어머니 조안 드 스토트빌
형제 존, 조안
배우자 알리나 바셋, 엘리스 제네가우
직위 제5대 노퍽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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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출생년도는 기록에 따라 1243년, 1245년, 1246년으로 엇갈린다. 아버지 휴 비고드는 1258년부터 1260년까지 잉글랜드 정의관을 역임했으며, 어머니 조안 드 스토트빌은 기사 니콜라스 드 스토트빌의 딸이다. 형제로 사제가 된 존, 기사 필립 드 카임의 아내가 된 조안이 있었다. 126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1270년 삼촌이자 제4대 노퍽 백작인 로저 비고드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한 뒤 그가 누리던 노퍽 백작위와 동앵글리아와 웨일스 변경지, 아일랜드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잉글랜드 왕실 마셜 직위도 계승했다.

로저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모든 원정에 참여했다. 1277년과 1282~1283년에 시행된 원정에서는 에드워드 1세의 지휘를 받는 주력군의 일원이었으며, 원정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287년에 감행된 세 번째 원정에서는 에드워드 1세의 사촌이자 대리 통치자인 콘월의 에드먼드에게 복종해야 했고, 1294~1295년 원정에서는 로저 드 멜스 원수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중 한 사람인데, 국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휘를 받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일시적으로만 그렇게 되었을 뿐 다음부터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

1291~1292년 스코틀랜드 왕관을 둘러싸고 14명이 경합했을 때, 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은 에드워드 1세가 벌인 법정 심리에 참여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을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단행했을 때 주력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1290년대에 이탈리아 은행가들과 왕실에 많은 돈을 빚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재산 일부를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겨야 했다. 1293년 로저가 국왕에게 지고 있는 빚은 2,232파운드에 달했고, 백작은 의회에 빚을 면제해 달라고 호소해야 했다. 그러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로저는 매년 재무부에 100파운드를 내야 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영지 관리에 대한 간섭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그는 깊은 불만을 품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스코뉴 침공에 대응하고자 솔즈베리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들을 그곳에 파견하려 했다. 그러자 로저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자기들이 왕 아래에서만 군 복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으며,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대귀족을 가스코뉴에서 복무하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가 윽박질렀다.
"백작! 신의 이름으로, 당신은 가야 하오. 안 그러면 교수형에 처하겠소!"

그러자 로저가 답했다.
"그렇지만 폐하. 소신은 가지도 않을 것이며, 교수형도 당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로저는 제3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등과 함께 웨일스의 영지로 은퇴한 뒤 의회를 따로 열면서, 다른 여러 귀족과 동맹을 협상했다. 그들이 왕의 소집령을 무시하자, 에드워드 1세는 그들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로저 등은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군사적 목적을 위한 특별세를 납부하지 않겟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들은 가신들의 승인 없이 군주가 세금을 인상하고, 높은 세금과 위임장을 도입하고, 연 소득이 20파운드 미만인 지주들을 군대에 징집하는 것에 항의했다. 이제 에드워드 1세와 로저를 비롯한 대귀족 간의 내전이 임박한 듯 했다.

그러던 중 윌리엄 월레스 등이 스코틀랜드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이 급격하게 흔들리자, 에드워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하기로 했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와 삼림헌장[1]을 확인하는 'Confirmatio cartarum'(헌장 확인령)에 서명했고, 영주들은 에드워드 1세의 원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1298년 7월 22일, 로저는 폴커크 전투에 참전해 윌리엄 월레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왕이 스코틀랜드 영지를 자신의 가신들 일부에게 분배하자, 로저는 자기가 속았다고 생각했다. 1299년, 그는 에드워드 1세에게 헌장을 다시 확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애매한 답변만 받았다.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왕실 마셜의 권한을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 존 시그레이브에게 양도했다. 1302년, 로저는 마셜의 직위와 그의 영지를 왕실에 넘겼다가 죽을 때까지 소유하는 대가로 다시 돌려받았다. 또한 이 양보에 대한 대가로 1년에 1,000파운드씩 받기로 했다. 1305년, 그는 왕과 또 다른 거래를 했는데, 그의 모든 빚은 면제되었지만 가상의 상속인은 자신의 권리를 인수할 때 왕에게 2만 파운드를 지불해야 했다.

1306년 12월 6일 또는 12월 11일, 로저가 사망했다. 로저는 생전에 와이컴의 필립 바셋의 딸 엘린 바셋과 초혼했고, 에노 백작 장 2세의 딸 엘리스 제네가우와 재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의 광대한 영지와 왕실 마셜 직위는 왕실에 반환되었다. 훗날 동앵글리아에 있던 그의 영지와 노퍽 백작 작위, 왕실 마셜 직위는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인 초대 노퍽 백작 토머스 브라더튼에게 수여되었다.


[1] 1225년 헨리 3세가 반포한 헌장. 마그나 카르타를 개정한 것으로, 왕실 산림에 ㄷ관한 법률 조항을 개정하고, 자유민의 권리를 확대하며, 왕실 산림 특권 위반에 대한 처벌 시스템을 완화했다. 1225년 이래 대헌장의 일부로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