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브라더턴의 토머스 Thomas of Brotherton | |
생몰년도 | 1300년 6월 1일 ~ 1338년 8월 4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브라더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프램링엄 성 | |
아버지 | 에드워드 1세 | |
어머니 |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 |
형제 | 에드먼드 | |
배우자 | 앨리스 드 헤일스, 메리 드 브루스 | |
자녀 | 마거릿, 베아트리스, 앨리스 | |
직위 | 초대 노퍽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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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고, 프랑스의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가문을 무너뜨릴 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할리돈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대승에 기여했다.2. 생애
1300년 6월 1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브라더턴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당시 마르그리트 왕비는 카우드 성으로 여행을 가던 중 브라더턴에서 그를 갑작스럽게 낳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난산에 시달리다가 토머스 베켓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서야 겨우 출산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토머스 베켓의 이름과 출생지를 따서 명명되었다. 친형제로 우드스톡의 에드먼드가 있었으며, 이복형제로 에드워드 1세와 전 왕비 카스티야의 레오노르[1] 사이의 자녀들인 헨리, 알리에노르, 조앤, 알폰소, 마르가레타,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2세가 있었다.당초 에드워드 1세와 마르그리트가 결혼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연 소득 1만 마크의 재산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1306년 8월, 에드워드 1세는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그의 재산 대부분을 토머스에게 주기로 합의했다. 로저는 1306년 12월에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정작 이 영토는 토머스의 이복형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넘어갔다. 1310년, 에드워드 2세는 두 이복형제인 토머스와 에드먼드에게 로저 비고드의 옛 영지의 관리를 맡겼다. 에드워드 1세는 어린 아들들 중 한 명에게 콘월 백작 작위를 내리려고 계획했다고 전해지지만, 에드워드 2세는 이 작위를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수여했다.
피어스 개버스턴이 귀족들에게 살해된 지 수 개월 후인 1312년 12월,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를 노퍽 백작에 선임하고 그에게 로저 비고드의 옛 영지를 비로소 수여했다. 또한 1316년에는 로저 비고드가 죽을 때까지 맡았던 잉글랜드 왕실 마셜 직위를 맡겼다. 1313년 1월 12살의 나이로 노퍽 백작으로서 의회에 처음 출석했으며, 1318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동생 에드먼드와 함께 어머니의 유언 집행자를 맡았다. 1318년 8월 에드워드 2세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화해시키기 위한 리크 조약에 증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에드워드 2세는 두 이복형제 토머스와 에드먼드에게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발리올을 집에서 교육하도록 위임했다.
1319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떠날 때 섭정을 맡았으며, 1319년 3월 24일 섭정의 자격으로 런던 시장인 하모 치그웰, 웬체스터 주교 존 샌데일,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를 소환해 서로 간의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의회에서 분쟁에 대해 결정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에 세 사람은 스스로 합의하기로 했다. 1319년 7월 15일 뉴캐슬에 스코틀랜드를 향한 새로운 원정을 위해 군대가 집결했을 때, 토머스는 뉴캐슬로 가서 다른 수많은 시종들과 함께 에드워드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20년 6월 19일부터 7월 22일까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왕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국왕의 소유지에 대한 충성 서약을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에게 표했다.
1321년 3월,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전횡에 분노한 웨일스 변경 영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3월 16일에 왕실의 소유지인 빌스 성에 입성했다가, 헤리퍼드 백작이 빌스 성을 공격하자 도주했다. 그 해 4월, 토머스는 1317년에 맺은 합의에 반하여 왕의 허가 없이 왕의 일행을 떠난 혐의로 재판에 소환된 휴 오들리의 심판을 맡았다. 그 해 5월에 디스펜서 전쟁이 발발했고, 에드워드 2세는 반군의 압력에 못 이겨 1321년 8월 의회에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추방하기로 했다. 하지만 1321년 가을 반군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고, 디스펜서 부자를 불러들였다.
1321년 10월, 토머스는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와 함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를 모욕하고 그녀의 수행원들을 살해한 켄트 주의 리즈 성을 포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1322년 초, 토머스는 켄트 백작이 된 동생 에드먼드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웨일스로 진군하는 왕실군에 가담했다. 1322년 1월, 두 형제는 왕의 다른 지지자들과 협력해,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와 다른 반군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여 왕과 협상하도록 했다. 로저 모티머는 곧 항복했지만, 왕은 그를 반역자로 규정했고, 그의 삼촌인 치크 남작 로저 모티머와 함께 런던 탑에 수감했다. 그 후 토머스는 왕이 북부 잉글랜드로 도망치는 랭커스터 백작과 헤리퍼드 백작을 추적하는 걸 지원했다.
1322년 3월 랭커스터 백작과 헤리퍼드 백작이 죽으면서 디스펜서 전쟁이 종결된 후, 토머스와 그의 분견대는 그 해 여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모종의 이유로 왕의 총애를 잃었고, 1323년 8월 연간 임대료 200파운드를 받는 대가로 웨일스 남동부의 체프스토 영지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양도해야 했다. 그 다음해에, 그는 체프스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임대료 징수를 포기하고, 800파운드를 일회성으로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랭커셔의 왕립 판사들이 토머스가 허가 없이 그곳에서 마셜 직을 위임했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그에게서 왕실 마셜직을 일시적으로 박탈했다. 토머스는 100파운드의 벌금을 내고 직위를 되찾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그가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더 큰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가 런던 탑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로저 모티머와 결탁하여 반기를 들 준비에 착수하자,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를 포섭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1326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노리치 주교 윌리엄 에어민으로부터 몰수한 수익 중 200파운드를 토머스에게 줬고, 5월에는 왕령 대장으로 선임해 잉글랜드 동부의 여러 주에서 병력을 징집하는 일을 맡겼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2세로부터 디스펜서 전쟁에서 몰수된 반군의 영지 관리, 보호자 관리 및 여러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휴 르 디스펜서 부자에게 휘둘리는 에드워드 2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고, 모티머와 이자벨에게 협력했다.
1326년 9월 24일, 이자벨과 모티머는 노퍽 백작령에 속한 오웰 강에 상륙했다. 토머스는 즉시 두 사람을 지지했으며, 그의 가신들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디스펜서의 동맹자인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의 영지를 약탈했다. 그 후 웨일스로 달아나는 에드워드 2세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추적하는 모티머의 군대에 가담했고, 에드워드 2세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가 체포되면서 반란이 성공한 뒤 10월 26일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의 섭정단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326년 10월 27일, 동생 에드먼드와 함게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11월에는 헤리퍼드에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토머스는 동생 에드먼드와 함께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된 후 소집된 첫 의회의 귀족 명단에 맨 위를 차지했으며, 두 사람 모두 미성년인 국왕을 대신해 통치하는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실제 권력은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에게 있었지만, 토머스는 그들의 통치를 지지했다. 1327년 웨어데일 전역을 이끈 군 사령관 중 한명이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여러 하위 관직을 역임했다. 로저 모티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체프스토를 돌려줬으며, 디스펜서 가문의 옛 영지도 몇 개 줬다. 토머스는 이 덕분에 연간 1,000 마크의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1328년에는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로저 모티머의 딸인 베아트리체와 결혼했고, 이를 기리기 위한 토너먼트에는 에드워드 3세와 이자벨 왕비도 참석했다.
1328년 10월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부하들이 로버트 홀랜드를 디스펜서 전쟁 때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배신한 것에 대해 복수하고자 살해했다. 로버트 홀랜드는 토머스의 가신이었기에, 이 일로 랭커스터 가문과 그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그 해 12월 초 런던에서 헨리와 화해했다. 이후 토머스는 형제 에드먼드와 함께 영주와 주교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들은 왕이 마그나 카르타와 대관식 선서를 위반했다는 구실을 들며, 최고 귀족들이 세인트 폴 대성당에 모여서 상황을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귀족이 이에 응했고, 12월 1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 모인 영주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그러나 1329년 1월 초, 랭커스터 백작이 이끄는 반군과 왕실군이 베드퍼드에서 본격적으로 맞붙기 직전에, 그는 대세가 모티머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동생 에드먼드와 함께 입장을 바꿔서 모티머를 지지했다. 결국 음모는 실패했고, 랭커스터 백작은 감옥에 갇히는 걸 모면하는 대신 영지 절반을 헌납하고 은거했다. 토머스는 반란을 지지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벌금을 내야 했고, 이 일로 로저 모티머의 신뢰를 잃었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1330년 2월 17일, 에드먼드와 함께 에드워드 3세의 신부인 에노의 필리파를 런던에서 웨스트민스터로 호위하여 대관식을 치르도록 했다.
1330년 3월 동생 에드먼드가 로저 모티머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처형될 때 잠자코 있었고, 1330년 여름에는 정부 업무를 위해 가스코뉴로 가서 업무를 조용히 수행했다. 1330년 10월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무너진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3세를 지지했고, 133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협상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에 참여했다. 1331년 6월 국왕과 함께 스테프니에서 열린 토너먼트에 참여했고, 여러 사법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했다.
1331년 왕으로부터 칼로우 영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정시켜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아일랜드 영지로 가고 싶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1333년 초여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이끌어 잉글랜드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그 후 1337년 퍼스의 수비를 맡는 등 여러 중책을 맡았다. 이렇듯 에드워드 3세의 신임을 받았지만, 그의 수행원들이 법을 위반하고 신민들을 약탈하는 걸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1337년 왕의 질책을받고 잉글랜드 왕실 마셜 직위를 박탈당했다. 1338년 8월 4일 서퍽주 프랭링엄 성에서 사망했고, 버리의 세인트 에드먼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에드워드는 1334년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두 딸 마거릿과 앨리스에게 분배되었고, 마거릿이 노퍽 여공작이 되었다.
3. 가족
- 앨리스 드 헤일스(? ~ 1330년 이전): 노퍽의 검시관 로저 드 헤일스의 딸.
[1]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3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