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호담 John Hotham | |
생몰년도 | 미상 ~ 1337년 1월 14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호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헌팅던셔 소머샴 | |
아버지 | 앨런 호담 | |
어머니 | 마틸다 | |
직위 | 엘리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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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엘리 주교, 잉글랜드 왕실 대집사.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2. 생애
요크셔 호담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앨런, 어머니는 마틸다라는 이름만 전해진다. 삼촌 윌리엄 호담은 1297년 더블린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삼촌의 영향으로 아일랜드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291년 아일랜드 재무부 세관원으로 활동했으며, 1293년부터1296년까지 아일랜드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초대 펨브로크 백작 기욤 드 발랑스 밑에서 재무 업무를 맡았다. 1305년 아일랜드 재무부의 남작 계급으로 승진했고, 그동안 아일랜드 재정을 잘 관리한 공을 에드워드 1세에게 인정받아 연봉 60 마크 이상의 수입을 받는 특전을 누렸다.1308년 7월 잉글랜드로 이동했지만, 1309년 1월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당시 아일랜드 보안관을 맡은 피어스 개버스턴을 보좌했다. 1309년 5월 아일랜드에서 여러 성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으며, 성직 활동에서 얻는 연간 수입이 39파운드였다. 같은 달에는 훗날 요크 대주교가 될 윌리엄 멜튼의 추천으로 아일랜드 대집사로 선임되어 1310년 1월까지 이 지책을 맡았다. 1309년 11월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1309년 12월 트렌트 강 북쪽의 영지 관리자로 선임되어 1311년 2월까지 맡았다.
1310년 12월, 에드워드 2세는 호담이 총 300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수입을 받는 걸 허락했다. 1311년 1월 30일, 그는 요크 대성당에서 연봉 46파운드가 넘는 수당을 받았다. 이후 왕의 조언을 받아 개버스턴의 변호를 맡았다. 이 때문에 대귀족들은 그가 피어스 개머스턴을 옹호한다고 여기고, 1311년 국왕에게 그를 해임하고 왕실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했다. 1311년12월 2일, 그는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삼림 관리를 헨리 퍼시에게 넘겼다. 1312년, 왕의 호의로 요크셔의 코팅엄 교회 수입과 더블린 근처의 렉슬립 행정권을 받았다. 1312년 12월 13일 잉글래드 대집사로 선임되어 1316년 6월까지 이 직위를 지켰고, 1313년 6월 국왕과 함께 프랑스를 방문했다.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군에게 완패한 뒤, 에드워드 2세는 1314년 8월 호담을 아일랜드로 보내 군자금을 모으도록 했다. 호담은 그 해 11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에드워드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아일랜드를 침공했다. 1315년 9월 1일, 호담은 아일랜드의 상황을 파악해서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다시 파견되었다. 10월 말, 아일랜드 의회가 더블린에 소집되었지만, 토머스 던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함대가 아일랜드 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호담은 11월 5일까지 아일랜드로 가지 못했다. 그 사이, 아일랜드 영주들은 호담을 하릴 없이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각자 흩어졌다.
토머스 던의 함대가 겨울을 피해 이동한 뒤 가까스로 아일랜드에 도착한 호담은 왕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인에 대항하여 방어를 조직하고 무능한 인사를 해임하는 권한을 받았다. 그는 더블린 요새를 확장했으며, 현지 게일인의 충성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전황은 갈수록 좋지 않았고, 호담은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을 불평하는 편지를 잉글랜드 정부에 보냈다. 1316년 6월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엘리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 해 말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으로 떠났다. 사절단의 목표 중 하나는 알렉산더 빅노르를 더블린 대주교로 선임하는 것이었다.
1317년 5월 11일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호담은 5월 27일에 에드워드 2세의 왕실 대집사로 선임되었다. 그는 왕의 관리들의 더 나은 교육을위해 케임브리지에 킹스 홀을 설립하도록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케임브리지가 선택된 주요 이유는 엘리 교구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318년 6월 대집사 직책에서 물러난 뒤 왕실 법무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에드워드 2세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결과 1318년 8월 양자간의 화해를 도모한 리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이 조약에 따라 구성된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해 10월, 요크 의회는 리크 조약을 확정했고, 호담이 왕실 대집사로 복귀하는 것도 인정했다.
1319년 여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요크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요크 대주교 윌리엄 멜튼,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의 협조하에 요크 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다. 이때 모인 병력은 10,000 ~ 2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그 대부분은 요크와 주변 지역의 징집병이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함께 했다.
1319년 9월 12일, 존 호담과 윌리엄 멜튼은 스코틀랜드군을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기 위해 20km 떨어진 마이톤온스웨일로 진격했다. 척후병으로부터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제임스 더글러스는 평원에 잔뜩 깔린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건초 더미를 태운 불에서 나오는 연기는 스웨일 강의 다리를 건넌 잉글랜드군의 시야를 가렸다.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그 사이에 우회하여 다리를 건너 퇴각하는 것을 막았고, 스코틀랜드 주력군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잉글랜드 민병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잉글랜드 민병대는 삽시간에 와해했고, 적에게 사살되거나 스웨일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자가 태반이었다.(마이톤 전투)
스코틀랜드의 시인 존 바버는 <운율 연대기>에서 잉글랜드군의 손실을 사제 300명을 포함해 1,000명이 죽었다고 밝혔고, 라네코스트 연대기는 잉글랜드인드인 4,000명이 스코틀랜드인에게 살해되었고, 1,000명은 스웨일 강에서 익사했다고 밝혔다.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은 전사했고, 여러 잉글랜드 장교들이 생포되었다.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간신히 요크로 탈출했고, 예상했던 스코틀랜드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성문을 닫았다. 이때 전투에 참여했던 수많은 잉글랜드 성직자가 살해되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마이톤 전투에서 전사한 성직자들을 "마이톤의 모임(Chapter of Myton)"이라고 일컬었다. 그 후 제임스 더글러스는 요크를 며칠간 포위했다가 다른 지역으로 진군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320년 1월 마이톤 전투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집사 직책에서 물러났고, 1320년 12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국이 2년간 휴전 협정을 맺도록 한 사절단의 일원을 막았다. 1321년 여름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타도를 외치며 반기를 든 웨일스 영주들과 에드워드 2세 간의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왕은 1321년 가을부터 반군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취했고, 호담은 1321년 12월 1일 캔터베리 대주교 레이놀즈가 소집한 교회 회의에 참석 하여 추방당한 왕의 총애를 받던 디스펜서 가문으 ㅣ복귀를 승인한 겨우 4명의 주교 중 한 명이 되었다. 1323년 1월, 왕은 호담을 가스코뉴로 파견하여 그곳 영주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 1324년 4월에 왕이 그에게 1,000파운드의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지만, 호담은 1325년에도 왕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남았다.
1326년 9월,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가 로저 모티머와 함께 에드워드 2세를 축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그는 곧바로 대세를 읽고 이자벨 왕비와 합류했다. 327년 초 에드워드 2세의 폐위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1309년부터 그를 알고 있던 로저 모티머 의 권유로 1327년 1월 28일에 대집사로 복위했다. 그는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327년 12월 에노의 필리파를 에노 백국에서 잉글랜드 홀본에 있는 그녀의 거주지로 안내했다.
그가 엘리 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엘리 대성당의 교차탑이 무너졌다. 이에 그는 팔각형으로 다시 짓도록 했고, 성가대 3개를 재건했다. 1329년 노팅엄셔에 있는 쿡니 영지를 웰벡 수도원에 기부했다. 호담은 아일랜드에 계속 속박되어 있었고, 1329년에 1년에 100파운드를 지불하고 엘레노어 디스펜서 로부터 킬케니 영주권의 3분의 1을 인수했다. 1335년 신체 마비 증세가 와서 1336년 8월 26일에 조카 앨런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보좌관으로 선임해 자기 대신 업무를 주관하게 해야 했다. 1337년 1월 14일에 헌틴덩셔의 소머샴에서 사망했고, 엘리 대성단의 주요 졔단 동쪽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