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5 17:46:27

앤서니 베크

성명 앤서니 베크
Antony Bek
생몰년도 1245년 ~ 1311년 3월 3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에레스비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엘섬 궁전
아버지 월터 베크
어머니 이브 드 그레이
형제 존, 토머스
직위 더럼 주교, 예루살렘의 명목상 총대주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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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성직자. 더럼 주교, 예루살렘의 명목상 총대주교.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1245년경 링컨셔의 에레스비 영주인 월터 베크와 요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대법원장 월터 드 그레이의 조카 이브 드 그레이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큰형 존 베크는 초대 베크 남작을 역임했고, 둘째 형 토머스 베크는 세인트 데이비즈 주교가 되었다. 그는 제2차 남작 전쟁 중인 1265년 이브샴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왕자의 편에 선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의 집사와 함께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다가 몰수된 반란 귀족의 재산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헀다. 1266년 헨리 3세의 요크셔 지방 관리로 재직했고, 1267년에서 1270년 사이에는 형 토머스와 함께 옥스퍼드에 거주했다.

1270년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1272년 6월 에드워드 왕자가 아사신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었을 때, 에드워드는 수술을 받기 전에 앤서니 베크와 또 다른 성직자 로버트 버넬을 자신과 부왕 헨리 3세가 사망할 경우 나라를 대신 통치할 인사 8명 중 중 한 명으로 선임했다. 이 여덟 명은 에드워드 왕자의 장남 에드워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잉글랜드 정부를 이끌 것이었다. 1274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로 돌아간 후, 앤서니 배크는 일시적으로 왕실 의상실 관리자로 임명되었다가 형 토머스에게 넘겼고, 1275년 1월 런던 탑 순경으로 선임되었다. 런던 탑은 왕의 무기고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이 성공한 후, 그는 1277년 11월 9일에 에드워드 1세와 웨일스 공 허웰린 압 그리퍼드가 체결한 에버콘위 조약을 이끈 잉글랜드 협상가 3인 중 한 명이었다. 이후 국왕의 사절로서 여러 차례 봉사하여 국왕의 해외 군사 원정을 위한 대출을 협상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 1282년, 에드워드 1세는 그를 존 드 베시와 함께 아라곤 왕국으로 보내 페로 3세의 아들인 알리폰소 왕자와 자신의 장려 레오노르 사이의 결혼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1276년, 앤서니는 요크 대성당의 수석 성직자이자 더럼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성직자 직책 겸임을 금지하는 교회의 규정을 위반했기에, 캔터베리 대주교 존 페컴은 1281년에 그에게 교황의 관면 허가 없이는 절대로 주교 후보로 고려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고했다. 이 해에 요크의 위크웨인 대주교는 더럼 교구 를 방문 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은 공석 기간 동안의 방문을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성당 참사회 의 사제들은 그들의 공식 수도원장인 더럼의 로버트 주교가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더럼에서 고소 내용을 심리하기 위해 몇몇 교회 판사를 임명했는데,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잉글랜드의 교회 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여겼다. 에드워드 1세는 앤서니를 중재자로 선임해 더럼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앤서니의 설득으로 협상이 진전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1283년 6월에 더럼의 로버트 주교가 사망하였고, 위크웨인 대주교는 그 뒤 이어진 공석 동안 방문을 시도했다. 에드워드 1세는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대성당 회의에서 즉시 앤서니를 더럼의 새로운 주교로 선출할 것을 권고했다. 성직자들은 이를 따르기로 하고, 1283년 7월 9일 앤서니를 주교로 선출했으며, 워크웨인 대주교는 9월 1일에 이를 승인했다. 1284년 1월 9일, 앤서니는 에드워드 1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요크에서 주교로 선임되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요크의 성 윌리엄의 유해는 요크 대성당의 새로운 장소에 다시 묻혔고, 앤서니는 이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했다. 더럼 교구에 대한 요크 대주교의 관할권을 둘러싼 분쟁은 이후에도 이어지다가, 1286년 요크 대주교는 공석 기간에만 더럼 교구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1290년 9월, 스코틀랜드 여왕이 될 예정이었던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스코틀랜드로 항해하던 중 뱃멀미로 인해 사망했다. 이후 14명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자들이 서로 경쟁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1년 5월에 이 제안을 수락하고, 앤서니를 자신의 대변인으로 활용했다. 앤서니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습을 모두 고려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앤서니의 주관하에 적합한 왕위 계승자 선임 작업이 이뤄진 결과, 선정 위원회는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존 발리올은 1292년 11월 19일 노럼 성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1월 30일 앤서니의 면전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앤서니는 존 발리올이 1295년 7월 스코틀랜드 고문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동맹을 맺어서 잉글랜드에 대항할 때까지 에드워드 1세와 존 발리올 사이의 연락 담당자 역할을 했다.

1294년 2월,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 왕의 소유였던 가스코뉴를 침공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앤서니에게 플란데런 백국, 저지대 국가, 신성 로마 제국 등지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이 작업을 수행하는 데 6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금을 사용했다. 1294년 여름, 앤서니는 더블린 대주교 샌드포드의 존과 협력하여 로마 왕 아돌프와 비밀 협상을 진행했다. 1295년 4월, 앤서니는 잉글랜드 국왕과 함께 앵글시로 가서 잉글랜드의 통치에 반발한 웨일스인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1925년 8월, 앤서니는 의회에서 왕을 대신해 연설해, 평화를 주장하는 교황의 사절에 맞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옹호했다.

이 무렵, 존 발리올이 프랑스와 손잡고 잉글랜드를 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앤서니를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함께 북부 잉글랜드 수호자로 선임했다. 1296년 3월, 더럼 교구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기병 500명과 보병 1,000명을 파견했고, 앤서니 본인도 에드워드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 해 7월, 그는 국왕 대표로서 존 발리올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에 관심을 돌렸다. 1297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원정을 위해 더럼 교구의 징집병들을 소집했는데, 여기에는 깃발 기사단 30명이 포함되었다. 앤서니는 이 원정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의 신원을 보증했다.

1297년 10월 플란데런에서 프랑스와 휴전 협상을 시작했을 때 국왕의 수행원 중 한 명이었으며, 1298년 7월 잉글랜드군이 윌리엄 월레스의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동행했고, 포스 만 남쪽 기슭에 있는 디르턴 성을 점령한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 참전해 전투 전에 미사를 주관했고, 전투 당일 2번쨰 기병 부대를 몸소 이끌어 스코틀랜드군을 동쪽 방면에서 요격해 에드워드 1세의 승리에 일조했다.

한편, 앤서니는 왕실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왕립 행정부의 업무 관행을 더럼 주교구에도 그대로 도입하려 했다. 1293년 봄, 그는 뉴캐슬에서 노섬벌랜드의 왕실 보안관이 타인 강과 티스 강 사이의 지역과 타인 강 북쪽에 위치한 교구의 땅인 노럼셔, 아일랜드셔, 베들링턴셔에 대한 관활권을 갖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요크 대주교 존 르 로메인과 교구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면서, 자신은 다른 영주와는 달리 자신의 영지에 대한 사법관을 직접 임명하고, 직접 형사 고발을 처리하며, 사형과 서면을 선고할 권리가 있고, 동전을 주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군대와 자금을 지원하는 등 자신에게 헌신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1293년 10월 의회는 왕의 요처에 따라 앤서니가 주장한 특권을 확인했다. 그 후 더럼 백작은 '팔라틴 백작'으로 일컬어졌으며,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보호권을 부여하고, 포로를 투옥하고, 좌초된 선박을 처분할 권리를 가졌다.

1299년, 더럼 교구에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앤서니는 당초 요크 대주교의 방문에 반대했던 더럼 대성당 참사회를 지지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대성당 참사회를 방문하려 했다. 대성당 참사회 관계자들은 그의 방문 역시 반대하면서, 에드워드 1세에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개입해달라고 요청했다. 교구의 지주들 역시 앤서니의 엄격한 통치와 군자금 마련을 위한 수탈에 강력히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서니는 1300년 5월 대성당 본당을 공식적으로 방문한다고 선언했다. 더럼 대성당 수도원장 리처드 호튼은 그의 방문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러자 앤서니는 리처드 호튼을 파문에 처했고, 군대를 파견해 대성당 수도원을 봉쇄하게 했다가, 나중엔 강제로 수도원에 진입하여 호튼을 체포한 뒤 수도원장 직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리처드 호튼은 포로 신세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서신을 보내 앤서니의 행위를 규탄했다. 1301년 6월, 에드워드 1세는 앤서니의 행위가 지나치다고 여기고, 타인머스에서 열린 의회에서 자신 앞에서 잘못을 변명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1세가 이런 입장은 취한 건 앤서니가 대성당 수도원과 호튼의 땅을 보호한다는 왕실 서한을 전달하기로 되어 있던 왕실 사자를 가로챘기 때문이다. 앤서니는 의회에 출석한 뒤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인정했지만, 교황청의 소환장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1302년 4월, 더럼 대성당 부수도원장 리처드 켈로는 리처드 호튼을 수도원장으로 복위한다는 교황의 서한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는 주교의 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저지되었다. 1302년 5월, 베크는 대성당 참사회와의 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교황청에 제시하기 위해 로마로 출발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앤서니의 설득에 따라 리처드 호튼을 폐위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1302년 7월 주교가 대성당 수도원을 방문하는 걸 허용했다. 다만 주교는 2, 3명의 공무원만 동반할 수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베네딕토회 수도자여야 하며, 공증인이 따라가야 했다. 교황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앤서니는 1309년 2월에 더럼 대성당 참사회를 전격 방문했다. 리처드 호튼의 후임자인 탠필드 수도원장은 앤서니에게 대성당 교구의 성직자들이 과거에 저지른 위법 행위를 조사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고, 앤서니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앤서니가 로마로 가있는 동안 그를 대신해서 더럼을 관리하는 인사들이 어떠한 세금이나 의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 화가 났다. 1302년 7월 7일, 그는 더럼 교구의 세속적 권한을 몰수하고, 앤서니의 관리들을 직권 남용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후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를 관리자로 임명했다. 라비의 네빌 남작 라눌프 네빌과 호든의 존 마마듀크 등이 이끄는 더럼 주민들은 주교의 권리를 제한하는 헌장을 제기했고, 앤서니는 1303년 5월에 마침내 산림 주권 등 다양한 권리를 제한받는 걸 동의했다. 그 대가로, 에드워드 1세는 주교가 보호권을 부여할 권리를 인정했으며, 교구 군대가 교구 영토 밖에서 싸울 의무도 인정했다. 1303년 7월, 앤서니와 더럼 주민 사이에 화해가 이뤄졌고, 앤서니는 다시 자신의 땅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했다.

그 후 왕립 재무부는 6,000파운드가 넘는 미납 세금, 벌금 및 부채를 앤서니로부터 징수하려고 시도했고, 이를 위해 더럼에 속한 하틀풀에 자체 세관 직원을 고용했다. 1305년 3월, 에드워드 1세는 앤서니에 대한 소송을 심리하기 위해 판사 2명을 임명했다. 1305년 12월, 에드워드 1세는 더럼의 행정권을 로버트 드 클리퍼드에게 넘겼지만, 1307년 9월 에드워드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2세는 앤서니에게 도로 돌려줬다. 그 후 잉글랜드를 상대로 반기를 든 로버트 1세가 새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하틀풀 인근 영지를 탈취하자, 에드워드 2세는 주교가 자신의 영지를 지킬 수 없는 걸 고려하여 하틀플을 로버트 드 클리퍼드에게 영지로 주고, 더럼 주교는 그곳에서 형식적인 주권만 가지도록 했다. 한편, 본래 존 발리올이 소융했던 바너드 성은 앤서니가 한동안 소유하다가 제10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에게 넘어갔다. 그 후 기 드 뷰챔프와 후계자들은 더럼 주교가 바너드 성을 도로 차지하려는 시도를 모조리 물리쳤다. 더럼의 팔라틴 백작령의 다른 소유지는 1536년 헨리 8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특권을 유지했다.

1306년 2월,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앤서니를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선임했다. 무슬림이 십자군 국가를 재정복한 후,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명목상의 직위에 불과했지만, 앤서니는 이제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성직자 중 지도적인 위치에 오른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이 직함 덕분에 교황으로부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성전 기사단에 대한 종교재판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1308년 1월, 그는 불로뉴로 여행갔고,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의 결혼식을 주재했다.

1311년 3월 3일, 앤서니는 1305년 에드워드 1세로부터 선불로 받았던 앨섬 궁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더럼으로 옮겨져 1311년 5월 3일 더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