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연대기 삽화, 피어스 개버스턴을 짓밟은 기 드 뷰챔프 | ||
성명 | 기 드 뷰챔프 Guy de Beauchamp | |
생몰년도 | 1270년경 ~ 1315년 8월 12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워릭 백작령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 |
아버지 | 윌리엄 드 뷰챔프 | |
어머니 | 모드 피츠존 | |
형제 | 로버트, 존, 이사벨라, 모드, 마거릿, 사라 | |
배우자 | 이사벨라 드 클레어, 앨리스 드 토스니 | |
자녀 | 모드, 토머스, 존, 엘리자베스, 이사벨라(사생아), 에마(사생아), 루시(사생아) | |
직위 | 제10대 워릭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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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고,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을 처단했다.2. 생애
1270년경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와 아일랜드 순회판사 존 피츠조프리의 딸인 모드 피츠존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자 형제로 로버트와 존이 있었으나 둘다 일찍 죽었으며, 누이로 이사벨라[1], 모드, 마거릿, 사라[2]가 있었다. 129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워릭 백작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19개 주에 걸쳐 토지를 소유했는데, 특히 우스터셔와 워릭셔에 집중되었다. 또한 웨일스에도 광범위한 토지가 있었다.1296년 에드워드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298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반군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격파하는 데일조했다. 1300년 케어라버록 요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304년에는 에드워드 왕자가 지휘한 스털링 성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 또한 1301년에는 잉글랜드 영주들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스코틀랜드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공동 서한에 서명했다.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 1298년 스코틀랜드 내에서 1,000 마크 상당의 토지를 받았고, 더럼에 있는 존 발리올의 옛 영지를 1307년에 받았으며, 왕실에 대한 가족 부채의 지불을 연기받았다.
1299년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딸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1307년에는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지만, 에드워드 1세의 임종이 임박하자 중단했다. 1307년 7월 7일 에드워드 1세의 임종을 지켜봤고, 1308년 2월 25일 에드워드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해 의례용 검을 휴대했다. 그 후 가스코뉴의 하급 귀족 피어스 개버스턴이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아 지나치게 높은 직위와 부를 챙기는 것에 반감을 품었고,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세력을 급격히 팽창하면서 자기 영지가 침해당하는데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 문제에 개입하길 꺼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도 불만을 품었다.
그는 에드워드 2세의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대관식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인 피어스 개버스턴을 추방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이 요구에 여러 귀족이 가세하자, 에드워드 2세는 압박감을 느끼고 피어스 개버스턴을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선임해 잉글랜드에서 내보냈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워릭 백작령 내 성전 기사단 영지 4개를 수여함으로써 그를 달래려 애썼다. 그러나 1309년 피어스 개버스턴이 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이에 반발해 그 해 10월 요크 의회 참석을 거부했다. 1310년 2월, 그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과 함께 군인들을 이끌고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워드 2세는 군인들을 대동하는 걸 금지했지만, 귀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강한 압박에 굴복하여 귀족 21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 설립을 허용했다.
개혁 위원회의 지도자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 그리고 기였다. 이들은 왕이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땅을 하사하거나, 국외로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또한 의회의 승인 없이 행정 명령을 시행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징발 제도는 페지되었으며, 왕실을 보조하던 프레스코발디 은행가들은 추방되었다. 개혁 위원회에는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처럼 왕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토머스, 헨리, 기 3인방에게 밀렸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로 마음먹고, 당시 스코틀랜드를 재정복하고 잉글랜드 북부 습격을 잇달아 벌이던 로버트 1세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징수한 뒤, 1310년 9월 8일에 군대를 베릭으로 소집했다. 그러나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그리고 피어스 개버스턴만 참여했고, 기 등 다른 귀족들을 참여를 거부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 상황에서도 원정을 감행했지만, 로버트 1세가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식량 수집대를 끈질기게 습격해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11년 8월 16일 런던에서 열린 의회에서, 개혁 위원회는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피어스 개버스턴의 추방을 재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 개버스턴이 잉글랜드에 계속 머무르는 대신에 개혁안을 수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귀족들은 거부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자기 권한을 제한하는 41개 법령을 승인했다. 이때 제20 조항에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국왕과 그의 국민의 공공연한 적"으로 규정하면서, 왕국 바깥으로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피어스 개버스턴은 11월 3일 잉글랜드를 떠나 플란데런 백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1311년 12월,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잉글랜드에 비밀리에 소환했다. 피어스 개버스턴은 1312년 1월 13일 나레스버러 성에서 왕과 합류했고, 왕은 이 시기에 태어난 피어스의 딸 잔의 세례 행사를 거행했다. 1월 18일,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 개버스턴에 대한 판결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그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반환했다. 이에 기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왕과 피어스 개버스턴이 의회의 결의를 독단적으로 어겼다고 규탄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파문했다.
1312년 5월 4일,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가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버스턴이 있는 뉴캐슬로 쳐들어갔다. 두 사람은 스카버러 요새로 피신하면서 돈과 보물을 전부 내팽개쳤고, 랭커스터 백작이 이를 압수했다. 에드워드 2세는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요크로 향했고, 피어스 개버스턴은 스카버러에 홀로 남겨졌다. 이후 대귀족들이 스카버러 성을 포위하자, 피어스 개버스턴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5월 19일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8월 1일에 열릴 의회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재판에 출두할 테니, 그 전까지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피어스 개버스턴을 옥스퍼드셔로 이송해 데딩턴 교구에 남겨뒀다.
그러나 기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재판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그리고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공모한 뒤, 자기가 총대를 매기로 하고 6월 10일 피어스 개버스턴을 체포해 워릭으로 끌고 갔다. 그 후 랭커스터 백작 등이 그곳에 모여서 약식 재판을 거행했다. 토머스는 피어스가 추방령을 3번이나 어겼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가 피어스를 8월 1일에 열리는 재판 때까지 신변을 보장하기로 한 자신의 약속을 상기하며 당장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토머스 등은 듣지 않고 6월 19일 밤 참수형을 집행하게 했다. 개버스턴은 자비를 간청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기에게 피어스 개버스턴을 그의 영지로 끌고 가서 처형을 감독하게 했다. 기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블랙로우 힐로 끌고 간 뒤, 그곳에서 두 웨일스인을 시켜 참수했다.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피어스 개버스턴을 참수한 일은 잉글랜드 전역에 깊은 충격을 안겼다. 당초 피어스 개버스턴을 체포하는 데 동의했던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은 이 처사에 분노했고, 이후 에드워드 2세 편으로 돌아섰다. 반면에 기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을 옹호하는 이들은 피어스 개버스턴의 처형이 합법적이며, 잉글랜드 왕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왕은 총신을 살해한 그들을 미워했지만, 그들의 권세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섣불리 처벌하지 못했다.
1312년 8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살해한 귀족들과 에드워드 2세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평화를 구축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기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와 함께 9월 3일에 군대를 일으켜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왕실군이 웨이크 마을에서 이들을 저지했다. 이제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듯 했지만,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를 저지하고 협상을 중재했다.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삼촌인 에브뢰 백작 루이 데브뢰와 교황 특사들도 자제할 것을 호소하자, 양자는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루기로 했다.
협정은 1313년 2월 13일에 체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살해한 자들을 사면하기로 했고, 귀족들은 왕권을 더이상 침해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범죄자로 규탄하고 그의 처형을 합법화하라는 기와 토머스 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기 등은 항의하는 차원에서 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1313년 10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중재에 따라 랭커스터, 워릭, 헤리퍼드 백작과 그들의 지지자 500명을 정식으로 사면했다. 그러나 1314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에 찫구했을 때, 기는 랭커스터 백작, 서리 백작, 아룬델 백작과 함께 의회에서 승인하지 않은 원정은 무효라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 에드워드 2세가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군에게 참패한 뒤, 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고,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기는 토머스의 최측근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이렇듯 막강한 권세에 막대한 부를 누렸지만, 그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315년 8월 12월, 그는 45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세간에서는 에드워드 2세가 피어스 개버스턴 처형을 집행한 그에게 원한을 품고 사람을 시켜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의 유해는 우스터셔의 보데슬리 수도원 내 뷰챔프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이사벨라 드 클레어(1262 ~ 1333):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딸. 1280년대에 결혼했지만 얼마 안가 근친 관계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 처리되었다.
- 앨리스 드 토스니(1283 ~ 1324): 플램스테드 남작 라울 7세 드 토스니의 딸. 기 드 뷰챔프와 결혼하기 전에 레이번 남작 토머스 레이번과 결혼했으며, 기 드 뷰챔프가 사망한 뒤 초대 주쉬 남작 윌리엄 드 라 주쉬와 결혼했다.
- 모드 드 뷰챔프(? ~ 1369): 제2대 세이 남작 제프리 드 세이의 부인.
- 엘리자베스 드 뷰챔프(? ~ 1359): 제3대 애슬리 남작 토머스 애슬리의 부인.
- 토머스 뷰챔프(1313 ~ 1369): 제11대 워릭 백작.
- 존 드 뷰챔프(1316 ~ 1360): 초대 워릭의 뷰챔프 남작.
- 사생아
- 이사벨라 드 뷰챔프: 기사 존 드 클린턴의 부인.
- 에마 드 뷰챔프: 기사 로랜드 드 오딩셀레스의 부인.
- 루시 드 뷰챔프: 기사 로버트 드 냅튼의 부인.
[1] 키드웰리 영주 패트릭 드 샤워스와 초혼,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재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어머니.[2] 리처드 탈보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