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8:45:43

킨조 테츠오

킨조 테츠오
[ruby(金城 哲夫, ruby=きんじょう てつお)] | Tetsuo Kinjo
파일:Tetsuo_Kinjo.webp
출생 1938년 7월 6일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
사망 1976년 2월 26일 (향년 37세)
오키나와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하에바루정
직업 각본가, 연출가
학력 타마가와학원 고등부 (졸업)
타마가와대학[1] (교육학과 / 졸업)
활동 기간 1962년 ~ 1976년
소속 츠부라야 프로덕션 (1962년~1969년)
가족 양친, 배우자[2], 슬하 2남 1녀
1. 개요2. 생애
2.1. 데뷔 이전2.2. 츠부라야 프로덕션2.3. 말년
3. 주요 작품
3.1. 대표작3.2. 대표 에피소드
4. 여담5. 관련 문서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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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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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각본가.

1960년대 서브컬쳐, TV 방송 특촬물을 대표하는 각본가로서 시대를 앞서간 각본으로 지금도 많은 팬들이 있는 전설의 각본가이다. 또한 울트라 시리즈의 창조자 중 한 사람으로[3], 제1기 울트라 시리즈를 기획하여 울트라 시리즈의 세계관을 창시한 사람이다.[4]

2. 생애

다큐멘터리 '울트라맨을 만든 남자들'

2.1. 데뷔 이전

파일:FSHRIa7akAAK6hX.jpg
학창 시절의 킨조 테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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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7월 5일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태어났다. 수의사였던 아버지 다다히로가 아자부 수의학교(현재의 아자부대학)에서 배우기 위해 아내 츠루코와 함께 2년간 도쿄에서 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생후 즉시 부모님과 함께 귀향하여 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하에바루정에서 성장하였고, 작가 본인도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했던 관계로[5]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오키나와를 출신지로 기록하고 있다. 6살때 오키나와 전투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 후, 킨조는 중학생 때까지를 오키나와에서 보내고 있었으며, 중학교 졸업 후에 상경해, 고등학교와 대학은 타마가와 학원에서 재학했다. 고등학생 때 '일금 우호 협회'라는 SF 클럽을 결성해 금성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테마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우에하라 쇼조는, 킨조의 우주적인 착상력에 혀를 내둘렀다, 라고 이야기했다.
금성에서 민달팽이의 괴수가 오다니, 역시 학창 시절에 "금성인과 악수하는 모임"을 만들어, 항상 우주를 보고 있던 킨조만의 발상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플롯부터 생각하지만 킨조는 우선 괴수가 있었고 스토리를 짜고 있었습니다.#

킨조가 2학년이 되었을 때, 3학년과 2학년이 함께 수강하는 강좌제가 도입되었다. 이때 킨조가 수강한 강좌의 담당 강사는 입학시험 때 그를 면접한 우에하라 테루오(上原輝男)였다. 우에하라는 이 강좌에서 민속학에 대해 열렬하게 가르쳤다. 이 강좌와 우에하라와의 만남이 킨조의 장래에 영향을 주게 된다. 2학기에 접어들면서 킨조는 자유연구발표회 준비에 바빴다. 오키나와의 특이성에 대해 연구를 하던 킨조는 발표회에서 오키나와어의 특징에 대해 발표해 많은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또, 킨조는 일년 선배인 모리구치 카즈(森口豁)[6]와 함께 '다마가와동릉신문'이라고 하는 학내 신문을 발행했다. 킨조는 17세 때 아직 본토 복귀가 되지 않은 오키나와 위문대에 참가했다. 남학생 9명, 여학생 8명, 교사 2명으로 결성된 타마가와 학원 오키나와 위문대에서, 장행회가 1956년 3월 8일에 열렸다. 당시 이들을 NHK TV가 뉴스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 위문대의 계기가 된 오키나와로의 여행을 계획한 미야기 카츠히사와 함께, 킨조는 선발대로서 오키나와로 갔다. 위문대의 진정한 목적은 오키나와의 향토 연구로, 류큐 정부, 오키나와 타임스와 류큐 신보등의 신문사, 방송국, 류큐 대학, 나하고등학교등의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타마가와학원 고등부 졸업 후, 킨조는 타마가와대학 문학부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우에하라 테루오는, 킨죠가 대학에 진학하는 동시기에, 고등부 교사에서 타마가와 대학 전임 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킨조는 고등부 때의 담당 교사이자 대학시절 은사인 우에하라의 영향을 받아 각본 제작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 무렵, 킨조의 은사 우에하라는, 타마가와 학원 고등부에서 츠부라야 노보루의 담임 교사를 담당한 것을 계기로, 특촬의 신이라고 불린 츠부라야 에이지와 교류를 갖는다. 그리고 우에하라가 각본가 지망생 킨죠를 츠루라야 에이지에게 소개한다. 이윽고 킨조는 츠부라야 에이지의 소개로 다수의 도호 특촬 영화, 호러 영화의 각본을 집필한 각본가인 세키자와 신이치(関沢新一)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각본 쓰는 법을 사사해 각본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1년경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각본 만들기와 기획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 후 일시적으로 오키나와에 돌아와, 오키나와의 배우를 사용한 영화 '요시야 치루 이야기'를 자체적으로 제작해, 1963년에 완성시킨다.

2.2. 츠부라야 프로덕션

특히, 「울트라Q」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등의 메인 라이터를 맡은 각본가 킨조 테츠오씨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지구 평화를 지키는 강하고 상냥한 영웅상이나 단순한 권선징악에 그치지 않는 스토리. 세계관·이야기 만들기는 물론, 프로듀서적인 역할도 담당해, 시간을 초월해 더욱 생명력을 가지는 시리즈의 원형을 구축했습니다.
― 오오오카 신이치 (츠부라야 프로덕션 제10대 대표이사 사장), 2016년#

1962년, 킨조의 각본 데뷔작 '인연'이 츠부라야 에이지의 장남인 츠부라야 하지메의 연출로 텔레비전화되어 TBS에서 방송되었다. 당시 킨조는 츠부라야 하지메의 마음에 들었고, 두 사람은 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7] 그 후도 '긴테쓰 금요극장/이렇게 사랑해'(도쿄방송)나 '울고 쌓이는가' 시리즈의 '날개가 있으면'(TBS) 등, 그의 각본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된다. 이후 지인 츠부라야 노보루[8]의 권유로 1963년 츠부라야 프로덕션에 입사한다. 그리고 킨조는 기획 문예의 책임자인 기획문예부장으로서 28세의 젊은 나이의 울트라 Q를 집필했으며 이후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 쾌수 부스카, 괴기 대작전 등 특촬 TV 작품을 차례로 기획 입안해 메인라이터로서 각본 집필에 역량을 발휘하면서 방송사나 제작현장과 조율하는 역할도 했다.

1980년대 이전에는 TV 특촬물, 애니메이션 각본계에는 여러 각본가의 각본을 정리하는 시리즈 구성 작가란 개념이 없어 매화 설정과 전개가 널을 뛰는 작품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의 경우는 자신이 담당하지 않는 방송분의 각본에도 다른 각본가들의 각본을 직접 수정하거나 방향성에 대해 주문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시리즈 구성 작가였다. 줄거리의 개요를 많은 각본가에게 설명하고 플롯을 보내서, 그것을 기초로 어떤 에피소드를 실제로 제작해 나갈지를 생각하는 '시리즈 구성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다른 시나리오 라이터가 쓴 각본의 주문 및 개정의 '각본 감수'도 담당했고, 본인이 메인 각본가의 역할도 담당했다. 킨조 테츠오는 세계관과 이야기 만들기는 물론 프로듀서적인 역할도 담당해 시리즈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킨조는 다양한 스태프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수용하면서도 기획서를 대부분 정리했다. 주제, 이야기의 방향성, 울트라맨, 괴수, 등장인물의 설정 등 킨조가 만들어낸 노선에 따라 울트라 시리즈가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울트라 시리즈는 옛날 작품임에도 현대 TV시리즈와 비슷하게 일관된 분위기와 정리된 설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킨조는 시간이 없어도 촬영 현장에 직접 나와 감독, 배우들과 소통하면서 스토리를 창조했다. 1기 울트라 시리즈는 다른 각본가들도 참여했지만 그들 모두 킨조에게 공을 돌리며 "그건 킨조 씨 작품이다" 라고 할 정도이다. 또한 매번 등장하는 괴수에 대한 특징, 네이밍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고, 때로는 괴수의 디자인에도 자신과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파이프 역할을 맡아 다양한 울트라맨 시리즈의 매력 구축에 힘썼다.

울트라 시리즈에는 매번 다양한 괴수가 등장했는데, 대부분의 디자인은 킨조 테츠오와 나리타 토오루가 상의해 결정했다고 한다.#[9] 또 킨조 테츠오는 화가 나리타 토오루에게 울트라맨의 디자인을 "이전까지 없었던 멋진 우주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리타가 만든 디자인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울트라맨의 디자인이다.# 킨조 테츠오가 이러한 다방면에서 활약한 덕분에 시리즈의 완성도가 상당히 올라갔다. 그래서 그가 담당한 작품들은 특촬 오락 작품의 틀을 초월한 명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초기 울트라 시리즈의 명감독 중 한 명인 짓소지 아키오는 오키나와 출신의 킨조가 울트라 시리즈 제작의 많은 영향을 끼친것을 기리며 "울트라맨. 본적지, 오키나와. 역시 나는 이렇게 기입하고 싶다.(ウルトラマン。本籍地、沖縄。やはり、私は、こう記入したい)'라는 말을 에세이집 안에 남기기도 했다.# 우에하라 쇼조는 "킨조가 없었다면 울트라 Q의 각본도 잘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다음 울트라맨도 기획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년에 회고하기도 했다.# 킨조는 뼈대가 굵고 강력한 드라마를 만들어, 특히 영상화를 염두에 둔 생동감 넘치는 작풍으로 당시 스태프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이후 킨조가 기획하고 메인 라이터로서 참여한 이 작품들은 '괴수붐', '울트라붐'으로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울트라 Q울트라맨은 평균 시청률 30%라는 대히트를 기록했으며, 울트라 세븐 역시 평균 시청률 20%대 중반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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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부라야 프로 소속 당시 킨조 테츠오

당시 킨조 테츠오가 집필한 각본의 특징은 엔터테인먼트에 철저한 각본이다. 그의 각본은 생동감 넘치는 필력으로 인해 '읽기만 해도 그림이 떠오른다'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SF풍이 강한 에피소드가 많으며, 주로 호러스럽고 미스테리한 에피소드를 추구했다. 또한 일견 잘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해피 엔딩이 아니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거나, 문제가 해결되어도 찝찝하게 해결된다거나, 문제의 근원이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다.[10] 사회 풍자 에피소드도 많다. 울트라맨이란 히어로상도 직접 창조했으며 '울트라맨이 없어도 인간이 스스로 지구를 지켜야한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같은 테마를 꾸준히 담아내 팬들에게 평가가 매우 높다. 킨조 테츠오가 각본을 쓰지 않은 건 울트라맨이 아니다 라는 이유로 울트라 세븐 이후의 시리즈를 부정하는 팬층마저 있을 정도이다.

평소 평화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는 오키나와 공습 당시 그의 어머니가 폭격을 맞고 다리가 잘리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엔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인과 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혼슈 본토인들은 오키나와인들을 자주 차별하곤 했는데 그도 도쿄에 상경하고 많은 차별을 겪었다고 한다. [11] 그럼에도 직접적인 전쟁을 다룬 작품은 적으며 인간찬가 각본을 많이 썼는데 동료이자 같은 오키나와 출신인 우에하라 쇼조는 누구보다도 인간을 혐오해야 했을 그가 이런 내용의 각본을 쓰는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12] 물론 인간을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긴 했는데 개선하려고 노력하면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희망은 항상 남겨놓는다.[13][14] 이치카와 신이치는 킨조의 각본엔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고 주장했지만 반면 미츠타 카즈호나 이이지마 토시히로 감독, 우에하라 쇼조 같은 경우는 그렇게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SF를 추구했을 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러한 해석을 부정했다. 하지만 악질우주인 메피라스 성인독가스괴수 모그네즌 같은 경우엔 그런 의도도 담겨있음이 킨조의 일기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의도도 있지만 과장된 것도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우에하라 쇼조는 킨조 테츠오의 각본을 "속구파 에이스. 똑바로 밀어서 밀고, 때로는 변화구로 삼진을 잡습니다. 그런 각본가죠. 그에 비하면 나나 이치카와 신이치2군의 투수에요. 킨조가 중간에 다른 작품을 가게 되고 우리가 마운드에 서게 됐지만 킨조의 대단함을 아는 만큼 똑바로 승부할 수 없죠. 그래서 변화구 승부를 하자며 그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 시나리오가 세븐 특유의 이미지를 만드는 단초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킨죠 테츠오의 세계관은 "뻥 뚫린 푸른 하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킨조 테츠오는 1960년대 괴수 붐을 일으킨 주역 중 한 명으로 높은 평가와 인기를 얻어 당시 서브컬쳐의 큰 영향을 끼쳤다. 츠부라야 에이지도 "각본은 킨조한테 맡기면 된다."[15]라고 할 정도로 츠부라야 초기 역사의 최대 공신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회사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성인 특촬 프로그램을 지향한 마이티잭이 평균 시청률이 8.3%로 부진해 1쿨 만에 중단됐고, 만회를 기한 괴기 대작전은 평균 시청률 22%로 건투했지만 울트라 시리즈에 비해 낮다는 평가로 끝나 츠부라야 프로가 경영 부진에 빠진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흥행 실패로 문예부가 폐지되어 시나리오 라이터가 아닌 프로듀서에 전념할 것을 요구받은 킨조는 거절하고 1969년 츠부라야를 퇴사해 고향인 오키나와로 돌아간다.

2.3. 말년

"왜 너는 도쿄에서, 그토록 방송 스탭과의 연결도 있고, 유명한 디렉터나 프로듀서와도, 키국의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시나리오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왔어 이런 오키나와에" "도쿄 사람들이 너 자꾸 오키나와 얘기만 하고 '오키나와, 오키나와'라고 하는데 오키나와를 위해 넌 뭘 한 거야?"라고 그 동료 중 누가 그랬대요. 그때는 나름대로 생각하고 "'그래, 나는 오키나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왔을까'라고 생각하고 돌아가기로 했어" 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지요. 나는 오키나와에 돌아가서 오키나와의 일을 세계에 알릴 것이다.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뭔가 큰 작품을 써서 오키나와를 어필하고 싶다는 마음이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쿠로시마 아키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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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킨조 테츠오(아래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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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이후 1967년 오시로 다치히로(大城立裕)가 칵테일 파티에서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것으로 감화된 킨조는 오키나와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해졌다. 오키나와에 귀향 후, 고향의 문화와 역사를 맹공부해, 오키나와 연극의 극단의 좌부 작자가 되어, 친가의 스키야키 요정을 도우면서, 각본 집필에 힘썼다. 또한 그는 오키나와 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지역 부흥 운동을 시도했다.

류큐 왕국의 왕조를 구축한 젊은 쇼하시왕을 그린 '사시키의 망나니'등을 집필해, 본토의 연극 요소를 도입한 새로운 스타일의 오키나와 연극으로서 배우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류큐 방송(RBC)에서 킨죠는,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기도 했다. 라디오의 '토요타 모닝 패트롤'의 캐스터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1975~1976년에 개최된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의 세리머니의 기획과 연출도 담당해 본토와 오키나와의 가교가 되도록 활약했다. 킨조가 생각한 연출은 세계 7개의 바다에서 떠온 바닷물을 박람회장에 설치된 하나의 통에 붓는 내용이었다. 오키나와에서 세계로 발신하는 해양박람회 세리머니 무대에서 인류는 바다에서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오키나와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하는 희망도 강해, 구상을 노트에 적고 있었지만, 과도한 음주로 컨디션에 영향을 미쳐 갈등과 고민이 심해졌다. 또한 기대했던 국제 해양 박람회의 경제 효과가 적어서 일부의 오키나와 지역 주민들이 그에게 욕을 퍼부었고, 각종 비판을 들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고 한다.[17] 이후 술을 먹고 2층 작업장으로 밖에서 직접 들어가려다 발을 헛디뎌 추락해 1976년 2월 26일[18] 뇌좌상으로 향년 37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동문이자 그를 내쫓은 장본인이었던 츠부라야 노보루는 이를 두고 그를 내쫓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3.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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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대표작

3.2. 대표 에피소드

4. 여담

  • 동료들이 불렀던 애칭은 킨짱(金ちゃん).
  • 인격 면에서도 매우 밝고 친절한 성격으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따랐다. 당시부터 그를 존경하고 따른 후계자 각본가로 훗날 슈퍼 전대 시리즈우주형사 시리즈를 만든 우에하라 쇼조가 있다. 동료 각본가였던 이치카와 신이치는 훗날 그를 기리는 드라마 '나를 사랑한 울트라 세븐'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유리 안느 역할의 히시미 유리코도 그를 믿고 따랐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그가 죽은 날이 되면 추모글을 올린다.[21]
  • 울트라 Q,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을 연출한 이이지마 토시히로[22] 감독은 킨조에 대해 "일동료로서는 라이벌 의식이라든지, 그리고 체면이라든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런 의식을 전혀 갖지 못해서 사귈 수 있는 상대였어요. 이쪽의 결점도 충분히 킨짱(킨조)이 알고 있고, 이쪽도 그런 것으로 킨짱의 결점을 알고 있으니까 서로 숨기는 것이 없어서 합작이 편했어요. (중략) 킨짱(킨조)을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일하는 동료 중에 그를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 울트라 시리즈 디자인의 아버지인 나리타 토오루는 유고집에서 가장 신뢰한 두 사람으로 킨조 테츠오와 초기 울트라 시리즈의 감독 츠부라야 하지메를 꼽았다.
  • 초대 울트라맨의 슈트 액터울트라 세븐아마기 대원을 연기한 배우 후루야 빈은 당시를 회상하며 "보통 각본가는 배우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달리 출연진에게 말을 걸었어요. 저도 친해져서 어느새 '토시짱'이라고 불리는 사이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오키나와 현민 중에 아직 울트라맨은 킨죠 테츠오가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킨조씨를 전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 2016년 츠부라야 프로덕션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TV 드라마 각본가 신인들에게 주는 상으로 킨조 테츠오 상을 만들었다.#
  • 그는 "괴수는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같은 생물이며 날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인간이 일방적으로 괴수를 악인으로 만들어 해치울 만한 스토리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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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37년 생애를 보여주는 사진. 출처는 DVD '킨조 테츠오 서쪽으로(金城哲夫西へ)'
  • 생전 자신의 고향인 오키나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울트라맨의 괴수 이름 중에선 오키나와 사투리에서 따온 게 많다.[23] 이 때문에 울트라맨 지드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다. 오키나와 현지에선 현재는 킨조를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여긴다. 그를 따랐던 우에하라 쇼조도 마찬가지.
  • 각 화의 부제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부제에 주제와 복선을 교묘하게 까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다른 작가들도 이어받아서 울트라 시리즈 팬들은 각 화의 부제를 중요시 여기는 전통이 생겼다. 예로 울트라 Q의 에피소드인 2020년의 도전 같은 경우는 제목까지 봐야 진정한 내용을 알 수 있다.
  • 꽤나 미남인데다 연기 욕심이 있어서 자신이 각본을 맡은 작품에서는 몇번 단역배우로 게스트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기는 발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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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구와 친지, 팬들의 방문이 많아 유족들의 호의에 따라 서재는 그대로 보존되어 '킨조 테츠오 자료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이 서재에는 킨죠 테츠오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울트라맨의 그림이나 포스터, 인형들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연극의 각본들도 있다.#
  • 2016년에 그가 집필한 시나리오집이 재편집되어 발매됐다.#
  • 2022년 오키나와 본토 복귀 50주년 기념 드라마로, 킨조 테츠오와 우에하라 쇼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 드라마가 NHK에서 제작됐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형식으로 제작됐으며, 제목은 '두 사람의 울트라맨'. 킨조 테츠오를 연기한 배우는 미츠시마 신노스케다.#
  • 울트라 시리즈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화가 나리타 토오루와 기일(2월 26일)이 똑같다.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재학 당시 선배로는 츠부라야 프로덕션에서 오랜 세월 스탭으로서 활약한 타카노 코이치(高野宏一)나 츠부라야 프로덕션 3대 사장인 츠부라야 노보루(円谷皐)가 있다.[2] 킨조 유코. 츠부라야 프로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의 도쿄에서 결혼했다.#[3] 다른 한 명은 울트라 시리즈 디자인의 아버지 나리타 토오루[4] 일본에서는 '울트라 시리즈의 친부모 중 한 명'이라고 부른다.#[5] 킨조라는 성 역시 오키나와에서 볼 수 있는 성이다. 집안 자체가 오키나와 출신으로 추정된다.[6] 이후 류큐 신보의 기자를 거쳐, 니혼TV로 옮겨 본토 복귀 전후의 오키나와를 계속 쫓았다. 그리고 제작한 다큐멘터리로 칸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7] 이렇게 형 동생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지만, 츠부라야 하지메는 직장에서 킨조에게 엄청나게 엄격했다.[8] 츠부라야 에이지의 아들로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3대째 사장이다. 정작 훗날 킨조를 츠부라야에서 퇴출한 장본인.[9] 나리타 토오루 『특촬과 괴수 우리 조형미술』 필름아트사[10] 어린시절엔 신나게 봤던 에피소드도 나이를 먹어서 다시보면 "어?" 하고 놀라게 되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진 경우가 많다. 90년대 초반에 울트라맨 재조명 붐이 이루어진 것도 이러한 그의 각본 덕이 크다. 어릴때는 그때대로 재밌고 나이먹고 봐도 재밌는 것이다.[11] 악질우주인 메피라스 성인이 "울트라맨 너는 우주인인가 지구인인가?" 라고 물었을 때 하야타 신 (울트라맨)이 "둘 다" 라고 답변하는 각본도 그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한다.[12] 킨조가 전쟁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적은 것을 두고 우에하라는 "정말로 큰 아품을 겪었기 때문에 쓰기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회고하기도 했다.[13] 반면 우에하라 쇼조는 인간의 잔인함을 직접 비판하는 각본이 많다.[14] 그런 킨조의 바람을 작품 속에서나마 실현시킨 작품이 쇼와 울트라 시리즈의 완결편인 울트라맨 뫼비우스다. 현실은 아직 한참 멀었을뿐더러 어쩌면 평생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15] 이 일화는 울트라맨 티가 49화에서도 다뤄진다.[16] 류큐 방송의 디렉터 시대에 킨죠 테츠오를 사회자·작가로서 기용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프로그램을 제작.[17] 9세 연하의 동생 킨조 카즈오는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로 일에 대한 각종 비판에 크게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라고 말했다.#[18] 국제 해양 박람회가 폐막하고 한 달이 지났다.[19] 기획은 킨조가 했는데 후배를 키우고 싶다면서 후배에게 맡겼다고 한다.[20] 2016년 NHK에서 주최한 팬들이 뽑은 최고의 울트라맨 에피소드 1위를 기록했다.#[21] 당시 히시미 유리코를 유독 잘 챙겨줘서 세븐의 최종화는 그의 감정이 담겨있다고 해석하는 팬들도 있으며 이치카와 신이치는 자신이 각본한 '나를 사랑한 울트라 세븐'에서 이를 긍정하는 묘사를 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 제목의 '나'는 히시미 유리코, '울트라 세븐'은 킨조를 의미한다[22] 우주닌자 발탄 성인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2021년 별세했다.[23] 두뇌성인 치불 성인이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