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cd30><colcolor=#000>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Великий князь Кири́лл Влади́мирови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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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 (Кирил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ма́нов) |
출생 | 1876년 10월 12일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938년 10월 12일 (향년 62세) |
프랑스 뇌이쉬르센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대공 묘역 |
가문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
아버지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어머니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
형제자매 | 알렉산드르, 보리스, 안드레이, 옐레나 |
배우자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1905년 결혼 / 1936년 사망) |
자녀 | 마리야, 키라, 블라디미르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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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이며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 이후 황실 계승권자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다.2. 생애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군함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에 있던 기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가 기뢰에 침몰할 때 겨우 생존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1905년경 사촌인 빅토리아 멜리타와 다시 만났다.[1] 두 사람은 결혼하길 원했지만 키릴의 사촌이자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러시아 황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2]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결혼이었기에 키릴은 황실에서 쫓겨나 파리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빅토리아는 두 딸인 마리야와 키라를 낳았다. 얼마 후 키릴의 사촌 니콜라이 2세는 키릴을 복권시켰고[3], 빅토리아도 러시아 황실의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동안 차르에 대한 맹세를 어기고 러시아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이 행동은 나중에 큰 비판을 받았고, 황족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1917년 3월 임시정부는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키릴은 그에 항의하여 사임한 후, 핀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코부르크를 거쳐 생브리악에 정착했다. 이후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는 백군을 지원했다.
1918년 키릴 가족 |
1924년 8월에 키릴은 자신을 왕좌의 수호자로 선언했고, 얼마 후 전러시아의 황제 칭호를 주장했다. 이 결정은 로마노프 가문의 분열을 일으켰고, 파리에 망명 중인 러시아 전군연합의 사령관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도 마찰을 빚었다.
1922년의 형제자매[4] |
1936년 3월, 아내가 먼저 사망했고[5], 그도 1938년 10월에 동맥경화증과 그에 따른 괴저로 인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6] 장례식은 파리에서 열렸으며, 코부르크의 가족묘인 글로켄베르크 묘지에 묻혔다가 1995년 3월 7일에 아내의 유해와 함께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대공 묘역에 재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Kirill Vladimirovich of Russia) | <colbgcolor=#fff3e4,#331c00>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 of Russia) | <colbgcolor=#ffffe4,#323300>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of Russia) | |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 |||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 |||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udwig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iedrich Franz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 (Paul Frederick,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
프로이센의 알렉산드리네 공주 (Princess Alexandrine of Prussia) | |||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Augusta of Royce-Kösstreets) | |||
로이스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63세 (Heinrich LXIII, Prince Reuss of Köstritz) | |||
슈톨베르크베르니게로데의 엘레오노레 여백작 (Countess Eleonore of Stolberg-Wernigerode)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라이닝겐 후작부인 마리아 (Maria, Princess of Leiningen) | 1907년 2월 2일 | 1951년 10월 25일 | 제6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7] 슬하 4남 3녀 |
2녀 | 프로이센의 왕자비 키라 (Kira, Princess of Prussia) | 1909년 5월 9일 | 1967년 9월 11일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8] 슬하 4남 3녀 |
1남 |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 (Grand Duke Vladimir Kirillovich) | 1917년 8월 30일 | 1992년 4월 21일 | 바그라티온 무크라니의 레오니다 공녀 슬하 1녀[9] |
4. 여담
- 한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제정복고 단체 믈라도로시 연합을 지원했으나 믈라도로시가 소련의 공작으로 좌경화되는 것을 보고 기겁해 지원을 끊고 작별했다. 다만 키릴 본인이 구상한 제국 재건안은 소련의 특성을 많이 반영한 안건이었고, 이 안건은 그에게 '소비에트 차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마 본인도 공산주의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듯 하다.
5. 대중매체
-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러시아로 사빈코프 정권을 무너뜨리고 제정복고를 하면 황제로 즉위하는데, 이 때 육군참모총장은 표트르 브란겔이어야 한다. 선대 제국과는 달리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며, 1938년경 사망하고 아들 블라디미르가 뒤를 잇는다.
[1] 이전에 두 사람은 만났던 적이 있었고 이때도 결혼을 원했지만 빅토리아의 어머니 마리야 여대공이 로마노프 가문 남자들의 문란함을 상기시키며 빅토리아를 말렸기에 헤어져야 했다.[2]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촌 간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빅토리아의 전 시누이(전 남편 에른스트의 여동생)였던 게 결정적이었다. 알렉산드라의 입장에서는 오빠와 이혼한 전 올케가 자기 남편의 사촌과 재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빅토리아와 키릴의 혼인을 완강하게 반대했다.[3] 이는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여서 일찍 죽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고 2순위 계승권자인 니콜라이 2세의 동생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한 탓에 자손들의 황위 계승권이 없어서, 계승법이 변경되지 않는다면 계승 서열이 그 다음 순서였던 키릴 대공과 그 자손이 황위를 이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4] 왼쪽부터 옐레나, 안드레이, 아내인 빅토리아, 보리스, 키릴 순이다.[5] 빅토리아 멜리타는 키릴의 바람기를 보고 어머니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며 큰 충격을 받았었다.[6] 의사는 러일전쟁 당시 겪은 저체온증이 그의 건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진단했다.[7] 슈탄데스헤어인 라이닝겐 후작가의 가주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 오빠인 제3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의 증손자. 밑에 동서인 루이 페르디난트와는 9촌이다.[8] 마지막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둘째 손자이자 빌헬름 황태자의 차남이자 후계자다. 자세한 가계도는 호엔촐레른 가문 참고.[9]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물론 블라디미르 대공 사후 마리야 여대공의 승계 문제(파벨 1세 이후 제정된 여성 승계 금지, 다만 마리야 여대공은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러시아 황실의 남계후손이 없음을 근거로 계승의 적법성을 주장한다.)로 인해, 황실 내에서도 파벌이 갈라져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