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1 00:25:05

캐나다복음주의협회

<rowcolor=#ffffff> 캐나다복음주의협회
Evangelical Fellowship of Canada
파일:ADAAC4B5-E103-4EBB-84A0-7373D3BE0574.jpg
<colbgcolor=#34005B><colcolor=#ffffff> 설립일 1964년 ~ ([age(1964- - )]주년)
본부 토론토
영문약칭 EFC
회원교단 48개 단체
사무총장 David Guretzki
교회 수
교인 수 200만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특징3. 역사4. 정회원 교단5. 참관회원 교단(준회원)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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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캐나다 지역의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 교단들과 일부 진보 신학 성향의 교단들이 모여 설립한 교회연합체다. 정식명칭은 'Evangelical Fellowship of Canada'고 약칭은 'EFC'다. 단체의 본부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토론토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회원 단체다. 세계복음주의연맹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체 중 하나다.

2. 특징

캐나다의 성공회 계통, 장로교 계통, 침례회 계통, 오순절교회, 메노나이트 등 48개의 다양한 교단들, 66개의 기독교 단체 그리고 33개의 교육기관들로 이루어져있다. 캐나다 최대 규모의 주류 정통교단인 캐나다 성공회캐나다 장로회는 옵저버 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두 교단은 캐나다복음주의협회에 속한 보수적인 교단들에 비해 매우 진보적인 편이다.

캐나다복음주의협회에는 전반적으로 에큐메니컬 신학 성향의 진보적인 교단들이 스페인복음주의연맹, 미국복음주의협회 등 다른 국가들의 교회연합체 조직보다 더 많이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았을 때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보수~중도 성향의 신학을 추구하는 교단들이 진보적인 교단들보다 수적으로는 더 많이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캐나다복음주의협회'(EFC)는 캐나다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신학 연구, 성경 보급, 기독교 박해 감시, 캐나다 교회들의 선교 확대, 교단간의 교류와 협력 등의 활동들에 주력하고 있다. 캐나다복음주의협회(EFC)는 이뿐만 아니라 캐나다 정부에 정책을 건의하고 정부 정책의 방향성을 점검, 자문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3. 역사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1964년 캐나다 온타리오 지역 토론토에서 설립되었다. 약 6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단체다. 오순절교회 출신인 J해리 포트가 단체를 창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초기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 회장을 맡았다. 조직이 만들어진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초 토론토의 Danforth Gospel Temple의 새 목사로서 부임한 J 해리 포트는 동료들이 자신의 교파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더 많은 교단, 새로운 교회들과 사역을 함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포트 목사는 미국 텍사스의 '달라스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다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는 더 나아가 비공식적으로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을 가진 토론토 목사들 간의 협력을 장려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교단 간의 연합운동에 대해 저항했고 포트 목사는 이러한 저항에 대해 놀랐다. 그러던 어느 날 The Peoples Church의 창립 목사인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에게 포트 목사는 자신의 성도들에게 설교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당시의 일에 대해 포트 목사는 당혹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저는 토론토의 다른 교회에서는 설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완고했던 스미스 목사는 곧 빠르게 자신의 폐쇄적 신학관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Calvary Church의 아서 리와 Temple Baptist의 헤럴드 테퍼를 포함한 다른 목사 몇 명과 만나기 시작했다. 포트 목사는 미국에서 미국복음주의협회(NAE)의 몇몇 회의에 참석했고 캐나다에 비슷한 그룹을 만들고 싶어했다. 마침 NAE를 이끌었던 클라이데 테일러는 유사한 그룹의 형성을 장려했고 심지어 몇몇 캐나다 교회들의 연합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4년에 이르러 이러한 여러 일들에 긍정적으로 자극받은 수백명의 목사들이 윌리엄 피치 목사가 부임한 '녹스 장로교회'에서 임시회의를 열고 캐나다복음주의협회를 창립하였다고 한다. J 해리 포트 목사는 열정적으로 새로운 복음주의 조직을 이끌어나나갔다. 이 당시 이 일에 영향을 받아 비슷한 단체가 1846년 영국에서, 1942년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몇년 후 이 단체는 곧바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1967년 J 해리 포트 목사는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의 역사를 다시 쓴 미국 신학자인 칼 F. H. 헨리와 함께 캐나다를 횡단하여 밴쿠버에서 핼리팩스까지 가서 회의를 열고 그를 개인 자격으로 초대하여 EFC에 가입하도록 했다. 당시는 무신론적 철학이 서양 문화에 스며든 직후였고, 헨리 박사는 캐나다복음주의협회에서 그에 따른 유신론의 부상에 대해 강조하였다고 한다. 칼 헨리의 영향을 받은 EFC는 이후 20년간 수많은 주제들을 다룰 수 있는 위원회를 설치하여 심도있게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이 20년 동안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Thrust>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 설교 세미나를 후원하고, 복음주의 교단과 주류 교회의 개인들 간의 협력을 장려했다. <Thrust>는 1983년까지 정기호가 발행되었고, 그 후 <Faith Alive>로 대체되었다. 이 기간 동안 빌 피치, 마리아노 디간지, 밥 톰슨, 돈 멕레오드 등의 지도자들이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에는 재정이 어려운 시절도 있었으나 곧 이를 극복했다. 1977년에는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해 알리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1965년 두 번째 EFC 전국 회의에 참여하면서 복음주의 기독교 운동에 눈을 뜬 브라이언 스틸러라는 젊은 기독교 지도자가 EFC에 합류했다. 그는 특별히 십자가 중심의 진리, 성경의 권위, 기독교 신자들의 교제, 복음을 전도의 중요성 네 가지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능력 또한 출중했다. 스틸러는 1983년 봄에 EFC의 첫 전무이사가 되었고, 조직을 빠르게 변화시켜 캐나다복음주의협회의 개인 회원을 17,000명으로 늘리고 예산을 확대했다. 그가 1997년에 단체를 떠날 무렵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의 예산은 연간 약 60,000달러에서 300만 달러 이상으로 늘어났다. 스틸러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대중과 정부에 참여하는 데 있어 할 수 있는 역할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를 통해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캐나다 사회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잘못된 법을 시정하고 필요하다면 부드럽게 저항해나가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88년 캐나다 대법원이 Morgentaler 판결로 알려진 조치로 캐나다의 낙태법을 무효화했을 때 복음주의자, 로마 가톨릭교인들이 저항한 일이 있었다.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 지도부를 이끌던 인물들은 스틸러를 중심으로 하여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 분명히 목소리를 내어 반대하였다.

스틸러가 조직을 정비하여 크게 발전시킨 이후 1985년에는 단체내에 있던 두 구호 기관이 합병하여 World Relief Canada가 되었다. 1987년에 EFC는 기독교 전도에 관한 태스크포스를 설립했고, 1990년에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이 태스크포스는 비전 2000으로 바뀌었고, 이후에는 '비전 캐나다'로 바뀌어 지속되다가 2007년에 종료되었다. 1995년에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의 지도자들은 원주민 사역 위원회를 설치해 캐나다 원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게리 월시가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캐나다 자유 감리교회의 주교였던 월시는 특히 사역 파트너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역 파트너십을 육성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강조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단, 조직, 교육 기관 및 회중은 공통의 목적을 위해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캐나다복음주의협회의 구성원들은 함께 전도, 세계 선교, 고등 교육, 기독교 미디어 및 최근에는 빈곤과 노숙에 대한 사역 "원탁 회의"를 만들었고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EFC는 이 당시에 종교 자유 위원회도 신설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후 2001년에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아동포르노 법률을 형법적으로 더 엄격히 다룰 수 있도록 대법원에 촉구하였다. 이는 인권 선진국인 캐나다의 인권을 더 진일보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브루스 J. 클레멘저가 2003년 EFC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법률과 공공 정책 문제에 있어 EFC가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책들을 단체내에서 시행하였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국가별 복음주의 교회 연합체 중 두 번째로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2005년에는 이 단체에서 일하던 제프 터너클리프가 세계적인 교회 연합체 중 가장 유명한 두 단체 중 하나인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06년에는 EFC에서 빈곤에 대한 회의인 Street Level을 촉진하여 시민과 정부를 대상으로 빈곤 완화를 돕기 위한 9개의 성명인 오타와 선언문을 발표했다. 가장 널리 읽힌 잡지 중 하나인 "신앙과 정치"는 스테판 하퍼, 잭 레이튼, 폴 마틴을 포함한 캐나다 최고 지도자들의 기사를 포함하여 발행하였으며 EFC의 역량을 더 널리 알리게 되었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EFC와 다른 단체들은 인신매매에 대한 캐나다 법률 개선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또 같은 해에 EFC는 유전 기술에 대한 연방 규제와 관련하여 대법원에 개입했는데, 이는 EFC가 이전에 신경써왔던 법안이다. 이후 2014년에 EFC는 세 건의 대법원 사건에 ​​개입했다. EFC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 현장에서의 종교적 자유에 대한 '로욜라 사건', 안락사에 대한 '카터 사건', 공공장소에서의 종교적 자유(캐나다 정부 회의에서의 기도)에 대한 'Saguenay 사건'이다. 이를 통해 공공 정책과 사회문제에 있어서 발생하는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을 하였다.

이후로 현재까지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아프리카 에이즈 치료 지원과 예방 사업에 대대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사회적으로 유익이 되는 활동들을 새롭게 벌여나갔다. 이후 계속 가입하는 교단 수가 늘어나고 단체의 활동 규모가 넓어지는 등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2023년에는 데이비드 그레츠키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현재까지 EFC(캐나다복음주의협회)를 이끌고 있다.

2024년 캐나다복음주의협회는 포르노에 대해 아동, 청소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해달라고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2025년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자선단체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정부 방침에 대해 반대하면서 인식의 전환을 촉규했다.

4. 정회원 교단

캐나다 최대 규모의 복음주의 교단인 'PAOC'(캐나다 오순절 총회)와 미국, 캐나다 사회를 전반적으로 이끌어온 주류 교단인 미국 개혁교회(RCA)가 캐나다복음주의협회의 회원 단체로 활동중이다. 성공회 계통 교단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미국복음주의협회와 다른 점이다. 미국복음주의협회에는성공회 고교회파 교단이 소속되어 있지 않다.

5. 참관회원 교단(준회원)

이 교단들은 정식 참관회원이고 미국복음주의협회에 비공식적으로 관여하는 교단들보다 더 많은 권리가 있다. 캐나다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교단들 사이의 교류를 촉진하고 있다. 미국복음주의협회에 참관회원(옵저버)이 아니면서도 참여중인 루터교 미주리시노드파, 남침례회와 같은 교단들과 달리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을 형성해온 교단들이다.
  • 캐나다 장로회: 캐나다의 주류 교단으로서 역사가 깊으며 한때 캐나다 개신교 교회의 70%를 차지했었다. 캐나다 연합교회로 기존 교단내 교회들이 옮겨가면서 세력이 상당히 약해졌으나 최근에는 안정 상태에 이르렀다. 대만, 한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 선교사들을 보내 기독교를 전했다. 현재는 캐나다 연합교회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성공해 잘 교류하고 있다.
  • 캐나다 성공회: 캐나다에서 가톨릭 다음으로 성도 수가 많은 기독교 교파다. 오랫동안 캐나다에서 중요한 교단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진보적 성향이 강하며 이러한 신학적 특징은 미국 성공회와 유사하다. 캐나다에 온 영국인 개척자들이 도시를 개척할 때부터 교세를 넓힐 수 있었다.

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