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18:04:26

철인왕후(드라마)/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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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시간적 배경2.2. 공간적 배경2.3. 실제 역사와 다른 설정2.4. 바뀐 역사2.5. 여담

1. 개요

tvN 토일 드라마 <철인왕후>의 극중 설정을 다루는 문서.

2. 내용

2.1. 시간적 배경

<rowcolor=#0E0F23,#BBBBBB> 1851년 6월 ~ 12월
(함풍 2년 / 咸豊 二年)[오류]
● 5화에서 김병인을 판의금부사에 임명할 때 나온 교지에 '10월 4일'로 표기된다.
● 15화에서 늦가을 풍경 즈음 되었을 때 좌의정 민우진[2]을 임명한 교지에 '11월 12일'로 표기된다. 그리고 16화(다음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면서 판총재관에 영평군 이경응을 임명하는데, 그 교지에 '11월 13일'로 나온다.
● 촬영시기와 극중 시기가 엇비슷하게 흘러가는 걸로 봤을 때 극중 배경은 '1851년 6월부터 12월'까지이다. 다만 극중 본격적으로 철종과 안송 김씨, 풍안 조씨 사이의 다툼이 벌어지는 건 '10월부터 12월까지'이며, 이 드라마는 그 시기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2.2. 공간적 배경

조선
한성부
<colbgcolor=#0E0F23,#010101> 한양도성
(漢陽都城)
<colbgcolor=#EAEAEA,#343434> 의금부
(義禁府)
사법기관. 판의금부사 김병인.
훈련도감
(訓鍊都監)
정규군. 대장(大將) 김좌근.
금위영
(禁衛營)
정규군. 대장(大將) 영평군 이경응.
어영청
(御營廳)
정규군. 무예별감 홍두일이 무예교련관으로 근무 중이다.
김문근의 사저 김소용의 본가.
● 우물: 8년 전 어린 김소용과 어린 이원범이 함께 숨었던 곳.
● 정자: 철종김병인이 주량 대결을 펼치는 곳.
김좌근의 사저 김병인의 본가.
만물상 최 상궁요술경을 구입한 곳.
옥타정
(玉打亭)
김소용이 이생망으로서 들른 기생집.[3]
창덕궁
(昌德宮)
희정전
(熙政殿)
편전(便殿). 철종의 처소.
대조전
(大造殿)
김소용의 처소.
선정전
(宣政殿)
편전(便殿). 철종의 집무공간.
인정전
(仁政殿)
정전(正殿). 조회가 열리는 곳.
선원전
(璿源殿)
역대 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 신정왕후의 아지트.
수랏간 만복의 직장 겸 숙소. 소용이의 아지트.
사복시
(司僕寺)
김소용이 만든 궁중 배달전문 서비스 '배달의 후예'[4]의 본거지.
창경궁
(昌慶宮)
통명전
(通明殿)
순원왕후신정왕후의 처소.[5]
춘당지
(春塘池)
김소용이 뛰어든 연못. "괜히 왔다 간다 - 장봉환" 글귀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6]
● 와룡정(臥龍亭)[7]: 춘당지에 있는 정자. 김소용이 뛰어든 연못 바로 앞이다.
● 만월정(滿月亭)[8]: 춘당지에 있는 정자. 장봉환이 깃든 김소용철종을 처음 만난 곳.
경기도 남부
충청도 목천현

2.3. 실제 역사와 다른 설정

이 드라마에서 설정된 내용과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은 아래와 같다.
  • 이 드라마에서 김소용의 어머니는 소용이를 낳자 마자 사망한 걸로 설정되어 있으나, 실제 역사에서 철인왕후의 어머니 '흥양부부인 민씨'는 철인왕후가 중전으로 책봉되고 나서도 66세까지 살았다. #
  • 이 드라마에서는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등장하지 않는다. '안송 김씨와 풍안 조씨의 대립 구도'에 넣기 힘들어서 배제한 걸로 보인다. 효정왕후 본인은 김씨도 조씨도 아닌 남양 홍씨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난 이후인 1904년까지 살았다.
  • 이 드라마에서는 철종이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반강제로 거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연히 이는 실제 역사와 다르다. 실제 역사에서는 1852년 1월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것은 맞으나, 스스로 그만두었다.
  • 이 드라마에서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그만둘 즈음인 1851년~1852년 시점에 세도 정치로 인해 삼정 문란이 심한 것으로 나와 있고, 이로 인한 민란이 진행 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정도까지는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순 없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실제 삼정이정청이나 동비와 같은 실제 역사학에서 접할 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용어들에 대해서 대중이 크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지적할 만한 오류는 다음과 같다.
    • 1851년 10월에 황해도 문화·은율 일대에서 민란이 발생한 것은 맞으나, 실제 역사에서 이 민란에 대해 철종이 개인적으로 삼정 문란이 원인이라고 판단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관련 내용 (제작진이 이 민란을 참고했는지는 불명.)
    • 이 민란을 바로잡기 위해 철종이 친정하자마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영평군을 세운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는 것은 철종 13년인 1862년, 즉 10여년 뒤의 일이고, 당연히 책임자는 영평군이 아니며, 순원왕후는 이미 그 이전인 1857년에 사망하였다.
    • 이 민란을 일으킨 이들을 '동비(東匪)', 즉 동학교도라고 칭하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하였고, 1851년~1852년 시점에서는 최제우는 전국 각지를 떠돌며 장사 중이었다. 게다가 조정 차원에서 동학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인식한 것은 1863년으로 이미 고종이 즉위한 직후이다. 관련 내용 게다가 동학의 목소리가 커진 시점은 1차 교조 신원운동이 발생한 1871년 정도까지는 가야 한다.
    • 실제 역사에서의 삼정이정청은 1862년 5월에 진주민란이 발생한 뒤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에 의해 원인이 삼정의 문란이라고 판단하자 조정에서 민란 수습을 위해 만든 임시 관청이다. 삼정을 바로잡고 세도정치에 대해서 견제효과까지도 기대한 삼정이정청은 오히려 이 삼정이정청의 상당수 관리가 세도정치를 주도한 세력이 관장하여 실효적인 커다란 효과를 거두긴 힘들었고, 약 3개월 뒤인 8월에 삼정이정청이 철폐된 후에 이 삼정을 관리하는 업무는 실제로도 그러하고 이 드라마에서도 세도정치 권력의 핵심이라고 표현된 비변사가 홀라당 가져가버린다.
  • 이 드라마에서는 철종이 영평군을 삼정이정청 판총재관으로 임명할 때 교지에 영평군의 이름을 '이경응'으로 적었다. 이후 19화에서도 영평군은 '이경응'으로 불렸다. 실제 역사에서는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8년 3월에 이경응으로 개명했다.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선파(璿派)의 후손들을 하나의 족보로 닦는 것은 한 뿌리에서 천 개 가지로 나누어지고 만 갈래가 근원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이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역대 조상들의 영혼도 반드시 굽어보고 기뻐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宣祖) 이후의 여러 계파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시조로 삼아 10여 파로 나뉘어졌는데, 모두 한 조상의 같은 핏줄이다. 항렬이 각 파가 같지 않은 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족(九族)을 친애한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난다. ‘응(應)’ 자 이하를 반드시 한 가지로 정하여 설사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벼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름을 고치도록 하는 일로 종친부(宗親府)이조(吏曹)에 분부하라.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도 이 예에 따라 고쳐 정하는 것이 실로 또한 각 집안에서 돈독하게 하는 방도이니, 함께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1868년) 3월 2일 경술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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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뀐 역사

제25대 철조실록
1. 강화도령 이원범 475
2. 세도정권 아래 이뤄진 철조의 친정 479
3. 60년간 지속된 안송 김씨의 세도정권 480
4. 철조의 가족 482
철인왕후 김씨
5.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 페이지 미상
(중략)[9]
조선의 승리[10]
9. 입헌군주제 대한제국의 탄생 512

제26대 고종실록[11]
1. 고종의 가족 514
명성황후 민씨[12]영왕 이은의왕 이강
2. 왕권과 의회 512[13]
홍인권 내각[14] | 권력 분립
(후략)[15]
- 20화에 등장한 《조선왕조실록》의 목차 中
제25대 철조실록
조선의 제25대 왕 철조(1831~1863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로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49년 7월 28일(음력 6월 9일)~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 14년 6개월간 재위)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OO에 어둡고 외척인 안송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철인왕후의 활약으로 국정이 안정되었다. 이후 철조는 민심을 얻은 성군으로 평가받았다.
- 20화에 등장한 《조선왕조실록》의 '철조실록' 편의 책갈피 소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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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명부 규칙
십팔세 이상 내명부 여인들의 혼인을 허한다
십세이하의 나인들을 내명부에 들이는 것을 금한다
- 20화에서 김소용이 새로 만든 내명부 규칙 : 최상궁이 대필

2.5. 여담

  • 장봉환김소용에 빙의된 이후에도 궁에서 글을 읽거나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데, 장봉환의 부모가 한문, 국사 선생님이라 한문 교육을 받았기 때문.
  • 김소용이 현대인들이 쓰는 외래어나 외국어 속어 등을 마구 쓰는데, 당시 서학을 금했던 분위기 상 실제 역사에서는 있기 힘든 이야기다. 극에서는 동학만 불순한 사상으로 직접적으로 나오지만, 서학(천주교) 역시 한 가문을 몰락시킬 정치적인 도구로 쓰였다. 대령숙수가 중간에 기해박해 이야기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양인(서양인)의 말을 쓰면 오해를 살 소지가 크다. 따라서 소용의 말들은 어디까지나 코미디 사극이라 가능한 이야기.
  • 서양식 요리 역시 어디까지나 장봉환이 청와대 수석쉐프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장치이고, 이 역시 오해를 사기 좋은 행동이다. [16] 그리고 중전이 수랏간에 들어가 요리하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판타지여서 가능한 설정.
  • 장봉환의 영혼이 깃든 후 소용이 철종에게 반말, 욕설, 폭력(코를 감싼 손을 치거나 비녀를 창문에 꽂거나 하는 모습) 등을 보이는데, 어디까지나 장르가 코미디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일 뿐, 실제로 그랬다가는 폐비당할 수 있는 행위다.[17]

[오류] 극중 15화, 16화의 조회 중 나오는 교지에 '함풍 2년'으로 나온다. 다만 실제 역사에 근거하여 보면 '함풍 원년(咸豊 元年)'이어야 맞다. 한편 이는 대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사대의 예에 따라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이고, 우리 내부 기록의 '철종 재위 2년(哲宗 在位 二年)'과 같다. (함풍 원년 = 철종 재위 2년)[2] 숙의 민자현의 아버지[3] 2회에서 김환의 설명에 따르면 '기생들의 목소리가 옥구슬을 치는 것 같다'며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4] 소용이가 아이디어를 낸 '식가마'를 주 배달도구로 이용한다. 라이더는 '식가마꾼'으로 불린다.[5] 순원왕후와 신정왕후가 각각 역모사건과 중전에 대한 음해사건으로 서궁으로 유폐된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서궁(西宮)'은 경운궁(慶運宮)이다.[6] 촬영지였던 부여 궁남지에 있던 것으로, 촬영 이후 해당 소품은 치워졌다.[7] 창경궁에는 이런 정자가 확인되지 않는다. 촬영지는 부여 궁남지의 포룡정(抱龍亭).[8] 마찬가지로 창경궁에는 이런 정자가 확인되지 않는다. 촬영지는 남원 광한루원의 완월정(玩月亭).[9] 6.부터 8.까지는 화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10] 8.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인데 '조선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추론컨대, 외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이며 대한제국이 탄생했다는 것을 보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칭제건원과 배상금을 통한 근대화를 준비를 한듯 하다. 대체역사물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11] 가족관계가 흥선대원군을 제외하면 실제 대한제국 고종과 동일하다. 김소용의 자녀가 즉위했을 지 우리가 알던 고종이 즉위했을 지는 시청자들의 상상에 맡긴 결말이다.[12] 드라마에서는 명성왕후라고 나오는데, 명성왕후는 현종의 왕비이며 200년전 사람이다. 드라마에서 잘못 표기한 것이다.[13] 극중 '512페이지'로 표기되어 나온다. 이는 오기이다. 왕권이라는 소제목도 황권으로 표기되어야 맞는 표기.[14] 숙의 홍씨(홍심향)의 집안인 남양 홍씨 가문 사람이거나 홍 별감 가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15] 장봉환의 손에 가려져서 내용이 보이질 않는다.[16] 극중에서도 대왕대비가 요리의 비결을 묻자 프랑스 요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영감이 떠올랐다고 답변하는데, 서구에 대한 경계가 강한 것을 의식해서 한 표현이다.[17] 물론 소용이 선을 넘을 때마다, 최 상궁나 상선 등 신하들의 놀란 표정이나 행동을 통해 조선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행위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