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02:46:45

천댜오위안


중화민국 일급상장
중화민국 군사참의원원장
천댜오위안
陳調元(진조원) | Chen Diaoyuan
파일:Chen_Diaoyuan.jpg
<colbgcolor=#458B00> 이름 천댜오위안
진조원 | 陳調元 | Chen Diaoyuan
설훤(雪暄)
별명 바보(笨蛋)
출생 <colbgcolor=#FFF,#2d2f34>1886년 11월 12일
청나라 허베이성 통커우
(現 중국 베이징시 퉁저우 구)
사망 1943년 12월 8일 (향년 58세)
중화민국 충칭시 베이베이구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북양속성무비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관련문서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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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 북양정부 직예군벌의 장군. 제2차 직봉전쟁 이후 국민정부로 전향한다.

특이하게도 별명이 바보였는데, 나쁜 의미가 아니라 군벌이 할거하던 시대에 몇 안되게 인성이 좋은 인물이라 이런 별명이 붙었다. 다만 후술할 평가를 보면 이는 모두 철저히 계산적인 행동이었던 듯 하다.

2. 생애

2.1. 초기와 신해혁명

천댜오위안은 오늘날의 허베이성 바오딩시 통커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누나는 그를 북양속성무비학당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짚으로 돗자리와 바구니를 만들어서 그를 뒷바라지 했다. 졸업 이후에는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의 육군 제3사관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허잉친탕성즈도 이 학교의 제자여서 그를 만나면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우창봉기가 발생하고 천댜오위안은 무창성이 곧 함락될 것으로 예상했다. 청 조정이 사관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징집해서 끌고가는걸 피하기 위해 직책을 버리고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그는 당시 육군에서 자문 과장으로 일하던 친구 리빙즈(李炳之)의 집에 숨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 정부가 혁명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는데, 지휘관인 돤치루이(段祺瑞)와 펑궈장(馮國璋)이 육군부에 참모 인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육군대신 자이타오(載濤)가 사람을 추천할 수 없어 난처해하던 상황에서 리빙즈는 아주 자기 집에 눌러앉을 태세였던 천댜오위안을 떠올려 재빨리 그를 인재로 추천했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 펑궈장장쑤성 도독으로 임명되자 천댜오위안은 그를 따라다니며, 30세도 되지 않아 난징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펑궈장에게 건의해 장쭝창이 등용되었고 그 뒤로 둘은 각별한 친구가 되었다. 천댜오위안은 키가 크고 항상 친근하고 소탈한 외모로 "천바보(陳傻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언변이 뛰어나고 사교에 능했다. 펑궈장은 그를 외교 대표로 삼아 쑤저우상하이 일대의 군정 인사, 재계 거물, 폭력 조직과 폭넓게 교류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천댜오위안은 위안스카이 사후 직예군벌에 가담하게 된다.

2.2. 안직전쟁에서 제2차 직봉전쟁까지

1920년, 리춘장쑤성 도독으로 임명되자 서주 진수사가 되어 안휘군벌과 맞서 싸웠다. 리춘이 자살한 이후 같은 북양속성무비학당 동창인 치셰위안이 도독으로 임명되며 그를 신뢰했던 치셰위안은 그를 중국 장쑤성 쉬저우 4성 토벌총사령으로 임명했다.

제1차 직봉전쟁에서 패배한 후, 봉계 군대는 관외로 철수했지만, 장쭤린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제2차 직봉전쟁이 시작되었다. 1924년,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고 봉천군벌에 가담한 장쭝창이 쉬저우로 진군하자, 천댜오위안은 5월에 쉬저우를 내주고 봉천군벌에 그대로 항복하게 된다. 이 선택으로 천댜오위안은 사단장으로 진급하고 장쑤 군무방판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양위팅은 투항으로 승진을 한 그를 못마땅해 했고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천댜오위안이 병력을 철저히 경계 태세로 유지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천댜오위안은 겉으로는 단순하고 둔한 사람인 척하며 "한나라의 대장부는 정직하다"고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높은 지위까지 오르기 위해 천부적인 참을성과 은신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양위팅의 의도를 명확히 알았으나 여전히 웃으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고, 양위팅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천댜오위안은 뒤로는 직계의 마지막 세력인 쑨촨팡과 비밀리에 접촉해 힘을 합쳐 양위팅을 몰아내고 봉계에서 이탈하기로 약속했다.

쑨촨팡은 단 5일 만에 봉계 군대를 동남 지역에서 몰아냈다. 천댜오위안은 태도를 바꿔 우디르급 태세전환으로 , 패퇴한 양위팅에게 거액의 자금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이어 병사 한 대대를 우이(烏衣) 기차역에 매복시켜 양위팅의 열차를 습격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양위팅은 이를 눈치채고 간신히 도망쳤으나, 부유한 강남에서 모은 수십만 위안의 재산은 모두 약탈당했다.

이 병변에서 천댜오위안은 막대한 금액을 챙겼을 뿐 아니라 한 사단의 무기를 노획해 군대를 확장했고, 그 세력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 쑨촨팡은 저장, 푸젠, 장쑤, 안후이, 장시 등 다섯 성을 아우르는 연합사령관으로 불리는 대규모 군벌이었고 우페이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직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이에 천댜오위안은 현명하게 스스로 양저우로 주둔지를 옮겼고, 난징을 쑨촨팡에게 순순히 내주었다. 쑨촨팡은 기뻐하며 천댜오위안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를 안휘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3. 국민당의 1차 북벌~국민당의 2차 북벌

1926년 4월, 중국국민당 북벌군이 우한을 점령하며 우페이푸를 빠르게 격파한 이후, 장시성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쑨촨팡은 자신이 통제하던 다섯 성의 총사령관들을 동원해 다섯 개 방면군을 조직했으나, 진조원이 이끄는 안휘군은 국민당 북벌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주요 장수 셰수쉰은 전투 중 폭발로 인해 두 다리를 잃었고, 이는 부대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벌군은 곧 쑨촨팡의 중추 요지인 주장을 점령하며 그의 방어 체제를 약화시켰다.

진조원의 상관이었던 왕푸(王普)가 방어의 최전선에 나섰으나, 무능력함으로 인해 지휘에 실패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왕푸는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곧바로 퇴각했고, 군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는 도망치는 데만 능숙하여 자기 혼자서 죽어라 달아날 뿐만 아니라 후방의 다른 부대들까지 우르르 휩쓸려 도망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군대가 마치 둑이 무너진 홍수처럼 순식간에 와해되며 대패가 확정되었다.

결국 천댜오위안은 장쭝창에게 귀순하여 안칭에 주둔했다. 1927년 1월 3일, 그는 쑨촨팡군 제1방면군 총사령에 임명되어 안후이 서부에서 장시로 진출했다. 그러나 3월 1일, 장쭝창과 쑨촨팡은 진조원의 태도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부대를 방부푸커우에서 무장 해제했다. 이후 그의 부대 일부는 도주하거나 분산되었고, 3월 4일, 진조원은 안칭에서 우후로 이동했다. 진조원은 이미 북벌군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국민당 측으로의 투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군수처장 리하이추에게 주장 은행에서 40만 위안을 인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국민당의 허야오쭈는 나의 옛 제자다. 문제가 생기면 그와 접촉하라"고 말했다.

한편, 직계와 봉계 군벌은 북벌 혁명군의 압력에 직면해 화해를 이루고 손을 잡아 북벌군에 대항했다. 장쭤린장쭝창 부대를 남쪽으로 보내 쑨촨팡의 반격을 지원했다. 이에 천댜오위안은 "북양 동료들에게 죄를 짓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충성을 맹세했지만, 곧 투항 준비를 서둘렀다. 국민당 측과 협상이 완료되자 그는 국민혁명군 제37군 군장 겸 북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며 국민당에 합류했다. 1927년 4월, 제37군은 제1집단군 제2군단 소속으로 제2차 북벌에 참여하여 안후이 운허전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진격, 허베이 란현까지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큰 전투는 없었으나, 마지막으로 탕산 일대에 틀어박힌 직로연군 잔당을 소탕하면서 상당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그 결과, 소령 이상의 모든 간부가 군마를 지급받고 권총도 지급받았다.

곧이어 전국적으로 군대가 축소 재편되면서, 천댜오위안은 장제스에게 투항하고 2차 북벌에 기여한 공로로 사단급 병력을 배정받았다. 이에 따라 기존 제37군 산하의 제2사단, 제3사단, 교도사단이 통합되어 제46사단이 창설되었으며, 판시지(范熙绩)가 사단장을 맡았다. 한편, 기존 제1사단은 신편 제1여단으로 축소되었고, 웨성쉬안(岳盛宣)이 여단장을 맡았다.

1년 후, 기존 쑨촨팡 휘하 9개 사단이 축소 편성된 제47사단에서 3개 연대를 선발하여 신편 제1여단에 보충하였고, 이로 인해 해당 부대는 확대 개편되어 제55사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단의 사단장으로는 원래 장쭝창 휘하에서 사단장이었던 롼자오창(阮肇昌)이 임명되었다. 그는 쑨촨팡 세력이 내부분열하는 기회를 틈타 전장을 누비며 패잔병을 규합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쑨촨팡의 부단장 우야오환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우야오환을 회유하며 쑨촨팡 군대 고위층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우야오환은 천댜오위안 앞에서 겉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뒤에서는 뒷담이나 까고 다녔다.

천댜오위안은 국민당에 투항한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장제스에게 독일제 크루프 야포 12문과 산포 16문을 바쳤다. 특히 독일 크루프 야포는 당시 국내에서 보기 드문 강력하고 첨단 무기로, 장제스는 이를 높이 평가하며 천댜오위안을 신뢰했다.

천댜오위안은 중국 내에서 장제스를 이길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판단하여 장제스가 실각한 기간 동안에도 그를 성심껏 보필하였다. 그는 장제스의 고향인 펑화를 여러 차례 방문해 충성을 표하고, 10만 은원을 선물로 바쳤다. 이러한 행동은 장제스의 신임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제스와 탕성즈 간의 대결이 임박한 상황에서, 천댜오위안은 구이저우의 왕톈페이 부대와 함께 양쯔강 북쪽 방어를 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는 성 주석직 분배에서 천댜오위안을 배제했다.

팡전우 또한 사전에 이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천댜오위안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반장전쟁을 준비했다. 팡전우가 그를 끌어들이려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두 사람은 오랜 친분이 있었고, 둘째, 당시 천댜오위안의 불만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장제스는 탕성즈와 전쟁을 벌일 예정이었고, 천조원과 구이저우 군벌 왕천배의 부대는 장강 이북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각 성의 주석직을 나눠주면서도, 천댜오위안에게는 아무런 직책도 주지 않았다.

1929년 제2차 장계전쟁이 정리된 후, 장제스와 펑위샹, 옌시산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장제스는 천댜오위안이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와 은밀한 교류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산둥성 주석으로 임명하여 세 세력 간의 완충 지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장제스와 펑위샹, 옌시산 사이에서 중원대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전쟁 중 옌시산의 휘하 장수 푸쭤이는 비밀리에 천자오위안에게 전보를 보내 반장 진영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으나 천댜오위안은 이 전보를 곧장 장제스에게 넘겨주었고, 이를 알게 된 장제스는 크게 기뻐했다. 반면, 천댜오위안은 고발의 공로로 승진하며 안후이성 정부 주석 자리에 올랐고, 이어 산둥성 주석으로 전임되었다.

2.4. 중원대전과 공산당에게의 패배

중원대전 당시, 천댜오위안은 장제스에 의해 총예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제15로군 마홍쿠이 부대와 함께 차오저우시지난 지역을 방어했다. 8월, 펑위샹이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자, 천댜오위안은 장제스 군대의 우익에서 반격을 감행하여 전황을 위기에서 안정적인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천댜오위안은 장제스로부터 100만 위안의 군비를 지원받아, 이를 최전선의 여러 잡다한 군벌 부대에 분배했다. 이로 인해 각 부대는 더욱 적극적으로 펑위샹 군을 상대로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덕분에, 장제스는 천댜오위안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장제스의 중앙군이 반란을 평정하고 승리를 거둔 후, 펑위샹 진영에서 투항하여 공을 세운 한푸쥐를 어떻게 보상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에 천댜오위안은 한푸쥐의 대군이 산둥에 집결한 이상 충돌은 피할 수 없다고 판단, 한푸쥐에게 산둥성 주석직을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천댜오위안은 산둥을 포기하고 안후이를 얻음으로써 한푸쥐와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장제스의 신뢰를 더욱 쌓아 일석이조를 이뤘다.

중원대전 이후, 샤오팡이 지휘하는 홍군 제1군 독립 제2사단이 안휘성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천댜오위안이 안휘성 주석으로 부임하면서, 홍군과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보유한 제46사단 한 개 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천댜오위안은 산둥에서 편입한 두 개의 경비여단을 추가로 데려왔고, 지방에서 조직된 다섯 개의 자위단까지 동원하여 병력을 대폭 증강했다. 마침 홍군 제1군 주력이 후베이성 일대에서 작전 중이었기에, 제46사단는 비교적 손쉽게 안휘 서부 소련구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 10월, 홍군 제1군 주력이 안휘 서부로 복귀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홍군은 빠르게 진자자이와 마푸를 탈환했고, 전선을 육안성 아래까지 밀고 나갔다. 천댜오위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홍군 주력과의 전투를 결심했다. 그는 군벌 출신 돤치루이의 조카인 천쥔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네 개 여단을 동원해 홍군을 반격했다. 양측은 동서 샹훠링에서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투 결과는 참혹했다. 제46사단의 세 개 연대가 큰 타격을 입었고, 1,000명 이상의 병사가 포로로 잡혔으며, 1,700정 이상의 무기를 빼앗겼다.

샹훠링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천쥔은 육안으로 퇴각했지만, 이후 전투에서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좌절감에 휩싸였다. 그는 점차 부하들에게 불만을 표출하며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냈다. 어느 날, 천쥔이 가마를 타고 외출하던 중 성문에서 경비병의 검문을 받았다. 그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당시 당직이었던 제46사 138여단 272연대 2대대장 웨이멍셴을 불러, 그 자리에서 40대의 곤장을 치게 했다. 하지만 천쥔은 이 일이 큰 화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사실 웨이멍셴은 272연대 내 지하공산당 조직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이에 그는 즉시 제3대대 전 병력을 소집하여 2월 18일 자정, 육안성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첫 번째 목표는 성 내 주요 지휘관 세 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반란군은 경찰 제2여단장 천샤오쓰와 272연대장 양무밍을 성공적으로 암살했다. 그러나 천쥔의 총지휘부는 방비가 철저해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쥔 역시 총격전 중 무릎을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오후 3시경, 웨이멍셴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홍군에 투항했다. 이 부대는 이후 홍군 제4군 제12사단 36연대로 재편되었다. 반란 이후 천댜오위안은 엄격한 문책을 단행했다. 제46사단 138여단은 단체로 변절한 전례 없는 사건을 일으켰기에, 잔여 병력은 전원 해산되고, 새로 138여단이 재편되었다. 사단장 판시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그 후임으로 위에성쉬안(岳盛宣)이 사단장을 맡았다. 이로 인해 천자오위안은 안휘 서부에서 홍군을 공격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방어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제55사단의 상황도 좋지 못했는데, 안휘와 장시 접경 지역에서 팡즈민의 홍군 제10군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성과가 좋지 않았다. 1931년 2월 더싱 전투에서 홍군에 의해 한 개 대대가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다행히도 이후 홍군 제4군은 후베이 동부 소비에트구를 공고히 하는 데 주력하면서 내부 정리를 진행하느라, 약 1년 동안 천댜오위안과 충돌하지 않았다.

1932년 3월, 홍군 제4방면군은 제4군 10·11사와 연합하여 다시 안휘 서부로 진격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홍군 제73사와 합류한 후, 쑤자푸(苏家埠) 전투를 개시했다. 홍군의 기습을 받은 제46사 5개 연대와 경찰 제2여단은 각각 쑤자푸, 한바이두, 칭산뎬, 마자안 등 고립된 거점에 갇혔다. 이에 포위된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단장 위에성쉬안은 4개 연대를 동원해 육안에서 출격했지만, 홍군에 의해 격퇴당하며 한 개 연대를 잃었다.

5월 2일, 합비(合肥)에서 온 지원군 운남군 제7사 주력도 홍군에 의해 대패했다. 결국, 포위된 장제스군은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홍군에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했다. 이 전투에서 홍군 제4방면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며, 제46사 6개 연대가 완전히 궤멸되었고, 두 명의 여단장이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제55사 역시 한 개 여단을 잃으며 큰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천댜오위안이 애써 양성한 주력 부대는 사실상 전멸당했다. 쑤자푸 전투 이후, 제46사 잔존 병력은 독립 제43여단으로 축소되었으며, 류전칭이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55사는 여전히 장시 접경 지역에 주둔하며 홍군 제10군과 대치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장제스는 그를 여전히 신임하여 안휘성 주석직을 유지하도록 했다.

1934년 12월, 홍군 제10군단이 저장과 안후이 접경 지역으로 출격하자, 제55사와 독립 제43여단도 이에 대한 저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홍군 제10군단이 궤멸되면서, 안후이 지역 내에서는 더 이상 정규 홍군 부대가 활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장제스는 천댜오위안의 안후이성 주석직을 해임하고, 그를 군사참의원 원장으로 전보하여 사실상 그의 군권을 빼앗았다.

군사참의원은 겉으로는 명망 있는 기관으로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군사 요양원이라 불리며 실질적 권력이 없는 한직이었다. 성 주석 같은 요직과 비교하면 명예만 있을 뿐 한산하고 소외된 자리였다. 천댜오위안은 이 직책에 흥미를 잃고, 참의원 부원장이었던 왕수창과 함께 장기간 근무지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2.5. 만주사변시안 사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장제스는 동북 지역의 옛 군인들을 회유하고 재편성하기 위해 동북 선무사 행서를 설립하고 천댜오위안에게 이를 맡겼다. 그러나 당시 동북 3성은 이미 일본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임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천댜오위안은 사교적이고 말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동북 지역 군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그는 부상병 관리와 관련된 임무로 배치되었으나, 힘은 많이 들고 성과는 없는 골칫거리였다. 당시 전쟁 부상병들은 생계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고, 한 기관이나 관직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천댜오위안은 이 과정에서 부상병들로부터 원망과 불만을 듣는 등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천댜오위안은 군사위원회에서 "부상자 위로 위원회 주석"과 "점검 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그의 주요 업무는 전국을 순회하며 전장에서 고생한 군인들을 위로하고, 각 부대의 군비와 군자금 사용 실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병사의 월급을 가로채는 "유령 군인" 문제가 만연했고, 군비와 자금 관리의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강력한 배후를 두고 있어, 천댜오위안이 점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종종 지휘관들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천댜오위안은 익살스럽고 농담을 잘하는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서안 사건 당시에도 발휘되었는데 그는 장제스를 수행하던 고위 관리 중 한 명으로 함께 억류되었다. 사건 당시, 소총을 든 병사들이 장군, 성 주석, 원장 등 국민당의 주요 인사들을 서안 초대소 대강당으로 몰아넣자, 모두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천댜오위안은 긴장을 풀기 위해 느긋하게 웃으며 "여기에 미국산 최고급 크래커 담배가 있어요! 한 개에 5마오! 이 상황에서 이 정도 가격은 적당하지 않나요?"라는 농담을 던졌고 억류된 관리들 사이에서 어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천댜오위안은 자신의 방에서 담배를 모두 피운 후, 건너편 방에서 시가를 피우고 있는 장바이리(蔣百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 담배는 다 피웠으니, 당신 담배 한 개를 5마오에 사겠소. 괜찮소?"라고 말했고 병사가 그의 농담에 거칠게 꾸짖었으나, 천댜오위안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후 그는 병사들에게 화장실에 가겠다고 반복해서 요청했고, 억류된 다른 관리들과 정보를 교환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는 억류된 관리들 사이에서 널리 채택된 방법이 되었고, 화장실은 일시적으로 정보 교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곧 병사들에게 간파되었다. 병사들은 관리들이 화장실에 가면 뒤따라가 감시하기 시작했고, 정보 교환은 어려워졌다. 화장실은 한때 붐볐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2.6. 말년과 사망

천댜오위안은 평소 사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편에 중독되었다. 금단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다량의 모르핀 주사를 맞았고, 이로 인해 건강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1944년, 천댜오위안은 후두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당시 이 병은 불치병으로 여겨졌으며, 서양 의학에 대한 신뢰가 강했던 천댜오위안은 평소 중의학을 배척하며 서양 의학만을 신봉했다. 그러나 서양 의학적 치료는 그의 병을 오히려 악화시켰고, 병세는 점점 심각해졌다.

그의 병세가 위중해져 가족들이 장례 준비를 하던 중, 한 하급 관리가 찾아와 병의 원인을 중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며 원장님 병은 중의학에서 말하는 치아 폐결핵이고 저희 집안에 이 병을 치료하는 비법이 전해지고 있으니 꼭 시도해보고 싶다며 말했다. 가족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첫 번째 처방을 복용하자마자 천댜오위안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는 다시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일주일 후에는 식사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천댜오위안은 하급 관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그를 재생의 은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급 관리는 가족에게 올해 동지가 지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고 그때까지는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천댜오위안은 병세가 계속 호전되는 듯 보였고, 매일 마작을 즐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동지 이틀 전,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결국 동지 하루 전날인 1944년 향년 58세로 사망했다. 사후 국민혁명군 육군 일급 상장으로 추서되었다.

3. 평가

천댜오위안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능했고, 젊은 시절 장쭝창에게서 이를 배웠다. 그는 부하의 고충을 파악해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자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는 주로 고위 부하들에게 국한되었으며, 그의 선행은 자신의 명성을 쌓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군사참의원 상장 원장으로 재직할 때는 업무에 점점 소홀해졌으며, 행정과 문서 업무를 비서실에 맡기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하의 실수나 문제 발생 시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천댜오위안은 민국 시기의 맹상군을 본받아 식객들을 환대하며 의리를 중시하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의 집에서는 매 끼니마다 두세 개의 큰 식탁이 차려졌고, 옛 부하와 친구들이 식사에 초대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물가 상승과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식사의 질이 떨어졌다. 손님들의 식탁은 초라해졌지만, 천댜오위안은 여전히 자신의 침실에서 고급 요리를 즐겼다. 이로 인해 손님들 사이에서는 조롱과 불만이 일었고, 그의 환대 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의 옛 부하들은 그가 "호객과 의리를 중시한다"고 스스로 칭찬할 때마다 이를 웃음거리로 여겼다.

천댜오위안은 겉으로는 털털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치밀하고 계산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군사적 재능이 평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이유가 되었는데 특히 각 군벌과 정치 세력의 관계를 조율하고 정세를 예측하는 데 탁월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도 볼 수 있듯 인간적으로는 치졸하고 약삭빠른 면모가 많았고 결국 눈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자 좌천되고 말았다.

4. 여담

5. 관련문서

6.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