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0 09:34:56

채규철

파일:채규철.jpg
이름 채규철(蔡奎哲)
본관 평강 채씨[1]
출생 1937년 10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 고산면
사망 2006년 12월 14일 (향년 70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학력 대광중학교 지세포분교[2]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서울시립농업대학 (수의학 / 학사)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학 / 석사[3])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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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자 두밀리자연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다.

2. 생애

채규철 선생의 강의
1937년 10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 고산면에서 아버지 채종묵(蔡鍾默, 1916. 9. 8.~?)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죽순(金竹荀, 1915. 4. 13.~2005)[4]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1945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현 함흥시 금실동)으로 이주했다.

채규철의 집안은 조부 채동주(蔡東胄, 1882. 2. 25.~?) 대부터 개신교를 믿기 시작했는데, 채동주는 순회 전도사로 일하며 각지를 돌아다녔고, 아버지 채종묵과 어머니 김죽순은 신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이들은 각각 영생고등보통학교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채규철이 태어나던 당시에 채종묵은 고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인 1938년 조선총독부 3종 훈도시험에 합격해 신북청소학교 훈도로 발령이 났고, 1939년에는 함흥 영생소학교에 부임했다. 그 뒤 1945년 소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전도사로 전업했다. #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하여 통영군 일운면(현 거제시 일운면)에 정착했다. 일운면 지세포리에 위치하던 대광중학교 지세포분교를 졸업하고 거제고등학교에 입학해 1년을 다녔으나 2학년 때 상경하여 대광고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농촌운동에 뜻을 두고 서울시립농업대학[5] 수의학과에 입학해 졸업한 뒤 1961년 충청남도 홍성군의 '풀무학교'에서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65년 덴마크유학하여 '하슬레브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국민고등학교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귀국한 뒤 1968년 장기려 박사와 함께 민간의료보험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부산시에서 자동차 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어[6] 한쪽 눈을 잃고 용모가 크게 훼손되어 30회에 걸친 수술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의료보험조합 사업을 재개하고, 간질환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장미회'를 결성하여 의료복지 운동을 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5년에는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를 창립하여 이사직을 맡기도 했으며, 1986년 경기도 가평군에 대안학교인 두밀리자연학교를 열어 '어린이가 바로 세상'이라는 철학을 실천하였으며, 주말마다 전국에서 모이는 아이들은 채규철 선생을 '이티(ET)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7]

2001년에는 공동체 평화운동 단체인 '철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 상임대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소나기 30분》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사람은 두 번 죽지 않는다》와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어린이들을 위한 《ET 할아버지와 두밀리자연학교》,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번역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등이 있다. 2000년에는 '제1회 풀뿌리 환경상'을 수상하였으며, 2005년에는 '제4회 교보환경문화상의 환경교육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티 할아버지 채규철은 임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 활동을 펼쳤으나, 2006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향년 70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

한창 화제를 타며 방송에도 출연하고 각 지역을 돌며 강연을 하며 자신이 사고로 인해 화상을 심하게 입었음에도 멘탈이 강했고 오히려 수십차례 수술을 받은 일화를 설명하며 "내가 이래 봬도 비싼 몸이다."[8], "하도 다림질을 세게 해놨더니 몆십 년이 지나도 얼굴이 늙지가 않는다"라고 농담까지 하면서 자신이 화상을 입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기도 했다.

3. 참고 문헌

채규철 - 네이버 지식백과

[1] 돈녕공파(敦寧公派) 29세 규(奎) 항렬.[2] 1954년 4월 1일 거제중학교 지세포분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가, 1960년 3월 18일 지세포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3] 석사 학위 논문 : 韓國 民間醫療保險에 關한 考察(한국 민간의료보험에 관한 고찰, 1974).[4] 김추성(金樞星)의 딸이다.[5] 지금의 서울시립대학교[6] 이 때 끝내주게 운도 없었는데, 농업활동을 하면서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차에 페인트를 한가득 실었는게 차가 전복되면서 하필이면 쏟아진 페인트를 채규철이 뒤집어썼고 정신을 차리려는 사이에 불이 붙자 온몸이 페인트 범벅이 된 채규철에게 삽시간에 불이 붙으며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7] 이티 할아버지라는 별명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채규철 선생 입장으로 보면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의 별칭이나, 채규철 선생이 이 별칭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1984년 개봉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作 영미권 영화인 'E.T.'의 주인공인 이티를 닮아서 아이들이 그렇게 붙였다고도 전해진다.[8] 수많은 재건수술로 인한 수술비를 말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