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21 15:56:50

지지(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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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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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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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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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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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前 축구인
파일:didi brazil.png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지지
Didi
본명 바우지르 페레이라
Waldyr Pereira
출생 1928년 10월 8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캄푸스 두스고이타카지스
사망 2001년 5월 12일 (향년 72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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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4cm
직업 축구 선수 (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마두레이라 EC (1947~1949)
플루미넨시 FC (1949~1956)
보타포구 FR (1956~1959)
레알 마드리드 CF (1959~1960)
보타포구 FR (1960~1962)
스포르팅 크리스탈 (1962~1964)
보타포구 FR (1964~1965)
CD 베라크루스 (1965~1966)
상파울루 FC (1966)
감독 스포르팅 크리스탈 (1962~1964)
스포르팅 크리스탈 (1967~1969)
페루 대표팀 (1968~1970)
CA 리버 플레이트 (1970~1972)
페네르바흐체 SK (1972~1975)
플루미넨시 FC (1975~1976)
크루제이루 EC (1977)
알 아흘리 SFC (1976~1980)
크루제이루 EC (1981~1982)
보타포구 FR (1983~1984)
클루브 알리안사 리마 (1986~1987)
방구 AC (1989)
국가대표 68경기 20골 (브라질 / 1952~1962)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경력2.3. 감독 경력2.4. 사망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관련 언사6. 사생활7. 뒷이야기8. 기록
8.1. 선수
8.1.1. 대회 기록
8.2. 감독8.3. 개인 수상
9. 둘러보기

1. 개요

브라질축구 선수 출신 감독.

1958년1962년의 대활약으로 브라질의 사상 첫 FIFA 월드컵 우승과 역사상 유이한 월드컵 2연패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클럽에서는 보타포구 FR에서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등의 동료들과 함께 활약했고 역시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 생애[1]

2.1. 어린 시절

지지는 캄푸스 두스고이타카지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지지는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길거리에서 땅콩을 팔다가 축구를 접했지만 큰 시련이 찾아왔다. 14살에 다리 부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치료 과정중에 세균에 감염된 것이다. 지지를 진찰했던 의사는 최악의 경우에 다리 절단의 가능성까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때 지지를 붙잡아줬던 사람이 바로 지지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지지를 간호하며 손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민간 요법으로 다리에 기름을 바르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다. 할머니의 이 정성이 빛을 보았는지 지지의 다리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지지는 회복하는 몇달간 휠체어에 앉아있어야만 했고 이후에 지지는 유스팀에서 뛰면서 약해진 다리 근력 보완을 위해 더욱 훈련에 몰두했다. 이후 전화위복으로 더 강력한 코어와 다리 근육을 얻게 되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지지는 1947년 마두레이라 EC에서 성인팀에 데뷔했고 1949년에 플루미넨시 FC에 이적하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플루미넨시는 1951년에 히우 주 리그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대부분의 브라질 팀을 비롯해 CA 페냐롤, 그리고 유럽 팀들도 참가한 국제 대회, 코파 리우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 시기의 지지는 항상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다녔는데 이에 언론인 네우송 로드리게스가 그에게 에티오피아의 왕자라는 별명을 헌사했고 이는 지지의 유명한 별명 중 하나가 되었다. 지지는 1956년까지 플루미넨시에서 활약했고 보타포구 FR로 팀을 옮겼다.[2]

당시 브라질의 이적료 신기록인 185만 크루제이루[3]에 둥지를 옮긴 보타포구에서 지지는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등 브라질 축구의 전설들과 함께 새 팀에서 1957년에 또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이 2년간 리그 64경기에서 40골을 넣었다. 결정적으로 1958년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8만 달러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되었다.
파일:알프레디 디 스테파노&지지&페렌츠 푸스카스.png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와 함께

처음 지지는 새 팀에 매우 만족해서 펠레를 마드리드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지에게는 팀의 중심이자 터줏대감들인 디스테파노, 푸슈카시와 공존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는데 결국 이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디스테파노와의 갈등이 심각했는데 팀의 확실한 코어이자 리더인 디스테파노는 지지의 존재를 매우 껄끄러워했다. 더 높은 지지의 연봉이 그들의 자존심을 긁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지지는 유러피언컵에서도 거의 출전하지 못했고, 리그에선 19경기 6골에 그쳤다.[4] 결국 역사적 기록인 유러피언컵 5연패의 현장이었던 햄든 파크의 피치조차 밟지 못한 지지는 유러피언컵 정상에 오른 것에만 만족하고 1시즌만 마드리드에서 보낸 후에 보타포구 FR로 복귀했다.

이때 지지는 팀을 떠나기 전, 디스테파노를 제외한 모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과 악수를 나눴지만 둘은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지지는 마지막에 디스테파노에게 칠레에서 다시 보자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디스테파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칠레에는 못 가! 넌 늙었고 네 선수 생활은 끝났다라고 차갑게 맞받아쳤다.[5]
그의 뛰어난 기술과 우아한 볼 컨트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상대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파괴적인 선수가 필요했고, 그는 그런 역할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지지는 패스에 능하고, 공격을 시작하는 선수다. 그는 궂은일을 하는 선수가 아니라 공격을 시작하는 데 능숙한 선수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 클럽의 빠른 템포에 적응하지 못했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27,500 달러에 지지를 다시 영입한 보타포구는 기존의 가린샤와 니우통 산투스 외에도 마리우 자갈루, 아마리우두, 콰렌치냐 등의 선수들이 더 추가되어 신구조화가 잘 어우러진 히우 주 리그의 맹주였고 지지는 팀의 중심을 잘 잡아줬다. 보타포구는 1961년과 1962년, 주 리그 2연패와 토르네이우 토너먼트 우승을 거뒀고 지지는 맹활약을 펼쳤다.

지지는 1962년에 페루의 클루브 스포르팅 크리스탈에 건너가 선수 겸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이후에 그는 보타포구 복귀, CD 베라크루스를 거쳐 1966년에 상파울루 FC에서 4경기 출전에 그치자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

파일:지지(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png
셀레상의 브레인

지지는 특히 국가대표팀에서 1954, 1958, 1962, 총 3번의 FIFA 월드컵에 출전해서 뒤의 2 정상에 올랐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지지는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프리킥 골, 유고슬라비아와의 두번째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어 브라질의 조 1위, 8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브라질의 8강전 상대는 당시 최강팀이었던 매직 머저르였고 헝가리에 2:4로 패해 탈락했다.[6]

지지의 커리어에서 빠질 수 없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지금에서야 펠레,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자우마 산투스, 지투, 바바, 마리우 자갈루, 지우마르 등 슈퍼스타들이 모여있다고 평가받지만 당시 브라질은 강호기는 했지만 우승권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브라질은 4조에서 오스트리아, 소련을 격파하고 8강에 올랐고 웨일스펠레의 결승골로 잡아내며 4강에 올랐다. 이때까지 지지는 바바, 펠레, 가린샤, 마리우 자갈루 등 공격진에 양질의 패스를 공급하는 게임메이커로서 공격을 지휘했다. 프랑스와의 4강전은 난타전이었고 지지가 역전골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승기를 잡았다. 브라질은 펠레가 해트트릭[7]을 폭발시키며 5:2 대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의 상대는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렌나르트 스코글룬드가 이끄는 개최국 스웨덴. 브라질은 다시 한번 스웨덴을 상대로 5:2 대승을 거두며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 이 월드컵에서 지지의 활약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FIFA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지지를 1958년 월드컵 브라질의 왕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8][9]#

이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언론인 가브리엘 하노는 지지는 이 경기에서 52회의 패스 중 단 한차례의 미스도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그에게 경의를 담아 미스터 풋볼의 별명을 헌정했다.
파일:지지와 펠레.png
쥘리메컵을 들고있는 지지와 펠레

지지는 플레이 메이커로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 우승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미유럽에서 열린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대회이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도 지지는 건재했다.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맡아 조별리그 2차전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펠레가 부상당한 이후부터 생긴 공백을 아마리우두, 가린샤와 함께 훌륭하게 메웠다. 지지는 펠레가 빠지면서 생긴 공격의 파괴력을 줄이기 위해 이전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맡았고 지투 역시 부담해야 할 부분이 넓어졌다. 8강 잉글랜드전에서 지지는 당시 만 21세의 초짜였던 바비 무어와 그의 센터백 파트너 론 플라워스에게 축구 레슨을 제대로 시켜주면서 경기 내내 가지고 놀았다. 브라질은 순조롭게 결승까지 진출했고 결승전에서 요제프 마소푸스트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격파, 1930년대 이탈리아월드컵 2연패 기록을 재현했다. 33세의 지지는 칠레 월드컵을 끝으로 정상에서 노란 유니폼을 반납했다.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브라질은 1953년[10] 1957년, 1959년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1953년의 지지는 페루전에서 자신을 퇴장시킨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공격하려다 경기장 안전 요원들에 제지당하고 끌려나갔지만[11] 1957년의 지지는 6경기 8골 2어시스트 1해트트릭의 미친 기록을 찍으며 최고의 토너먼트 선수로 선정되었다. 1959 대회에서도 베스트팀 수준의 활약을 보였다.

지지의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 커리어를 정리하자면 1958년의 MVP급 활약을 포함한 월드컵 우승 2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3회 준우승으로 최상급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지는 10년간 국가대표팀의 20골 중 12골을 프리킥으로 넣은 당대 최고의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2.3. 감독 경력

1962년, 지지는 페루의 스포르팅 크리스탈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1970년 월드컵 당시 지지는 41세의 젊은 감독이었는데 지역 예선에서 페루를 이끌고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월드컵 본선에 올라갔다. 이는 12년 전에 아르헨티나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던 페루의 복수였으며 당시 페루에는 테오필로 쿠비야스, 우고 소틸, 엑토르 춤피타스 등의 젊은 피들이 국제 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그러나 페루의 8강 상대는 지지의 조국이자 옛 동료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이었다. 지지는 젊은 피들을 지도하며 반란을 꿈꿨지만 당시의 브라질과 페루의 전력차는 현격했다. 결국 페루는 브라질에 2:4로 패하며 4강 진출의 꿈은 접었지만 페루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성공적인 성과였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펠레와 포옹하는 지지의 사진은 브라질 축구 덕후들에게 명장면이기도 하다.

지지는 아르헨티나의 명문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자리에 취임했지만 라이선스 문제로 아르헨티나에 오래 머물 스 없었다. 대신 튀르키예의 페네르바흐체에서 1974년의 쉬페르리그튀르키예 쿠파스 더블을 포함한 리그 2연패를 이끌며 클럽 감독 커리어 전성기를 누렸다.

지지는 1990년에 척추 수술로 인해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2.4. 사망

지지는 2001년, 암과 폐렴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지지는 장과 방광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지 이틀 만에 사망해서 의료 사고의 의혹이 있었고 일부 기록에는 대장암, 간암으로 혼재되어 기록되어 있다. 레알 마드리드 CF는 지지의 사망으로 경기 전 1분간 묵념을 가졌다.

3. 플레이 스타일


지지의 선수 시절 주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 또는 하프백, 말년에는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서 뛰었다.
나는 뛸 필요가 없다. 40미터 떨어진 곳에서 공을 받는데, 5미터 떨어진 곳으로 패스하기 위해 35미터를 뛰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5미터만 뛰어서 최소 40미터는 패스할 수 있는데 말이다.
지지

지지는 우아하고 기술적인 선수로 유명하지만 그 바탕에 뛰어난 지능, 넓은 시야와 정교한 패스, 지칠 줄 모르는 체력[12], 탄탄한 코어 힘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 우아함과 기술이 빛을 발했다. 특히 공중으로 날아오는 공을 발로 다루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으며 빠르게 오는 공을 한 번의 감각적인 퍼스트 터치로 연결해 사방을 마킹하던 수비수들을 속이곤 했다. 일명 '샤페우' 라고 불리는 두 발로 공을 잡아 머리 위로 넘기는 볼 컨트롤 기술을 당시 선수들은 '지지 플레이' 라고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다. 지지뉴, 가린샤, 펠레처럼 화려한 드리블을 주무기로 삼지는 않았지만 정교한 기술을 이용한 볼키핑과 탈압박에 능했다.

다만 지지는 평균적인 스피드에 몸싸움을 그리 좋아하진 않아서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상대들에게는 몸싸움과 공중볼 경합에서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여느 다른 플레이메이커들처럼 수비력 자체는 전문 수비수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효율적으로 쓸 줄 알던 체력과 위치 선정을 통한 패스 길목 차단 능력이 뛰어나서 충분히 수비적인 역할도 잘했지만 태클이나 거친 경합등의 수비는 파트너 지투 등에게 맡기고 전적으로 플레이메이킹에 집중했다. 템포가 느렸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당시의 축구가 현대보다 대체적으로 템포가 느렸기 때문일 뿐, 상황에 따라 템포를 조절하는 능력은 그 시대 기준으로 매우 뛰어났다. 다만, 지지는 잠시 공을 멈춰놓고 이후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시대의 축구 템포와는 거리가 있다.

프리킥과 중거리 슛에도 뛰어났다. 상술했듯 국가대표팀에서의 10년간 12골을 프리킥으로 넣는 등 정확한 프리킥을 구사했으며 오늘날 많은 선수들이 즐겨 구사하는 뚝 떨어지는 프리킥(Folha Seca)를 자체적으로 개발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는 1956년 무렵, 지지가 발목 부상으로 인해 고생할 때 우연히 나온 결과물이었다. 발목 부상으로 인해 흔히 발등 전체로 차던 인스텝 킥 대신 약간 발 안쪽의 뼈부분으로 킥을 하다보니 살짝 공이 떨어지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지지는 멘탈에서도 강인한 면모가 있었다. 자갈루의 회고에 따르면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닐스 리드홀름에게 선제골을 먹히자 브라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지는 공을 센터 서클에 옮겨놓으면서 우리가 얘들보다 나아. 걱정 마. 곧 경기를 뒤집을 수 있을거야라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곧 그 말대로 되었다.

항상 논리적인 사람이어서 그가 하는 말들은 동료나 코칭 스태프는 물론 구단 경영진조차 귀를 기울였다.

4. 평가

로타어 마테우스,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함께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이자 남미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꼽힌다. 펠레, 가린샤와 함께 전성기 브라질를 대표하는 인물로,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아 브라질의 월드컵 2연속 우승을 견인한 레전드이다.[13]

파일: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지지는 1960년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1위에 이름을 올렸다.

5. 관련 언사

나는 지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결코 그만큼 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고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처음으로 샀던 사진들도 모두 그의 사진이었다.
펠레
지지는 제게 프리킥과 슈팅 기술을 가르쳐준 분입니다. 제가 오른발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양발을 똑같이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감독님 덕분입니다.
테오필로 쿠비야스

6. 사생활

지지는 평생 2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부인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비비도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두 부인과의 관계는 썩 원만하지는 못했는데 마리아는 그와 이혼 후 분노로 집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직접적인 이혼의 원인은 지지의 불륜이었는데 상대는 여배우 기요마르 바티스타였다. 두번째 부인과 지지는 서로 질투했지만 그래도 평생을 같이 보냈다. 기요마르는 지지를 질투해서 그의 양복을 모두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고 한다. 기요마르는 지지가 사망한 후 37일 후에 사망했다.

7. 뒷이야기

  • 지지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축구 경기장,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의 1호 득점자이다. 이 경기는 1950년 월드컵 개장 직전인 1950년 6월 16일에 히우와 상파울루 주 선발팀의 친선 경기로 치러졌다. 마라카낭의 공식 경기 첫 득점자는 당해 월드컵 1호골의 주인공 아데미르이다.
  • 1957년 히우 주 리그가 치러질 때 지지는 보타포구가 우승하면 마라카낭에서 라랑제이라스[14]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걸어가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마라카낭에서 라랑제이라스까지의 거리는 대략 9.5km, 이 행진에 보타포구 서포터 5천명이 화답해서 지지와 같이 걸었다.

8. 기록

8.1. 선수

8.1.1. 대회 기록

8.2. 감독

8.3. 개인 수상

  • 발롱도르 드림팀 3군: 2020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브라질 드림팀: 2021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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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위키피디아, 트랜스퍼마크트, 11v11[2] 이 이적에는 그때도 브라질에 남아있던 인종 차별 문제가 터졌다는 설이 있다.[3]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보타포구는 대출은 물론, 구단 수뇌부의 적금까지 깨는 지극정성을 들였다.[4] 그런데 그의 포지션이 직접적으로 골을 넣는 포지션이 아닌 인사이드 포워드나 하프백임을 감안하면 저 골기록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골기록들이 평생 저 수준이었으니 당시에는 브라질과 유럽의 실력차가 크지 않았다는 좋은 반증이 될 수 있다.[5] 그러나 정작 나이가 2살 더 많은 것도, 실제로 칠레에 부상으로 못 간것도 디스테파노 본인이었다. 반면 지지는 FIFA 월드컵 2연패를 이루며 결과론적으로 디스테파노의 말과 반대로 현실이 이뤄졌다.[6] 바로 이 경기가 베른의 전투로 FIFA 월드컵의 난투극 역사에 영원히 남은 그 경기다.[7] 이 해트트릭은 월드컵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이며 17세의 나이를 감안하면 월드컵 불멸의 기록 중 하나이다.[8] 당시엔 월드컵 개인 수상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골든볼(MVP)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만약 골든볼 제도가 있었다면 지지는 충분히 수상 가능한 퍼포먼스를 보였다.[9] 다만 프랑스 풋볼 측에서는 발롱도르 재평가에서 1958년 수상자를 지지가 아닌 펠레로 선정했다. 다만 이는 월드컵에 한정된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발롱도르 재평가이므로 지지가 월드컵 MVP급 퍼포먼스를 보인 것에 대한 이견은 아니다.[10] 현재의 제도라면 골득실까지 따져서 브라질이 우승을 차지했겠지만 이 대회에선 승점만을 봐서 최종전을 치렀다. 최종전에서 브라질은 파라과이에 2대3으로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11] 그리고 브라질이 이 경기에서 페루에 0대1로 패했다.[12] 펠레의 자서전에 의하면 니우통 산투스1958년 월드컵브라질 대표팀 내에서 최고의 체력을 가졌고 그 뒤를 지지, 자우마 산투스가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훗날 브라질의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은 제르송이 이어받게 된다.[14] 여기에는 지지가 직전에 뛰었던 플루미넨시의 본부 이스타지우 다스 라랑제이라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