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천로(天老) |
호 | 백운(白雲)·송파(松波) |
본관 | 신안 주씨[2] |
출생 | 1875년 3월 11일[3] |
강원도 울진현 근북면 매정동 (現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4]# | |
사망 | 1936년 9월 16일 |
만주국 빈강성 영안현 해림보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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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주진수는 1875년 3월 11일 강원도 울진현 근북면 매정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에서 신안 주씨 교수공파 12세손인 아버지 주병휘(朱秉輝, 1861. 5. 12 ~ 1933)[5]와 어머니 담양 전씨(潭陽 田氏, 1855. 2. 1 ~ ?)[6]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진현 원남면 금답동(現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7]어려서 한학과 지리·역사·수학 등 신학문을 독학하고, 『독립신문』·『황성신문』·『매일신보』 등을 읽고 민족의식을 키웠다. 1896년경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1907년 10월 관동학회 회원과 울진 지역민인 곽종욱·남상정·전오규(田五圭)·주병웅·진규환(陳奎煥)·전주석·최정순 등과 울진군 원남면에 울진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인 매화만흥(梅花晩興)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또 황만영이 평해군 원북면(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세울 때도 자금을 지원했다.
1909년 봄, 한성부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인 양기탁·안태국·이동녕 등이 만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인 총감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지령을 받았다. 이후 상경해 1910년 8월에는 김구·양기탁 등과 함께 경성부에 조선총독부에 대항하는 도독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간도로 가서 독립군 기지 후보지 물색 및 군자금 마련, 이주민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 중 1911년 1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 유동열·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동휘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해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8]
출옥 후 1912년 9월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9]에 정착하여, 이시영·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운영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조선인들을 규합, 삼위기사단, 지인단, 애국부인회, 소년애국단 등을 조직하여 조국 광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에서 조선 동포들을 모아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신참(新站)[10]·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 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 5일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만주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현정경·곽종대(郭鍾大)·오동진·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헌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 및 선전부원에 선임되어 정의부의 산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후 1936년 9월 16일 만주국 빈강성 영안현 해림보에서 별세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신안주씨대동보 4권 1672쪽에는 朱[2] #. 웅천파-교수공파 12대손 진(鎭) 항렬. 신안 주씨 31세.(족보)[3] 1911년 7월 2일 판결문에는 7월 11일생, 187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안주씨대동보 4권 1672쪽 참조.[4] 독립유공자 주병웅·주병책·주진욱도 이 마을 출신이다.[5] 신안주씨대동보에는 朱秉徽로 등재되어 있다.[6] 전연기(田淵基)의 딸이다.[7] #[8] 당시 경성부 동부 연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 살고 있었다.[9]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류허현(柳河縣) 쩌우자촌(鄒家村).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과의 거리는 약 6km에 불과하다.[10] 현 함경북도 무산군 차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