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4:42:05

자유중국(스탈린의 편지)

1. 개요2. 역사3. 정치4. 경제5. 치안6. 외교
6.1. 동아연방과의 관계6.2. 미국과의 관계6.3. 그 외 나라들과의 관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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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성의 대체역사소설 스탈린의 편지에 나오는 가공의 국가. 국토 면적은 400만 평방킬로미터이며, 인구는 6억 명, 수도는 베이징이다.[1] 국기는 현실의 중화민국과 같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쓴다.

현실처럼 동아시아에 위치해있지만, 현실의 중국 영토보다 훨씬 쪼그라들었으며, 국토가 이웃나라동아연방에게 둘러싸인 모습이다.

2. 역사

1952년 동북아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3년 동안 중국 대륙에서 미군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미 국무성의 전략 부문 전문가들은 국공내전이 아시아 전체의 불안을 가져온 것으로 보고 중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변방의 소수민족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산권 강경파인 폴 니체 국무성 정책실장이 기발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만주, 내몽골,[2] 위구르, 티베트, 한국을 합쳐 5개국 연방을 만들어 중국을 외곽에서 둘러싸고 소련까지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국방성, 국무성을 만족시켰고 즉각 채택되었다. 군정 기간 동안 미군을 비롯한 미군 60만 명이 중국과 한국에 주둔하며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1953년 3월, 중국분할안이 공개되고, 당연히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국민당 고위층은 결사반대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군정장관은 장제스를 불러 분할안에 반대하면 군정종식 후 중국의 통치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수락한다.

1954년 4월 25일, 중국에서 미군정이 끝나가던 해에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의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소수민족 5개국 연방 결성을 위한 13번째 회담이 열린다. 여기서 연방 결성의 최대 난관이었던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최종안이 제시되며 동아연방이 구성되고, 자유중국은 기존 중국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다. 게다가 칭다오를 일본에게 200년간 조차하게 되고, 웨이하이는 미국령이 된다.

이듬해인 1955년에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반공세력을 형성하는 자유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8개국[3]의 집단방위조약인 동아시아조약기구를 설립한다. 동아시아조약군은 자유중국과 동아연방에 주둔한 25만 명의 미11군과 각국의 상비군을 주축으로 구성됐고 최고사령부는 베이징에 있으며 역대사령관은 미군이 맡게 되는 등, 북대서양 조약 기구아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였다.

1979년~1983년 동아연방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취임했을 때 자유중국은 티베트를 침공하지만 연방군대에 의해 격퇴된다.

그리고 2010년 동아연방 월드컵 개최에 자유중국이 참석하고, 16강까지 진출하는데 이때가 현대의 시점. 중국이 사상 최초로 16강에 진출해 축구 열기가 대단히 끓어올랐다. 그러나 경기 당일날 연방에 거주하는 중국인들과 자유중국인들이 마오쩌둥오성홍기가 그려진 카드섹션을 하고 의용군진행곡을 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고, 경찰을 투입하여 이들을 제지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화염병까지 던져대면서 경기를 방해하여 도중에 경기가 중단된다. 그 시점에서는 동아연방이 3:0이라는 일방적인 점수로 앞서고 있었는데, FIFA에서는 관중 입장 없이 제3의 장소에서 잔여시간만큼 경기를 한다고 발표했으나 자유중국 측은 완전 재경기를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않자 아예 선수단을 철수시켜버렸다. 그 덕인지 동아연방은 무사히 8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중국인들이 대대적으로 동아연방을 비난하는 시위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3. 정치

현실의 중국과 반대로 국민당 정부의 계보를 잇는다. 자세한 정치체제는 언급되지 않지만 현실의 중화민국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며, 언론의 자유가 살아있는 민주국가라는 언급이 나온다.

작중에서 민주한족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석의 42%를 차지하여 선거혁명이라고 중국이 난리난 일도 나온다. 이들은 순수한 한족만의 독립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아직도 중국에 남아있는 수십 개의 소수민족을 모두 쫓아내고자 하는 당이다. 공약은 구체적으로 서남부 변경지대의 3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에 소수민족 4,000만 명을 몰아넣고 땅덩어리를 떼어주겠다는 것이다.

4. 경제

동아연방과 비교할 때 끊임 없는 내전과 테러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언급이 나왔을 뿐더러, 미국이 자유중국 정부가 일부러 테러를 방치한다고 판단해 한동안 모든 중국산 물품의 금수조치를 내린 전적도 있다. 그 바람에 2년 간 중국의 수출공장들이 거의 모두 파산했다고 하니 경제 상황도 개판이고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위상도 현실보다 훨씬 작을 것으로 보인다.

5. 치안

자유중국은 동북아전쟁 이후로 내전과 테러에 시달리며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작중에서도 자유중국은 테러가 끊이지 않아 치안이 불안정하다고 언급되는데, 동아연방 역시 불안정한 치안과 테러가 빈번하기에 둘은 비슷한 신세라고.

6. 외교

6.1. 동아연방과의 관계

자유중국은 중화사상에 입각해 동아연방의 결성 전부터 동아연방 결성에 반대해왔지만, 미국이 동북아전쟁 이후에 새롭게 세운 세계전략에 따라 자유중국과 동아연방은 함께 동아시아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소련에 대항해야 했다. 그래도 역시 사이는 안 좋아서 1979년~1983년 사이에 자유중국군이 동아연방의 티베트국으로 쳐들어갔으나, 당시의 연방대통령 박정희가 연방군대를 동원해 이를 격퇴하면서 물러나게 된다.[4]

이후로도 동아연방 내에 거주하는 중국인 문제와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동북아전쟁에서 중국이 입은 피해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심이 겹쳐 2010년 현재까지도 이 두 나라 간의 앙금은 해소되지 못한 상태다. 게다가 미국과 동아연방에 증오심을 품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펑더화이주의자가 되어 테러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더더욱 현실은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양국 정부는 펑더화이주의자들의 테러와 미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다.

6.2. 미국과의 관계

현실의 사우디아라비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전쟁 이후 양국 정부는 공산 국가 견제와 테러 방지 등을 목적으로 협력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반미 감정이 현실보다 더 드센 것으로 보인다. 1993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중국계 미국인들이 러시아제 소형 핵무기를 터트려 맨해튼을 유령의 거리로 만든데다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대놓고 지지했다고 하니 미국 입장에서는 열불이 뻗칠 것이다.

6.3. 그 외 나라들과의 관계

근래 들어 동아연방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자 주변 약소국들이 동아연방에 가입하려고 적극적으로 대쉬하고 있는데, 소설에서 언급되는 나라로는 네팔, 부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 있다. 특히 부탄 같은 경우는 현실에서도 반중 감정이 쩔어주는 나라 중 하나인데, 동아연방에 가입하려는 것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처럼 주변국과의 관계는 좋지 않은 듯.

게다가 중국인들이 뉴욕 원폭 테러를 지지하거나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 펑더화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벌였다는 언급도 나오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중국은 국제왕따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태도와 별개로 국민들이 국제적인 테러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고립될 여지가 다분한 일이기 때문. 더군다나 경제 상황도 안 좋다고 추정할 만한 설정들이 많아 현실에 존재하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또는 대만(중화민국)과는 반대로, 이 세계관의 자유중국과의 관계가 좋아봐야 이익이 별로 없을 것이다.


[1] 이 부분은 일종의 고증오류이다. 국공내전에 패배해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상징성을 위해서는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지는 게 들어맞다.[2] 중국의 자치구인 내몽골 자치구를 의미한다. 당시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이긴 했지만 한국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몽골은 냉전이 끝난 이후 원래 동아연방에 속해 있던 내몽골과 통일하는 식으로 연방에 가입한 듯하다.[3] 동아연방을 구성한 자치공화국 5개국을 합한 숫자.[4] 현실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반대로 중화민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장개석 대만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뉴스로도 내보내고 조문단까지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