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7-29 23:13:03

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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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 중국의 형벌
2.1. 묵형(墨刑)2.2. 의형(劓刑)2.3. 월형(刖刑)2.4. 궁형(宮刑)2.5. 대벽(大辟)
3. 당률의 5형
3.1. 태형(笞刑)3.2. 장형(杖刑)3.3. 도형(徒刑)3.4. 유형(流刑)3.5. 사형(死刑)
4. 관련 문서

1. 개요

오형()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범죄자에 대한 5가지 형벌을 말한다. 삼황오제 시기 전설상의 법관인 고요가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2. 고대 중국의 형벌

형(刑)은 원래 신체를 영구적으로 훼손하는 형태의 처벌을 의미하는 글자였다.[1] 전국시대 무렵에는 벌금·징역·유배 등의 처벌도 형(刑)으로 포괄되었으나, 별다른 수식어 없이 '刑'이라는 글자만 단독으로 쓰였을 경우에는 기존에 써온 신체를 훼손하는 처벌인 사형과 육형(肉刑)을 가리켰다. 이에 따라 '오형(五刑)'의 범주에도 벌금·징역·유배 등의 처벌은 포함되지 않고 사형과 육형으로 거론된다.

이에 관해 일본의 역사학자 도미야 이타루(富谷至)가 '추방'의 관점에서 신체훼손형인 오형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민족들이나 하는 풍습인 문신을 새기는 묵형(경형)을 문명 사회에서 추방(야만인화) → 코를 잘라 얼굴을 훼손하는 의형은 인간 사회에서 추방 → 다리 힘줄을 끊어 걸을 수 없게 만드는 월형은 동물계에서 추방 → 생식 능력을 박탈하는 궁형은 생물계에서 추방 → 목숨을 박탈하는 대벽(사형)은 이승에서의 추방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당시 형벌은 어느 하나가 단독으로 집행되는 예가 드물었는데, 진나라에선 과실범이 아닌 범죄는 육형과 노역형[徒]를 병과해 처벌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육형을 당한 사람은 '형인(刑人)'으로 부르며 인간 미만의 존재로 취급했으며, 이는 억울하게 육형을 받은 경우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진나라의 율령을 살펴보면 아예 제도적으로 육형을 받은 사람을 차별하는 조항이 제정되어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실제로는 대부의 이상의 신분은 형(육형)을 집행하지 않는 원칙을 세웠다거나 달리 이러한 처벌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마련했기에, 육형과 노역형이 무조건 집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문제가 육형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나, 그 이후에도 사형을 면해준다는 명목 아래 부분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파악되고, 육형 부활이 논의된 적도 여러 번 있어서 묵형(자자형)이 재시행되기도 했다.

오형 또한 어느 한 종류만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병과되기도 했는데, 일례로 이사는 모든 오형이 종합선물세트로 집행되어 단계별로 육형을 당한 뒤에 최종적으로 요참형으로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집행자의 의지에 따라 여러 가지 형을 복합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주로 역적죄 같은 중형의 경우에 적용되었다. 한나라 건국 이후 숙청당한 한신, 팽월 등의 삼족이 이런 오형 종합선물세트 및 채찍형까지 알차게 당한 후 참수되었는데 이후에 이들을 숙청한 장본인인 여태후가 집권한 후에 처형시에 오형을 부가하는 형벌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사형 집행 전에 형벌을 더 부가하는 관습은 여전히 남아 사형 집행 전에 장형이나 채찍형을 시행하는 경우가 근대까지 공공연히 시행되었다.

2.1. 묵형(墨刑)

먹글씨로 죄명을 신체에 새기는 문신형이다. 가장 가벼운 형벌이지만, 이 형벌 또한 육형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진나라에서는 육형이 집행된 범죄자는 노역형 형기가 만료되더라도 일반인 신분을 회복하지 못하고 '은관(隱官)'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다뤄졌는데, 아예 제도적으로 일반인과 차별하여 불이익을 주는 것이 규정된 신분이었으며, 심지어 관리의 실수로 인해 육형이 집행되었더라도 은관이 된다는 율령 규정까지 확인된다.[2]

당시에 약 1000여가지 범죄가 묵형의 대상이었다.

이 형벌은 경형(黥刑)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나온 말이 경을 치다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경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초한쟁패기의 군웅 영포가 있다. 영포는 원래 평민이었는데 소년 시절에 누군가가 그의 관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후에 왕이 될 상이라고 말했으며, 이후 법을 위반하여 경형을 받고갔는데, 이때 "옛날에 내 얼굴을 보고 누군가가 형벌을 받은 후 왕이 될 관상이라고 했는데 이거구나!"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노역형을 수행하기 위해 여산(麗山)으로 끌려간 뒤 반진전쟁이 터져 진나라가 사실상 무너지자 동료 죄수들을 이끌고 세력을 일으키게 되는데, 경형을 받은 전력 때문에 '경포(黥布)'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게 되었고, 이후 항우 편에 붙어서 진짜로 구강왕(九江王)이 되었다가 유방 편에 붙은 다음 유방한테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해 죽는다.

손빈은 빈형과 함께 묵형을 동시에 받았다.

한문제가 육형을 폐지하면서 제도적으로 육형을 받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규정들도 함께 철폐되었으나, 도망 노비나 무기수 등을 대상으로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여전히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며, 한나라 이후의 왕조에선 묵형이 부활하여 재시행되기도 했다. 비록 은관과 같은 제도적인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하더라도 묵형을 받게 되면 감추기 어려운 부위에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만큼 당연히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할 수 없었고, 문신을 가리기 위해선 남들과 다른 복장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사시 추적당하기 딱 좋다.

원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행되었으나 원나라 때 몽골의 풍습[3]이 들어오면서 문신을 얼굴 대신 팔꿈치에 새기는 것으로 바꾸었고, 특히 여자에게는 아예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원의 법전에 영향을 받은 대명률에도 여자에게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생겼다. 조선 영조 연간에는 아예 남자에 대한 자자형도 폐지하였다.

송나라, 정확히는 북송 시대를 다룬 수호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형벌인데, 주인공의 대부분이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이다 보니 이 형을 받은 인물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양산박의 두목인 송강. 이외에도 송나라 당시 법률 상 도둑질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등 중범죄를 저지를 경우 유배를 보내면서 얼굴에 먹자를 뜨고, 등허리에 매를 때린 뒤 목에 칼을 차고 먼 고장의 노성(교도소)로 보냈기 때문에, 비중 있는 주인공들 상당수가 이 형을 받았다. 표자두 임충, 청면수 양지 등.

다만 이렇게 얼굴에 먹자가 남으면 전과자란 의미였으므로 저잣거리에 나서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후 양산박에 합류한 신의 안도전이 먹자를 지워주는 시술을 해 준다. 독한 약을 먹자에 발라 살을 썩게 한 뒤, 좋은 고약을 붙여 새 살이 돋게 하고 거기에 고운 금과 옥을 부수어 발라 살결이 원래대로 돌아오게 만드는 식. 오늘날에 피부과 시술과 유사한 방식이다. 이 덕분에 송강 일행은 관아의 감시를 통과해 도성인 동경 개봉부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낭자 연청이사사의 도움으로 휘종 황제를 만나 귀순할 수 있었다.

2.2. 의형(劓刑)

를 베어내는 절단형이다. 한자 모양도 깔끔하게 (鼻)+(刀). 비형(鼻刑)이라고도 부른다. 코를 벤다고 죽는 일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지만,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용모에 끔찍한 손상이 가해지므로, 심적 충격이 크다. 원래 코를 베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명예형의 의미도 크다.

법치주의자 상앙은 엄격한 법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진의 태자였던 영사[4]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사가 법을 어기자 대신 스승이었던 공자(公子) 영건[5]과 공손가를 잡아 그들의 코를 베고 시종을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 이 이후로 영건은 영원히 은둔했으며 영사는 상앙에 대한 증오를 품었고, 영사가 즉위한 뒤로 숙청당하는 것이 확실해지자 진나라를 탈출하려 했으나 본인이 만든 법에 걸려 탈출에 실패하고 최후의 발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로잡혀서 자신이 고안한 거열형에 처해졌다.

당시에 약 1000여가지 범죄가 의형의 대상이었다.

이 형벌은 동로마 제국에도 있었는데 황위계승전에서 패배하거나 역적질을 한 권력가를 실각시킬 때 이런 형벌을 썼다고 한다. 나름대로 이유도 붙였는데 '타국은 그냥 죽이지만 우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코를 베는 것 정도로 형벌을 줄였답니다'라는 이유였다. 여기에는 신체가 훼손된 자는 황제와 같은 공적인 지위를 수행할 수 없다는 당대의 사회적 인식도 거들었다. 즉, 황제를 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강력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 같이 이러고도 복위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는 재범자의 경우에는 그냥 죽여서 영원히 복귀를 못 하도록 했으며, 초범자는 좀 더 사망 확률이 높고 자신의 능력을 복구하기 힘든 눈을 뽑는 형벌로 대체하였다.[6]

인도에서도 이 형벌은 간통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행해졌다. 이 잘린 코를 복구하기 위해 고안된 이마의 살을 돌려 붙이는 절편술은 최초의 성형수술로 기록된 바 있다.

2.3. 월형(刖刑)

뒤꿈치를 잘라내는 절단형이다. 아킬레스건과 그 주변을 통째로 날리는 것으로, 이 형벌을 받으면 제대로 걷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멀쩡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어주는 마법. 묵형과 의형은 범죄자 낙인을 찍는 것에서 정도에 차이를 둘 뿐이지만, 월형은 낙인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남의 도움이 없으면 밥먹고 살기도 어렵게 만들어 준다. 손빈병법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손빈이 이 형벌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무릎 슬개골을 뜯어내는 빈형을 받았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잘렸다는 판본도 있고 또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많으며, 애초에 걷지 못하는 점은 똑같으니 손빈한테는 별 의미가 없다.

당시에 약 500여가지 범죄가 월형의 대상이었다.

2.4. 궁형(宮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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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궁형#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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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궁형#|]]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생식기를 불구로 만드는 형벌이다. 남성이 대상일 때는 거세하는 형벌로 널리 알려졌으나, 여성에 관해서는 집행 방식이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바가 없어 유폐를 했다거나 복부에 충격 등을 가해서 자궁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설로 나뉘고 있다.[7]

얼핏 생각해 보면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월형이 훨씬 더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중형 아닌가 싶지만, 당시 의료기술의 한계 때문에 궁형을 받으면 죽을 확률이 높기도 했고, 거기에 육형은 어느 한 종류만 시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월형 이하는 본인의 신체 훼손으로 끝나지만, 궁형은 자손의 대를 끊어놓아 “생물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까지 있었다.

당시에 약 300여가지 범죄가 궁형의 대상이었다.

2.5. 대벽(大辟)

가장 무거운 사형을 말한다. 목을 베는 참수형의 방식으로 죽인 후 시신을 거리에 내다거는 기시, 작두로 허리를 베는 요참형, 사지를 수레로 묶어 분리시키는 거열형 등이 있었다. 고대 중국에는 교수형은 정식의 처형 방식이 아니라 고위층 인사가 자결을 명령받는 형식으로 비공개적으로 이뤄지는 비공식인 사형이었을 뿐 정식 형벌로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가 북위효문제 때 가서야 법전에 규정되기 시작하였다.[8]

당시에 약 200여가지 범죄가 대벽의 대상이었다. 한문제가 공식적으로 육형을 폐지한 뒤에도 사형을 감면해준다는 명목 아래 대벽에 해당하는 범죄를 일부 궁형으로 대체하여 부분적으로 궁형을 부활시키거나, 연좌로 인한 사형수들이 궁형으로 감면받는 사례는 제법 많았다.

이에 더하여 사마천흉노와의 전투에서 악전고투 끝에 사로잡힌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사형을 언도받았을 때, 대신 궁형을 선택하여 목숨을 이어가 사기(史記)를 완성시킨 사례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대벽을 면하기 위해선 50만전을 내거나 궁형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당시 한무제가 사마천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은 공식적인 형벌이 아니라 사사(賜死)에 가까운 처분이었으며, 사마천에게 주어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선택지도 한무제가 제딴엔 자비를 베푼답시고 내밀었던 것이었다. 또한 사마천은 원칙적으로 궁형 등이 포괄되는 육형이 면해지는 신분이었으며, 특히 앞서 언급했듯 이미 한무제 시대엔 공식적으로 육형이 폐지된 상황이었다. 즉, 사마천의 사례는 정식 형벌인 대벽을 면하는 방법으로 보기 어렵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집필을 시작한 사기를 완결할 때까지 죽을 수가 없었고, 형편 상 거금 50만전을 낼 수도 없어서[9] 결국 어쩔 수 없이 궁형을 택하였으나, 당시에는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명예를 버린 것으로 치부되어 남은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기피당하며 끔찍한 육체적 고통까지 겪는 비참함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말로에 빗대어 만일 그가 죽음을 선택했다면 명예나마 챙기며 장례식도 융숭하게 치러졌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는 자결로 죽었을 때나 통용될 수 있는 말이다. 정식 절차대로 공개 처형을 당한다면 제대로 된 장례식조차 치러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성질상 명예를 챙길 수 있는 길로 여겨질 수도 없다.

3. 당률의 5형

중국 당(唐)의 법전인 《당률(唐律)》에서 체계화된 5가지 형벌 집행 방식으로 사형(死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笞刑)으로 구분된다. 명(明)나라의 기본법전 《대명률(大明律)》과 청(淸)나라의 기본법전 《대청률례(大淸律例)》로 계속 이어진다. 고려 때 도입되어 조선에도 이어진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한문제가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기에 5형의 범주에 기존에도 징역의 일종인 도형과 유배를 의미하는 유형이 포괄될 수 있게 되었다. 태형과 장형도 고대에는 없던 것이 아니라 정식 형벌의 방법으로 편입된 것이다. 유교 경전인 《예기》에 적힌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10]"는 구절에 의거하여, 고위층 인사는 도형·장형·태형 등을 속전으로 대체하는 것이 원칙이다.

3.1. 태형(笞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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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벌의 강도: 10대/20대/30대/40대/50대

태라는 것은 사람이 가벼운 죄가 있을 때, 가느다란 매로 치는 것을 말한다. 태 10번에서 태 50번까지 5등이 되는데 태 10번을 한 등으로 하여 더하고 줄인다. 여기서 가느다란 매라는 소리는 회초리 같은 물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장형에서 쓰는 크고 아름다운 곤장보다는 가늘다는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매우 아프다!

'대명률'에서 제시하는 이 "가느다란 매"의 규격은 이렇다. 작은 가시나무 가지로 만들며, 반드시 옹이나 눈을 깎아 상부관서에서 내린 교판에 맞추어 길이 3자 5치(약 105cm), 대두의 지름 2푼7리(약 0.8cm), 소두의 지름 1푼 7리로 하여 소두 쪽으로 볼기를 치도록 되어 있다. 속형이 가능하였는데, 조선 초기에는 태 10~50에 따라 각각 오승포 3~15필(한 등급당 3필씩 증가)을 내면 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대명률'에서는 동전 600문~3관(한 등급당 600문씩 증가)을 내면 면할 수 있었으며, 대나무 막대를 썼다고 한다. 왜 조선에서는 속형에 필요한 비용을 오승포로 환산했냐면 조선 시대에는 화폐 기반 경제가 잘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물물거래에 사용되는 오승포로 대신한 것이다. 이후 화폐로 속형을 하는 것은 조선 중후반기쯤 가서 속대전과 대전통편에서 제시했다.

옛 중국에서 은자 1냥이 동전(copper cash) 1,000문이고, 명나라 시기의 은자 1냥은 현대 화폐로 대략 600~800위안, 즉 한화 약 138,000~184,000원이다. 그리고 1,000문이 1관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환산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 속형 비용을 환산할 때, 기준 비용은 모두 구리로 만들어진 동전을 기준으로 하며 1관 = 1,000문 = 600~800위안으로 환산한다.
태형 등급 속형에 필요한 비용 환산
10 600문 82,800원~110,400원
20 1관 200문 165,600원~220,800원
30 1관 800문 248,400원~331,200원
40 2관 400문 331,200원~441,600원
50 3관 414,000원~552,000원

3.2. 장형(杖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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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벌의 강도: 60/70/80/90/100

장이란 것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큰 형장으로 볼기를 치는 것을 말한다. 장 60번에서 장 100번까지 5등이 되는데, 장 10번을 한 등으로 하여 더하고 줄인다. 보통 사극에서 주로 나오는 곤장치는 것이 장형인데, 한번이라도 엄청나게 통증이 심하므로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든다.[11] 곤장과는 다른 형벌이지만 관리의 횡포 등으로 태형을 집행할 때 장을 쓴다거나, 장형을 집행할 때 곤장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본래 북조 연간에는 장형 10번~50번, 채찍형 60~100번 체계로 나갔는데[12] 수 문제가 채찍형의 잔인함을 문제삼아 채찍형을 폐지하고 채찍형은 장형으로 대체하고 장형은 장형 때 사용하는 형장보다 가는 형장을 사용하는 태형으로 대체하여 이와 같은 체계를 만들었다.

이 형벌은 가장 폐단이 심했다. 본래대로라면 '대명률'의 규정을 기준으로 형구는 큰 가시나무 가지로 만들며 반드시 옹이나 눈을 깎아 상부관서에서 내린 교판에 맞추어 길이 석자 다섯 치(약 105cm), 대두의 지름 3푼 2리, 소두의 지름 2푼 2리로 하여 소두 쪽으로 볼기를 치도록 되어 있지만, 점차 형이 가혹해지고 교판에 맞지 않는 규격을 사용하는 등의 폐단이 심해져서 정종 2년(1400년) 흠휼전칙을 제정해 형구의 규격과 집행 방법을 엄격히 규제했고, 한번에 다 맞으면 위험하므로 짧은 구금 기간을 부여해 나눠서 맞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13]

역시 속형이 가능했는데, 조선에서는 가장 낮은 장 60을 기준으로 오승포 18필을 내면 면할 수 있었고, 70부터 한 등급당 3필씩 증가하여 장 100일 경우에는 오승포 30필을 내면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에서는 가장 낮은 장 60이 3관 600문, 그때부터 한 등급당 600문씩 증가해서 장 100일 때는 무려 6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모반 음모와 역적을 빼고는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부인이나 첩이 남편을, 노비가 상전을 고발할 수 없었는데 만약 이를 어기면 범인도 벌을 받는 것은 물론 고발한 사람도 강상죄라는 죄를 적용받아 장형 100번과 유형에 처해졌다.

마찬가지로 당시 대명률에서 제시한 속형 비용을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과 당시의 화폐가치가 다름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100만 원은 당시 서민들에게는 큰 돈이었다.
장형 등급 속형에 필요한 비용 환산
60 3관 600문 496,800원~662,400원
70 4관 200문 579,600원~772,800원
80 4관 800문 662,400원~883,200원
90 5관 400문 745,200원~993,600원
100 6관 828,000원~1,104,000원

3.3. 도형(徒刑)

  • 형벌의 강도: 장 60대+1년/장 70대+1년 반/장 80대+2년/장 90대+2년 반/장 100대+3년

도라는 것은 사람이 범한 죄가 조금 무거워 관에서 잡아놓고 강제 노역을 시켜 괴롭게 하는 일을 이른다. 도 1년에서 3년까지 5등이 되는데 장 10번과 도 반년을 한 등으로 하여 더하고 줄인다. 현대의 징역형과 비슷한 형벌로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징역의 의미로 '도형'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강도 면에서는 징역 따위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세다. 일단 위에 언급했듯이 장형을 먼저 받아서 곤장 맞으면서 시작하는 데다가 불결한 시설인 감옥에 가둔 후 날이 밝으면 끌어내서 채석장이나 광산, 소금 굽기와 같은 힘든 일을 하는 곳까지 끌어낸 다음 노예처럼 일하게 된다. 따라서 도형을 받고 1년 이상 살아남으면 기적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현대의 징역형이 도입된 다음에도 금고라는 형량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했는데, 금고는 감옥에 가두는 것은 동일하지만 노역을 시키지 않으므로 자비로운 형벌이라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징역형은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으며 일을 하게 되지만[14] 인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서양에서도 징역형은 강제노동을 매우 가혹하게 시켰고[15] 심한 매질을 동원하는 경우도 매우 흔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남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는 1년+60번은 12관, 그때부터는 한 등씩 3관이 증가하여 3년짜리는 무려 24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역시 속형 비용을 중국 명나라 시대 기준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도형 등급 속형 비용 환산
1년+장 60 12관 1,656,000원~2,208,000원
1년 반+장 70 15관 2,070,000원~2,760,000원
2년+장 80 18관 2,484,000원~3,312,000원
2년 반+장 90 21관 2,898,000원~3,864,000원
3년+장 100 24관 3,312,000원~4,416,000원

3.4. 유형(流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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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벌의 강도: 2천리(800km)/2,500리(1,000km)/3천리(1,200km)

유는 사람이 범한 죄가 무거우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먼 고장으로 쫓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벌이다. 쉽게 말해 귀양. 유 500리를 한 등으로 한다.

강도 설명에서 보면 알겠지만 곤장 뒤 유배를 보내는 것이라 유배를 가는 죄수 입장에서는 장난아니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유배를 가는 길에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 거기다가 유배지까지 거리가 형장에서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리저리 길을 빙빙 돌아가면서 거리를 늘리는데, 국토를 끝에서 끝까지 가야 3천리를 겨우 맞추는 조선에서는 아예 유배 전용 코스를 만들어서 거기를 도는 방식으로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직선거리로는 안 되니까 빙빙 돌아서 가는 것이다.

게다가 코스의 목적지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유배지인데 보통 원주민도 살기 힘들고 기후, 환경이 안 좋은 산간오지나 절해고도 같은 곳을 택하며, 국가에서 유형자에 대한 지원을 안 하기 때문에 거지꼴로 살기 딱 좋다. 덤으로 언제 석방될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강제노역이 없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는데도 유형이 도형보다 형량이 높은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후한 시대에는 유배지에 따라 형벌의 강도가 달라졌는데 어지간한 중형은 회계로 유배되는 것이었고 일남[16]으로 유배되는 것은 준사형(準死刑)으로 취급되었다. 교통 사정도 있거니와 치안이나 의료수준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찍고 돌아오는 것만 해도 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유형 역시 돈을 내면 면제했는데 2,000리는 30관, 2,500리는 33관, 3,000리는 36관을 내면 면할 수 있었다. 이를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유형 등급 속형에 필요한 비용 환산
2,000리+장 100 30관 4,140,000원~5,520,000원
2,500리+장 100 33관 4,554,000원~6,072,000원
3,000리+장 100 36관 4,968,000원~6,624,000원

3.5. 사형(死刑)

원칙적으로는 아래의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 (絞): 신체를 온전히 유지한 채로 밧줄 등으로 목을 매어 죽임.
  • (斬): 몸에서 머리를 베어 죽임.

원나라 때 교수형이 폐지되고 사형 방식을 능지처참과 참수형으로 규정했다가 명나라 때 교수형이 부활했다.

목숨을 박탈하는 만큼 형벌 중 가장 무거운 것이다.[17] 둘 중 그나마 나은 것은 교수형으로, 참수형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유교적 관념에서 큰 치욕이었던 신체의 훼손이 가해지는 참수형이 더욱 중형이었다. 물론 죽이는 방법이야 능지처참이나 거열형 같이 신체가 토막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것은 원래 법전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았다. 사약을 내려 죽이는 사사(賜死)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는 신체를 온전히 함과 동시에 임금이 죽음을 하사하는 형식이므로 조선에서 시행한 사형 방식 중에서는 가장 죄인을 예우한 형태가 되었다. 죄인을 벗겨놓고 조리돌려 구경거리로 만들고 시작하고 심하면 집행 전에 매질 등 고문까지 병행하기도 하는 참수형, 거열형, 능지처참과는 달리 사사는 대궐이나 죄인의 집 같은 비공개 장소에서 의관을 제대로 갖춘 상태에서 시행하기에 적어도 모욕은 당하지 않는다는 특혜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아무 때나 내리는 게 절대 아니다. 조선에선 사자의 원혼이 천지의 조화를 해친다고 하여 만물의 생장이 멈추는 추분 이후에 사형을 실시하는 게 원칙이었는데, 이것을 대추(待秋)라고 하기 때문에 형벌을 담당하는 관리를 가리켜 '추관(秋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역죄나 강상죄 같이 십악대죄(十惡大罪)를 저지른 죄인은 대추의 대상에서 빠져서 즉각 사형을 집행하는데, 이를 부대시(不待時)라고 하여 참형과 교형에 한해 각각 참부대시, 교부대시라 불렀다. 이는 중국에서도 명칭만 틀릴 뿐 다르지 않다. 대추의 대상일 경우엔 참감후/교감후(監候), 아닐 경우 참립결/교립결(立決).

그러나 형벌 집행이 금지되는 날인 금형일(禁刑日)에는 설령 부대시라고 해도 사형 집행이 불가능했다. 금형일에는 전술한 춘분과 추분 사이 이외에도 왕실 인사의 축일, 정조시일[18]과 정월, 24절기의 당일, 십직일[19],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大祭祀), 치재일(致齋日) 등이 있어 이 시기를 피해야 했다. 그렇다고 금형일에 형을 집행하려고 하면 처벌을 받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사형을 선고받고 옥에 구금되어 있던 죄인이 형 집행이 1년 넘게 밀리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 그만 자연사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걸 면하려면 중국에서는 무려 동전 42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당시 법률상 사형이라는 형벌을 돈으로 면할 수 있었다는 게 특이한 점이라면 특이할 만하다. 상술한 식을 사용해서 환산하면 대략 5,796,000원~7,728,000원 가량이었다. 그러나 당시 명~청 시기 일반적인 농민의 1년 소득이 20관(=20냥)임을 고려해 보면, 2년치 소득에 해당되므로 그 당시 기준으로 42관이라는 돈은 엔간한 중산층이라도 쉽게 지출할 수가 없는 꽤나 큰 돈에 해당한다.[20]

4. 관련 문서


[1] 머리카락이나 수염 등을 깎아 회복의 여지를 남겨두는 신체의 훼손 행위는 '내(耐)'라고 하여 구분했다.[2]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아 일반인 신분을 회복하는 사례는 더러 있었다.[3] 죄인을 불구로 만들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형벌을 꺼렸다.[4] 훗날의 진혜문왕.[5] 태자의 큰아버지로 다시 말해 진의 공족이다.[6] 하지만 이런 극약처방을 쓰고도 눈을 뽑히고도 복위한 경우도 결국 나왔다.[7]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肉刑)은 이미 전한 초기 때부터 가능한 집행하지 않는 기조가 되었던 관계로, 어지간하면 육형과 병과되는 노역형 형기를 채우던 중에 사면령을 받아서 면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미성년자·노인·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육형은 대대적인 사면령이 없을 때에도 수시로 감면령이 내려졌다. 때문에 이미 전한 말기쯤 되면 육형의 집행 방식은 상당수 실전되었으며, 후한 이후의 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궁형을 유폐 형식으로 집행한 것으로 보았는데, 근·현대에 발견된 전한 이전의 간독을 살펴보면 궁형을 당한 여성이 딱히 평생 감금당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8] 정석대로 당하는 사형은 당연히 공개처형이며 조리돌림이 수반되어 사형수는 치욕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특히 효문제가 공개처형 때 사형수을 발가벗겨 놓고 집행하는 관례를 괴이하게 여겨 상의만 벗기도록 지시했던 점을 살펴보면, 그 이전까지 군주가 고위층 인사를 정식 형벌로 죽이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9] 전한 당시 쌀 1석이 대략 30~50전 정도 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50만전은 쌀 1만 석 이상을 거뜬히 구입할 수 있는 금액으로 볼 수 있으며, 1석이 대략 31kg이므로 1만석은 약 310톤으로 환산된다. 즉, 50만전은 현대 쌀 소매가 기준으로도 10억원 가량인 금액이다. 생산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전한 당시 쌀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것으로 볼 수 있고, 또한 50만전은 5,000명 규모의 군대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던 금액이라고도 전하므로, 어지간한 거부(巨富)가 아닌 사람은 도저히 낼 수가 없는 거금임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10] 위의 문단에서 거론했듯, 원래 정확한 의미는 대부 이상의 계급엔 육형(肉刑)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진나라 말의 율령에서도 비슷한 조항이 발견된다.[11] 흔히 장독 올라 죽었다고 하는 것이 장형이 집행될 때 죽었다는 뜻이다. 당시 위생관념상 형구를 깨끗하게 관리했을 가능성도 작거니와 상처를 제대로 소독하지 못했던 당시의 의료수준 때문에 패혈증 등으로 죽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왔다. 설령 감염은 어떻게든 피했다 하더라도 장형 자체가 워낙 가혹한 매질이었기 때문에 근육이 녹아 버리면서 횡문근융해증으로 죽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고문을 하기 위해서 장을 치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도 많이 죽어나가서 일부러 사건을 묻어버리는 데에 동원되기도 했다.[12] 본래 사마씨의 진(晉)나라 시대까지는 장형과 채찍형을 섞어서 200번까지 집행이 가능했다. 때문에 100번까지로 최고대수를 줄인 북조와는 달리 남조에서는 여전히 200번까지 집행했다. 휼형 문제에 있어서는 북조가 남조보다 나았다.[13] 물론 이 부분은 한번에 해치우는 게 편한 형리들의 편의, 혹형을 선호하는 지방관, 구금 시설의 부족 등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14] 그래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도중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무료해서 견딜 수가 없다며 스스로 자원해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5] 심지어 노역을 시키기 위해 아무런 노동 가치도 없는 쳇바퀴를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트레드밀 문서로.[16]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지역. 다낭시나 후에시가 있는 곳 부근.[17] 위 형벌들로는 직접 죄인을 죽이지는 않으나 간접적인 이유로(체력 상실, 부상 및 지병 악화, 노환 등) 죄인이 사망하는 경우이지만 이 형벌은 사람이 직접 죄인을 죽이는 것이기에 위의 형벌들과는 차원부터가 다르다.[18] 停朝市日. 국상이나 대신의 장례, 국가에 재난이 닥쳤을 때 시장의 문을 닫고 관청도 업무를 정지하는 날. 지금으로 치면 국가장 기간이나 국가애도기간 중인 때이다.[19] 十直日. 도가에서 살인을 금지하는 열흘을 뜻하는 단어로 매월 1, 8, 14, 15, 18, 23, 24, 28,29,30일이었다. 명진재일(明眞齋日), 금살일(禁殺日)이라 불리기도 한다.[20] 사마천 역시도 궁형을 택한 이유가 만일 사마천이 돈이 많아서 돈으로 때울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지만 전한 시기에는 이를 면하려면 50만금이나 되는 거금을 내야 했는데 그 50만전은 42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돈이며, 현대 한화로 따지면 천억 단위의 돈이다. 사마천은 그 돈이 없어서 대벽(참수형)과 궁형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동시대 인물인 양복은 왕검성 전투에서의 실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그래도 죄질이 약한 편이라서 특별히 값을 조금 깎아줘서 양복은 돈을 내고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