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칸토나 1992-1997 | |
▲ 1992년 계약 당시 | |
소속팀 | <colbgcolor=#ffffff,#191919>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프리미어 리그) |
등번호 | 7 |
기록 | |
143경기 64득점 51도움 | |
16경기 5득점 4도움 | |
17경기 10득점 3도움 | |
6경기 1득점 1도움 | |
3경기 2득점 3도움 | |
합산 성적 | |
185경기 82득점 62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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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5경기 82골 62도움 |
2. 이적
결국 리즈에서 잦은 사건 사고로 반 시즌만에 겨울 이적시장 칸토나는 라이벌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헐값에 이적한다. 리즈 팬들은 라이벌팀에 팀의 핵심 선수를 넘기는 것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잦은 사고를 범하는 선수를 팀에서 제거했기에 괜찮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칸토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레전드가 되며 엄청난 영입으로 평가되었다.3. 1992-93 시즌
칸토나가 맨유로 영입되기전 맨유는 시즌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첫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우승 타이틀을 가져가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했던 아스톤 빌라와 블랙번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사실 시즌 시작 전 이적시장에서 퍼거슨 감독은 사우스햄튼의 시어러를 영입하려 했으나 블랙번과의 영입 경쟁에서 패배했다. 칸토나가 영입되기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6위를 달리고 있었다.칸토나가 영입된 후 마크 휴즈와 함께 팀의 공격수를 담당하던 브라이언 맥클레어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전환했다. 칸토나는 바로 팀의 상승세에 크게 기여하며 빠르게 팀의 성적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역시 다혈질 기질도 어디가지 않아서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더비전을 치르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리즈 팬에게 침을 뱉어 1000만 파운드의 벌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칸토나의 활약은 어마무시해서 칸토나가 합류 후 맨유는 리그에서 단 2패만 기록하며 아스톤 빌라와의 승점차를 10점이나 내며 리그 우승을 26년만에 탈환한다.
1992-93 시즌: 23경기(선발 22경기) 9골 11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2 | 21 | 1 | 9 | 11 |
FA컵 | 1 | 1 | 0 | 0 | 0 |
합계 | 23 | 22 | 1 | 9 | 11 |
4. 1993-94 시즌
그 다음 시즌인 93-94 시즌에는 FA컵까지 동시에 재패하는 시즌 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칸토나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해 주었다. 그러한 활약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1994년 P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당연히 칸토나의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당시까지 별다른 기행은 없었고, 이는 지금도 확연히 드러나는 퍼거슨 감독의 선수 장악력이 아주 제대로 먹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으며 거기에 1993년에는 발롱도르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1993-94 시즌: 49경기(선발 49경기) 25골 13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4 | 34 | 0 | 18 | 12 |
챔피언스 리그 | 4 | 4 | 0 | 2 | 0 |
FA컵 | 5 | 5 | 0 | 4 | 0 |
코카콜라컵 | 5 | 5 | 0 | 1 | 0 |
채리티 실드 | 1 | 1 | 0 | 0 | 1 |
합계 | 49 | 49 | 0 | 25 | 13 |
5. 1994-95 시즌
94-95 시즌 칸토나와 맨유는 그대로 순항할 것처럼 보였고 맨유가 리그를 3연패 할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했다. 칸토나도 충분히 훌륭하게 활약하며 블랙번과의 리그 타이틀 경쟁을 가져갔다. 게다가 겨울 이적시장에서 뉴캐슬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이던 앤디 콜을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더욱 더 맨유의 우승이 점쳐지고 있었다.하지만, 이후 칸토나는 후술할 그 동안의 폭력 사건을 잊게 할 정도의 초대형 사고를 터뜨린다.
칸토나가 빠진 1994-95 시즌의 9개월 동안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을 블랙번에게 빼앗기고, FA컵 우승은 에버튼에게 빼앗기는 등 한끗발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4-95 시즌: 25경기(선발 25경기) 14골 9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1 | 21 | 0 | 12 | 6 |
챔피언스 리그 | 2 | 2 | 0 | 0 | 2 |
FA컵 | 1 | 1 | 0 | 1 | 0 |
채리티 실드 | 1 | 1 | 0 | 1 | 1 |
합계 | 25 | 25 | 0 | 14 | 9 |
5.1. 쿵푸 킥 사건
1995년 1월 25일, 당시 맨유는 선두 블랙번에게 승점 2점이 뒤져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우승 경쟁을 위해선 다음 상대였던 크리스탈 팰리스는 무조건 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후반 3분경, 칸토나는 리차드 쇼에게 주먹감자를 날리며 레드카드를 받았다. 칸토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천천히 벤치로 향하던 중, 당시 건강악화로 인해 병상에 누워있던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패드립을 한 상대팀 서포터 매슈 시먼스(당시 20세)를 향하여..라이더 킥 한 방을 먹였다. |
이것이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쿵푸 킥 사건이었다. 발차기를 날린 직후에도 넘어지면서 발길질을 더 했으며, 정권지르기까지 추가타로 더 먹였다. 결국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었다.
축구 선수가 하필이면 발차기로 팬을 가격한 너무나도 위험한 사건이었기에[4] 여론은 "9개월로는 부족하다. 아예 축구를 못하게 막아버려라"라는 지경까지 치닫았는데, 알렉스 퍼거슨이 직접 나서서 칸토나를 두둔해주었다. 사실 이 때는 퍼거슨도 칸토나를 포기하려고 했으나,[5] 아내 캐시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어 그를 남기기로 했던 것이다. 멘탈이 글러먹었거나,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를 가차없이 내치는 퍼거슨 감독이 직접 총대를 메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퇴를 시사하던 칸토나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9개월의 공백기 동안 인터 밀란이 적극적으로 칸토나를 영입하려 애썼음에도 이 때 칸토나는 그 유명한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라는 한 마디만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적을 거부했으며, 정말로 맨유에서 은퇴를 했다.
칸토나는 그 후 인터뷰에서 쿵푸 킥 사건은 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자평하면서, 축구장에 있어서는 안 될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걷어찬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라고 추천하겠냐?"고 물어봤을 때는 손사래를 쳤다.[6]
2011년에 촬영된 시먼스.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는지 자신의 아들이 뛰는 축구팀의 감독에게 아들을 기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입해서 고래고래 쌍욕을 하다 연행까지 당했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래서 그 건으로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연하겠지만 칸토나에게 쿵푸 킥을 맞은 시먼스도 문제가 큰데[7] 시먼스는 이 당시에 자신을 걷어찬 칸토나에게 맞대응을 하려다, 되레 칸토나에게 주먹질로 추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2007년 포포투 지가 축구사 유명한 사건의 중심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그를 취재했을 때 그도 평생 축구 경기장 출입 금지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왜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냐 하면, 칸토나에게 "Fu*k off back to France, you French motherfu*ker" 라고 욕을 했기 때문이다. 12년이 지난 당시에도 칸토나에 대해 안 좋게 평하기도 했다.
물론 시먼스도 답이 없는 수준인 건 자명하나 사건의 심각성으로 인해 퍼거슨은 십년이 더 넘은 뒤에도, 정확히는 감독 은퇴 뒤에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 일이 언급되자 한숨을 푹 쉬고 등을 뒤로 젖혔다. 강철 같은 퍼거슨의 멘탈을 으깨버리다 못해 트라우마를 주는 위업을 달성한 셈이다. 사실 칸토나는 에고가 굉장히 강해서 퍼거슨도 헤어드라이어를 안했는데 이 사건이 터지자 그야말로 죽여버릴 기세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8][9]
6. 1995-96 시즌
95-96 시즌 칸토나가 복귀하자마자 다시금 시즌 더블을 기록한다.[10] 이 95-96 시즌은 칸토나가 쿵푸 킥 사건의 징계로 초반 10경기를 결장한 상태로 시작해야 했는데, 지난 시즌 데뷔한 폴 스콜스가[11] 칸토나의 공백을 잘 메워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1위 뉴캐슬과 승점이 10점 이상 차이가 난 채로 1996년을 맞았는데, 이 무렵부터 칸토나가 박빙 상황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결승골, 동점골을 연속으로 기록하며 무승부를 승리로, 패배를 무승부로 바꾸는 대활약을 했다. 특히 뉴캐슬 원정에서의 결승골은 뉴캐슬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고, 퍼거슨 감독의 언론플레이에 말린 뉴캐슬은 후반기에 처참한 성적을 기록, 결국 맨유는 극적인 역전 우승을 달성했다. 그 후 리버풀과의 FA컵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기록했다.1995-96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9골 13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0 | 30 | 0 | 14 | 10 |
FA컵 | 7 | 7 | 0 | 5 | 2 |
코카콜라컵 | 1 | 1 | 0 | 0 | 1 |
합계 | 38 | 38 | 0 | 19 | 13 |
7. 1996-97 시즌
1996-97 시즌에는 맨유 최초의 비영국인 주장이 되었다. 이 시즌에는 출장징계가 한번도 없었던 시즌이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같이 뛰면서도 예전보다는 떨어진 기량을 보였다. 그래도 칸토나와 맨유는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에 진출했음에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홈, 원정 모두 패배하면서 결승 진출에는 실패해서 아쉬움을 남겼다.1996-97 시즌: 50경기(선발 50경기) 15골 16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6 | 36 | 0 | 11 | 12 |
챔피언스 리그 | 10 | 10 | 0 | 3 | 2 |
FA컵 | 3 | 3 | 0 | 0 | 1 |
채리티 실드 | 1 | 1 | 0 | 1 | 1 |
합계 | 38 | 50 | 50 | 15 | 16 |
7.1. 은퇴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1997년 5월 11일. 칸토나는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만 30세였다. 결코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돌연 은퇴를 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정상에서 멈추고 싶다라는 이유였다. 거창한 기자회견이나 은퇴식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구단 홈페이지에 짧은 글귀만을 남겨놨을 뿐이었다. 그렇게 올드 트래포드의 왕은 왕관을 벗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웬만한 개인상과 우승 트로피를 거의 다 들어봤으니 미련도 없던 모양이다.[12]8. 총평
칸토나는 맨유에 몸담은 순간이 그렇게 길진 않고 거기다 맨유에서 주장을 역임했던 기간이 1시즌 이지만 맨유 역대 최고의 주장이자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이 당시에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칸토나는 오랫동안 우승에 고달팠던 맨유를 바로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며 칸토나가 징계를 받았던 94-95 시즌 빼고는 모두 리그 우승을 차지할 정도였다. 맨유팬들은 그를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고 불렀으니 그의 맨유에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1] 걸려 넘어진 선수는 당시 노리치의 헤니 슐츠였다.[2] 참조하자면 지금의 룰 대로 적용할 시, 백태클을 건 선수는 최소 옐로카드 부터 공격상황의 치명적 정도에 따라 레드카드를 받지만, '보복행위'에 해당하는 칸토나의 발차기는 즉결 레드카드 처분에 향후 징계까지도 가능한 수위다.[3] 후에 이 영상은 프랑스인들의 이상한 면을 보여주는 짤로 더 그랜드 투어 시즌 4 4화에서 다시 소개되었다.[4] 축구화의 스터드는 상당히 위험한 흉기 중 하나다. 그런 흉기를 일반인도 아니고 각력이 우수한 축구선수가 날아차기로 있는 힘껏 때렸으니...[5] 칸토나는 에고가 매우 강한 선수라 퍼거슨이 헤어드라이어를 안 하는 선수였는데, 이 사건이 터지자 죽일 기세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6] #[7] 애초에 맞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선수를 보고, 아픈 어머니를 욕하는 자가 정상일 리는 없다.[8] 물론, 그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좋게 하는 칸토나도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도 이 일에 대해서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9] 사실 시먼스가 무개념인 것과 별개로 프로스포츠에서 관중 폭행은 절대 있어선 안되는 행위이다. 프로스포츠는 이를 소비하는 관중들이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이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크고 강한 운동선수들에게 언제든지 폭행당할 수 있다면 프로스포츠 리그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팬들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선수가 이런 무개념 팬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구단과 보안요원들에게 알려 법적 처벌 및 경기장 출입금지 등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지, 본인이 몸소 나서서 폭력 등의 과격한 행위로 직접 맞서며 해결하려 들어선 안된다는 뜻이다. 법치국가에서 사적제재가 범죄인 것과 마찬가지다.[10] 공교롭게도, 에릭 칸토나가 부재했던 이 시즌이 블랙번 로버스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당시 블랙번의 핵심 선수는 그 유명한 앨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이었다.[11] 이 시기에 스콜스는 스트라이커였다.[12] 다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년만 더 뛰고 국대를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의 첫 월드컵 우승과 프랑스의 두번째 유로 우승 그리고 그 유명한 맨유가 달성한 트레블의 일원이 되어 빅 이어도 들어봤을 것이라는게 팬들이 아쉬워하는 점. 근데 재밌게도 캄 노우의 기적에서 챔스 우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선수가 테디 셰링엄으로 교체선수로 들어와 동점골을 넣음과 역전골까지 어시스트했는데 칸토나의 대체자로 영입된게 셰링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