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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24대 칼리파 알 타이 الطائع لله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 아부 바크르 압둘카림 이븐 알 파딜 أبو بكر عبد الكريم بن الفضل |
출생 | 929년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사망 | 1003년 8월 3일 (향년 73~74세)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재위 기간 | 아바스 칼리파 |
974년 9월 5일 ~ 991년 11월 22일 (17년) | |
전임자 | 알 무티 |
후임자 | 알 카디르 |
별명 | 알 타이 알라/빌라흐(الطائع لله\بالله: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 |
부모 | 아버지 : 알 무티 어머니 : 우투브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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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왕조 제24대 칼리파.2. 생애
929년 바그다드에서 제23대 칼리파 알 무티와 동로마 제국에서 끌려온 여노예 우투브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렸을 때 천연두에 걸려서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나 있어서 당대에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일개 왕자였던 그는 946년 1월 29일 또는 3월 9일에 아버지가 부와이 왕조의 무이즈 앗 디올라에 의해 칼리파로 선임되면서 차기 칼리파로 신분이 급상승했다. 실권은 부와이 왕조에게 있었고, 칼리파는 그저 종교 활동을 수행하고 아바스 가문의 구성원들을 감독하는 역할만 맡았다.974년 8월 1일, 사부타킨이 이끄는 튀르크 용병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와이 왕조군을 축출하고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알 무티는 부와이 일족과 함께 바그다드를 떠났지만, 도중에 튀르크군에게 붙잡혀 궁궐에 강제로 끌려왔다. 3년 전부터 뇌졸중에 시달려 오른팔이 마비되었던 알 무티는 9월 5일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었고, 그가 새 칼리파에 선임되었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사부타킨의 부와이 왕조 원정에 동행하다가 974년 10월 12일 데이르 알 아쿠울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사부타킨은 그로부터 수석 에미르(에미르 알 우마라)로 임명되면서 권세를 누렸으나, 와시트에서 부와이 왕조군과 대치하던 중 사망했다. 이후 또다른 튀르크 장성 알프타킨이 뒤를 이었으나, 975년 1월 디얄라 강 근처에서 배패한 뒤 티크리트로 물러났다. 알 타이는 튀르크인들에 의해 풀려난 뒤 바그다드로 귀환했다. 바그다드를 접수한 부와이 왕조의 에미르 아두드 알 다울라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고, 몰수했던 토지를 돌려줬다. 하지만 사촌 이지즈 알 다울라가 아두드를 밀어내고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976년 9월 부와이 왕조의 지배자 루큰 알 다울라가 사망한 뒤 아두드는 부와이 왕조의 동쪽 절반을 장악했고, 이지즈 알 다울라는 서쪽 절반을 장악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간의 갈등을 심화시켜서 입지를 확보하기로 했다. 우선 이지즈 알 다울라에게 특권을 부여했으며, 그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후제스탄으로 원정을 떠나는 이지즈와 동행한 그는 아두드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아두드가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자, 그는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977년 7월, 아두드가 이지즈를 물리쳤고 12월 23일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는 즉시 아두드에게 에미르 알 우마라로 임명하고 광범위한 영예를 수여했다. 아두드는 '무슬림 공동체의 왕관'과 칼리파의 후계자를 위한 깃발 등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아두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말을 타고 칼리파의 접견실에 들어갈 수 있고, 칼리파 앞에 엎드렸을 때 동료들이 이를 볼 수 없도록 커튼을 치는 특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건 너무 나갔다고 여기고 거부했고, 접견실 앞에 장벽을 세워서 말에서 내려서 들어가게 했다. 그러면서 고대 이란 의정서에 귀를 기울이는 의식에 몇 가지 세부사항을 추가해, 아두드가 칼리파에 의해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후 아두드의 원정에 동행하여 978년 5월 사마라에서 아두드가 이지즈의 남은 군대를 섬멸시키는 걸 지켜본 뒤 바그다드로 귀환했다.
아두드는 이지즈를 무너뜨린 뒤 칼리파 주변의 고관들을 해임하고 감옥에 가뒀다. 이후 부와이 왕조의 고위 관리 파르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리하여 이라크는 부와이 제국의 속주로 완전히 전락했으며, 칼리파는 자신의 이름으로 관리와 총독을 지명하는 권리까지 박탈당했다. 아두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주화를 이라크에 발행하면서, 샤한샤 칭호를 새겼으며, 칼리파를 완전히 예속시키기 위해 980년 하반기에 자신의 딸과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 알 타이가 이를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그러던 983년 3월 26일, 아두드가 병사했다. 부와이 장성들이 아두드의 둘째 아들인 삼삼 알 다울라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자, 그는 이를 인정하고 샴스 알 밀라(Shams al-Milla)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아두드의 장남 샤라프 알 다울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파르스를 점령해 바그다드를 위협했다. 그러나 샤라프 역시 각지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쿠르드족에 넘어갔고, 부와이 제국의 동부 지역은 두 형제의 삼촌인 파흐르 알 다울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는 부와이 가문간의 내전을 기회로 삼아 권력을 회복하기로 했다. 아두드에 의해 축출되었던 관리들을 복권시켰고, 이라크가 속주 신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게 했다. 그러면서 삼삼과 샤라프 간의 중재를 도맡으며 권위를 점차 높였다.
985년 사만 왕조가 후제스탄을 점령하자, 삼삼과 샤라프는 화해한 뒤 사만 왕조에 대항하기로 했다. 그는 이들의 평화 협정을 중재했다. 986년 6월에 체결된 협약에서, 샤라프가 최고 에미르로 인정되었고, 그의 이름은 바그다드에서 열리는 금요일 기도에 포함되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칼리프의 공식적인 권한 아래에 자신들을 두었다. 그러나 바그다드에서 데이람인들과 튀르크인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자, 샤라프는 이를 핑계로 바그다드로 진군해 987년 1월 바그다드에 입성한 뒤 삼삼을 잡아 감옥에 집어놓고 987년 5월 알 타이로부터 수석 에미르로 선임되었다.
988년 9월 7일, 샤라프가 바그다드에서 사망했다. 그의 두 아들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남동생 바하 알 다울라가 직위를 계씅했다. 그는 이를 인정하고 바하 알 다울라(Baha al-Dawla)의 칭호를 내렸다. 이후 바하와 파흐르 간의 갈등을 중재해, 두 사람이 서로를 각자의 영역의 통치자로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바하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급할 돈이 떨어지자 아부 알 하산 이븐 알 무알림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 궁정을 털고 알 타이를 폐위시키기로 작정했다.
991년 11월 22일, 바하의 부하들이 궁궐을 습격하여 철저히 약탈했고, 알 타이는 체포된 뒤 바하의 저택으로 끌려갔다. 이후 사촌인 알 카디르가 새 칼리파로 즉위했다. 하지만 사만 왕조와 가즈니 왕조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1000년까지 금요일 기도와 동전에 알 타이의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알 타이의 친척인 압둘라 이븐 자파르는 바그다드에서 탈출한 뒤 길란으로 이동해 자신이 알 타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진상이 드러나자 도로 바그다드로 끌려갔다.
알 타이는 992년 9월까지 억류되었다가 나중에 칼리파 궁전으로 이송되었다. 다만 이전 칼리파들과는 달리 실명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알 카디르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003년 8월 3일 루사파 궁전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알 무티의 무덤 맞은 편에 세워진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