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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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양봉저정 | 성제묘 | 사육신묘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 | |
성제묘 聖帝廟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385-1 (방산동4가 96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수량 / 면적 | 건물 1棟, 토지 21.4㎡ |
지정연도 | 1972년 5월 25일 |
관리자 (관리단체) | 국유 |
<colbgcolor=#ae1932> 성제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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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ae1932> 성제묘의 주신(主神) 관우 |
관우는 '관왕(關王)' 이란 호칭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관우의 사당을 일컬어 '관왕묘'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 역사
삼국시대 중국의 장군을 한국에서 기리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을 도우러 파병나온 명나라 군이 관우 신앙을 전파했으며, 명나라 장군들이 진중 근처에 관왕묘를 세웠다. 그 영향으로 인해 '관우의 음덕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조선군에게도 퍼져나갔다. 이에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조선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관왕묘 건립을 논의했고 국가차원의 관왕묘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관왕묘를 여러 곳에 세웠는데 방산동 성제묘도 그 중 하나였다. 첫 이름은 그냥 '관왕묘(關王廟)'였고, 대한제국 수립 후인 1902년(광무 6년) 경에 고종이 관우를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로 높이면서[2] 관왕묘도 '성제묘(聖帝廟)'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성묘(顯聖廟)'란 별칭도 이때 생겨났다.성제묘가 있던 곳은 조선 초기에는 훈련원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훈련도감에 속했던 염초청이 있던 자리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성제묘를 원래 염초청 소속 관왕묘로 보기도 한다.#
3. 제사
현재까지 제사가 치러지는 현역 사당이다. 방산시장 상인들이 시장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관우의 생일 및 사망일마다 제사를 올렸으나 지금은 사망일인 음력 10월 19일에만 지낸다.유교식으로 제례 의식을 진행한다. 상차린 후 다음 잔을 올려 재배하며, 참석자는 3명씩 함께 들어가서 같이 절한다. 제수는 생선포, 제육, 떡, 3색 과일, 조기, 막걸리 등이며, 장례를 치르거나 아이를 낳는 집에는 출입하지 않는 금기를 지킨다.#
4. 현성전
- 본전인 현성전은 정면 1칸, 측면 2칸, 총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한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다.
- 정면의 외면에는 세살문이 달려있으며 측면과 배면 외면은 노란색 벽이다. 정면 전면에 '顯聖殿(현성전)'이란 현판이 달려있다.
<colbgcolor=#ae1932> 성제묘 관우 부부 초상 |
5. 같이보기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서울 2천년사 18 조선시대 서울의 종교와 신앙, 423쪽[2] '현령소덕무안왕(顯靈昭德武安王)'은 명나라 만력제가 내린 이름이고, 고종이 저기에다 '의열(義烈)'을 추가하고 '왕(王)'을 '성제(聖帝)'로 격상시켰다.
두 번째 사진 출처: 서울 2천년사 18 조선시대 서울의 종교와 신앙, 423쪽[2] '현령소덕무안왕(顯靈昭德武安王)'은 명나라 만력제가 내린 이름이고, 고종이 저기에다 '의열(義烈)'을 추가하고 '왕(王)'을 '성제(聖帝)'로 격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