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30 01:43:58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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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달베르토 마르가리타 슬라브 연합회
Congregatio Slava S. Adalberti et S. Margaritæ
파일:슬라브 연합회.svg
<colbgcolor=#ffd200,#ffd200><colcolor=#000,#000> 이명 슬라브 연합회
(Slovanské benediktinské)
표어 <colbgcolor=#ffd200,#ffd200><colcolor=#000,#000> 라틴어 {{{#000,#fff 'Ora et Labora'}}}
영어 Pray and Work
한국어 기도하고 일하라
설립 시기 1945년 8월 23일 ([age(1945-08-23)]주년)
설립자 얀 아나스타즈 오파섹 O.S.B.
아르노슈트 비쿠칼 O.S.B.
설립 허가 교황 비오 12세
총재아빠스 초대 얀 아나스타즈 오파섹 O.S.B.
현재 예로님 아담 마린 O.S.B.
규모 25명 (사제 17명)
종교 가톨릭
소속 베네딕도회, 베네딕도회 총연합
모원 체코 프라하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
(Markétská 1/28, 169 00 Praha 6-Břevnov,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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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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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200,#ffd200> 라틴어 <colbgcolor=#fff,#1f2023>Congregatio Slava S. Adalberti et S. Margaritæ
체코어 Slovanské benediktinské kongregace sv. Vojtěcha a sv. Markéty
크로아티아어 Slavenske benediktinske kongregacije sv. Adalberta i sv. Margarete
슬로베니아어 Slovanske benediktinske kongregacije sv. Vojteha in sv. Margarete
이탈리아어 Congregazione Benedettina Slava
프랑스어 Congrégation bénédictine slave de Saint-Adalbert
독일어 Slawische Benediktinerkongregation
영어 Slavonic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aint Adalbert and Saint Marga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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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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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200,#ffd200> 웹사이트 <colbgcolor=#fff,#1f2023>파일:슬라브 연합회.svg 홈페이지 }}}}}}}}}}}}
1. 개요2. 역사
2.1. 연합회 창립 이전
2.1.1.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설립과 체코의 베네딕도회2.1.2. 연합회 결성을 향한 초기의 움직임2.1.3. 보헤미아 연합회의 부흥과 해체2.1.4. 해산 이후 재결성 시도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억압2.1.5. 타 연합회로의 편입
2.2. 슬라브 연합회 창립
2.2.1. 정체성의 재고와 슬라브계 연합회 창설 시도2.2.2.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의 창설2.2.3. 공산주의 시대의 박해와 지하 생존2.2.4. 공산정권의 붕괴와 슬라브 연합회의 재기2.2.5. 오늘날의 슬라브 연합회
3. 역대 총재아빠스4. 소속 수도원
파일:슬라브 연합회 성무일도.jpg
체코 라이흐라드 수도원의 성무일도 모습

1. 개요

성 아달베르토 마르가리타 슬라브 연합회, 또는 '슬라브 연합회'(Slovanské benediktinské)는 슬라브계 가톨릭 전통에 뿌리를 둔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연합체로, 특히 체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지역에 기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체코 공산 정권 하에서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1989년 이후 다시 복원되어 2003년 완전한 자율성을 회복하였다.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구성원 중 하나인 슬라브 연합회는 규모는 비교적 작으나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는 영적으로 활발한 수도공동체들을 하나로 묶으며, 슬라브 수도 전통의 보존과 계승에 힘쓰고 있다.

2. 역사

2.1. 연합회 창립 이전

2.1.1.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설립과 체코의 베네딕도회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의 역사는 993년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은 체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프라하 교구의 제2대 주교였던 성 아달베르트(보이체흐)와 보헤미아의 공작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공동으로 설립되었다. 수도원은 설립 초기부터 보헤미아 지역 교회와 수도승 전통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 곧 보헤미아 베네딕도회의 확산 거점이 되었다.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수사들은 수세기에 걸쳐 여러 주요 수도원을 창설하거나 통합하였으며, 1048년에는 모라비아의 라이흐라트 수도원을 산하에 두고, 13세기 초에는 오타카르 1세로부터 폴리체 나트 메투이 지방의 브루모프 수도원을 하사받았다. 한참 이후인 1703년에는 오트마르 친케(Otmar Zinke) 아빠스의 주도 아래 실레시아 지역의 옛 시토회 수도원인 레흐니체 폴레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들 수도원은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권위 아래 영적·법적 공동체를 구성하였으며, 아빠스는 지역 베네딕도회 수도원장들 가운데 사실상 수위자 역할을 하였다.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이러한 권위는 여러 문헌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특히 993년자로 전해지는 교황 요한 15세의 인준 교서는,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을 "이후 보헤미아에 세워질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규율 개혁과 수정을 위한 수장(Caput)이며 교사(Magistra)"로 명시하였다. 이 문서는 13세기에 삽입된 후대 문서로 판명되었지만, 적어도 18세기 초까지는 진본으로 간주되었고,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수위권을 정당화하는 주요 근거로 활용되었다. 또한 1296년에는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바보르 아빠스가 교황으로부터 정식 교서를 받아, 라이흐라트, 폴리체, 브루모프 수도원에 대한 내규 및 행정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이를 통해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은 관련 수도원들에 대해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체코 지역에 공식적인 베네딕도회 연합체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중앙집권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빠스는 산하 수도원들의 영적 지도자일 뿐 아니라, 외적 업무와 수도원장 선출 절차까지 관장하였다. 이러한 전형적 연합체 이전의 구조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베네딕도회 제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수세기에 걸친 변화와 개혁 속에서도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지도적 역할은 지속되었다.

2.1.2. 연합회 결성을 향한 초기의 움직임

15세기 초 후스 전쟁의 발발은 보헤미아 지역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420년 5월 22일,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이 후스파와 프라하의 급진 세력에게 공격을 받았고, 아빠스를 포함한 수도자 공동체 대부분은 브루모프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부터 아빠스가 '브루노프에 있는 브르제르노프 아빠스'(Opat Břevnovský v Broumově)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은 폐허로 남게 되었으며, 건물은 파손되고 경제적 기반도 거의 붕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도원에는 소수의 수도자만이 남아 있었고, 아빠스가 부재한 상태에서 아빠스 서리가 관할을 맡아 운영을 이어갔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16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때부터 새로운 세대의 아빠스들이 수도원 건물의 물리적 복구뿐 아니라 수도 규율과 영적 질서의 회복에 힘썼다.

복구 작업은 프로테스탄트 분열에 맞선 가톨릭 개혁 운동 시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특히 1602년부터 1619년까지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을 이끈 프로쇼비체 출신의 볼프강 셀렌데르(Wolfgang Selender) 아빠스의 지도 아래 큰 진전을 보였다. 체코 가톨릭 부흥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셀렌데르 아빠스는 자신의 직무를 브르제브노프의 아빠스직에 그치지 않고 총순시관(VIsitator Generalis)의 임무까지 포함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셀렌데르 아빠스는 이 총순시관이라는 직함을 프라하 대주교의 감독으로부터 독립된 신성로마황제의 위임으로 해석하며, 대교구의 승인을 벗어나 자체적으로 활발한 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셀렌데르 아빠스는 라이흐라트와 클라드루비 등의 수도원을 방문하며 수도 규범을 점검하고, 각 수도원의 수도원장 선출을 주관하였으며, 사자바, 스바티 얀 포트 스칼루(암석 아래의 성 요한), 에마우지 등에서는 수도원장을 임명하거나 해임하였다. 일부 수도원장들은 그의 권한 확대에 반발하며 해임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셀렌데르 아빠스는 루돌프 2세 황제로부터 지위를 재확인받았고, 이로써 그의 중앙집권적 운영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셀렌데르 아빠스의 방문, 규율, 개혁 프로그램은 사실상 하나의 감독 체계를 이루었으며, 후일 공식적인 수도원 연합체 형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셀렌데르 아빠스가 사망한 직후, 실제적인 수도회 연합체 형성 작업이 시작되었다. 후임자인 팔켄베르크의 베노(Benno of Falkenberg) 아빠스는 1631년 프라하의 에마우지 수도원에서 최초의 지역 총회를 소집하였다. 이 총회에서 수도자들은 수도원 간의 상호 의무와 운영 구조를 규정한 초기 규정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계속되던 30년 전쟁으로 인해 매년 총회를 여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이 1631년의 모임은 일반적으로 보헤미아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기점으로 간주된다.

이후 이 연합체는 다양한 라틴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Congregatio Benedictinorum Bohemica'(성 베네딕도회 보헤미아 연합회), 'Congregatio Bohemo-Moravo-Silesitica Ordinis sancti Patris nostri Benedicti'(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의 보헤미아-모라비아-실레시아 연합회), 'Congregatio Ordinis s. Benedicti per Bohemiam et Moraviam'(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성 베네딕도회 연합회) 등이 그 예이다. 이들 명칭은 모두 보헤미아 왕관령 안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통일된 구조를 세우려는 열망을 반영하고 있었다.

중요하게도, 이 시기에는 교황의 공식 인준이나 설립 교령이 발행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공식적 승인 부재는 훗날 교회 내 분쟁이 발생할 때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31년의 지역 총회는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전통적 수위권을 보다 협력적이고 규범 기반의 수도원 연합체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셀렌데르 아빠스와 그 후계자들이 구상한 제도적 비전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점차 구체화되어 갔다.

2.1.3. 보헤미아 연합회의 부흥과 해체

1631년의 초대 지역 총회 이후, 두 번째 총회는 한참이 지난 1653년에야 열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브르제브노프-브루모프의 아우구스틴 자이페르트(Augustin Seifert) 아빠스가 주관하였다. 이 회의에서 초안 상태였던 연합회 규정이 마침내 확정되어 공식 채택되었고, 이로써 보헤미아 연합회는 기능적으로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 오랜 전통에 따라 브르제브노프 아빠스가 총순시관 겸 종신 순시관(Visitator Generalis et Perpetuus)으로서 연합회의 수장직을 계속 맡았다. 수장은 3년마다 한 차례 열리는 지역 총회를 주재하였고, 각 수도원의 수도원장 선출에 대한 주재 권한, 당선자의 인준 및 서약 접수 권한을 독점적으로 행사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역사적 수위권을 보존하는 동시에, 정기적이고 협의적인 공동 운영 구조를 도입한 것이었다.

연합회는 교구 주교로부터의 교회법적 독립을 확보하고자 1669년 총회에서 몬테카시노의 카시노 연합회(Cassinese Congregation)와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는 로마의 승인을 받은 이탈리아 연합회에 가입함으로써 보헤미아 수도원들의 자율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연합회에는 브르제브노프-브루모프, 라이흐라트, 폴리체, 클라드루비, 사자바, 스바티 얀 포트 스칼루(암석 아래의 성 요한), 프라하 구시가지의 성 니콜라오 수도원이 속해 있었다. 반면, 1635년부터 1636년 사이에 스페인 베네딕도회로 이관된 에마우지 수도원은 연합체 구조에서 제외되었다.

연합회는 설립 초기 수십 년 동안 큰 내부 충돌 없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프라하 대주교와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대주교들은 브르제브노프 아빠스가 행사하는 광범위한 권한, 특히 수도원장 선출 인준권, 서약 접수권, 수도원 내 행정 간섭권이 교구장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특히 연합회가 여전히 '총순시관'이라는 직함을 사용한 점은 대주교 측에서 주교의 고유 권한을 침범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갈등은 격화되었다. 양측 모두 권리를 양보하지 않으면서, 이 사안은 결국 로마 교황청으로 회부되었고, 1705년부터 1758년까지 이른바 '면속 특권 심사'(Processus pro Exempte)가 진행되었다.

결정은 1758년에 내려졌다. 로마의 '주교 및 수도자성성'은 공식 교령을 통해 보헤미아 연합회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로마 교회법상 이 연합회가 교황의 정식 설립 교서 없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정규 수도회 연합체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체코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이 결정이 부당한 외부 개입이며, 100여 년 넘게 이어진 합법적이고 체계적인 수도 공동체의 협력 전통을 무시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번 판결로 인해 체코 지역의 베네딕도회는 공식적인 공동체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2.1.4. 해산 이후 재결성 시도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억압

보헤미아 연합회의 강제 해산 후에도 연합회에 참여했던 수도원들과 그 지도자들은 공동체 조직을 어떤 방식으로든 복원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759년에 새로운 지역 총회가 소집되었고, 1763년에는 총회 참가 수도원들 간의 새로운 규약이 채택되었다. 이 구조는 브르제브노프 아빠스의 종신 권한에 기반했던 기존 체제와는 달리, 수도원 간의 평등과 상호 자율성을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총순시관 직책은 폐지되고, 의장이 지역 총회에서 선출되어 3년 임기의 중임이 가능한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을 보좌하는 조정관(Definitores) 두 명도 함께 선출되었다. 의장은 수도원장 선출을 주관했지만, 당선자의 인준과 서약 수리는 프라하 대주교에게 이관되었고, 지역 총회는 회의 개최 및 결정 사항을 대주교에게 통보해야 했다. 이와 같은 체계는 해산 이후의 현실에 대한 실용적 대응이자, 면속 수도원 체계에서 지역 교계 권위와의 협력으로 전환된 제도적 조정이었다.

이 체제의 첫 번째 의장은 브르제브노프의 수도원장이었던 프리데리쿠스 그룬트만(Fridericus Grundtmann)으로, 1772년 사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 재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적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조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773년 총회는 브르제브노프의 신임 아빠스 슈테판 라우텐슈트라우흐(Štěpán Rautenstrauch)의 권위적 태도에 대한 반감을 이유로 그의 출마를 거부하고 그룬트만의 후임 의장으로 클라드루비 수도원장 아만두스 슈트레어(Amandus Streer)를 선출하였다. 이후 슈트레어 의장이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을 공식 방문하려 하자, 두 파벌 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공개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회복된 조직의 안정성을 약화시켰으며, 중앙집권적 지도 체제를 지지하는 측과 민주적 연합 운영을 선호하는 측 사이의 깊은 균열을 드러냈다.

이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외부의 국가 정책이었다. 특히 요제프 2세 황제 하에서 진행된 전면적인 교회 개혁은 관상 수도생활을 비생산적이고 사회적으로 불필요하다고 간주하였다. 17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요제프 2세는 클라드루비, 스바티 얀 포트 스칼루, 사자바, 프라하의 성 니콜라오, 폴리체의 부속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라이흐라트 수도원은 해산 대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황제 칙령에 따라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과의 공식적 관계 유지가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체코 지역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수는 급감하였고, 개혁된 연합회를 지속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요제프 2세의 수도원 폐쇄 정책의 결과, 합법적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수도원은 브르제브노프-브라우모프, 라이흐라트, 에마우지 단 세 곳뿐이었다. 이들 역시 서로 간에 교회법적이거나 행정적으로 연결된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각 수도원은 고립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 상태는 약 한 세기 동안 이어졌고, 체코의 베네딕도회가 하나의 독립된 교회 공동체로서 기능하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연합체 구조의 상실, 국가 권력의 개입, 그리고 전통적 권위의 약화는 체코 베네딕도회를 제도적으로 단절된 상태로 만들었으며, 각 수도원의 수도생활은 지속되었으나 공동체적 정체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2.1.5. 타 연합회로의 편입

1859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수도원장 회의에서 국제적 베네딕도회 연합체와의 연결을 통해 공동체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는 오스트리아 지역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장들이 참여하였고,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요제프 노르베르트 로테르(J. N. Rotter) 아빠스도 참석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성 베드로 수도원을 비롯하여 미하엘보이른, 피에히트, 람바흐, 그리고 라이흐라트 등의 수도원장들과 함께 로테르 아빠스는 새로운 '체코-오스트리아 공동 연합회'의 창설에 동의하였다. 이 제안의 핵심 목적은 수도회가 교구장의 권한에서 벗어나 수도회 고유의 면속 특권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당시까지도 지역 주교들은 수도원을 순시하고 수도원장 선출에 개입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는 많은 수도자들이 베네딕도회 정신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비록 체코–오스트리아 공동 연합회 구상은 당장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연합체 편입을 향한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약 10년 뒤에는 에마우지 수도원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80년, 에마우지 수도원은 독일의 개혁 수도회인 보이론 연합회로부터 파견된 수도자들에 의해 재건되었고, 곧 보이론 연합회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보이론 연합회는 엄격한 규칙 준수와 전례 쇄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로써 에마우지는 체코 주도의 수도원이 아니라 독일의 수도원 운영 양식을 따르는 기관으로 전환되었고, 독일 지도 아래 보이론 전통을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889년 교황 레오 13세가 오스트리아와 체코 지역 수도원들을 위한 새로운 연합회 두 개를 공식 인준하면서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때 설립된 연합회 중 하나인 무염시태 연합회[1]에는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이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연합회 가입은 수도원이 오랫동안 바라온 교회법적 면속을 부여했으며,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은 정체성을 보존한 채 보다 체계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안정성과 가시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1813년에 원장좌 자치수도원에서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된 라이흐라트 수도원은 같은 해 설립된 또 다른 연합회인 성 요셉 연합회에 가입하였다. 라이흐라트 수도원은 체코적 정체성을 유지했으나, 이제는 보다 큰 국제적 연합회의 행정 구조와 연계를 통해 운영되게 되었다. 이처럼 19세기 말까지 체코 지역에 남아 있던 세 수도원 모두 해외에 모원을 둔 연합회에 편입되었고, 이를 통해 제도적 안정성과 교회법적 인정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통일된 체코 베네딕도회 공동체라는 이상은 포기하게 되었다.

2.2. 슬라브 연합회 창립

2.2.1. 정체성의 재고와 슬라브계 연합회 창설 시도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하면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베네딕도회 공동체는 중대한 정치적·문화적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수도생활 자체는 국가의 억압 없이 지속될 수 있었지만, 새롭게 독립한 체코 국가 안에서는 수도원의 정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교회 내 소속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었다. 게르만계 연합회에 소속된 상황이었던 브르제브노프–브라우모프, 라이흐라트, 에마우지 등 세 수도원의 영적·언어적·전례적 관습은 제국 체제 이후 새롭게 형성된 체코어 중심의 공화국 정서와 점차 괴리를 빚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교회법적 안정성을 제공했던 이들 연합회 소속이, 이제는 오히려 소외감과 긴장의 원인이 되었고,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 정체성이 뚜렷해지고 슬라브 언어가 전례와 문화 전반에서 더욱 강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중부·동부 유럽의 수도생활이 처한 영적·사목적·문화적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독자적인 슬라브계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필요성을 외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체코인 베네딕도회 수도자 아르노슈트 비쿠칼(Arnošt Vykoukal)이었다. 그는 수도생활을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쇄신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단순한 행정 재편을 넘어서 게르만계 교회 구조의 하부 조직이 아닌, 슬라브 세계의 고유한 영적 유산으로서 베네딕도회를 회복하려는 비전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비쿠칼 신부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3년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순교함으로써, 그의 노력은 비극적으로 중단되었다.

2차 대전은 체코 베네딕도회에게 극심한 고난의 시기였다. 나치 정권은 수도원을 표적으로 삼아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자들을 박해하였다. 많은 수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일부는 유배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과 단절의 상황 속에서도, 자국 내 수도연합체 설립의 필요성과 타당성에 대한 신념은 더욱 굳어져 갔다. 슬라브계 연합회의 설립이 곧 슬라브어권 수도원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성 베네딕도의 유산을 영적 충실성과 문화적 뿌리를 동시에 보존하는 방식으로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2.2.2.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의 창설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가 해방되자, 살아남은 체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제국 체제와 나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발판 삼아, 오랜 염원이었던 고유한 교회법적 조직의 설립을 실현하기 위해 신속히 나섰다. 비쿠칼 신부의 유산과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얀 아나스타즈 오파섹(Jan Anastáz Opasek) 신부의 지도 아래,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새로운 연합체 설립을 주도하였다.

1945년 8월 23일, 교황 비오 12세의 권한 아래, 교황청 수도자성성의 인준을 받아 '성 아달베르토 마르가리타 슬라브 연합회'(Congregatio Slava S. Adalberti et S. Margaritæ)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연합회는 거의 천 년에 걸친 번영과 파괴, 쇄신과 자주성의 시대를 모두 거친 보헤미아·모라비아 지역 베네딕도회 가 가진 유산의 결실이였다. 새 연합회가 수호성인으로 프라하의 성 아달베르토와 헝가리의 성 마르가리타를 선택한 것은 보헤미아의 뿌리를 반영함과 동시에, 중부 및 동유럽 전역의 슬라브계 수도공동체를 아우르려는 포괄적 비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새로 설립된 연합회는 창립과 동시에 브르제브노프, 브라우모프, 라이흐라트, 에마우지 등 역사 깊은 수도원들을 포함하였다. 이후에는 크로아티아의 초코바츠(Čokovac), 슬로베니아의 마리보르(Maribor) 등지의 수도원들도 가입을 타진하면서, 슬라브 지역 전반의 연합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연합회는은 공동의 교회법 체계를 수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슬라브 언어와 문화, 전례 전통에 조화된 공동의 수도생활 리듬을 형성하고자 했다.

1945년의 설립은 여러모로 유리한 여건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치 점령의 종식은 민간과 교회의 자유를 회복시켰고, 수도공동체들은 재건의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으며, 동유럽 전체 교회 내에서도 희망에 찬 재구성의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조성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연합회는 갱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2.2.3. 공산주의 시대의 박해와 지하 생존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 설립 직후 이어졌던 초기의 활력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상황 변화로 인해 중단되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가 무신론과 교회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고, 가톨릭 기관들은 새 정권의 이념적 체제에 반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수도공동체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강한 억압을 받았다. 1950년, 이른바 "K 작전(Akce K)"이 개시되었고, 이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자 수도회 대부분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수도자들은 체포되거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일부는 비공식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과 브라우모프, 라이흐라트, 에마우지 수도원은 모두 폐쇄되었으며, 도서관과 문서는 압수되고, 수도원 건물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거나 방치되었다.

이 시기 연합회는 제도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지역 총회는 열릴 수 없었고, 행정 조직은 마비되었으며, 소속 수도원 간의 연락도 중단되거나 제한되었다. 일부 수도자들은 강제노동 수용소나 격리시설에 수용되었고, 다른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부 수도자들은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수도생활을 계속하였고, 개인적으로 또는 비밀 공동체 안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1947년에 브르제브노프 대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된 오파섹 신부는 1950년 공산당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년간 복역하였다. 석방 후에도 그는 브르제브노프로 복귀할 수 없었고, 정부의 감시를 받다가 1960년대에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연합회의 공식 체계는 유지되지 않았지만, 해외에 망명한 체코 수도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베네딕도회 공동체와 교류를 지속하였다. 브르제브노프 출신 수도자들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였으며, 오파섹 아빠스도 서독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한편,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종교 정책의 차이로 인해 초코바츠 수도원의 활동이 제한되기도 했다.

1948년부터 1989년까지의 시기 동안,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조직적 기능은 수행되지 않았다. 이 시기 연합회의 지속은 행정적 운영이 아닌, 개별 수도자들의 활동과 망명 공동체의 교류를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2.2.4. 공산정권의 붕괴와 슬라브 연합회의 재기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정권이 붕괴되면서, 국가 전반에 걸쳐 종교 생활의 재건이 가능해졌다. 약 40년간 활동이 중단되거나 망명 상태에 있었던 성 베네딕도회 슬라브 연합회도 이 정치적 전환을 계기로 교회법적, 영적, 제도적 회복 절차를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연합회의 복원은 수도원 재산의 회복, 공동체 재건, 흩어진 수도원 간의 연계를 복구하는 순서로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재건의 가시적 징후 가운데 하나는 1990년, 오파섹 아빠스가 독일 로후스베르크 수도원에서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40년 만에 브르제브노프로 귀환한 일이었다. 오파섹 아빠스의 귀환 이후 브르제브노프 수도공동체는 다시 구성되었고, 새로운 수도자들이 받아들여졌으며, 전례 생활도 회복되었다. 한편, 세속화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라이흐라트와 에마우지 수도원의 건물을 되찾고 복원하려는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수석아빠스는 성좌와 협의하여 슬라브 연합회의 과도기 상황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오스트리아 괴트바이크 수도원의 클레멘스 라쇼퍼 아빠스를 사도좌 대표로 임명하였다. 라쇼퍼 아빠스의 임무는 연합회의 교회법적 감사를 수행하고, 내부 조직을 지원하며, 자치 구조 확립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라쇼퍼 아빠스의 지도 아래, 파손 상태에 있던 수도원과 복구 중인 수도원 간의 협력이 이루어졌고, 공통 양성 체계와 정기 총회, 성 베네딕도 규칙의 적용이 점차 회복되었다.

2001년에는 헝가리 파논할마 대수도원의 아스트리크 바르세기 아빠스가 사도좌 대표직을 승계하였다. 바르세기 아빠스의 임명은 연합회가 단순한 복원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적·제도적 운영 능력을 갖춘 공동체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바르세기 아빠스의 지도 아래, 연합회는 공산주의 이전 체계를 대체하고 확장된 지리적 범위 및 내부 구조를 반영한 신규 규범을 준비하였으며, 이 규범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공식 인준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슬라브 연합회는 지난날의 총체적 억압 시기를 지나 제도와 공동체를 모두 회복한 상태에 이르렀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수도원들이 연합회에 재가입하여 연합회의 슬라브적 정체성이 더욱 분명해졌고, 이에 따라 연합회는 체코 내 제도 복원을 넘어서, 슬라브 세계 전역에 걸친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연합체로서 기도, 상호 협력, 성 베네딕도 규칙의 생활을 공동으로 실천하는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2.2.5. 오늘날의 슬라브 연합회

2003년에 인준된 신규 규범은 공동 지도 체계, 정기 총회, 연합회를 대표하며 양성, 방문, 수도원 간 협력을 조정하는 총재아빠스의 선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규약에 따라 마리보르 수도원장과 잘츠부르크 아빠스를 역임한 에드문트 바겐호퍼(Edmund Wagenhofer) 신부가 2009년에 제2대 총재아빠스로 선출되었으며, 얀 아나스타즈 오파섹 아빠스가 초대 총재아빠스로 소급되었다.

바겐호퍼 총재아빠스의 지도 아래 슬라브 연합회는 수도원 간 형제적 유대를 강화하고, 교회법상 책임을 명확히 하며, 규모는 작지만 지속적인 공동체들의 영적 쇄신을 추진하였다. 바겐호퍼 아빠스는 지역 간 협력, 공동 피정, 전례 전통의 심화, 그리고 슬라브 언어와 문화 속에서 베네딕도회 유산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

2021년에는 크로아티아 초코바츠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예로님 아담 마린(Jeronim Adam Marin) 신부가 제3대 총재아빠스로 선출되었다. 마린 총재아빠스의 선출은 연합회의 범슬라브적 구성과 남유럽 수도원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마린 총재아빠스의 지도 아래 슬라브 연합회는 영적 쇄신과 점진적 확장을 지속하며, 젊은 수도자들의 양성과 사회와의 접촉, 세속화된 유럽 사회 속에서 수도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20세기의 피해에서 회복 중인 공동체 간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3. 역대 총재아빠스

4. 소속 수도원


[1] 오스트리아 무염시태 연합회의 전신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