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톡은 원전인 삼국지연의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에 가까우며 작가의 순수한 자기 창작물이 아니다 보니 이래저래 오류가 발생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삼국지연의 역시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이고 연의 역시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원전 자체가 워낙 방대[1]하고 이 역시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류들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건 삼국지톡은 어디까지나 삼국지를 기반으로 만든 새로운 삼국지의 갈래 중 하나이므로 어디까지나 실제 역사를 알고 싶을 때 참고하도록 하자.[2]
☆ 표시 - 삼국지톡이 아닌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난 오류이다. ■ 표시 - 실제 역사와 사실관계가 명백히 불일치한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내용의 단순 생략, 연의와는 충돌하지만 정사에는 가까운 경우, 원전 사료 자체가 모호한 경우 등이 이에 속하며, 작품 속 해석의 여지가 충분한 경우에 쓴다.
소제와 유협이 동탁에게 발견된 곳을 '낙양 외곽 황야'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연의나 정사 모두 황제 일행이 발견된 곳이 명확히 명시되고 있다. 우선 연의에서는 아래와 같이 서술된다.
且說張讓, 段珪劫擁少帝及陳留王, 冒煙突火, 連夜奔走至北邙山.
각설하고[3] 장양, 단규는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낀 채 갑작스러운 연기와 불을 무릅쓰고 밤중에 급히 달려 북망산에 이르렀다.
즉, 연의에서 장양과 단규가 황제를 겁박해 도착한 곳은 낙양성 북쪽의 북망산이었다. 한편 후한서에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讓, 珪等復劫少帝, 陳留王走小平津. 양, 규 등이 다시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소평진으로 달아났다.
정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소평진은 이른바 낙양을 둘러싼 낙양팔관(洛陽八關)이라 불리는 8개의 관문 중 하나를 의미하며[4] 8관에 속하는 곳은 함곡(函谷)[5], 이궐(伊闕), 광성(廣成), 대곡(大谷), 환원(轘轅), 선문(旋門)[6], 맹진(孟津)[7], 소평진(小平津)이다. 소평진은 맹진보다도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장양과 단규가 소제와 진류왕을 끌고 북궁을 탈출해 제법 멀리 도망갔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소평진은 엄연히 낙양을 감싼 8개의 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외곽 황야' 라고 묘사될 수 없으며 연의의 북망산 또한 낙양과 멀지 않은 지점인데다 역대 황제들과 명사들이 묻힌 곳이라 오늘날의 어감과는 달리[8] 참배객들이 많이 오가던 곳이라 황야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다. 더군다나 (연의 기준으로) 동탁은 낙양 외곽인 홍농의 민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북망산이나 소평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즉, 민공이 황제 일행을 구출하고 동탁이 낙양의 사태를 관망하다가 이내 군을 휘몰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장면이 한꺼번에 누락되면서 발생한 오류다.
거의 설명이 동일하며(...)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이 명백해 보인다. 나무위키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위키백과 역시 편집과 수정이 자유롭게 위키 자체에서도 '위키백과는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다'고 공언한 상태이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자료를 긁어와 그것이 사실인 양 '이러한 설이 있다'고 말하는 건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서상 정해져 있지 않은 장료의 생년을 설정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없는 설을 착오로 있다고 하면 명백한 오류가 되기 때문.
참고로 연의에서 장료의 향년을 언급한다. 224년 조비가 서성에게 대패할 때, 장료는 정봉의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고 오래지 않아 죽었고 이 때 54세라고 나온다. 연의 설정을 가져오면 장료는 171년생이 된다.
3컷에 여포가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쓴 장료를 지적하는 장면 하단에 '십상시의 난은 8월 말 늦여름에 벌어진 일'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정사인 후한서 효영제기에 보면 하진이 십상시들 손에 죽은 것이 '중평 6년(189년) 8월 무진(戊辰)일'이라고 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후한서에 나온 8월과 무진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맞지 않은데 우선 영제 시기 마지막 연호인 중평은 189년 4월까지만 쓰였고 소제가 즉위하자마자 연호를 광희(光熹)로 바꿨기 때문이다.[11] 또한 육십갑자로 계산했을 때 189년 8월에는 무진일이 나올 수가 없다. 때문에 60갑자에서 189년이 해당되는 기사년(己巳年)에 무진일을 찾을 경우 그 다음 달인 9월 22일이 해당된다. 그리고 9월 22일을 음력으로 계산할 경우 8월 25일이 나온다.[12] 즉, 음력으로 따지면 8월 말인 셈이고 양력으로 따지면 9월 중순인 셈인데[13] 둘 다 여름이 아니다. 양력에서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入秋)는 8월 7일에서 8일 정도이며[14] 9월 22일 정도되면 추분(秋分)에 접어든다. 굳이 계절을 추론하면 가을이 되어야 한다. 삼국지 시리즈의 계절 설정을 생각해보면 쉬운데, 음력을 사용하는 개념이라 1~3월, 4~6월, 7~9월, 10~12월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설정되어 있다.
■ 손견이 '양주 서현' 이라는 곳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굳이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주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이 된다. 이러한 표기는 예를 들자면 MBC의 본사 주소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암로 267' 인데 그것을 '서울특별시 성암로 267' 이라고 표기한 것과 동일한 경우다. 해당 컷은 지도 앱에서 찾은 양주 서현을 가리키고 있기에 주소가 전부 나오지 않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럽긴 해도, 양주에는 서현이 하나뿐이기 때문에[16] 양주 서현이라고만 해도 지리적 위치를 특정할 수는 있다.
거기다가 손견은 연의와 정사 모두에서 '장사태수' 로 등장한다. 정사에서는 사공 겸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던 장온을 도와 양주(서량)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동참했다가[17] 이후 구성의 난이 발발했을 때 장사태수로 임명되었고, 구성과 호응한 계양과 영릉까지 평정하면서 오정후(烏亭侯)의 직위를 받았다. 연의에서도 반동탁연합 참전 당시 '오정후 장사태수'라는 직함을 달고 등장한다.
여강군 서현은 주유의 고향이다. 정사에서는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孫堅興義兵討董卓, 徙家於舒)'[18]고 되어 있다. 즉, 손견이 동탁을 토벌하러 떠나기 전에 그 가족이 여강군 서현에 있다는 점이 오류가 된다는 견해가 있는데, 70화 문단에서 후술하겠지만 수춘에 있었던 손견의 가족이 주유의 설득으로 서현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적으로도 매우 자연스러운 전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원소가 동탁에게 항의하다 벼슬을 버리고 낙양을 떠나는 장면이 마치 원소가 절대권력자 동탁에게 오기만으로 덤비다가 조조가 반거짓으로 때리는 연기를 해서야[19] 겨우 원소에 대한 동탁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동탁이 원소를 비웃고 조롱하며 죽일 수 있지만 백성들의 원성 때문에 그냥 보내준 것처럼 묘사된다. 일단 조조의 때리는 연기는 연의나 정사에 안 나오는 순수한 창작이며, 원소와 동탁의 대립 자체가 다르다. 이 장면은 정사에서는 동탁의 황제 폐위 의견에 원소가 칼까지 뽑아들고 정면으로 대립하며 "천하의 힘 있는 자가 동공 하나만은 아니다"라고 한 뒤 보란듯이 부절을 낙양성문에 걸어두는 시위를 한 뒤에 떠난다. 연의에서는 더욱 극적이 되어 다들 아무도 말 못하고 있는데 대놓고 동탁을 반대하고, 분노해 칼을 뽑아든 동탁에 맞서 칼을 뽑고 대놓고 욕설을 퍼부은 다음 떠난다. 즉, 삼톡처럼 원소의 굴욕이 아니라 오히려 연의에서 묘사된 몇 안되는 원소의 멋있는 장면이다. 원소는 당시 청류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집권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동탁이 죽이고 싶다고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20], 원소가 저런 시위를 벌이고 갔음에도 오히려 발해 태수 자리를 줘서 그를 회유하려고 했다. "저런 겁쟁이가 뭐함? ㅋㅋㅋㅋ 가다가 울지나 마라"라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 동탁조차 원소의 명성을 부담스러워한 것. 그런데 여기선 발해 태수를 주는 것도 생략됐다.
(손)책이 10여세일 때, 이미 교우를 맺어 이름이 알려지고 성예(명성)가 자자했다. 주유라 불리는 자가 있었는데 손책과 동년배였고 또한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성숙했다. 책에 대한 소문을 듣고 스스로 서현(舒)으로 가서 예를 갖춰 방문[21]했다. 곧바로 관계를 맺고 좋은 것을 나누니 의(義)가 쇠를 끊음과 같았고 책에게 서현으로 옮겨올 것을 권하자 책이 따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유가 손책을 만나러 서현으로 이동했다는 부분인데, 강표전에서는 주준이 손견을 좌군사마로 임명했을 때 '가족을 수춘에 머무르게 했다(留家著壽春)' 라는 기록이 있다. 즉, 강표전의 기록을 따른다고 하면 손책은 수춘에 있었던 셈이고 주유가 손책을 설득해서 서현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서현은 여강군에, 수춘현은 구강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수춘에 머무르고 있을 손책의 가족들이 만화의 내용처럼 주유 일가를 만나려면 주유 일가가 수춘에 온 상황이어야 한다. 여기까지 작품에서 묘사된 바는 전부 일치한다.[22] 이 과정에서 손견 일가가 수춘에서 서현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주유가 설득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해당 편의 서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기에 생략되어도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역사와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은 '십여 세'를 정확히 10세로 잡은 것이다. 둘이 만난 나이를 보다 어리게 잡아서 우정을 보다 각별히 묘사하려는 생각이었던 모양.
* 기존에 통용되던 오주전(五銖錢)을 없애고 새로이 소전(小錢)을 만들었는데 낙양과 장안에서 구리로 만든 인물상 등을 모조리 가져온 것도 모자라 백성들로부터 구리로 만든 물건을 죄다 수거한 뒤 그걸 녹여 동전을 만들었지만 제작 자체도 너무 조잡해 동전에 무늬도 없었고 너무 많이 풀리는 바람에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사람들은 동탁의 행위를 보고 같은 임조 출신인 진시황을 떠올렸다.[25] 즉 화폐개혁을 하긴 했으나, 완전히 실패해 민생고를 불러온 것이지만 부작용이 생략된 나머지 멀쩡한 정책을 편 것처럼 오해할 만하도록 기술되었다.
간혹 동탁이 선비들을 많이 등용한 것과 채옹이 동탁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한 일 때문에 재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후한서에는 그 부분에 언급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기술도 함께 적고 있다.
卓素聞天下同疾閹官誅殺忠良, 及其在事, 雖行無道, 而猶忍性矯情, 擢用群士. 동탁은 본디 엄관(환관)이 충성되고 좋은 이들을 베어죽인다고 천하가 한가지로 외치는 것을 듣고는 그 일을 살펴서 비록 무도하지만 오히려 잔인한 성품을 바로잡고 학식있는 무리를 뽑았다.
즉, 동탁은 당시 너무 이미지가 나빴던 환관들과 동급으로 취급당할까봐 선비들을 대거 기용한 것이지, 본인이 좋은 마음으로 한 게 절대 아니다. 이렇게 등용된 하옹, 정태 등이 모두 동탁의 패망에 일조하였으니 사대부 사회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 작중에서 표현되는 진궁의 모습이 검문소의 대장 정도로 나오는데 연의에 등장하는 진궁은 무려 중모현(中牟縣)의 현령(縣令)이었다. 현령은 당시 1만호가 넘는 현을 관리하는 직위였기 때문에 삼국지톡에서 그 휘하의 병사들이 가볍게 얘기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셈.[26] 그럼 왜 현령 정도나 되는 인물이 검문검색을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연의에서 동탁은 조조가 달아난 뒤 사방에 조조의 얼굴을 그린 전단지를 뿌리고 수배령을 내린 상태였다. 때문에 현령급 인물이 조조 하나를 잡으려고 길목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진궁 역시 연의에서 벼슬을 버리고 노자만 챙긴 채 조조를 따라갔기 때문에 삼국지톡 내에서처럼 현령의 권위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삼국지톡에서의 창작인 셈.
■ 조조의 아명(小字)인 '아만(阿瞞)'을 '거짓말쟁이'라고 해석한 설명을 조조가 시체로 위장해 탈출한 장면에 넣었는데[27] 조조의 아명의 한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나[28] 정말로 '거짓말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의 아명을 기술한 조만전(曹瞞傳)[29]에서도 이 아명이 거짓말쟁이라는 해석은 등장하지 않으며 더 황당한 건 조만전에도 '태조가 따로 불리는 이름은 길리이다(太祖一名吉利)' 라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즉, 조조가 불리던 이름은 진짜 이름인 '조'와 길리, 그리고 아만이었던 셈. 더군다나 길리(吉利)라는 이름 자체는 '운이 좋고 이롭다'는 뜻이다.
또 아명은 태몽 등을 반영하기도 하나, 아이가 무병장수 할 수 있도록 일부러 나쁘거나 천한 이름으로 짓기도 했다. 즉, 조조의 저 아명이 실제 조조의 성격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조조가 건강하게 성장하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부여한 이름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다. 실제로 고구려 동천왕의 경우는 아명이 '제사용 돼지(郊彘, 교체)', 황희는 '도야지(돼지)', 고종 황제는 '개똥이'였는데(...) 이것 역시 아만이라는 아명이 조조의 성품을 진지하게 반영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예가 된다.
조조가 거병할 때에 조숭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 조홍이 대신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온다.
조조가 처음 거병했을 때는 관직이 겨우 효기교위라 지방에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자금이 어디서 등장한 것인지 명확한 출처를 따지긴 어렵지만, 조씨 집안에 워낙 돈이 많았으므로 조조 자신도 상당한 자산가였을 가능성이 높고, 또 진류 효렴 위자[30]의 지원이 있었다. 조숭이 조조를 못마땅해한 나머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도 조조가 거병할 돈을 마련하는 것은 가능했다.
다만 조홍이 돈을 대신 내 주는 것은 오류이다. 조홍은 조조가 모은 병력을 이끌고 연주 인사들이 집결해 있던 산조로 나아갔을 무렵에야 합류한다.
■ 조조가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조조의 어머니는 생몰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후연이 조조가 지은 죄를 대신 받은 정사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조조가 하후연을 이용해 먹은 장면만 등장해서 조조가 나쁜 놈처럼 보이게 묘사되었다. 실제로는 조조가 하후연이 자기 대신에 중죄(重罪)를 치르는 사이에 방책을 생각해 하후연을 구하고 죄를 면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즉, 짤막한 고사에서 앞 부분만 인용하고 뒷 부분은 누락한 셈.
연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서 한동안 별 게 없었는데 별 해괴한 오류가 튀어나왔다. 작가 자기 손으로 19번째 제후라는 제목을 써서 유비가 합류하기 이전에 반동탁연합 18로 제후가 모인 걸로 설정해 놓고는 공손찬이 참여하지 않은 정사의 전개를 가져다 썼다. 정사를 따라가 공손찬이 빠졌다면 당연히 제후가 18명이나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손견과 유비는 실제론 원술과 조조 아래서 종군했고, 실제론 참여했으나 연의에서 빠진 유표까지 포함해도 정사상으론 참여한 군벌이 18명이나 되지 않는다.
순욱이 원소군 소속인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순욱이 원소군에서 일했던 적이 없다. 한복이 순욱을 초빙하자 이에 응하였는데, 순욱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한복 세력이 원소에게 멸망. 이후 원소도 순욱을 극진히 대접하나 순욱은 관직에 응하지 않고 나중에 조조에게 임관하게 된다. 즉 손님으로서 잠시 원소 세력에 있기는 하였으나 원소군의 책사로 있던 적은 없다. 아마 삼국 전투기에서 원래 원소군이었다는 설정을 써먹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6컷에 만총의 추천과 함께 여건이 등장하는데, 피묻은 키티옷을 보며 어머니가 사준옷이라는 말과 각주에
※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단 두목들을 모두 술자리에 초대해 한번에 죽여버리다.
여건, 자기를 미워하는 새어머니 극진히 모시다. <여건전>
앞 내용은 맞지만 뒷내용은 아니다. 우선 도적 토벌 건은 조조가 종사로 삼은 후에 도적 창희와 결탁한 계모 등 반란 주동자들을 술자리에 불러 처단한 거지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 무리들을 처단한 건 아니다. 자신을 미워한 새어머니 건은 먼 훗날 자신이 서주자사 시절에 발탁한 왕상이다. 정황상 여건전에 있는 왕상 주석을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 '연주 기획전략실 친목방'이라는 채팅방에서 순욱이 인사들을 천거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등장한다.
이때 곽가는 연주 사람이 아니라 예주 영천군 출신이며, 곽가가 관직에 나가기 전부터 교류하던 사람들도 대체로 영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근거로 이 부분은 오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상당히 오해를 사기 쉬운 서술이지만, '연주 출신'이 아니라 '연주에 거주 중인 사람 중 조조군에 들어올 만한 사람'과 같은 의미라면 말은 된다.
동승이 헌제의 조서를 대신 읽을 때 "비록 폐허가 되었으나... 400년 역사가 깃든 이곳, 낙양에 돌아오니 기쁘도다!"라고 말하였다. 아마 한나라의 역사 400년을 낙양의 역사로 등치시킨 듯한데, 전한의 수도는 장안이었으므로 수도로서의 낙양의 역사는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물론 한나라 이전 시대에도 낙양은 수도 역할을 한 적이 있으므로 그것까지 합쳐 말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반대로 400년을 훨씬 웃돌게 된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적절하지 못한 서술이다.
조조가 천자를 차지한 후, 자신을 포함하여 휘하 장수, 책사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사실이 진궁의 말을 통해 드러났으며 이때 정욱은 동평상이 되었다고 서술된다. 그러나 정욱이 동평상의 벼슬을 받은 것은 조조의 협천자 전, 여포, 진궁이 연주를 점령했을 때 순욱, 하후돈과 3개의 성을 굳건히 지킨 공이 있었기 때문에 받은 것으로 시기를 정확히 따지자면 아주 올바른 서술은 아니다.
조조의 벼슬이 승상으로 나온다. 물론 연의대로의 설정이라면 승상이 맞겠지만 삼톡에서는 정사의 기록을 따라 원소가 조조가 대장군이 되는데 불만을 표했다.[33] 즉, 고작 대장군으로도 저정도인데 하물며 승상에 올랐다면 원소가 조조를 어떻게 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이다.[34] 연의에선 원소의 불만을 생략했기에 무난하게 진행이 되었던것. 정사와 연의를 적절하게 조합하다가 간혹 가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삼톡 특유의 고질병으로 전에 원술과 손책의 전국옥새건도 마찬가지다.[35] 이번 문제도 그렇게 된것. 사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삼톡에선 유독 조조의 벼슬 오류가 많다. 조조는 협천자 이후 대장군(임시) -> 사공 겸 거기장군 -> 하북 평정 이후 승상이지만 삼톡에선 협천자 이후 대장군 -> 태위 -> 논영회시점에서 승상이 되었다.
손책의 최대 공적 중 하나인 황조 토벌을 손책의 패배로 왜곡했다. 199년 일어난 손책의 하구 전투는 주유와 정보, 여범, 손권 등 손책 세력의 주요 장수들이 총출동하여 황조와 유표의 원군이었던 유호와 한희를 철저히 개박살낸 전투로 손책이 올린 표에 의하면 죽은 자만 3만 여명으로 기록된 대승이었다. 그러나 삼톡에서는 승패를 바꿔버리는 걸로도 모자라 유표의 본군도 아닌 겨우 감녕의 부대에 털린 것으로 묘사했다. 이는 같이 참여한 손책의 장수들 역시 털린 것이 되니, 결국 손책 세력의 전투력을 깎아내린 것이다. 손책을 띄워주고는 싶으나 어떻게 설득력 있게 할지는 모르는 작가진의 모습을 보여준다. 덧붙여, 삼국전투기를 따라하려 했는지 203년에 전사하는 능조 역시 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묘사했다. 정사나 연의나 능조의 전사는 능조가 황조를 상대로 승리한 후 추격 도중 감녕에게 화살에 맞고 죽었으며, 그 어디에서도 감녕이 손책, 혹은 손권을 이겼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능조가 감녕에게 부대와 부대로 싸워 털리게 했으니 능조에게도 굴욕. 이때까지 삼국지톡은 손책에 대해 계속 대단하다고 묘사하며 과도한 편애와 애정을 보여주었는데, 정작 강동정벌을 스킵한 것도 모자라 유표에게도 털리는 것으로 왜곡하며 과연 작가진이 손책을 띄우려고 하는지 폄하하려 하는지는 의문이 되었다. 삼국지 팬덤에서는 기껏 손책 지나칠 정도로 띄워주더니만 이제 곧 죽을 때가 되니 감녕에게 신캐 보정을 주기 위해 손책을 깎아내리냐며 비웃는 중.
강릉(남군)은 주유와 유비가 함께 함락시켰고 땅을 나누어 강릉의 북쪽은 손권, 남쪽은 유비가 가져갔고 유기가 죽은 후 형주목의 자리는 유기의 후견자였던 유비가 승계받았다. 형남 4군 중 장사는 손권이 일부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무릉은 황개의 기록이 언제인지에 따라 논란이 있지만 전체 영역이 아니었을 뿐 4군 모두 유비가 자력으로 점령했다. 유비가 빌린 것이 확실한 곳은 융중대를 위해 필요했던 강릉 북쪽뿐이며 형남 4군 중 대부분은 당시 손권의 소유가 아니었다.
익주의 성도를 설명하면서 각주로 "현재의 청두(칭따오)"라고 표기하는 심각한 재현 오류를 범하였다, 성도는 21세기 중국에서도 성도(成都)이며, 발음은 청두다. 뒤에 사족으로 붙힌 "칭따오"는 靑島(청도)이며 서쪽의 청두와 완전 정반대인 산둥성의 도시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시대 배경에 강원도 평창이라고 설명하고 각주에 "현재의 평양"이라고 표기한 꼴.
위왕 조조의 계승자를 "태자"라고 칭하였다, 허나 "태자"는 오직 황제의 계승자에게만 사용 가능한 칭호이며 조조는 삼국지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듯이 평생 칭제를 하지 않았다[36],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제후왕의 계승자는 어디까지나 세자다[37]. 이러한 오류는 2023년 4월 14일 최신화 무료분인 477화에서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베스트 댓글들도 대다수가 이를 지적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톡 속 조조와 조비의 관계에만 집중한다.베플들의 역사왜곡 내지는 설명오류는 덤
남송때 저술된 광남서로 지방고찰서적인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39]에 카더라로 작성된 황월영 자동화 목각인형썰을 정사라고 작성했다. 허나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에서조차 "면남인[40]들에게 전해지길..."이라며 카더라취급을 했고, 현재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원서는 진즉에 실전됐으며 남아 있는 기록들은 이를 인용했다고 하는 명청시대의 제갈량인물전, 제갈량문집 등의 서적들 뿐이다. 24사는 물론이고 자치통감에도 보이지 않는 지방민들의 구전설화를 정사라고 못박은 것은 삼국지연의를 제외한 중국사서에 나온 모든 기록은 정사로 취급하는 아예 대전제부터 완전히 틀렸다.[41]
요약하자면 작가 무적핑크가 세는나이 계산[42]+1로 계산한다. 태어날 때 1살로 계산하기 때문이다.]을 전혀 하지 못한다. 작가가 이것을 인지하지 않는 한 이 오류들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인지만 하면 해결가능한 오류인데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다. 신문 기사에서 만 나이로 기재하는 느낌을 살리려는 의도로 단순하게 마이너스 1을 했을 수도
유비는 161년생으로 184년 당시 24살인데 1화부터 작품 통틀어 일관되게 23살로 묘사하는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만 나이를 쓰지 않았을 뿐더러, 만 나이를 쓰더라도 161년 6월생인 유비가 184년 1월에 23살이 되는 건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비의 고무줄 나이. 실제 역사에서 유비는 161년생으로 황건적의 난 당시 24살이지만, 이 작품에서 유비는 1화부터 꾸준히 23살로 언급되고 있다. (애당초 작가의 고유 창작물도 아니지만) 창작물에서 주인공의 나이를 각색하는 일이야 흔히 있으니 삼국지톡에서의 유비는 162년생으로 설정된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정작 1화 마지막에는 유비가 161년에 태어났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유비의 나이가 161년생인지 162년생인지 불분명한 까닭에 작품이 계속되면서 설정충돌이 일어나고 있다.[43] 게다가 해당 작가가 연의를 따라간다고 얘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연의에서 유비가 의병을 활동할 당시 나이는 28세로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된 들쑥날쑥한 나이의 지적과 비슷한데 1화에서는 유비가 15세에 대학까지 다녔으나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가 17화에 와서는 16세에 노식의 특강을 들은 것처럼 말이 바뀌었다.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웹툰의 특성상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댓글이 베댓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베댓은 삼국지톡의 독자들이 몰랐던 사실들을 알려주는 순기능을 하지만 때로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나 잘못된 사실을 알려주는 경우도 많다. 관련된 실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다면 댓글이 아닌 사서상 기록을 찾아보는 것을 권장한다.[44]
다음은 대표적인 오류의 베댓에 대한 설명이다.
대표적으로, 장비가 몰락한 귀족의 후손이라는 베댓이 예시이다. 물론 장비의 출신을 추정함에 있어 '몰락 귀족이나 변방 사대부 집안 출신일 것이다'라는 가설이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45], 어쨌든 정사 장비전은 물론이고 현존하는 어떤 사서에도 장비의 출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장비가 실제로는 미남이라는 이야기 역시 본 작품의 댓글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오류. 정사삼국지 어디에도 장비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가 장비 미남설을 쓰긴 했지만... 위의 장비 몰락 귀족 설에서 기반한 미남 이야기 썰에서 생긴 오해. 반면, 댓글에서 실제론 추남이었다고 한다는 말이 떠도는 제갈량은 오히려 역사서에 미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외모가 뛰어난 것이 명백하다. 재미있게도 위, 촉, 오 창립자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정사에 기록된 미남이다.
조조에 대해서도 미남에 키가 컸다는 이야기가 보이는데, 조조는 오히려 외모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는 야사나 설화가 다수 존재한다. 일단 외모가 훌륭하지는 않았는지 풍채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흔한편. 또한, 곽가도 정사에 미남이라고 기록된 사람이 아니다.[46] 조조의 참모 중 미남이었던 기록이 있는건 곽가가 아닌 순욱이다.
8화 댓글에서 관우가 염전 장사꾼을 죽인 후 소쌍에게 몸을 의탁했다는 베플이 존재하는데, 그 내용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 등장하는 각색된 내용이다. 연의에서 장세평과 소쌍은 말 그대로 유,관,장 삼형제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26화에서 손가의 요절징크스를 다루는 내용의 베플이 있는데, 정확하지 않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년 또는 몰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향년도 기재했으며, 이 중엔 나무위키도 포함한 게임(…)에서 참고한 듯한 나이도 보인다.
27화에서는 손견이 성벽을 기어오른걸 보고 실제 역사인줄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아래 [연의]라고 써져있었는데도 불구하고...
40화에서 조조를 20대 후반이라고 하는 댓글이 베댓이 됐는데, 이때는 189년으로 조조의 나이 35세였다. 애초에 첫 등장(184년)부터 30세이다.
46-47화를 거쳐 대장군 하진이 사면을 약속하고 범죄자들을 기용했다는 내용의 댓글이 베댓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하진이 모집한 것은 '맹장'과 '호걸'이었고 그들을 모으면서 '죄에 대한 사면'을 공약한 적이 없다. 유비의 경우도 하진이 파견한 도위인 관구의 밑에서 종사하며 세운 공이 이전에 지은 죄를 덮고 새로 공직생활을 할 만 했기 때문에 하밀의 승으로 임명된 것에 가깝다.[47] 댓글들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처럼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49화에서 작가가 하진의 자(字)를 거고(巨高)[48]라고 쓰고 부연 설명으로 '크고 높음' 이라고 써놨는데 하진의 원래 자가 수고(遂高)인 오류는 넘어가더라도 저 곁다리로 붙인 해석을 보고 섹드립을 치는 댓글이 많다.
하태후가 유협을 낙태시키려 한 것과 왕미인과 동태후를 살해한 것 등 악행이 묘사되지 않고 십상시 처형을 반대한 것도 가족이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실드를 받아서인지 예쁘다는이유로 미화되고 있고 비판적인 의견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후한이 몰락하게 된 원인은 환관과 외척 양쪽이 번갈아 전횡하게 되어 황권은 한없이 약한 상태로 나라의 발전보다 권력 집단 간의 잇속 챙기기만 바쁘게 된 것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저 흥미 위주가 아닌 역사자료로써의 가치를 두고 해석하려면 환관이든 외척이든 진영논리나 흑백논리로 가지 않고 형평성에 맞게 평가되어야 한다.
[1]배경이 되는 시대를 적은 문서에도 나오지만, 끝이 되는 지점은 서진이 손오를 멸망하면서 통일을 한 280년인 것은 불변이지만, 시작이 되는 시점은 후한의 멸망(220년), 황건적의 난(184년) 등 여러 설들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삼국지 창작물처럼 황건적의 난을 시작점으로 삼았다.[2] 원래 삼국시대 자체가 공부하는데 있어 오류와 다양한 해석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 시기는 너무나 짧은데 비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수많은 기록들이 유실되었으며, 각자 세력들이 명분상으로 극적으로 대립되는 입장을 유지했다(=적대 세력에 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다). 일례로 한때 중국에서 가장 강대한 원소의 세력은 진수가 삼국지를 쓰기 수십년전 패망했기에 관련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원소의 상장 중 하나인 안량에 대한 기록이 '명장이었다' '관우에게 죽었다' 정도다) 설령 기록이 방대하고 상세한 역사서라 할지라도 소설과 역사서를 번갈아가며 내용을 취합하면 오류가 생길텐데, 삼국시대같이 기록이 빈약하고 왜곡이 많은 시대에 대한 묘사라면 오류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이유로 삼국시대에 대한 창작물들은 캐릭터들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강하게 들어가는 편이다. 장비의 좌충우돌 막내 이미지나 황충의 노장 명궁 이미지는 순수하게 후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3] 차설(且說)이라는 말은 '각설' 이라는 의미다.[4] 상당히 중요한 지역인지라 영제가 중평 원년(184년)에 8관에 도위(都尉)를 설치하기도 했다.[5]코에이 삼국지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낙양팔관이며 장안에서 낙양으로 진입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구간이다.[6] 함곡과 비슷한 포지션으로서 서쪽에 위치한 함곡과는 달리 동쪽에서 낙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7] 하진이 원소의 계획대로 정원을 보내 불을 질러 하태후를 협박했던 그 곳 맞다.[8] 보통 북망산은 무덤이 많거나 죽은 이들이 많은 곳 등의 불길한 의미를 담고 있다.[9] 일단 저 나이 계산도 틀렸다(...).[10] 당시 예주에 속해 있었으며 공자의 고향이기도 하다.[11] 아마 이 부분은 영제의 기록을 담은 '효영제기'에 담긴 내용이기 때문에 영제의 연호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12] 공교롭게도 위키백과에서도 한국어 십상시의 난 항목에서 이러한 계산법을 채택하고 있다.[13] 고대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등에서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한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14] 이는 양력이 중국의 화북지방에 맞춰진 탓이 크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무진장 덥지만 중국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15] 옥새를 담당하던 관원.[16] 중국 북서부의 양주(凉州), 즉 서량에는 한양군(훗날의 천수군)에 서현(西縣)이 하나 있지만 한자가 다르다.[17] 즉, 손견이 동탁을 처음 만난 게 이 시점이며, 동탁이 장온의 통제를 따르지 않자 죽여야 한다고 직언을 올리기까지 했다.[18] 오서 주유노숙여몽전.[19] 절반은 진심이었다. 원소가 군벌을 불러들여 십상시를 때려잡자는 계획을 내 이 모양이 됐기 때문.[20] 삼톡에선 이 부분이 백성들이 "프린스 원소"를 응원하는 걸 보고 동탁이 민심을 얻기 위해 원소 죽이는 걸 포기한 것으로 나왔는데, 보다 정사 기록에 맞게 묘사하려면 오히려 당대 명사들이 일제히 동탁을 압박하고 동탁은 자신의 권력이 아직 불안정한 걸 느끼는게 더 현실적이었을 듯.[21] 조언(造焉)은 보통 넷상에서 지명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 조언이라는 말은 배방(拜訪), 즉 '예를 갖춰 방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서 49권 완적(阮籍)에 관한 열전에서도 조언이라는 말은 방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22] 당시 손견 일가가 머무르던 곳을 수춘으로 직접 언급하진 않고 '손견군 주둔지'라고만 표현하긴 한다.[23] 영제의 무덤이다. 하태후는 여기에 합장 되었는데 동탁은 그 와중에 보물을 꺼내간 것이다(...).[24] 연의에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25] 진시황은 과거 구리로 거대한 동상을 만든 적이 있었다. 동탁은 반대로 구리로 만든 상들을 수거해 파괴했기 때문에 비록 서로 다른 행위를 하지만 같은 부류로 본 것이다.[26] 그래서 도망다니는 조조를 따르기 위해 현령직을 단숨에 버리고 간 연의 속 진궁의 행위가 돋보이는 것이다.[27] 아마도 어릴 때부터 거짓말에 능했던 조조가 그 주특기(...)를 살려 목숨을 건진 것이라는 의미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28] 아(阿)는 보통 언덕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알랑거리다' 라는 의미가 있으며 만(瞞)의 경우는 '속이다'라는 의미로서 자주 사용된다.[29] 정사인 위지 무제기에서 조만전을 인용하였다.[30] 뒷날 조위의 중신이 되는 위진의 아버지다. 본인도 조조를 따라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나 얼마 가지 않아 전사한다.[31] 더 언급이 없으므로 오타일 확률이 100%이다[32] 현재는 제갈균으로 수정이 된 상태이다.[33] 물론 자신을 태위로 삼았다는것에 빡쳤을수도 있지만, 조조가 대장군직을 자신에게 넘기며 일단은 넘어가는걸 보면 그쪽에도 불만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34] 대장군도 굉장히 높지만 승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장 승상의 권한이 커서 승상을 없애고 그 권한을 삼공과 대장군으로 나눈것이다.[35] 정사에선 손견이 곧바로 원술에게 옥새를 주고 연의에선 손책이 군사를 빌리는 담보로 원술에게 옥새를 준다. 하지만 삼톡에선 임팩트있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선진 모르겠지만 손책이 손견이 죽자 바로 원술에게 투항을 조건으로 전국옥새를 주는 애매한 시점으로 전개되었다.[36] 칭제를 한 것은 조조의 아들 조비, 조조는 조비에 의해 황제로 추존됐으나 생전에는 결코 칭제를 하지 않음.[37] 쉽게 말하자면 조선왕과 위왕은 작위가 동급이니 둘의 계승자 모두 세자다, 다만 조선국왕의 경우 외국의 제후왕이기에 중국 내부의 제후왕보다는 급이 더 높다.[38] 天下人의 天은 하늘 천으로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千下人의 千은 일천 천으로 숫자 1000을 뜻하며 千下人이란 단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한자문화권에서 존재하지 않는 한자 단어다.[39] 지리, 풍속 등 다방면을 다뤘다고 전해진다.[40] 현재의 후베이성징저우시.[41]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 지리서에서 강원도 사람들에게 "서울 사람 이순신이 자동소총을 개발했다."라는 구전설화를 정사라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42] (나이)=(기준연도)-(출생연도[43] 1화에서 184년의 유비는 23살이고(162년생), 15살에 대학에 들어갔고(176년) 6년 전 대학을 중퇴한 것으로(178년) 나온다. 그런데 17화에서 유비는 1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나온다. 184년에 23살인 유비가 1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면 14살에 입학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유비가 184년으로부터 7년 전인 177년에 16살이었다고 언급함으로써 175년의 유비는 14살이라고 못을 박는다. 유비가 161년생이라면, 대학에 들어간 175년에 15살이었던 게 맞다. 이 경우 유비는 177년에 16살이 될 수 없다. 유비가 162년생이라면, 대학에 들어간 175년에 14살이 된다. 이 경우 유비는 15살에 대학에 들어갔다는 설명과 어긋난다. 해당 관련 설정오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화에서 유비는 178년에 대학을 중퇴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17화에서는 유비가 2년만에 자퇴했다고 나오므로 유비는 176년에 입학한 셈이다. 이 경우 175년에 입학했다는 설명과 또 충돌한다.[44] 물론 '기록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근거 자료가 부재할 뿐 추론 자체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 추론이 맞다고 볼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기록이 있는데도 상반된 것을 이야기하면 오류가 맞다.)[45]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는 민간 전승이 있는 점도 그렇고, 장비의 부인이었던 하후씨가 한의 개국공신 하후영의 후손이자 당대 조조 세력의 실세였던 하후연이 아끼던 조카딸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평민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다. 특히 하후씨와 혼인한 것의 경우 하후씨가 요즘으로 치면 흔히 생각하는 귀한 집 따님 그 자체이고 당시 장비가 하후씨를 납치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정략결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신부만 먹튀당한 조위측에서 납치혼이라고 프로파간다를 시도한 것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그런데 전술했다시피 한의 개국공신 가문이자 당대 정권 실세가 애지중지하던 아가씨를 아무리 난세에 정략혼이라 해도 아예 근본없는 사내에게 시집보낼 리는 없으므로, 장비의 출신이 아주 한미한 집안이 아닌 '명문가 규수를 상대로 혼인해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수 있는' 수준은 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46] 진수는 원소, 제갈량, 손책, 주유 등 뛰어난 미남은 확실하게 미남으로 기록하였으며 그밖에도 키가 크거나 수염이 아름답거나, 혹은 반대로 못생겼다는 등 외모에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했다. 그런데 곽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름이 '아름다울 가'를 쓰지만 그뿐이다.[47] 출처: 촉서 선주전[48] 조조의 아버지 조숭의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