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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톡/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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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목록 | 등장인물 (기타 세력 · 미분류) | 평가 | 비판 (조조/비판 · 피해자) | 오류 (시즌 1 · 시즌 2)


1. 개요2. 내용 오류
2.1. 시즌 12.2. 시즌 22.3. 시즌 3
2.3.1. 61화2.3.2. 62화2.3.3. 63화2.3.4. 67화2.3.5. 68화2.3.6. 70화2.3.7. 72화2.3.8. 75화2.3.9. 80화2.3.10. 81화2.3.11. 96화
2.4. 시즌 4
2.4.1. 127화2.4.2. 129화
2.5. 시즌 5
2.5.1. 156화2.5.2. 180화
2.6. 시즌 6
2.6.1. 187화2.6.2. 188화2.6.3. 190화2.6.4. 199화2.6.5. 246화2.6.6. 248화~271화2.6.7. 265화2.6.8. 295화
2.7. 시즌 7
2.7.1. 335화
2.8. 시즌 8
2.8.1. 8화2.8.2. 422화
2.9. 시즌 9
2.9.1. 466화~2.9.2. 477화2.9.3. 479화
3. 나이 계산 관련 오류
3.1. 1화3.2. 10화3.3. 17화3.4. 26화3.5. 28화3.6. 40화3.7. 43화3.8. 55화3.9. 58화3.10. 62화3.11. 63화3.12. 69, 71화3.13. 82화
1. 베플의 오류 및 논란

1. 개요

네이버 웹툰 삼국지톡에 있는 재현 오류설정 오류에 대해 정리했다.

삼국지톡은 원전인 삼국지연의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에 가까우며 작가의 순수한 자기 창작물이 아니다 보니 이래저래 오류가 발생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삼국지연의 역시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이고 연의 역시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원전 자체가 워낙 방대[1]하고 이 역시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류들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건 삼국지톡은 어디까지나 삼국지를 기반으로 만든 새로운 삼국지의 갈래 중 하나이므로 어디까지나 실제 역사를 알고 싶을 때 참고하도록 하자.[2]

☆ 표시 - 삼국지톡이 아닌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난 오류이다.
■ 표시 - 실제 역사와 사실관계가 명백히 불일치한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내용의 단순 생략, 연의와는 충돌하지만 정사에는 가까운 경우, 원전 사료 자체가 모호한 경우 등이 이에 속하며, 작품 속 해석의 여지가 충분한 경우에 쓴다.

2. 내용 오류

2.1. 시즌 1

삼국지톡/오류/시즌1 참조.

2.2. 시즌 2

삼국지톡/오류/시즌2 참조.

2.3. 시즌 3

2.3.1. 61화

즉, 연의에서 장양과 단규가 황제를 겁박해 도착한 곳은 낙양성 북쪽의 북망산이었다. 한편 후한서에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讓, 珪等復劫少帝, 陳留王走小平津.
양, 규 등이 다시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소평진으로 달아났다.
정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소평진은 이른바 낙양을 둘러싼 낙양팔관(洛陽八關)이라 불리는 8개의 관문 중 하나를 의미하며[4] 8관에 속하는 곳은 함곡(函谷)[5], 이궐(伊闕), 광성(廣成), 대곡(大谷), 환원(轘轅), 선문(旋門)[6], 맹진(孟津)[7], 소평진(小平津)이다. 소평진은 맹진보다도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장양과 단규가 소제와 진류왕을 끌고 북궁을 탈출해 제법 멀리 도망갔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소평진은 엄연히 낙양을 감싼 8개의 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외곽 황야' 라고 묘사될 수 없으며 연의의 북망산 또한 낙양과 멀지 않은 지점인데다 역대 황제들과 명사들이 묻힌 곳이라 오늘날의 어감과는 달리[8] 참배객들이 많이 오가던 곳이라 황야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다. 더군다나 (연의 기준으로) 동탁은 낙양 외곽인 홍농의 민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북망산이나 소평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즉, 민공이 황제 일행을 구출하고 동탁이 낙양의 사태를 관망하다가 이내 군을 휘몰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장면이 한꺼번에 누락되면서 발생한 오류다.

2.3.2. 62화

2.3.3. 63화

2.3.4. 67화

2.3.5. 68화

2.3.6. 70화

2.3.7. 72화

간혹 동탁이 선비들을 많이 등용한 것과 채옹이 동탁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한 일 때문에 재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후한서에는 그 부분에 언급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기술도 함께 적고 있다.
卓素聞天下同疾閹官誅殺忠良, 及其在事, 雖行無道, 而猶忍性矯情, 擢用群士.
동탁은 본디 엄관(환관)이 충성되고 좋은 이들을 베어죽인다고 천하가 한가지로 외치는 것을 듣고는 그 일을 살펴서 비록 무도하지만 오히려 잔인한 성품을 바로잡고 학식있는 무리를 뽑았다.

즉, 동탁은 당시 너무 이미지가 나빴던 환관들과 동급으로 취급당할까봐 선비들을 대거 기용한 것이지, 본인이 좋은 마음으로 한 게 절대 아니다. 이렇게 등용된 하옹, 정태 등이 모두 동탁의 패망에 일조하였으니 사대부 사회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2.3.8. 75화

2.3.9. 80화

2.3.10. 81화

2.3.11. 96화

2.4. 시즌 4

2.4.1. 127화

2.4.2. 129화

2.5. 시즌 5

2.5.1. 156화

2.5.2. 180화

2.6. 시즌 6

2.6.1. 187화

2.6.2. 188화

2.6.3. 190화

2.6.4. 199화

2.6.5. 246화

2.6.6. 248화~271화

2.6.7. 265화

2.6.8. 295화

2.7. 시즌 7

2.7.1. 335화

127화에서 설명한 것 처럼, 순욱이 본래 원소의 부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2.8. 시즌 8

2.8.1. 8화

강릉(남군)은 주유와 유비가 함께 함락시켰고 땅을 나누어 강릉의 북쪽은 손권, 남쪽은 유비가 가져갔고 유기가 죽은 후 형주목의 자리는 유기의 후견자였던 유비가 승계받았다. 형남 4군 중 장사는 손권이 일부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무릉은 황개의 기록이 언제인지에 따라 논란이 있지만 전체 영역이 아니었을 뿐 4군 모두 유비가 자력으로 점령했다. 유비가 빌린 것이 확실한 곳은 융중대를 위해 필요했던 강릉 북쪽뿐이며 형남 4군 중 대부분은 당시 손권의 소유가 아니었다.

2.8.2. 422화

익주의 성도를 설명하면서 각주로 "현재의 청두(칭따오)"라고 표기하는 심각한 재현 오류를 범하였다, 성도는 21세기 중국에서도 성도(成都)이며, 발음은 청두다. 뒤에 사족으로 붙힌 "칭따오"는 靑島(청도)이며 서쪽의 청두와 완전 정반대인 산둥성의 도시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시대 배경에 강원도 평창이라고 설명하고 각주에 "현재의 평양"이라고 표기한 꼴.

2.9. 시즌 9

2.9.1. 466화~

위왕 조조의 계승자를 "태자"라고 칭하였다, 허나 "태자"는 오직 황제의 계승자에게만 사용 가능한 칭호이며 조조는 삼국지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듯이 평생 칭제를 하지 않았다[36],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제후왕의 계승자는 어디까지나 세자다[37]. 이러한 오류는 2023년 4월 14일 최신화 무료분인 477화에서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베스트 댓글들도 대다수가 이를 지적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톡 속 조조와 조비의 관계에만 집중한다.베플들의 역사왜곡 내지는 설명오류는 덤

2.9.2. 477화

천하인(天下人)의 한자를 千下人으로 표기하는 등 매우 기초적인 한자를 틀렸고 이는 무료분으로 풀릴때까지 수정되지 않았다[38].

2.9.3. 479화

남송때 저술된 광남서로 지방고찰서적인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39]카더라로 작성된 황월영 자동화 목각인형썰을 정사라고 작성했다. 허나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에서조차 "면남인[40]들에게 전해지길..."이라며 카더라취급을 했고, 현재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원서는 진즉에 실전됐으며 남아 있는 기록들은 이를 인용했다고 하는 명청시대의 제갈량인물전, 제갈량문집 등의 서적들 뿐이다. 24사는 물론이고 자치통감에도 보이지 않는 지방민들의 구전설화를 정사라고 못박은 것은 삼국지연의를 제외한 중국사서에 나온 모든 기록은 정사로 취급하는 아예 대전제부터 완전히 틀렸다.[41]

3. 나이 계산 관련 오류

요약하자면 작가 무적핑크가 세는나이 계산[42]+1로 계산한다. 태어날 때 1살로 계산하기 때문이다.]을 전혀 하지 못한다. 작가가 이것을 인지하지 않는 한 이 오류들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인지만 하면 해결가능한 오류인데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다. 신문 기사에서 만 나이로 기재하는 느낌을 살리려는 의도로 단순하게 마이너스 1을 했을 수도

3.1. 1화

3.2. 10화

3.3. 17화

3.4. 26화

3.5. 28화

3.6. 40화

3.7. 43화

3.8. 55화

3.9. 58화

해당 회차에 나이 계산을 완전히 틀리게 하고 있고, 이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함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십상시의 난 당시는 189년으로 제갈근을 중학생으로 설정하려면 중학교 3학년이어야 한다.

3.10. 62화

3.11. 63화

3.12. 69, 71화

3.13. 82화

1. 베플의 오류 및 논란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웹툰의 특성상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댓글이 베댓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베댓은 삼국지톡의 독자들이 몰랐던 사실들을 알려주는 순기능을 하지만 때로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나 잘못된 사실을 알려주는 경우도 많다. 관련된 실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다면 댓글이 아닌 사서상 기록을 찾아보는 것을 권장한다.[44]

다음은 대표적인 오류의 베댓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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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이 되는 시대를 적은 문서에도 나오지만, 끝이 되는 지점은 서진손오를 멸망하면서 통일을 한 280년인 것은 불변이지만, 시작이 되는 시점은 후한의 멸망(220년), 황건적의 난(184년) 등 여러 설들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삼국지 창작물처럼 황건적의 난을 시작점으로 삼았다.[2] 원래 삼국시대 자체가 공부하는데 있어 오류와 다양한 해석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 시기는 너무나 짧은데 비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수많은 기록들이 유실되었으며, 각자 세력들이 명분상으로 극적으로 대립되는 입장을 유지했다(=적대 세력에 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다). 일례로 한때 중국에서 가장 강대한 원소의 세력은 진수가 삼국지를 쓰기 수십년전 패망했기에 관련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원소의 상장 중 하나인 안량에 대한 기록이 '명장이었다' '관우에게 죽었다' 정도다) 설령 기록이 방대하고 상세한 역사서라 할지라도 소설과 역사서를 번갈아가며 내용을 취합하면 오류가 생길텐데, 삼국시대같이 기록이 빈약하고 왜곡이 많은 시대에 대한 묘사라면 오류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이유로 삼국시대에 대한 창작물들은 캐릭터들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강하게 들어가는 편이다. 장비의 좌충우돌 막내 이미지나 황충의 노장 명궁 이미지는 순수하게 후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3] 차설(且說)이라는 말은 '각설' 이라는 의미다.[4] 상당히 중요한 지역인지라 영제가 중평 원년(184년)에 8관에 도위(都尉)를 설치하기도 했다.[5] 코에이 삼국지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낙양팔관이며 장안에서 낙양으로 진입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구간이다.[6] 함곡과 비슷한 포지션으로서 서쪽에 위치한 함곡과는 달리 동쪽에서 낙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7] 하진이 원소의 계획대로 정원을 보내 불을 질러 하태후를 협박했던 그 곳 맞다.[8] 보통 북망산은 무덤이 많거나 죽은 이들이 많은 곳 등의 불길한 의미를 담고 있다.[9] 일단 저 나이 계산도 틀렸다(...).[10] 당시 예주에 속해 있었으며 공자의 고향이기도 하다.[11] 아마 이 부분은 영제의 기록을 담은 '효영제기'에 담긴 내용이기 때문에 영제의 연호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12] 공교롭게도 위키백과에서도 한국어 십상시의 난 항목에서 이러한 계산법을 채택하고 있다.[13] 고대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등에서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한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14] 이는 양력이 중국의 화북지방에 맞춰진 탓이 크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무진장 덥지만 중국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15] 옥새를 담당하던 관원.[16] 중국 북서부의 양주(凉州), 즉 서량에는 한양군(훗날의 천수군)에 서현(西縣)이 하나 있지만 한자가 다르다.[17] 즉, 손견이 동탁을 처음 만난 게 이 시점이며, 동탁이 장온의 통제를 따르지 않자 죽여야 한다고 직언을 올리기까지 했다.[18] 오서 주유노숙여몽전.[19] 절반은 진심이었다. 원소가 군벌을 불러들여 십상시를 때려잡자는 계획을 내 이 모양이 됐기 때문.[20] 삼톡에선 이 부분이 백성들이 "프린스 원소"를 응원하는 걸 보고 동탁이 민심을 얻기 위해 원소 죽이는 걸 포기한 것으로 나왔는데, 보다 정사 기록에 맞게 묘사하려면 오히려 당대 명사들이 일제히 동탁을 압박하고 동탁은 자신의 권력이 아직 불안정한 걸 느끼는게 더 현실적이었을 듯.[21] 조언(造焉)은 보통 넷상에서 지명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 조언이라는 말은 배방(拜訪), 즉 '예를 갖춰 방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서 49권 완적(阮籍)에 관한 열전에서도 조언이라는 말은 방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22] 당시 손견 일가가 머무르던 곳을 수춘으로 직접 언급하진 않고 '손견군 주둔지'라고만 표현하긴 한다.[23] 영제의 무덤이다. 하태후는 여기에 합장 되었는데 동탁은 그 와중에 보물을 꺼내간 것이다(...).[24] 연의에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25] 진시황은 과거 구리로 거대한 동상을 만든 적이 있었다. 동탁은 반대로 구리로 만든 상들을 수거해 파괴했기 때문에 비록 서로 다른 행위를 하지만 같은 부류로 본 것이다.[26] 그래서 도망다니는 조조를 따르기 위해 현령직을 단숨에 버리고 간 연의 속 진궁의 행위가 돋보이는 것이다.[27] 아마도 어릴 때부터 거짓말에 능했던 조조가 그 주특기(...)를 살려 목숨을 건진 것이라는 의미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28] 아(阿)는 보통 언덕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알랑거리다' 라는 의미가 있으며 만(瞞)의 경우는 '속이다'라는 의미로서 자주 사용된다.[29] 정사인 위지 무제기에서 조만전을 인용하였다.[30] 뒷날 조위의 중신이 되는 위진의 아버지다. 본인도 조조를 따라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나 얼마 가지 않아 전사한다.[31] 더 언급이 없으므로 오타일 확률이 100%이다[32] 현재는 제갈균으로 수정이 된 상태이다.[33] 물론 자신을 태위로 삼았다는것에 빡쳤을수도 있지만, 조조가 대장군직을 자신에게 넘기며 일단은 넘어가는걸 보면 그쪽에도 불만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34] 대장군도 굉장히 높지만 승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장 승상의 권한이 커서 승상을 없애고 그 권한을 삼공과 대장군으로 나눈것이다.[35] 정사에선 손견이 곧바로 원술에게 옥새를 주고 연의에선 손책이 군사를 빌리는 담보로 원술에게 옥새를 준다. 하지만 삼톡에선 임팩트있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선진 모르겠지만 손책이 손견이 죽자 바로 원술에게 투항을 조건으로 전국옥새를 주는 애매한 시점으로 전개되었다.[36] 칭제를 한 것은 조조의 아들 조비, 조조는 조비에 의해 황제로 추존됐으나 생전에는 결코 칭제를 하지 않음.[37] 쉽게 말하자면 조선왕과 위왕은 작위가 동급이니 둘의 계승자 모두 세자다, 다만 조선국왕의 경우 외국의 제후왕이기에 중국 내부의 제후왕보다는 급이 더 높다.[38] 天下人의 天은 하늘 천으로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千下人의 千은 일천 천으로 숫자 1000을 뜻하며 千下人이란 단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한자문화권에서 존재하지 않는 한자 단어다.[39] 지리, 풍속 등 다방면을 다뤘다고 전해진다.[40] 현재의 후베이성 징저우시.[41]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 지리서에서 강원도 사람들에게 "서울 사람 이순신이 자동소총을 개발했다."라는 구전설화를 정사라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42] (나이)=(기준연도)-(출생연도[43] 1화에서 184년의 유비는 23살이고(162년생), 15살에 대학에 들어갔고(176년) 6년 전 대학을 중퇴한 것으로(178년) 나온다. 그런데 17화에서 유비는 1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나온다. 184년에 23살인 유비가 1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면 14살에 입학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유비가 184년으로부터 7년 전인 177년에 16살이었다고 언급함으로써 175년의 유비는 14살이라고 못을 박는다. 유비가 161년생이라면, 대학에 들어간 175년에 15살이었던 게 맞다. 이 경우 유비는 177년에 16살이 될 수 없다. 유비가 162년생이라면, 대학에 들어간 175년에 14살이 된다. 이 경우 유비는 15살에 대학에 들어갔다는 설명과 어긋난다. 해당 관련 설정오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화에서 유비는 178년에 대학을 중퇴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17화에서는 유비가 2년만에 자퇴했다고 나오므로 유비는 176년에 입학한 셈이다. 이 경우 175년에 입학했다는 설명과 또 충돌한다.[44] 물론 '기록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근거 자료가 부재할 뿐 추론 자체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 추론이 맞다고 볼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기록이 있는데도 상반된 것을 이야기하면 오류가 맞다.)[45]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는 민간 전승이 있는 점도 그렇고, 장비의 부인이었던 하후씨가 한의 개국공신 하후영의 후손이자 당대 조조 세력의 실세였던 하후연이 아끼던 조카딸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평민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다. 특히 하후씨와 혼인한 것의 경우 하후씨가 요즘으로 치면 흔히 생각하는 귀한 집 따님 그 자체이고 당시 장비가 하후씨를 납치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정략결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신부만 먹튀당한 조위측에서 납치혼이라고 프로파간다를 시도한 것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그런데 전술했다시피 한의 개국공신 가문이자 당대 정권 실세가 애지중지하던 아가씨를 아무리 난세에 정략혼이라 해도 아예 근본없는 사내에게 시집보낼 리는 없으므로, 장비의 출신이 아주 한미한 집안이 아닌 '명문가 규수를 상대로 혼인해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수 있는' 수준은 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46] 진수는 원소, 제갈량, 손책, 주유 등 뛰어난 미남은 확실하게 미남으로 기록하였으며 그밖에도 키가 크거나 수염이 아름답거나, 혹은 반대로 못생겼다는 등 외모에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했다. 그런데 곽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름이 '아름다울 가'를 쓰지만 그뿐이다.[47] 출처: 촉서 선주전[48] 조조의 아버지 조숭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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