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00:27:30

박명식 장기적출 연쇄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범죄 행각3. 검거4. 재판5. 기타

1. 개요

북한의 엽기 연쇄살인범 박명식이 1990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14살부터 17살까지 청소년과 1명의 20대 여성을 상대로 연쇄살인을 벌인 사건. 확인된 피살자만 12명에 달한다. # 범행 방법도 엽기적이었는데 복부를 칼로 난자한 다음 장기를 적출했다. 이 사건은 범행 수법도 잔인했지만 당시 수사에 나선 함경남도 신포시[1] 보안서[2]가 제때 범인을 잡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나 주민들이 공포에 떨면서 불만이 고조됐다.

북한에도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있지만 북한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고 김씨 왕조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리하는지라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 사건이 다른 지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그런 연쇄살인들 중에서도 굉장히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기 때문에 남한에도 알려져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었다.

2. 범죄 행각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룬 유일한 자료는 2006년 12월 6일자 Daily NK 기사 "北 엽기 연쇄살인 '박명식 사건' 아시나요?"이며 본 문서의 내용도 대부분 해당 기사를 그대로 베껴 왔다. #

박명식이 저지른 연쇄살인의 내막은 이러했다. 그는 수 년 전부터 간경화를 앓았는데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큰 병원과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 치료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가 그러던 중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로부터 점을 잘 친다는 점쟁이 이야기를 듣고 소개를 부탁했다.

원래 북한에서는 점쟁이나 종교 행위에 대한 통제와 단속이 심하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를 못 한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여러 해를 같이 지내면서 가까워진 박 씨의 동료는 그를 믿고 점쟁이를 소개해 주었는데, 점쟁이를 찾아간 그는 "자기가 지금 간경화를 심하게 앓고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호소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팔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자 점쟁이는 거절하지 못하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며칠 후 찾아온 그에게 점쟁이는 "사람의 간을 먹어야만 간경화가 완쾌된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주었고, 뒤이어 "젊은 사람의 간이어야 더욱 좋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박명식은 집에 돌아와 고민에 빠졌는데, 그는 소심한 성격이어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느냐는 고민을 하게 되었으며, 직장에서도 조용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병세가 자꾸만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독기가 돌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점쟁이 말이라도 해 보고 죽자'는 마음이 생겼다.

박명식은 봄철 농촌동원[3]을 나온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했으며 낮에 학생들이 머물던 숙소를 찾았는데 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에서 농촌 동원에 나온 학생들은 하루종일 일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면 모두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1990년 4월에 때마침 학생들이 잠든 밤 11시경 학생들이 자던 숙소에 침입한 박 씨는 한 학생의 입을 틀어막고 준비한 흉기로 그 자리에서 급소를 찔렀는데 피 흘리는 학생을 숙소에서 안고 나오다가 동네 개들이 짖고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학생을 마당에 내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흉기에 찔린 학생은 많은 피를 흘려 다음 날 아침에 사망했다. 사망한 학생은 당시 고등중학교[4] 4학년(만 13~14세)[5]이였다.[6]

며칠 후 살인 사건이 일어난 농장에서 4km 정도 떨어진 농장에서 또 다시 학생이 납치된 후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번째 시신은 농장원이 발견했을 때 기절할 정도로 복부가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 보안서에서 수사했으나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다. 보안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이런 사건이 발생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신포 시내에서 20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역시 시신의 복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신포시와 인근 지역에서 9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연쇄살인 사건이 계속되자 신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밤에는 다니지 못했다. 신포시 보안서 수사당국은 살인범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다.[7]

당시 신포시당 책임비서는 평양에 도당 관련해서 회의하러 갈 때마다 '살인장군'이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3. 검거

그러던 10월 어느 날 박명식은 추수동원을 나온 학생을 상대로 다시 13번째 살인을 시도하다가 피해 학생이 소리 치면서 저항하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살인범 잡기에 혈안이 된 주민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가던 박명식을 붙잡았다. 주민들이 붙잡지 못했다면 그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뻔한 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박명식을 신포시 보안서에 넘겼고, 박명식에게 간을 먹으라고 말해준 점쟁이도 박명식의 진술에 따라 체포되면서 사건은 막을 내렸다.

4. 재판

1991년 10월 중순 함경남도 신포시 인민재판소에서 박명식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박명식은 공소 사실을 인정했으며 12명의 생명을 앗아간 연쇄살인범으로 북한 형법 규정에 따라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총살형으로 공개처형됐다.

이와 더불어 박명식에게 사람의 간을 먹으라고 점괘를 내 준 점쟁이도 함께 신포시 인민재판소에서 살인교사 혐의로 재판 받아 15년 노동교화형[8] 선고 받았다. 본인이 점만 쳐줬을 뿐 특별히 살인을 지시한 게 아니라고 주장해서 살인교사죄 적용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의 간을 먹으랬지 "사람을 죽여서" 간을 먹으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쟁이는 열악하기로 유명한 북한 교화소의 특성과 불과 4년 뒤 시작된 고난의 행군, 그리고 같은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경원시(敬遠視)되어서 교화소에서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형사범이라 그래도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줬는지 교화소에서 15년 동안 복역하고 2006년에 만기 출소해서 신포시에서 다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범죄자들이 만기 출소하면 다른 지방으로 추방되는 것이 원칙이다.

5. 기타

북한이탈주민 출신 기자인 주성하 기자 등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자들이 탈북한 뒤 과거를 세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탈북자들을 무작정 받아주지 말고 북한에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는 처벌하는 식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9]

이 사건 이후에도 북한에서는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이 간간히 보도되고 있다. 비슷한 케이스는 2013년 9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유아 3명의 피를 뽑아 살해한 사건인데, 사건 현장 주변에 있었던 22호 관리소의 수용자가 저질렀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사건은 진짜 뜻밖의 의의(?)가 하나 있는데 바로 북한의 언론통제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이트에서는 이 사건이 조선중앙TV와 《로동신문》에서 보도되었다는 풍문이 확산되었으나[10] 이는 근거가 전혀 없다. 보도된 날짜를 제시한 글은 한 군데도 없이 서로 베끼면서 재생산되고만 있는데 사건이 발생한 1990-1991년 사이에 로동신문에서 살인 관련으로 실린 기사는 모두 미국, 한국, 서방 국가들에서 살인이 만연하다고 비난하는 내용들뿐이다. 사실 북한에서 보도하는 사건사고라고 해봤자 룡천역 폭발사고처럼 도저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극단적으로 큰 경우와 평양 아파트 붕괴 사고처럼 이미 주민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경우 정도밖에 없고[11] 살인 사건은 사실상 없다시피 한데 북한은 주민들에게 '별다른 일 없는 지상락원'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북한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을 되도록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른 나라라면 나라 전체가 뒤집힐 사건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북한의 언론통제가 얼마나 극악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다만 2020년대 들어 살인, 강도, 강간 같은 강력범죄와[12] 북한 내 반체제 정당조직 발각사건 같은 반체제 사건들을 강연용 영상자료로 만들어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서는 과거에 비해 확연히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당연히 로동신문에서는 이런 사건들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다.
[1]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2] 남한의 경찰서에 해당한다.[3] 북한은 해마다 봄, 가을이면 중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을 협동농장 노력지원에 의무적으로 동원하는데 학생들은 봄철에는 보통 5, 60일 정도, 가을철에는 20일 농촌 동원을 나간다. 보통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지만 밤 늦게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들은 농장원 가정집에 2, 3명씩 나누어 잠을 자고 식사는 단체로 한다.[4] 당시엔 학제가 소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이었으므로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로 바뀐 건 2012년이다), #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중학교 2학년이다.[5] 1975년 9월생~1976년 8월생으로 추정된다.[6] 1995년까지는 9월 학기제를 실시했다. #[7] 한국도 2000년대 이전에는 CCTV도 별로 보급되지 않았고 DNA 분석 기술도 미흡했기 때문에 미제사건이 된 사건들이 적지 않게 있는데, 북한도 마찬가지로 과학적 수사 기법의 도입과는 영 거리가 있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주민의 신고나 현장의 증인이 없으면 수사가 진척되지 않았고 그래서 고난의 행군 당시 그대로 영구미제가 된 사건도 대다수였다. 2000년대 이후 성새망이라는 한국의 경찰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성이 독자적인 인트라넷을 개발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이 망에 전 주민들의 지문을 보관한다. 살인 사건에서 흉기에서 지문이 묻어 있는 경우 이 인트라넷에서 주민들의 지문을 대조해서 범인을 잡기도 하는 모양이다.[8] 북한에서는 유기징역의 최고 상한선이 징역 15년이다.[9] 탈북자 중에도 사기꾼이나 범죄자가 꽤 있기 때문이다. 온갖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 주제에 자신이 정치범이라고 거짓말하고 돈을 뜯으려고 하는 식이다. 2004년에 BBC미국 의회도 속은 북한 쇳물 처형 보도가 이런 사기꾼이 저지른 사기극이었다. 한 여성 탈북자가 북한에서 기독교인의 몸에 녹인 쇳물을 부어 죽인다고 증언하고 그 증거라고 자신이 대충 적은 엉터리 문서라고 들이댄 것을 그대로 보도했는데 탈북자들이 이 보도에 경악했다. 녹슨 쇠못도 주워서 재활용하는 북한은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정치범으로 드러난 탈북자들도 북한 어디에서도 없는 일이라며 부정했고 그 증거라는 문서도 대충 끄적인 수준이었다. 이 사기꾼 탈북자(심지어 그녀는 정치범수용소 수용자도 아닌 경제범교화소 수용자 출신이었다)에게 속은 BBC측이 사과 및 정정 방송을 하면서 얼굴이 드러났고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반대로 남한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궁지에 몰리면 월북하는 경우도 있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당사자 윤태식도 아내를 살해한 후 월북을 시도했다가 살인범임을 알게 된 북한 당국한테 거부 당했으며, 주한미군 이등병 트래비스 킹도 남한에서 2차례 폭행을 저지른 것과 아동 성착취 미수로 처벌 받을 게 두려워 월북을 시도했으나 2달 만에 북한에서도 쫓겨났다. 하지만 범죄 의혹이 있다고 해서 북송을 강행한다면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과 같은 역풍이 심하게 불 것이다.[10] 아마 살인마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언론에서 보도되었을 거라고 생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1] 심지어 개고청년역 열차 전복 사고, 단천시 여객열차 전복 사고처럼 일반적인 나라라면 나라 자체가 뒤집힐 초대형 참사조차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12] 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