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8 21:18:04

바렌 사건

바렌느 배신사건에서 넘어옴

바렌 사건
La fuite à Varennes | Flight to Varennes
파일:Flight to Varennes.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uplessi-Bertaux_-_Arrivee_de_Louis_Seize_a_Paris.png
《국왕 루이 16세 일가의 체포》[1]"이만 파리로 돌아오셔야 하옵니다, 폐하아아아아!!"만 외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야만 했다.], 토마스 팰컨 마샬[2] 《파리로 귀환하는 국왕 일가》, 듀플레시 베르트랑

1. 개요2. 배경3. 준비4. 진행5. 결과

1. 개요

프랑스 혁명의 주요 사건. 혁명이 고조화되면서 왕권을 넘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루이 16세 일가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도주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바렌 도주사건" 혹은 "바렌느 배신사건"으로도 불린다.

실제로 루이 16세는 무능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심한 폭군까지는 아니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도 실책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소문처럼 사치가 심한 악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파리 민중들은 왕과 왕비가 조국을 버리고 외국으로 도주하려 하였다는 사실에 모든 신뢰를 거두고, 조국에 대항하려 하였다는 외환죄와 반역 혐의를 제기하면서 결국 루이 16세 부부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과 왕실의 파리 복귀 이래 여전히 혁명의 기운은 높았고 루이 16세는 실권을 하나둘 빼앗기고 있어도 여전히 국왕으로서 존중받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루이 16세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오는 것도 바스티유 습격 전 고위관료들에서 프랑스 국민의회 지도부 및 파리 시장으로 바뀌었을 뿐 계속되고 있었다. 아울러 혁명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인 미라보 백작은 왕정과 루이 16세에 우호적이었으며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6세도 미라보 백작과 비밀리에 연락하며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다. 즉 이 시점까지는 국왕 측과 혁명 지도부측 양쪽 모두 나름대로 앞으로의 개혁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한 협상을 그럭저럭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791년 4월 루이 16세와 국왕 일가를 아연실색케 할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미라보 백작의 급사였다. 미라보의 급사로 국왕은 국민의회 및 혁명지도부에게 맞서서 자신을 옹호해 줄 사람, 즉 재판으로 치면 변호사를 잃어버렸고 그 대체자도 찾지 못했다. 뿐만이 아니라 파리의 최대 유력 주간지인 <파리의 혁명>은 4월 2주본에서 왕권신수설 및 왕의 신성설을 전면 부정하고 신성한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며 왕에게 부여한 신성성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비슷한 시기에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군주제 헌법의 친구들 협회> 회원들을 과격파가 린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국민의회는 성직자가 새 헌법과 왕에 충성하고, 일부 주교직을 없애는 등 성직자의 특권을 폐지하는 선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루이 16세는 교황의 답신을 기다려야 한다며 시간을 끌지만, 어쨌든 법안을 승인한다. 요약하자면 발언권, 정치력, 든든한 지지세력 하나를 한꺼번에 빼앗긴 것이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부활절의 사건이었다. 루이 16세 일가는 일시적으로 튈르리 궁전을 떠나 생클루 궁전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는 의회와 파리 시 정부에도 통보가 되었고 이의제기가 없던 사안으로, 생클루 궁전에서 부활절 미사를 올린 뒤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보낸 뒤 올 예정이었다. 왜 굳이 튈르리가 아닌 생클루 궁전에서 미사를 올리려 했냐면 이른바 비선서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고자 함이었다.[3] 그런데 이를 국왕의 탈출시도로 오인한 군중들이 길가를 가득 메우며 왕가의 이동을 저지했고 이 과정에서 왕실가족들은 성난 군중들에게 온갖 모욕을 들어야 했다. 왕실을 호위할 예정이었던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는 군을 동원해서라도 돌파하자고 제의했지만 루이 16세가 유혈사태에 대한 우려로 이를 거부했다. 다음날 국왕은 바로 의회로 달려가 이런 사태에 유감을 표했고 의원들도 무지몽매한 군중들의 행위에 거듭 유감을 표하면서도 "폐하께서 (혁명정부 소속인 선서 사제들도 있는데) 비선서 사제들 편만을 들어주셔서 그렇습니다."는 뉘앙스로 원인을 루이 16세 탓으로 돌렸다.

종합하자면 미라보의 죽음으로 정치적 환경이 급변한 상황에서 <파리의 혁명>지에 의하여 여론적인 환경조차 왕실에 불리해지고 있었고 <군주제 헌법의 친구들 협회> 테러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힘이 되어줄 친군주정 세력들조차 위축되었으며 의회에서 국왕의 권한들을 박탈하여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몰린데다 부활절 사건으로 실질적인 신변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 국민의회 방문과정에서 미라보의 사후 급변한 정치적 환경을 체감했기에 탈출이라는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루이 16세가 어떻게 느꼈는지와는 별개로 파리 시민 다수가 루이 16세를 폐위시키거나 처형까지 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만일 루이 16세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던 것이 사실이고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이 그렇게 막강했다면 국왕이 수도를 탈출해 내전을 일으킨다는 명백한 반역 행위를 시도하고도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바렌 사건 이후 2년이나 지난 뒤에 집행되었고 거기까지 진행되는 과정 역시 험난했다. 그 연속선상에서 분석하자면 바렌 사건은 루이 16세의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후에도 살아남아 왕위를 지킬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 모든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버렸다.

3. 준비

많은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안 그래도 가능성이 낮은 탈출계획이 실패하였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후술할 경과들을 보면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러 번이나 황당한 행각들을 벌였으나 결과론적으로 그런 철없는 행각들이 탈출계획에 실패한 까닭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도 루이 16세가 탈출결심을 굳히기 전부터 이미 탈출계획은 준비되고 있었다. 스웨덴 출신으로 프랑스 육군 1개 연대연대장을 맡고 있던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이 평소 왕실과의 깊은 친분이 계기가 되어 그 중심에 섰다. 페르센은 동쪽 국경을 지키고 있는 부이예 장군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으며 계획을 논의하였지만, 전혀 들키지 않았다. 왕은 가만히 있지 않고 페르센 백작을 통하여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전달했다. 브이예 장군은 보안을 위해 내용을 기억한 후 편지를 태워버렸다.

페르센은 해가 바뀌기 전인 1790년 12월에 이미 장인에게 탈출용으로 쓸 6인용 사륜마차 제작을 의뢰했다. 공식적으로는 당시 파리에 거주 중이던 러시아 귀족의 과부인 코르푸 남작부인의 명의를 빌어서, 러시아로 귀국하기 위한 목적의 튼튼한 마차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다만 여기서 순진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황당발언이 나왔는데 마차의 외관을 눈에 잘 띄는 초록색으로 도색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전달이 안 되었는지 아니면 페르센이 이건 아무래도 아닌거 같다고 생각했는지 최종적으로는 평범한 갈색으로 도색되었다.

3월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왕이 아직 탈출을 결심하지 못했음에도 주요 생활필수품 및 가구들을 사전에 빼돌리거나 왕자와 공주가 입을 옷을 사전에 구매하는 등 또다시 눈치 없는 행각을 감행하여 주위를 뒷목잡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행위들은 감시자 측에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4월, 일련의 사건으로 드디어 탈출을 결심한 국왕은 처남이기도 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2세에게 탈출자금 1,500만 리브르를 꿔 달라고 했으나 처남은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헌법을 부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것을 요청했다.[4] 때문에 국왕은 국민의회에서 국왕 일가에 생활비로 주는 200만 리브르를 수령하는 날을 기다려야 했다.[5]

6월 초–중순이 되자 준비는 절정에 달했다.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코르프 남작부인 일행의 명의로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가는 위장 여권이 발급되었다. 최종적으로 탈출할 인원은 국왕 루이 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왕태자 루이 샤를, 공주 마리테레즈, 왕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그리고 왕비를 호종하는 루이즈엘리자베트 드 투르젤 부인(Louise-Élisabeth de Croÿ de Tourzel), 그리고 왕태자와 공주의 시녀 각 1명, 전령 4명이었다.

거의 동시기에 페르센 백작이 주문한 마차도 제작이 완료되어 시험주행까지 마쳤다. 말 12필을 동원하였는데 탈출 당시 국왕 일가가 탈 사륜마차의 여섯 마리, 시종 2명이 탈 이륜마차의 세 마리, 그리고 이들을 호종 또는 선행하며 인도하는 전령들이 이용하는 말 세 마리 총 열 두 마리였다. 사륜마차와 이륜마차는 각각 말 네 마리와 두 마리가 끌어도 충분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말을 덜 지치게 함으로써 시간을 단축하려는 생각에서 보다 넉넉한 숫자로 말을 준비한 것이다.

아울러 마차 내부에 화덕이나 와인 저장고, 요강 등을 갖춰 마차 내부에서 식사를 해결하고[6] 요강 역시 같은 까닭으로 마차 내부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국왕 일가는 식기도 없이 빵과 고기를 먹는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행위를 감수했다. 그 이유야 당연히 탈출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그리고 괜히 마차에서 내렸다가 마부나 주민 등에게 얼굴을 보이는 일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왜 마부에게도 얼굴을 보이는 걸 피하려 했냐면 마부들을 사전에 섭외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역참제도를 활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고자 일행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으며 말들 또한 마차를 이끌고 하루종일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7] 과감하게 역참을 이용하기로 한 것. 다만 국왕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까닭으로 대관식을 거행한 랭스를 생략하기도 하였고 최종목적지 몽메디로 가는 역참이 없기도 하여 일부 구간에서는 역참간의 거리를 넘어서 운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 구간들에서는 마부삯을 더 높게 쳐주는 걸로 해결하기로 하였다.

이들의 최종목적지는 몽메디(Montmedy)였는데 오늘날의 벨기에룩셈부르크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왕당파인 부이예 후작 프랑수아 클로드 아무르(François Claude Amour, marquis de Bouillé) 장군이 확실히 장악한 부대, 그리고 자체적으로 모집한 용병들로 장악하고 있던 곳이었다. 부이예 역시 겉으론 국민의회와 신정부에 충성했지만 루이 16세가 오는 대로 즉시 반혁명전쟁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레오폴트 2세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국경에서 군대를 움직여 부이예가 움직일 명분을 제공해주겠다고 한 당초의 약속을 깨는 바람에 부이예는 아무 지원도 없이 독단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면서도 파리의 전쟁장관과 프랑스군의 눈을 속이느라 고생했다.

4. 진행

1791년 6월 20일 밤 작전이 결행되었다. 밤 10시 루이 16세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온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 부부에게 그제서야 탈출계획을 말해주었고 동생 부부도 동의하면서 동생에게 추후 다른 경로를 통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뒤이어 페르센 백작, 왕비의 시종이자 왕자 및 공주들의 훈육관인 투르젤 부인이 움직였다. 페르센 백작은 마부로 위장하여 직접 마차를 몰고 투르젤 부인은 왕자와 공주를 자신의 치마폭 안에 숨기는 대범함으로 감시자들의 눈을 피했다.

국왕 내외는 바로 탈출할 수 없었다. 상술했듯 파리시청과 국민의회의 고위인사들이 국왕 내외에게 밤 문안인사를 올리기 때문이었다. 문안인사를 받기도 전에 도망치면 당연히 국왕 일가의 도피가 조기에 노출될 터였다. 루이 16세 내외는 태연하게 이들의 문안인사를 받은 뒤 그들이 돌아가자 바로 왕과 왕비, 엘리자베트 공주가 야음을 틈타 차례대로 움직였다. 그러던 도중 하필 왕비의 안내인이 마차를 세워둔 곳을 까먹어서 약 1시간을 지체하긴 하였지만 국왕 일가는 무사히 탈출하였고 파리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르센의 배웅을 받으며 훗날 다시 만나자는[8] 약속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물론 루이 16세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 날로부터 딱 19년이 되는 1810년 6월 20일에 페르센 백작은 죽었다.

어쨌든 21일 새벽 1시에 출발한 국왕 일행은 계획대로 역참을 활용해 가며 빠른 속력으로 파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상술했던 대로 주변의 시선을 피하고자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식사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등 철저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침즈음부터는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아니면 파리에서 멀어졌다는 안도감인지, 마차에서 내려 산책하거나 지역민 및 행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미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차를 끌던 몇몇 마부들도 자신들이 몰고 있는 마차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추격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더군다나 정오 무렵에 하필 마차가 고장나서 수리한다고 귀중한 1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한편 국왕 일행의 긴장이 풀어지던 아침 7시경 아침 문안인사를 위해 온 사람들을 위해 왕을 깨우러 온 시종은 침실이 텅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왕궁 사람들이 1시간 동안 왕궁을 뒤졌을 때에는 국왕 일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국왕 일행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정식으로 국민의회에 보고되기까지 다시 1시간이 걸려 오전 9시경 국민의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국민의회는 즉시 대응에 나섰다. 최우선적으로 앞으로 내려갈 모든 명령 및 법률에 들어갈 문구를 통일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루이 16세가 제2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뒤이어 국민방위군 총동원법령 및 무기반출법령이 통과되었고[9] 루이 16세가 방에 남긴 성명서를 후일을 대비한 증거물로 채택하고자 국회의장 보아르네 자작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마리(Alexandre François Marie, vicomte de Beauharnais)는 성명서 각 페이지마다 국회의원들이 서명하는 법안을 가결시켰다[10]. 그리고 이 사실을 프랑스 전역에 알리는 파발을 띄우는 것과 동시에 추격대를 보냈다. 이들 추격대들은 역참을 향하여 따라가면서 마차 2대가 새벽부터 동쪽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금 더 따라가다가 마침내 이들이 국왕 일행이라는 목격증언을 받으면서 속도를 높였다.

밤 8시, 국왕 일행은 바렌[11]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 생트머누(Sainte-Menehould)[12]에 도착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부이예 장군이 보낸 부하 슈아죌스탕빌 공작 클로드 앙투안 가브리엘(Claude Antoine Gabriel, duc de Choiseul-Stainville)과 기병대 40명이 국왕 일행을 호종했어야 했는데 하필 이 마을 일대에서 납세거부투쟁이 일어나는 중이었고 농민들은 군대가 자신들을 무력진압하러 온 거 아니냐는 공포로 병사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때문에 슈아죌과 기병대는 국왕 일행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기 때문에 국왕 일행은 생트머누의 역참에서 말만을 교체하고 떠나야 했다. 그리고 하필 생트머누의 역참에 근무하던 장바티스트 드루에(Jean-Baptiste Drouet)는 전에 왕비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고 아시냐 화폐의 국왕 얼굴과 비슷한 사람이 왕비 옆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가장 중요한 목격증언이 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중요한 문제는 국왕 일행을 호종하던 전령 네 명 중 한 명이 출발하면서 "바렌으로 가자!"고 마부에게 외쳤다는 것이다.

한편, 루이 16세 일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시장기를 느꼈고 "생트머누식 돼지족발찜"(Pieds de porc à la Sainte-Menehould)이라는 지역 특산물로 식사를 하다 늦어져 탈출극의 발목을 잡았다는 일설이 있는데, 이 이야기의 출처는 소설가일 뿐만이 아니라 미식가, 호사가이기도 했던 알렉상드르 뒤마가 저술한 프랑스 요리 대사전이라는 서적이다. 재미를 우선시하는 뒤마의 성향을 생각하면 좀 많이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한 야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혁명 한참 전인 과거 세자 시절의 루이 16세가 프랑스를 시찰하던 중 이곳을 지날 때 족발찜을 수라로 맛보고 좋은 평을 내린 적은 있었고, 이러한 일화에 착안하여 "국왕이 죽기 전에 먹었던 진미"라는 스토리텔링을 기획하여 홍보한 것이다. 게다가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바렌 사건은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 단순히 맛있는 요리"만"이 원인은 아니다.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던 추격대는 생트머누에 도착한 후 원래 베르됭[13]으로 가려고 했다. 왜냐하면 생트머누의 역참은 베르됭을 거쳐 메스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루에는 목격증언과 함께 국왕 일행이 바렌으로 향했다는 말을 추격대에 고스란히 전하고 자신도 추격대에 합류했다.

국왕 일행은 밤 10시 바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때 하필 마부들의 파업이라는 예기치 못한 장애에 부딪혔다. 마부들은 역참 노선을 벗어난 데다 운행거리가 더 늘어나서 자기들이 속한 원래 역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상태여서 보너스 지급도 거부하며 돌아가겠다고 격렬히 저항했다. 어쩔 수 없이 국왕 일행은 잠시 여인숙을 빌린 다음에 마부들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보너스를 더 주겠다고 달래서 마부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다시 출발준비를 하던 밤 11시 바렌에 추격대가 나타났다. 드루에는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여 마차 주위를 인의 장벽으로 막았고 지역감찰관 소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스는 일단 문제의 손님들을 자택 2층으로 안내한 후 사정을 물었으나 이들은 국왕 일행이 아니라고 버텼다. 그러나 하필 이 지역의 판사는 과거 궁정에서 일한 사람과 인척관계여서 궁정에서 왕실 일행을 본 적이 있었다. 소스의 자택에 온 판사는 일행을 보자마자 "폐하아아아아아아!!!"를 외치며 넙죽 엎드렸고, 결국 루이 16세는 자신이 왕이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이들의 예의바른 행동에 루이 16세는 한가닥 희망을 걸고 "아 쫌, 짐은 떠나고 싶도다."라며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이들은 국왕을 극진히 모시기만 할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지역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뒤늦게 도착한 부이예의 부하와 병사들이 강행돌파하여 국왕 일행을 말에 태우고 탈출하는 것을 논의했으나 그러기에는 국민방위군의 병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날이 바뀐 6월 22일 새벽 5시 단순한 추격대가 아닌 국회의 명령을 전달받은 라파예트의 참모진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국왕에게 절하며 "폐하께서 용상을 오래 비우시니 백성들의 슬픔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옵니다. 어서 돌아오셔서 혼란을 수습해 주시옵소서!"라며 파리행을 강권했고 국왕은 버텼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결국 국왕 일가는 마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갔다.

2시간 후 부이예는 자신의 용병들과 휘하 부대를 이끌고 급히 바렌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마차는 떠난 뒤였다. 부이예는 그저 탄식하며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군에서 자신을 체포하려고 하자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1800년 11월 14일에 61번째 생일을 닷새 남기고 병으로 죽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5절에 '부이예의 공모자들은 아니로다'라는 가사가 나올 정도로 국가로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

한편 프로방스 백작 부부는 프랑스를 벗어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6월 25일 저녁 7시 국왕 루이 16세 일가는 튈르리 궁전에 되돌아 왔다. 의회를 대표하는 호위로 바르나브, 페티욘, 모브르 세 의원이 도중에 합류했다. 국왕 일가가 돌아오는 도중 각지에 “국왕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중형, 국왕을 모욕하는 것은 교수형”이라는 경고전단이 붙여졌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대우일 뿐 파리는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치려고 한 국왕 일가를 침묵 속에 맞이했다. 이전에 입헌 군주정을 수용한 루이 16세를 향해 환호를 보냈던 시민들은 더 이상 그를 믿지 않았다. 이후 루이 16세는 민중에게는 배신자, 혁명에는 대적이 되어 버렸다.

5. 결과

눈에 띄지 않게 도주하기엔 마차가 지나치게 호화로웠고,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계획이 복잡해졌다.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국 타이밍 미스와 경로착오까지 겹쳤다. 게다가 탈출계획은 이미 소문으로 퍼져 있었다. 루이 16세가 변장을 시도했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 유명했고 그의 키도 193 cm나 됐으며, 서민 흉내를 내기에는 몸에 밴 왕의 품격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그는 붙잡혔고, 그가 우려하던 신변의 위협은 현실이 되었다.

국민의회는 국왕 일가의 탈출에 대해 왕권 일시정지를 끝으로 불문에 부쳤고 국왕을 모욕하거나 해를 입히려 한다면 중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국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반혁명전쟁에 나서려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분개했다. 이는 프랑스 내부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고 왕실과 반혁명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치솟아 결국 후일의 튈르리 궁 습격과 뒤이은 국왕 내외의 처형으로 이어졌다.

이렇게만 보면 단순히 루이 16세의 무모한 자충수 정도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배경 항목에서 서술했듯 루이 16세는 신변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탈출을 감행할 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의 방심도 실패원인 중 하나였지만 적어도 탈출을 시도할 만한 까닭은 충분했다. 그러나 신변위협을 느껴 감행한 탈출은 결국 나쁜 상황과 본인의 실책으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이는 자신과 가족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는 바렌 사건 직후에 사형당한 건 아니고 1년 뒤에 죽었다. 심지어 루이 16세 일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국민의회도 바렌 사건의 후폭풍을 염려하여 어떻게든 적당히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바렌 사건 후 주변국들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상황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것이다. 너무 노골적으로 사보타주가 의심되는 행동을 하며 오스트리아 황실과 연락하는 등, 명백히 외환죄에 해당하는 정치적 행보를 연달아 반복하면서 더 이상 혁명정부가 루이 16세를 재위 상태로 놔둘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아버렸다.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루이가 무죄면 국민이 유죄가 된다."라는 말처럼 진짜 당시 상황이 루이 16세가 유죄든가 혁명이 유죄든가 둘 중 하나였다. 국왕 일가가 외국으로 도주하려다가 현행범으로 강제송환당한 시점에서 이를 주도한 루이 16세가 만약 무죄로 판명난다면, 외국 군대가 혁명세력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권력행사라는 뜻이며 이에 따라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부부가 알아서 상황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몰고가니, 국민의회와 혁명세력은 이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입헌군주제고 뭐고 왕정 자체를 폐지하고 루이 16세 일가를 죽여야만 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처형을 면하고 살 뻔하였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가 자기가 왕이 되고 싶다고 사보타주하지 않았으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에게 '사실 자코뱅파는 엄청 관대한 거 아니었냐'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프랑스만큼이나 중앙집권체제가 잘 자리잡았고 왕권도 안정적이었던데다 임금을 신적 존재로 여기던 조선에서마저 왕과 왕비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외환죄를 저지른다면 프랑스 혁명처럼 반정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국왕 일가의 체포에 결정적 공을 세운 드루에는 국회의원이 되고,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스위스, 인도 등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도 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1815년 부르봉 왕정복고 후에도 이름을 바꿔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1824년 평안히 최후를 맞았다.
[1] 표현도 그렇고 실질적으로도 체포가 맞긴 하지만 감히 국왕 일가를 압송할 수 없었던지라 파리에서 온 관료들과 장군들은[2] Thomas Falcon Marshall, 1818~1878, 영국의 화가.[3] 1790년 국민의회는 성직자들에게 국왕, 국민과 헌법에 충성 할 것을 요구하고 성직자의 특권을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상술한 국민의회가 루이 16세에게 서명하게 했다는 법률이 그것. 이에 반발하여 충성선서를 거부한 사제를 비선서 사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파리는 혁명의 중심지로서 비선서 사제들이 활동하기 매우 어려웠고, 루이 16세가 희망하는 비선서 사제에 의한 미사가 이뤄질 환경이 아니었다.[4] 혁명이 일어나 왕실 친위세력이 최소한 수도 파리에서만큼은 완전히 소멸했고 기세등당한 혁명정부와 시민들이 파리를 장악한 상황이었다. 애당초 루이 16세가 파리에서 탈출을 시도한 까닭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였다. 레오폴트 2세가 얼마나 루이 16세의 위기상황에 무감각하고 현실감각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위협을 못 느끼니 저런 황당한 요구를 한 건데 레오폴트 2세 사후 아들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게 허구한 날 샌드백처럼 얻어터지고 수도도 함락당하고 국가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결국 장녀 마리 루이즈까지 빼앗겨야 했다. 안타깝게도 레오폴트 2세뿐만이 아니라 당대 유럽 군주들이 루이 16세에게 보낸 기대치가 다 비슷했다. 굳건히 반란군들에 맞서 싸우고 프랑스 왕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보여달라는 것. 교황은 루이 16세에게 성직자법을 승인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루이 16세의 위험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맞서 싸우라며 부추긴 유럽 군주들은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에게 신나게 얻어터졌다.[5] 이러다 보니 페르센 백작이 탈출비용을 거의 전부 댔다. 그 금액은 2012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억. 스웨덴 최고의 부호인 페르센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거액이라 본인 재산을 쏟아붓고 왕당파 귀족들의 원조를 받았으며 개인 빚까지 이리저리 내어 마련했다.(출처: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나카노 교코)[6] 이 시기의 와인은 음주를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식사를 하면서 물을 마신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도망가면서도 고상하게 와인 챙겨먹는다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독일이나 네덜란드, 폴란드, 체코가 물 대신에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듯이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서는 식사시 물이 아닌 와인을 마셨다. 왜냐하면 고도화된 파리와 인근 지방의 도시화, 그리고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상하수도의 발전이 수질을 현저히 악화시켰기 때문이다.[7]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랬다간 조금만 지나도 말들이 지쳐 속도가 떨어지고 그럼 추격대에 쫒긴다.[8] 이때 페르센은 국왕 일가와 끝까지 함께하려 했으나 루이 16세는 단호하게 그를 보냈다. 훗날 페르센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왕은 나와 함께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썼다.[9] 이는 루이 16세의 탈출이 필연적으로 반혁명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맞는 판단이었고 이는 후일 루이 16세 처형의 중요사유가 되었다.[10] 주제와 관련없는 이야기지만 이때의 국회의장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아내가 바로 후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여인이자 프랑스 제1제국의 황후가 되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다.[11] 現 그랑테스트 레지옹 뫼즈 데파르트망 바렌앙아르곤.[12] 現 그랑테스트 레지옹 마른 데파르트망. 생트메누, 생 므느울 등 여러 표기법이 난무한다. 일단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IPA 표기는 [sɛ̃tmənu\]이며, 프랑스어 위키피다아 문서에서는 이와 함께 [sɛ̃tmeneuld\]라는 발음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생트머누'로 표기를 통일한다.[13] 제1차 세계 대전의 격전인 베르됭 전투가 벌어진 그 곳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