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8 21:22:14

미지의 남방대륙

1. 개요2. 역사적 의의3.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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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대의 지도. 남방대륙에 Terra Australis Incognita와 같은 의미인 Terra Australis Nondum Cognita라고 표기되어 있다.[1]

Terra Australis Incognita

과거 유럽인들이 상상했던 가상의 대륙. 그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으로 추정된다. 대항해시대 이전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지구상의 대륙적도 이북 북반구에 몰려있었다. 이에 적도 이남 남반구에도 비슷하게 큰 땅덩이가 있어야 상하균형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실체가 확인된 것은 아니기에 세계 지도 하단에 거대한 대륙을 그려두고 미지의 남방대륙이라고 표기했다.

이 미지의 남방대륙을 라틴어로는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Terra Australis Incognita)라 했는데, 여기에서 '아우스트랄리스'라는 말이 훗날 호주(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의 어원이 되었다. 남방대륙의 개념이 호주에 일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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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2][3]

'미지의 남방대륙'이라는 개념은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명나라에 전해져 동양 고지도상에도 묘사되었다.

일본에서 편찬된 화한삼재도회 1권에서는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 없는 지역이라는데, 땅이 낮아서 그렇다고 한다"[4] 정도의 의문스러운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2. 역사적 의의

유럽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지도로부터 거의 1,300년 이상 미지의 남방대륙과 아프리카가 맞닿아있다고 믿었다. 즉, 인도양이 아프리카와 미지의 남방대륙, 아시아로 둘러싸인 내해로 인식했고,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양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유럽의 고지도를 보면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기 직전까지도 아프리카가 남방대륙과 이어져있는 지도가 통용되었다. 다만 1459년 베네치아의 프라 마우로가 포르투갈의 의뢰로 제작한 지도에서도 아프리카의 남쪽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프라 마우로는 이에 대해 그 근처를 항해하던 선원들로부터 들은 소문에 근거해 그린 지도라고 설명했다. 당장 1402년 조선에서 그려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조차 아프리카가 실제에 매우 가까운 형태[5]로 그려진 것을 보면 의외로 아프리카와 이어진 남방대륙이란 인식은 중세 유럽인만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지의 남방대륙이 유럽 근대사에서 차지한 비중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이를 목표로 감행된 숱한 항해 탐사활동이 호기심을 충족하려던 일부 호사가들의 취미가 아닌, 무역로 개척과 식민지 확장을 기도한 나라들의 국책사업이었다는 점이다. 남•북 아메리카의 존재가 알려진 다음에도 세계 지도의 아래쪽 - 남반구의 공백은 여전했고, 이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좇아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대륙을 향한 욕망을 부채질하였다.

흔히 남태평양 탐험의 주역으로 영국쿡 선장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영국의 해양진출이 남다른 면이 있었지만, 17~18세기의 남태평양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도 적극적인 탐사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례로 호주뉴질랜드를 최초로 탐사한 사람은 네덜란드인이었다.[6]

유럽인들이 상상한 대륙의 규모는 남반구 대부분을 뒤덮고 있었으니, 탐사선이 지나가지 않은 곳에도 육지가 있을 것으로 간주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탐사를 거듭할수록 육지 발견보다 망망대해를 지나는 일이 더 많았다. 발견한 육지는 대부분 여러 작은 섬들이었고, 호주, 뉴기니, 뉴질랜드, 남극 대륙 등 큰 땅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실측 자료를 토대로 지도를 만들어보니 아무리 크다고 해도 원래 상상했던 것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는 아니었다. 결국 남•북반구의 균형을 예상한 유럽인들의 상상과 달리 남반구는 북반구에 비해 땅이 실제로 훨씬 적었다. 그리고 해양탐사 정보가 축적되어 가면서 지도상의 남방대륙 가장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어갔고, 반대급부로 태평양이 넓어졌다.

결국 탐험가와 지리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초거대 대륙이 아니었다. 지구 표면의 3분의 1, 전체 해양 중 절반, 전세계 육지면적을 다 합친 것보다 넓은 태평양의 실체와 전설 속의 대륙보다 훨씬 작은 대륙인 남극이었다. 천동설이 지배하던 우주관이 지동설로 대체되었듯이, 전설속의 남방대륙이 오세아니아(Oceania)와 대양으로 바뀐 것은 지리학에 있어 일대 혁명적인 변화였다. 관념상의 변화일 뿐이지만 문자 그대로 육지가 바다로 바뀌었다는 뜻의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셈이었다. 미지의 거대한 대륙을 발견하길 꿈꾸던 탐험가들이 이루어낸 역설적 공로였다. 물론 호주 대륙과 남극, 뉴질랜드, 뉴기니를 비롯한 남태평양의 섬들의 발견도 결코 가볍게 볼 성과는 아니며, 대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도 의의가 대단했다.

묘하게도 예전의 지도에 그려진 남방대륙은 남극점을 중심으로한 거대대륙이었고, 실제 남극대륙과 면적에서 차이가 많이 나지만 위치상으로는 비슷하게 자리잡고 있다. 면적으로는 1,400만 ㎢로 호주대륙의 곱절이나 되니, 남극이야말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른다며 막연히 동경해오던 남쪽 거대한 땅이라는 관념에 더 부합할 수도 있겠다. 물론 호주와 남극대륙을 다 합쳐도 옛 사람들이 상상한 것에는 미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왕성한 탐구 정신이 이어졌다는 측면에서 남극을 향한 열정은 과거 선배 탐험가들과 다를 바 없으며, 여전리 남극 대부분이 미지의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에서 미지의 남방대륙이라는 존재와 신비로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3. 여담

  • 유럽 문명[7]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년단위로 보여주는 영상. 남방대륙은 57초부터 큰 보라색 타원으로 나타난다.[8]
  • 옛날 사람들은 육지의 비중이 적어서 아쉬워했지만 지구과학이 발전한 지금은 바다의 비율이 높은 것이 지구상의 생명체로서는 오히려 축복받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다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지구의 온도는 적당히 유지되어 좀 더 생명체의 생명활동에 적합할 수 있었다.[9]
  • 남극대륙이 발견된 시기는 1820년인데 그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에 남방대륙이 그려져 있다보니 이를 증거로 초고대문명설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에서 잘알려진 150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졌다는 피리 레이스 제독의 지도에 그려진 남극처럼 보이는 대륙은 사실 이 상상 속의 대륙일 가능성이 높다.[10]
  •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세계일주 항해를 나갔을 때, 처음 영국 정부에서 세운 목표는 이 남방대륙 탐사였다. 다만 출발 직전에 해적질로 계획이 바뀌었고,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서 드레이크 해협의 존재를 확인하고 남방 대륙은 없음을 알게된 드레이크는 그대로 뱃머리를 북으로 돌렸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에서는 사후 세계를 탐방하면서 사후 세계를 '테라 인코그니타'라고 명명한다. 본 문서의 테라 오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에서 '남쪽'을 뜻하는 '아우스트랄리스'가 제외된 명칭이다. 해석하면 "미지의 대륙"이 된다.


[1] 참고로 한반도는 아직 그려져 있지 않은데, 한반도는 1590년대에 들어서야 '섬'의 형태로 서구권의 지도상에 차츰 등장하기 시작한다. 단, 12세기 알 아드리시의 지도와 같은 중세 아랍권 지도에서는 이미 신라가 나타나 있다. 이 당시 지도에서 신라를 반도가 아닌 섬으로 그려졌다. 아랍인들이 주로 해로를 통해 신라와 교류했고, 압록강두만강을 거의 연결시켜 생각한 결과 섬으로 인식된 것이다.[2] 중국에 선교사로 체류했던 알레니(Aleni)의 《직방외기(職方外紀)》(1623)에 수록된 만국전도를 바탕으로 18세기에 조선에서 그려진 지도이다.[3] 남방대륙에 묵와랍니가(墨瓦臘泥加)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마젤란의 땅'이라는 뜻의 마젤라니카(Magellanica, Magallanica)를 음차한 것이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 중 발견한 오세아니아 일부 지역을 남방대륙의 일부분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에도 전해진 곤여만국전도 같이 명나라 말기의 세계지도 등에 이렇게 표기되었다.[4] 땅과 하늘이 36도 정도 비틀려있어서 땅이 높은 곳에는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일어나고, 땅이 낮은 곳은 (백야가 아니라) 사람이나 동물이 지나갈 수 없다는 식의 논지로 서술되어 있다. 이 서적은 1700년대 초에 발간된 것으로 아직 지동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므로 극야/백야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5] 다만 아프리카가 조선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이는 조선에서 직접 실측한 것이 아닌 해외에서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간접적으로 그렸다. 오히려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이 정도까지 정확한 지도를 그렸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것이다.[6] 호주 남쪽의 태즈메이니아(Tasmania) 섬,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의 바다 태즈먼 해, 뉴질랜드 남섬의 태즈먼 빙하는 네덜란드 탐험가 타스만(Tasman)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뉴질랜드는 '새로운(New) 질랜드를 의미하며, 질랜드는 네덜란드의 제일란트(Zeeland) 주를 지칭한다. 그리고 호주 대륙은 처음에는 뉴홀랜드(New Holland)라는 이름으로 불렸다.[7]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과 이후의 기독교 문명[8] 여담으로 극지방에서는 빙하가 계속 녹기 때문인지 자잘한 섬이 여전히 새로 발견된다. #[9] 땅의 비율도 그렇고, 땅 근처에 바다가 있어야 생명 활동에 용이하다. 지구의 대륙이 모두 합쳐져있던 판게아 시기에는 내륙에까지 바닷바람이 닿지 않아 대규모 사막이 발생했다. 바다의 비율이 더 적었다면 이런 일이 상시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10] 혹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일부라고도 주장하는데, 이는 이스탄불을 기준으로 사방을 바라보는 형태로 지도를 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