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ING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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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LB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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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모리타 도지 [ruby(森, ruby=もり)][ruby(田, ruby=た)] [ruby(童, ruby=どう)][ruby(子, ruby=じ)] | Morita Doj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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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비공개[1] | ||
출생 | 1953년 1월 15일 | ||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 |||
출신 | 도쿄도 시나가와구 | ||
사망 | 2018년 4월 24일 (향년 65세) | ||
도쿄도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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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 1975년 10월 21일 {{{#!wiki style="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 1px solid #050706"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데뷔일로부터 [dday(1975-10-21)]일 | [age(1975-10-21)]주년 | ||
활동 기간 | 1975년 10월 21일 - 1983년 12월 26일 (총 2988일) | ||
서명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신체 | 160cm | AB형 | |
배우자 | 마에다 아도(前田亜土)(1939-2009)[2] | ||
레이블 | 폴리도르(1975-1979) 워너 파이오니어(1980-1983) | ||
소속사 | 해저극장[3] | }}}}}}}}} |
1. 개요
지금 나는 우리의 지나간 청춘들에게 – 데뷔 직후 취재 中 |
1975년부터 1983년까지 활동하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1993년 TBS 금요 드라마 고교교사의 주제가로 사용된 <우리들의 실패>가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면서 대중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곱슬머리와 검은 선글라스, 중성적인 복장으로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했으며 앨범 재킷이나 콘서트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리타 도지'는[4] 예명으로, 본명은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다. 사생활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가사 또한 실 체험보다는 내면의 소망을 투영한 것이라 밝힌 바 있다. 강렬한 외적 이미지와는 달리 가냘프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특징이다.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음악성과 유일무이한 존재감으로 일본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남았다.
2. 생애 및 활동
2.1. 어린 시절
1953년 1월 15일,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에서 2녀 1남 중 차녀로 태어났다.모리타 도지의 조부모는 한때 만주국에서 술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집에서는 매일 술자리가 열릴 정도로 지역의 명망가였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조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아버지 나카니시 쇼이치는 21살에 일찍이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평범한 일로는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고 판단해 1947년 청어잡이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큰 실패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된다.[5] 결국 1953년 10월경, 담보로 잡혔던 오타루의 집을 잃고 도쿄도 시나가와구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잇따른 사업 실패로 인해 여러 차례 이사하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성장하던 그녀는 1968년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작은아버지 나카니시 레이가 인세로 나카노구에 약 110평 규모의 주택을 신축하면서 가족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된다. 이 시기에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고 작은아버지로부터 시 쓰는 비법을 조금씩 전수했다.
1970년, 몸이 약해 학교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고, 그로 인한 적응 문제 등 여러 사정이 겹치며 점차 학교에서 멀어졌다. 같은 해 친구가 학생운동 중 체포되자 이를 계기로 결국 중퇴했다. 대학이나 취업으로 나아가는 또래와 달리 방황하던 시기에는 하루 종일 찻집 창가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거나, 시부야역에서 출발하는 하토 버스의 반나절 관광 코스를 타며 시간을 보냈다. 이 경험은 훗날 <저와 관광버스를 타보지 않겠습니까>의 모티브가 되었다.
<nopad> | <nopad> |
▲ 모리타 도지가 라디오를 통해 리퀘스트 했던 곡 |
이후 갑작스러운 흉부 질환으로 약 2년 동안 홋카이도를 오가며 요양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녀는 자신만 정체된 듯한 감정을 노래에 투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000,#fff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라디오 매거진 1983년 2월호 인터뷰 中 |
2.2. 데뷔 전
1972년 여름, 고교 시절 같은 그룹이었던 친한 친구의 사망 소식을 엽서로 접한다.[7] 이 일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요양 중의 고립감과 맞물려 처음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곡이 <안녕 나의 친구>였다.한창 곡과 시를 쓰며 시간을 보내던 중 오비히로시에서 J&K 소속사의 프로듀서와 만나 인연을 맺고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다. 그녀는 작곡해 둔 다수의 곡을 녹음해 보내기로 약속했으나, 테이프는커녕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아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1973년 여름, 니시오기 로프트를 찾아와 첫 음악 활동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날 있던 로프트의 창업자 히라노 유우(平野悠)는 훗날 인터뷰에서 모리타 도지와의 첫 만남을 회고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무더운 저녁, 한 무명 소녀가 찾아와 카세트테이프 한 장을 건네며 조용하고 겸손하게 "저도 여기서 노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테이프를 듣고 '참으로 어두운 노래구나'라고 느꼈지만, 그 가사 내용이 내 청춘 시절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져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런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몇 번이나 물었는데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 로프트 창업자가 본 라이브하우스 50년 中 # |
1974년 10월[8], 마침내 그녀의 데모 테이프가 J&K 음악 프로듀서 마츠무라 케이코에게 전달되었다. 곡에 깊이 사로잡힌 마츠무라는 그녀를 데뷔시키고 싶다며 작은아버지 나카니시 레이, 아버지 나카니시 쇼이치를 불러 함께 논의를 시작했다.
원래 그녀는 작사 ・ 작곡가를 지망한 것으로, 가수로 데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마츠무라는 그녀의 작품에 담긴 독특한 감성을 알아보고 "이 곡들은 당신이 직접 불러야만 전달될 수 있다"며 설득했고, 고민 끝에 '모리타 도지'라는 예명으로 활동을 결정한다. 그녀는 "작은아버지 유명세에 기대어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고,[9] 마츠무라 역시 "너무 메이저하면 어딘가 체제적인 냄새가 난다. 나카니시 레이의 조카라는 점은 마이너스가 될 수 있으니, 그녀를 비체제적이고 반체제적인 이미지로 내세워야 한다"는 전략을 세움에 따라 작은아버지와의 관계는 철저히 숨겨졌고, 곱슬머리와 선글라스를 하여 언더그라운드적이고 마이너한 이미지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3. 데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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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안녕 나의 친구>의 편곡가 하야카와 히로츠구는 스가와라 요이치와 나카니시 레이의 콤비로, 그녀가 첫 앨범을 발매하기까지는 작은아버지의 인맥이 상당한 뒷일을 도와주고 있던 셈이다.
첫 앨범 녹음 과정은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랐다. 당시 싱어송라이터의 녹음 방식은 보통 스튜디오에서 뮤지션들과 세션을 진행한 후 백그라운드 사운드를 추가하고 필요한 악기를 더빙하여 노래를 완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극도로 수줍음이 많았던 그녀를 위해 처음에 기타와 노래만 녹음해 둔 테이프에 다른 뮤지션들이 악기를 덧붙여 곡을 완성했다. 소리가 작아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은 베이스 소리를 일부 제거하거나 빼기도 했다. 드럼을 아예 넣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악기를 빼는 대신 사운드 이펙트를 사용해 연극적인 발상을 표현했다. <이른 봄에>의 곡 끝에는 제트기의 소음이, <지평선>에서는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새 소리가 삽입되었다. <빗속의 크롤>에서는 처음부터 보컬만 낮은 사운드로 녹음되었다가 후반부에 보통 사운드로 돌아가면서 음상이 가까워져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모리타 도지의 뜻이었다.
▲ 1982년 신주쿠 로프트 라이브 |
모리타 도지는 단순한 가창을 넘어 공연 연출과 편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갔다. 라이브 하우스뿐만 아니라 소극장, 유치원, 집회장, 영화관, 다목적홀 등 무대 설비가 부족한 장소에서 공연을 여는 경우가 많았으며 예산 절감을 위해 스태프들이 여러 역할을 맡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대학 축제, 체육관 등 규모와 상관없이 초대받으면 기꺼이 응했고 지방 청년회나 지역 문화 행사 등에도 참여했으며, 때로는 오키나와까지 찾아갈 만큼 전국 각지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인지도가 빠르게 높아지며 입소문이 퍼졌고, 데뷔 2년 차에는 라이브 하우스가 관객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렸다. 이와 함께 각 지역에서 소수의 열성팬이 모여 '모리타 도지를 지지하는 모임'이라는 팬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도쿄나 오사카처럼 수요가 높은 지역에서는 협소한 공연장으로 인해 많은 관객이 입장하지 못하는 일도 빈번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언더그라운드 씬에서의 인기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대중적 인지도는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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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모리타 도지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모으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단순한 싱어송라이터를 넘어 연극과 만화, 실험 공연이 결합한 복합적인 예술 활동을 펼쳤다.
<rowcolor=#fff> 연도 | 월 | 콘서트명 |
1977년 | 6월 | 동자상(童子像) |
7월 | 푸른 깃발의 모임 지지 선언 콘서트(青い旗の会支持宣言コンサート) | |
1978년 | 7월 | 도쿄 성 마리아 대성당 콘서트(東京カテドラル聖マリア大聖堂) |
1979년 | 8월 | 와세다 소극장(早稲田小劇場) |
1980년 | 6월 | 이케부쿠로 문예좌 지하실(池袋文芸坐地下室)[10] |
11월 | 이케부쿠로 흑색 텐트(池袋黒色テント 夜行)[11] | |
1981년 | 3~5월 | 500인 극장(五百人劇場)[12] |
10월 | 쌍두의 노래(双頭の歌) | |
12월 | 12월 료고쿠 흑색 텐트 나사식(両国黒色テントねじ式)[13] | |
1983년 | 12월 | 전진좌 극장(前進座劇場) |
1983년에는 극작가 타카도리 히데(高取英)가 발표한 연극 <소년 오로라 도시>에 작사 · 작곡가로서 처음 곡을 제공했다.[14]
데뷔 후 8년간 꾸준히 활동하며 정규 앨범 6장과 싱글 4장을 발표했다.
2.4. 활동 중단
1983년 12월 26일, 신주쿠 로프트에서 열린 <전진좌 극장 「늑대 소년」 추가 공연> 마지막 무대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활동을 중단했다. 이 소식을 알지 못한 채 다음 라이브 일정을 문의한 팬들에게는 "흥행적인 문제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고 한다.1980년 11월 방송된 <청춘의 일본 열도 〜모리타 도지 라스트 왈츠〜> 중 아래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훗날 이 발언이 은퇴와 관련된 암시였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000,#fff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도쿄에 텐트(소극장)를 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겠죠. 우리의 콘서트가 불가능해지는 모습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래가 사라지는 모습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 청춘의 일본 열도 〜모리타 도지 라스트 왈츠〜 방송 中 |
1984년 3월 5일, 일본 독서 신문에 기고된 《츠게 타다오의 만화 서평》 에세이를 끝으로 모든 활동이 완전히 멈췄다.
2.5. 리바이벌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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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대히트에도 불구하고 모리타 도지는 "현재는 주부로서의 생활에 전념하고 있어 음악 활동을 재개할 생각은 없다"라는 짧은 입장을 밝힌 뒤 모든 취재를 거절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행적을 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르포 작가는 자택을 찾아내 취재를 요청했지만 완강히 거부당했고, 사진 주간지는 그녀를 촬영하기까지 했으나 기사화는 결국 보류되었다.[15] 라이브 하우스 관계자들 역시 "다시 무대에 나오면 어떻겠냐"라고 여러 차례 권했지만 그 말이 본인에게 전해지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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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한 기자가 그녀의 지인을 통해 타진을 받았으나 "가까운 사람의 사망에 의한 충격과 자신의 지병으로 활동이 어려운 상황입니다."라는 답변만이 전해졌고, 이후 더 이상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남편 마에다 아도는 2009년에 사망했다.
2.6. 사망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지내며 오랜 기간 지병을 앓았고, 2017년부터 건강이 악화해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식과 영결식은 가까운 친인척만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진행되었으며, 부고는 JASRAC 측에서 같은 해 6월 11일 밤 공표하였다. 원래 공표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3.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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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모리타 도지/디스코그래피#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모리타 도지/디스코그래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출연
4.1. 라디오
<rowcolor=#fff>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방송 기간 |
1975년 | | スタジオライブ (스튜디오 라이브) | - |
1976년 | | 若いこだま (젊은 코다마) | 6월 30일 |
1980년 | | ニューサウンズスペシャル 뉴 사운드 스페셜 | - |
1983년 | | ニューサウンズスペシャル 뉴 사운드 스페셜 | 2월 20일 21시 10분 |
<rowcolor=#fff> 그 외 다수 |
4.2. TV 방송
<rowcolor=#fff>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방송 기간 |
1980년 | | 青春の日本列島〜森田童子 ラストワルツ〜 (청춘의 일본 열도 ~모리타 도지 라스트 왈츠~) | - |
5. 여담
- 곱슬머리는 본인의 머리일 가능성이 높다. 질감이 자연스럽고 푹신하며, 해마다 조금씩 풀리거나 다듬어진 흔적이 있어 오랜 기간 같은 머리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데뷔 초기에는 비교적 머릿결이 부드럽고 건강했으나 활동 후반으로 갈수록 푸석해지고 손상된 모습이 두드러져, 가발처럼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 가사 속에 다자이 오사무가 자주 등장한다. 예명도 그의 소설 《멋쟁이 도지》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첫 번째 정규앨범 <GOOD BYE グッドバイ>역시 다자이의 유작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는 이 한 장만 내고 끝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수록곡 <눈부신 여름>에도 다자이가 언급되는데, 인터뷰어가 "가사에 다자이가 나오는데, 다자이의 어떤 점에 끌리나요?"라고 묻자 "다자이에 대한 건 묻지 말아 주세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 츠게 요시하루와 츠게 타다오 형제 만화를 매우 좋아했다.[16] 특히 츠게 타다오를 '츠게 요시하루를 뛰어넘는 유일한 사소설적 극화가'라고 평했다. 콘서트 제목에도 《나사식》과 《야행》을 사용하기도 했다. 어느 날 모리타 측에서 작품 사용을 요청하는 연락이 왔는데 이에 츠게는 "사용료는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하며 흔쾌히 허락하였고, 모리타는 남편과 함께 직접 찾아가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과자나 꽃다발을 보내는 등 감사와 애정을 표현했다. 츠게는 모리타의 곡에 대해 '정직하고 좋은 노래'라고 말하기도 했다.
- 어두운 이미지와는 달리 청산유수한 성격을 지녔다. 대화한 이들 대부분은 "이렇게 귀여운 여자인 줄 몰랐다", "밝고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라이브 하우스에서 THE ALFEE와 같은 탈의실을 사용했을 때도 평범하게 밝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사람이랑 대화하다 보면 쉽게 흥분하기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은 1년에 1번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 음악적 영감은 어떤 아티스트에게서도 영향받지 않았다. 클래식조차 거의 듣지 않았고, 집에 스테레오도 없었다고 한다.
- 유명인 중에서는 시무라 켄, 쇼후쿠테이 츠루베, 시마다 신스케, 요시다 타쿠로, 이노우에 요스이, 쿠로키 히토미, 후쿠시마 미즈호 등이 콘서트에 간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시무라 켄은 2003년 <고교교사> 특집 방송에서 팬임을 밝히며 "그녀를 좋아해서 공연을 보러 루이드(라이브 하우스)에 자주 갔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레코드도 샀다. 어떻게든 보러 가고 싶었다"라고 회상했다.
- 시마다 신스케 역시 "그녀의 노래는 어둡지 않고 따뜻하다"라고 말했으며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 백스테이지 뒷문에서 데마치[17]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마다가 선글라스를 벗어달라고 부탁하자 웃으면서 벗어주었고 "엄청 예뻤다, 귀여웠다"라는 인상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 쿠로키 히토미도 에세이에서 자신이 팬이었음을 밝혔다. 오빠의 영향으로 접했고, 앨범이 나올 때마다 구매했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구루메시에서 열린 콘서트에 남자 친구와 함께 가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다카라즈카에 입단한 뒤 모리타 도지 이야기를 꺼내면 "너 참 어둡구나"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 콘서트에서 수화도 활용했다. 수화 통역사와 함께 공연한 것을 계기로 직접 수화를 배우기 위해 강습회에 다녔으며 이후에는 청각장애인이 의자의 진동으로 음악을 느낄 수 있는 홀에서 수화 통역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맑고 부드러운 미성이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들어도 목소리 하나로 촌스럽거나 낡은 느낌 없이 들린다는 평을 받는다.
- 가끔 노래를 부르며 펑펑 울기도 했다고 한다.
- 어두운 이미지로 보이곤 하지만 사실 어두운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 공식적으로는 본명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사후에 前田美乃生(마에다 미노부)였음이 알려졌다. 결혼 전 성은 中西(나카니시)로, 일본의 유명 작사가이자 소설가인 나카니시 레이가 그녀의 작은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본래 성씨도 드러났다.[2] 무사시노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무대미술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중, 예능 사무소 아도・프로덕션을 설립하며 연예계에 입문했다. 결혼 후에는 그녀의 데뷔와 함께 매니저 역할과 해저극장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메이저가 되길 원했지만, 마이너를 고집하는 그녀의 강한 의지 앞에서는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3] 1994년 4월, 저작권과 음악 관리 등의 목적으로 정식 법인화되었다. 현재는 그녀의 남동생이 대표이사직을 맡고있다.[4] 童子(동자)는 문자 그대로 사내아이, 어린 남자아이를 뜻한다. 그녀는 가사를 쓸 때 남성이 사용하는 1인칭 인칭대명사 僕(보쿠)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동료나 친구의 시선에서 '너와 나(君と僕)'의 관계를 그려내 보고 싶은 바람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童子는 소년적 이미지와 음악 세계관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이름의 유래는 후레부키 도지의 영원한 소년상적인 이미지를 좋아했기 때문이라 말한 바 있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멋쟁이 도지》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5] 이후에도 수차례 사업 실패가 이어져 누적된 빚은 10억 엔에 달했고, 이는 동생 나카니시 레이가 대신 갚아 나갔다. 1996년에 모두 청산했으나 같은 해 형이 사망하며 남긴 2억 엔 가량은 가족들과 상속 포기를 통해 정리되었다. 이 일화는 훗날 그의 자전소설 《형제》의 모티브가 되었다.[6] 《형제》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아버지의 건설회사 도산으로 집안 상황이 악화했다. 작은아버지가 조카들의 학비를 대신 부담했음에도 아버지는 새로 지은 집의 비용을 동생과 반씩 부담했다고 자녀들에게 거짓말했다. 또한 잘나가는 동생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흥청망청 사업을 벌였고, 결국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많은 빚쟁이가 들이닥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을 것이다.[7] 학생운동 중 사망했다고 하며, 자살이라고 한다.[8] 이 시점에서 마에다 아도와는 이미 혼인했다.[9] 사실 지난 달인 1974년 9월, 아버지와 남편이 운영하던 예능 사무소 아도・프로덕션의 소속 가수였던 후부키 준을 작은아버지까지 합세해서 호텔방에 감금해 소속사 이적을 막으려 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일로 셋은 감금, 강요, 강도상인 등의 혐의로 고소당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사건 역시 그녀가 정체를 숨기려 했던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0] 5일간 2,500명 동원, 400명은 입장하지 못함[11] 이케부쿠로 백화점 뒤편. 5일간 3,500명 동원, 400명 이상 입장하지 못함[12] 일본 전역 20개 지역 투어, 400~800명 규모의 중형 홀 중심으로 공연[13] 5일간 진행, 1983년까지 <우리들의 여행하는 나사식 극장>으로 전국 순회.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나사식》에서 따왔다.[14] 남편과 함께 타카도리 히데와 친분을 쌓았으며, 그의 연극을 보러 가기도 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주고받기도 했다.[15] 나카니시 레이 조카 설도 이때 주간지를 통해 처음 등장했다.[16] <A BOY ボーイ> 앨범 재킷도 《나사식》에 영감받았다고 한다.[17] 출구 앞에서 연예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팬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