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넬슨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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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셀틱스 No. 19 | |
도널드 아비드 "돈" 넬슨 Donald Arvid "Don" Nelson | |
출생 | 1940년 5월 15일 ([age(1940-04-15)]세) |
미시간 주 머스키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198cm |
출신학교 | 아이오와 대학교 |
포지션 | 포워드 |
드래프트 | 1962년 NBA 드래프트 3라운드 17순위 시카고 제퍼스 지명 |
선수 경력 | 시카고 제퍼스 (1962~196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63~1965) 보스턴 셀틱스 (1965~1976) |
지도자 경력 | 밀워키 벅스 (1976, 어시스턴트 코치) 밀워키 벅스 (1976~1987, 감독)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8~1995, 감독) 뉴욕 닉스 (1995~1996, 감독) 댈러스 매버릭스 (1997~2005, 감독)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06~2010, 감독)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1994) |
프런트 경력 | 밀워키 벅스 (1977~1979, 선수 인사부장) 밀워키 벅스 (1977~1987, 단장) 밀워키 벅스 (1985~1987, 부사장)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7~1995, 단장 겸 부사장) 댈러스 매버릭스 (1997~2006, 단장) |
등번호 | 44번 - 시카고 제퍼스 20번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번 - 보스턴 셀틱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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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 보스턴 셀틱스의 선수로 다섯 번의 우승에 기여해 셀틱스의 영구결번이 되었고, 이후 감독으로 대성하여 올해의 감독상을 세 번으로 최다 수상하고[2] 공격농구의 대명사로 통했다. NBA에서 통산 승수 1,335승으로 그렉 포포비치 감독에 이은 2위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94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을 감독하여 우승을 차지했다.2. 선수 시절
1963년 NBA 드래프트 3라운드 17순위로 시카고 제퍼스에 입단, 제퍼스 시절과 레이커스 시절에는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1965년에 보스턴 셀틱스로 입단 이후 1976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곳에서 11년 동안 뛰면서 총 NBA 파이널 우승컵을 5번이나 드는 등 화려한 시즌을 보냈다.선수 시절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1969 파이널 7차전으로, 당시 11점 정도를 기록하는 식스맨이었던 넬슨은 3쿼터에만 12점을 퍼부으며 점수차를 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4쿼터 종료 1분여을 남겨두고 역사에 남는 플레이를 했는데, 1점차 리드를 간신히 지키고 있던 보스턴의 존 하블리첵이 공을 놓친 것이 자유투라인 부근에 있던 넬슨에게 흘러갔고, 넬슨이 쏘아올린 슛은 림 뒤쪽에 맞고 한번 높이 튕겨 올라갔다가 그대로 그물에 빨려들어갔다. 이것이 사실상 우승을 결정지은 슛이 되었고, 이 플레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셋 중 하나인 1969 파이널을 논할때마다 하이라이트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 되었다.
올스타 선정도 없고 경기당 30분 이상 뛰어본 적도 없는 비교적 펑범한 선수였지만, 건실한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뛰어난 롤플레이어로, 이런 그의 공헌을 높게 산 셀틱스는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시킨다.
3. 감독 시절
3.1. 밀워키 벅스
1976년에 은퇴하자마자 밀워키 벅스의 코치로 부임했고, 11월에 초대 감독인 래리 코스텔로가 물러나자 감독 겸 선수 인사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1977년부터는 부사장으로 승진한 웨인 엠브리의 뒤를 이어 단장을 겸해가며 팀의 전권을 부여받았고, 1985년에는 부사장까지 전부 겸해 1인 3역을 맡았다.
감독대행 때는 성적이 부진했지만, 1977년 정식 감독 재임 시부터 전 보스턴 셀틱스 코치 존 킬릴리(1928~1996)의 보좌를 받으며 마키스 존슨과 켄트 벤슨, 어니 그룬필드 3명을 드래프트에서 발굴해낸 뒤 데뷔 2년차인 주니어 브릿지맨과 짝을 짓고, 노쇠화된 밥 댄드릿지를 FA로 풀어 워싱턴 불리츠로 보내 세대교체를 시도하여 1978-79 시즌까지는 플옵 진출 1회를 달성했다.
1979년 드래프트에서 아칸소대 출신 시드니 몽클리프를 뽑아 수비를 강화해내 4시즌만에 지구 1위를 땄고, 1980년에는 벤슨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기둥이던 밥 레이니어랑 맞바꿔가며 1980-81 시즌에는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갔으나 줄리어스 어빙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게 졌다.
이후 폴 프레시, 테리 커밍스, 랜디 브루어, 리키 피어스, 크레익 호지스, 스캇 스카일스, 래리 크리스트코비악 등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며 1981~1986년까지 6년 연속 지구 1위,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 3회 등을 더 달성하였지만, 래리 버드가 이끄는 동부의 최강팀 보스턴 셀틱스에 막혀 파이널을 못 갔다. 1985년에 슈퍼마켓 체인업체 '콜즈(Kohl's)' 창업주 허브 콜이 팀을 인수한 후 그와 운영 등지에서 갈등을 겪었고, 1986-87 시즌을 끝으로 사임했다.
3.2.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7년에 밀워키에서 물러난 이후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부사장 겸 단장으로 취임했고, 1988년에는 감독직도 겸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팀 하더웨이-미치 리치몬드-크리스 멀린을 축으로 한 RUN TMC 라인업을 주축으로 한 공격농구로 다시금 강호로 올라섰지만, 1991년에 미치 리치몬드가 새크라멘토 킹스로 떠나자 삼인방이 해체됐다.
대신 그는 빅터 알렉산더, 크리스 개틀링, 라트렐 스프리웰, 크리스 웨버 등 젊은 유망주들을 드래프트에서 뽑아 키워내는 데 주력했으나 1993-94 시즌을 끝으로 플옵에 나가지 못했고, 1995년 2월에 단장 및 감독직에서 해임됐다.
3.3. 뉴욕 닉스
1995년에 전임 감독인 팻 라일리를 대신해 뉴욕 닉스의 감독으로 부임, 재임 기간 동안의 성적은 34승 25패로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패트릭 유잉-샤킬 오닐 트레이드 요구로 결국 구단 내에서 반발이 심해져 시즌 도중에 해임당했다.
3.4. 댈러스 매버릭스
1997년 2월부터 단장 겸 감독으로 2년만에 현장으로 복귀, 그 해에 숀 브래들리, 1998년에 디르크 노비츠키, 스티브 내시를 영입함으로써 리빌딩을 가속화시켰고, 1999-00 시즌 대표적인 서부 컨퍼런스의 약체였던 팀을 40승에 도달케 하였으며, 다음 시즌인 2000-01 시즌에는 무려 12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등으로 댈러스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대항마로 만들어 주었다.게다가 그는 샤킬 오닐을 방어하는 작전인 핵-어-샤크(Hack-a-Shaq)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었는데, 2004-05 시즌 도중에 에이버리 존슨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사임했고, 시즌이 끝나자 아들인 도니 넬슨에게 단장직까지 물려주고 팀을 떠났다.
3.5.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자신의 애제자였던 크리스 멀린 (당시 단장)과 함께.
2005-06 시즌에 34승 48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기고 경질당한 마이크 몽고메리 감독 후임으로 복귀, 이곳에서 '배산적' 배런 데이비스를 축으로 하여 2006-07 시즌에 42승 40패(컨퍼런스 8위, 지구 3위)로 13년만에 플레이오프에 복귀, 상대는 1라운드에서 시드 1으로 진출한 댈러스 매버릭스. 그는 자신이 지휘했던 댈러스의 모든 것을 꿰고 있었기 때문에 6차전만에 2라운드에 진출했으나, 결국 유타 재즈에게 5차전 만에 탈락했다.
그 다음 시즌인 2007-08 시즌에도 절치부심해서 48승을 기록했지만, 49승을 거둔 덴버 너기츠에게 밀려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었고, 마지막 2시즌 동안 팀은 또 다시 하위권을 전전했다.
결국 돈 넬슨은 2009-10 시즌을 끝으로 해임, 34년 동안의 지도자 생활은 이것으로 끝을 고했다.
4. 감독 스타일
기본적으로 돈 넬슨은 선수들을 거의 터치하지 않는 타입이다. 전술적으로 복잡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선수에게 훈련량이나 전술적 움직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NBA라는 세계 최고의 농구무대에서 보기 힘든 자율농구.그대신 넬슨은 주로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파격적으로 플레이한다. 선수들이 자기 맘대로 플레이해서 무리수를 던지건 딱히 신경쓰지 않다보니 선수들은 대담하게 속공 3점 던지는 걸 주저하지 않고 턴오버에 이은 역습 상황에선 일단 달린뒤 덩크부터 노리는 극한의 공격형 스타일. 돈 넬슨의 팀은 항상 1,2,3번부터 시원하게 달리면서 찬스나면 일단 던지고 보고 하프코트에서 2대2, 3대3같은 정교한 패싱전술보다는 개인기 자신있는 선수가 코트 벌린뒤 시원한 1대1 돌파로 득점한다. 닉스에서 실패한 것도, 사진에서 나와있듯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 데릭 하퍼같은 하프코트 경기에 익숙한 선수들로만 런앤건을 하려다 실패한 것.[3]
이것이 가장 돋보였던 시기가 바로 노비츠키의 택배 MVP[4]사건을 남긴 2006-07 시즌 골든스테이트. 이 시기 골든스테이트는 한국에선 골스파르타라고 불릴만큼 묻지마 닥공, 묻지마 속공, 묻지마 3점등 선수들 공격력을 그냥 후리하게 살려주는 타입으로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면 배런 데이비스, 스티브 잭슨, 몬타 엘리스, 제이슨 리차드슨 등이 거침없이 분위기 타고 밀어붙이는 닥공팀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부진하긴 했지만 중복자원이라는 평가를 무시하고 지명했던 넬슨 최후의 유산인 스테판 커리까지.[5] 어떤 의미에선 현시대 NBA의 흐름인 스몰 라인업 및 빠른 공수전환에 이은 전원 3점 슈터화 같은 스피드와 하이페이스,슛 거리를 왕창 끌어올린 공격농구의 선구자격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여러 실험적 시도를 하는 감독이기도 했다. 80년대 밀워키 벅스를 맡을 당시 다재다능한 스몰포워드였던 폴 프레시의 리딩력을 살리기 위해 그를 사실상의 포인트가드로 기용, 최초의 "포인트 포워드"(당시 언론에서 프레시를 묘사하며 만든 말)를 탄생시켰고, 자유투가 약한 특정선수에게 고의적으로 파울을 하는 "해킹"작전이 최초로 시행된 것도 돈 넬슨의 댈러스가 97-98시즌에 데니스 로드맨을 상대로 한 것이다.
이 영상에 보면 버바 웰스란 선수가 플레이와 전혀 상관없는 로드맨이 하프코트를 넘어올때부터 계속 노골적으로 잡고 늘어지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웰스는 NBA에서 거의 뛰지 못하고 사라진 무명선수로 투입 직후부터 로드맨을 계속 파울했다. 당시엔 '해킹'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이 상황을 지시받은 웰스도 '이게 뭐하는짓인가'는 듯 멋쩍게 계속 웃고, 불스 선수들은 처음엔 짜증내다가 자꾸 파울하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해설자들도 당황스러워하는 걸 볼 수 있다. 한번은 조던이 볼운반을 하는데, 웰스가 드리블하는 조던을 무시하고 지나쳐서 반대쪽 코트에서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로드맨에게 파울을 한다. 그런데 이때 심판들이 당황했는지 파울을 불지 않았고, 이때 해설진이 "넬리(넬슨 감독)이 그(웰스)에게 파울하라고 하고 있네요!"라고 해설한다. 당시엔 이런 플레이자체가 없었기에 넬슨을 제외하면 선수들과 해설진, 심판, 그리고 웰스 본인조차도 이런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6]
사실 공격농구로 유명한 넬슨이었지만 그가 처음 맡은 밀워키 벅스는 오히려 수비로 명성을 떨치던 팀이었다. 초창기 이후 벅스가 본격적으로 강팀이 된 79-80시즌에 밀워키는 상대실점 리그 7위, 디펜스 레이팅 8위였으며, 이후부터는 그가 지휘봉을 잡은 86-87시즌까지 디펜스 레이팅 3위, 1위, 6위, 2위, 2위, 2위, 4위를 기록한 수비강호였다.
이 차이점은 넬슨이 복잡한 전술을 짜놓기보다는 선수들이 자유롭게 자신이 잘하는 플레이를 잘 할 수 있도록 판을 짜는 스타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밀워키에는 초대/2회 올해의 수비수상 수상자인 시드니 몽크리프를 포함해 디펜스 퍼스트팀 멤버 폴 프레시 등 뛰어난 수비수들이 많았고, 이들이 수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넬슨이 판을 짜주었기에[7] 가능했던 것. 즉 자신만의 틀에 선수들을 끼워맞추기보다는 각 선수들의 재능을 살려 자유롭게 뛰게 해주는 편에 가깝다.[8]
보통 업템포 하이페이스 다득점을 노리는 팀 치고는 딱히 정교하게 세팅하여 점수를 짜내기보단 던지고 던지고 또 던져서 왕창 점수를 쌓아놓는 농구다 보니 같은 런앤건이라고 불리더라도 이쪽이 무작전 농구로 보이기도 쉽고[9], 클러치 상황에서 기복도 엄청나게 심한 편. 그 때문에 단 한 번도 파이널에는 진출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수들과도 가족처럼 지내는 온화한 모습을 보여 선수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다고 한다.
그의 밑에서 코치로 일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게리 세인트진 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단장, 마이크 던리비 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감독 등이 있다.
5. 은퇴 이후
2012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역대 성적
6.1. 선수 시절
6.2. 감독 시절
역대 감독 전적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승률 | 정규리그 | 플레이오프 |
1976-77 | 밀워키 벅스 | 64 | 27 | 37 | 0.422 | 서부 컨퍼런스 11위 | 진출 실패 |
1977-78 | 82 | 44 | 38 | 0.537 | 서부 컨퍼런스 5위 | CSF 탈락 | |
1978-79 | 82 | 38 | 44 | 0.463 | 서부 컨퍼런스 9위 | 진출 실패 | |
1979-80 | 82 | 49 | 33 | 0.598 | 서부 컨퍼런스 2위 | CSF 탈락 | |
1980-81 | 82 | 60 | 22 | 0.732 | 동부 컨퍼런스 2위 | ||
1981-82 | 82 | 55 | 27 | 0.671 | 동부 컨퍼런스 2위 | ||
1982-83 | 82 | 51 | 31 | 0.622 | 동부 컨퍼런스 2위 | CF 탈락 | |
1983-84 | 82 | 50 | 32 | 0.610 | 동부 컨퍼런스 2위 | ||
1984-85 | 82 | 59 | 23 | 0.720 | 동부 컨퍼런스 2위 | CSF 탈락 | |
1985-86 | 82 | 57 | 25 | 0.695 | 동부 컨퍼런스 2위 | CF 탈락 | |
1986-87 | 82 | 50 | 32 | 0.610 | 동부 컨퍼런스 4위 | CSF 탈락 | |
통산 | 884 | 540 | 344 | 0.611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승률 | 정규리그 | 플레이오프 |
1988-89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82 | 43 | 39 | 0.524 | 서부 컨퍼런스 7위 | CSF 탈락 |
1989-90 | 82 | 37 | 45 | 0.451 | 서부 컨퍼런스 10위 | 진출 실패 | |
1990-91 | 82 | 44 | 38 | 0.537 | 서부 컨퍼런스 7위 | CSF 탈락 | |
1991-92 | 82 | 55 | 27 | 0.671 | 서부 컨퍼런스 3위 | 1R 탈락 | |
1992-93 | 82 | 34 | 48 | 0.415 | 서부 컨퍼런스 10위 | 진출 실패 | |
1993-94 | 82 | 50 | 32 | 0.610 | 서부 컨퍼런스 6위 | 1R 탈락 | |
1994-95 | 45 | 14 | 31 | 0.311 | 중도 경질 | ||
통산 | 537 | 277 | 260 | 0.51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승률 | 정규리그 | 플레이오프 |
1995-96 | 뉴욕 닉스 | 59 | 34 | 25 | 0.576 | 중도 사임 | |
통산 | 59 | 34 | 25 | 0.576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승률 | 정규리그 | 플레이오프 |
1997-98 | 댈러스 매버릭스 | 66 | 16 | 50 | 0.242 | 서부 컨퍼런스 10위 | 진출 실패 |
1998-99 | 50 | 19 | 31 | 0.380 | 서부 컨퍼런스 11위 | ||
1999-00 | 82 | 40 | 42 | 0.488 | 서부 컨퍼런스 9위 | ||
2000-01 | 82 | 53 | 29 | 0.646 | 서부 컨퍼런스 5위 | CSF 탈락 | |
2001-02 | 82 | 57 | 25 | 0.695 | 서부 컨퍼런스 4위 | ||
2002-03 | 82 | 60 | 22 | 0.732 | 서부 컨퍼런스 3위 | CF 탈락 | |
2003-04 | 82 | 52 | 30 | 0.634 | 서부 컨퍼런스 5위 | 1R 탈락 | |
2004-05 | 64 | 42 | 22 | 0.656 | 중도 사임 | ||
통산 | 590 | 339 | 251 | 0.575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승률 | 정규리그 | 플레이오프 |
2006-07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82 | 42 | 40 | 0.512 | 서부 컨퍼런스 8위 | CSF 탈락 |
2007-08 | 82 | 48 | 34 | 0.585 | 서부 컨퍼런스 9위 | 진출 실패 | |
2008-09 | 82 | 29 | 53 | 0.354 | 서부 컨퍼런스 10위 | ||
2009-10 | 82 | 26 | 56 | 0.317 | 서부 컨퍼런스 13위 | ||
통산 | 328 | 145 | 183 | 0.442 | |||
총계 | 2,398 | 1,335 | 1,063 | 0.557 |
7. 여담
- NBA 선수들과 현지 기자들 사이에서는 '워스트 드레서'로 자주 손꼽히는데, 그는 주로 양복 자켓 안에 터틀넥을 즐겨 입지만 옷 색상이랑 몸매가 맞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 아들인 도니 넬슨(전 댈러스 매버릭스 단장)[10]은 아버지와는 달리 지도자보다 구단 운영과 스카우팅에서 엄청나게 성공한 케이스이며, 1989년 사루나스 마르셜오니스 극비 스카우트 작전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8. 관련 문서
[1] 영구결번[2] 다른 3회 수상자는 팻 라일리와 그렉 포포비치이다.[3] 특히 이 시기의 유잉은 30대 중반이 가까워진데다 고질적인 무릎문제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20대 중후반이던 1989, 1990년 즈음에는 유잉도 달리는 농구를 한 적이 있지만, 안 그래도 공격부담이 높고 프로커리어 내내 무릎보호대를 달고다닌 유잉에게 달리라는 건 무리한 요구.[4] 참고로 정말 MVP를 택배로 받은것이 아니다! 그럴듯한 농담이 퍼지게 된 것뿐.[5] 서장훈은 이를 두고 "커리가 농구인생에서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은 돈 넬슨이다. 선수가 저렇게 플레이하는데 감독이 내비뒀다는게 제일 중요하다."고 평했다. 사실 00년대 까지만 해도 포인트가드가 3점슛부터 노리고 공격 조립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돈 넬슨은 커리의 자율성을 최대한 온존해준 것이고 그 덕분에 커리는 2010년대 3점 혁명과 함께 골스 왕조를 연 농구 역사상 최고의 슈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6] 여담으로 세계 최초의 해킹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웰스는 짧은 시간안에 로드맨에게만 파울 6개를 하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나(역대 최단시간 파울아웃 기록) 자유투가 약한 로드맨은 경기 최다인(마이클 조던과 타이) 자유투 12개를 던지면서 놀랍게도 이 중 9개를 성공(75%)시킨다. 당연히 댈러스는 대패. 로드맨은 27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경기의 일등공신이 되어 인터뷰를 했는데, 정작 경기 후 인터뷰에선 황당한 파울작전에 대해 가장 먼저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해 로드맨은 웃으며 "다들 놀라게 했죠. 그들(매버릭스)가 계속 절 파울하길래 전 속으로 '날 파울하면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텍스(윈터)는 오늘 여기 없었지만 제가 자유투를 넣은걸 보고 뿌듯해하셨을 겁니다."라고 답했다.[7] 프레시를 포인트포워드로 기용해 포인트가드 몽크리프의 부담을 덜어준다던지.[8] 다만 크리스 웨버 관해서는 그가 원하지도 않는 센터 역할을 강요하다가 큰 갈등을 겪기도 했다. 웨버가 마지막 시즌에 넬슨이 감독하던 워리어즈에 자발적으로 합류한 것을 보면 관계는 회복된 듯 보이지만. 사실 당시 웨버는 틀에 박힌 플레이를 강요받은 것도 아니고 꽤 자유롭게 플레이를 했는데, 기본적으로 활동반경이 넓고 사이즈가 센터치곤 작은 웨버가 센터 뎁쓰가 역사상 가장 두터운 90년대에 센터로 뛰는 것 자체를 불편해했고, 넬슨도 다혈질이고 고집이 셌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틀어진 것.[9] 마이크 댄토니식 7 second or less 오펜스가 지향하는 런앤건은 경기 페이스를 올리더라도 철저하게 코트를 벌리고 벌려서 공간을 만든 뒤 빠르게 3점 슛 찬스를 만들어낸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한 런앤건이지만 넬리볼은 그런 거 없는 매우 즉흥적인 닥공 스타일.[10] 2020-21 시즌을 끝으로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