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맥헤일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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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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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맥헤일 | ||||||||||||||||||||||||||||||||||||||||||||||||||||||||||||||||||||||||||||||||||||||||||||||||||||||||||||||||||||||||||||||||||||||||||||||||||||||||||||||||||||||||||||||||||||||||||||||||||||||||||||||||||||||||||||||||||||||||||||||||||||||||||||||||||||||||||||||||||||||||||||||||||||||||||||||||||||||||||||||||||||||||||||||||||||||||||||||||||||||||||||||||||||||||||||||||||||||||||||||||||||||||||||||||||||||||||||||||||||||||||||||||||||||||
헌액 연도 | 1999년 |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32번 | ||||
제프 저드킨스 (1978~1980) | → | 케빈 맥헤일 (1980~1993) | → | 영구 결번 |
보스턴 셀틱스 No.32 | |
'''케빈 에드워드 맥헤일 Kevin Edward McHale''' | |
출생 | 1957년 12월 19일 ([age(1957-12-19)]세) |
미네소타 주 히빙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미네소타 대학교 |
신장 | 208cm (6' 10") [1] |
체중 | 102kg (225 lbs) [2] |
윙스팬 | 244cm (8' 0", 비공식)[3]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
드래프트 | 1980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보스턴 셀틱스 지명 |
소속팀 | 보스턴 셀틱스 (1980~1993) |
지도자 경력 |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감독 (2005 / 2008~2009) 휴스턴 로키츠 감독 (2011~2015) |
프런트 경력 |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단장 (1995~2008) |
등번호 | 32번 - 보스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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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1980년대 보스턴 셀틱스 3인방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2. 일생
2.1. 선수 시절
1957년 미네소타 주 히빙에서 아버지 폴 오스틴 맥헤일(1920~1994)과 어머니 조세핀 패트리샤 스타세빅(1927~2013) 사이에서 태어났다. 히빙 고등학교 시절 농구부에서 게리 애딩턴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아 실력이 쭉쭉 자라 1976년에는 미네소타 미스터 배스킷볼에 뽑혔고, 졸업 후 미네소타 대학교에 진학해 짐 더처[4] 감독에게 지도를 받아 1979-80 시즌에는 NIT 진출을 이끌어낸 후 결승까지 나가 버지니아 대학교에 55-58로 졌지만, 그 공로로 1980년 올 빅 텐 컨퍼런스 퍼스트 팀에 뽑혀 주목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는 NBA 드래프트를 신청하여 전체 3번으로 보스턴 셀틱스에 뽑혔다.데뷔 초기에는 주전 포워드 세드릭 맥스웰의 백업이었던 식스맨이었고, 1984년과 1985년 2차례 식스맨 상을 받았다. 1984-85 시즌 도중 세드릭 맥스웰이 무릎 부상으로 빠지자 본격적인 주전 선수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내내 보스턴 셀틱스 왕조에서 래리 버드, 로버트 패리시와 함께 3번의 우승, 2번의 준우승을 이뤘다. 이들 3명은 역대 최고의 프론트 코트로 손꼽히기도 한다.
13시즌동안 보스턴에서 17.9점(FG 55.4%), 7.3리바운드, 1.7블록, 1.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번의 식스맨 상을 받았고 1번의 ALL-NBA 1st TEAM 과 2번의 NBA All-Defensive 1st TEAM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올스타에도 7번 선정되었다. 커리어 하이인 1986-87 시즌에는 평균 득점 26.1점(FG 60.4%), 9.9리바운드, 2.2블록, 2.6어시스트을 기록했고, 이해 ALL-NBA 1st Team과 NBA All-Defensive 1st Team에 선정되었고, 이해 MVP 투표에도 4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등번호 32번은 보스턴 셀틱스의 영구결번으로 선정되었고, 1996년 ESPN이 선정한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중 1명에 선정되었다. 2016년 ESPN이 선정한 NBA 랭킹 31위(PF 랭킹 6위)에 선정되었고##, SI에 선정한 NBA 랭킹 49위에 선정되었다.##
1980년대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시의 3인방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카림 압둘자바-제임스 워디의 3인방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들 6명은 나중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2. 은퇴 후
은퇴 후 1994년에 고향팀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부단장으로 프런트 생활을 시작했고, 1995년부터 단장으로 승진하여 케빈 가넷을 지명한 후 1996/97 시즌부터 8시즌 동안 울브스를 플옵 단골 팀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으나, 2000년에 터진 조 스미스 이면계약 파동으로 5년 동안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박탈당하는 등의 물의를 빚기도 했다. 울브스가 한창 암흑기에 접어들 무렵인 2005년에 감독대행을 했고, 2008년 퇴임 후 2009년까지 감독을 지내기도 했다.2011년에는 휴스턴 로케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별다른 전술 능력이 없이 선수단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2013-14 시즌에는 2월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2014-15에는 56승 26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2위를 차지하는 등 정규시즌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휴스턴 통산 193 승 130 패, 승률 .598) 2015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등[5]의 실적을 냈지만 2015-16 시즌 출발과 함께 4승 7패로 부진했고 곧바로 경질되었다.[6] 이후에는 TNT 등지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7]
3. 플레이 스타일
1980년대 중반 팀의 에이스인 래리 버드에 이은 2인자였고[8], 맥헤일보다 반세대 후의 찰스 바클리나 칼 말론에 살짝 가리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파워 포워드이다.그 하킴 올라주원이 맥헤일의 포스트업을 보고 배웠다고 말했을 정도로 뛰어난 풋워크와 포스트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올라주원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로우포스트 테크니션이었으며, 맥헤일을 상대했던 선수들은 그가 있는 로우포스트를 고문실이라고 했을 정도. 게다가 자유투도 빅맨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통산 79.8% 성공률을 기록했으며, 주 공격 루트는 골밑이었지만 미드레인지 점퍼도 수준급이었다.
1986-1987시즌에 그는 60%이상의 필드골 성공률과 80%이상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는데, 한시즌 60-80클럽은 오직 맥헤일만이 가지고 있는 대기록이다. 야투율의 경우 시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가드는 4할대가 일반적이고 빅맨이라도 50%만 되어도 효율적인 득점원이라 평가받으며, 보통 6,7할대의 미친듯이 높은 야투는 보통 받아먹기 득점만 하는 디안드레 조던이나 타이슨 챈들러 같은 선수들이 주로 기록한다. 당장 리그 야투율 1위를 10번이나 한 샤킬 오닐의 커리어 하이가 60.9%였다. 즉, 6할대 득점은 거의 모든 득점이 골밑에서 이뤄지며 그마저도 대부분 받아먹기인 선수들이나 기록하는 것으로, 멕헤일처럼 직접 쥐어짜내며 득점하고 페이드어웨이나 중거리 점퍼도 많이 던지는데 6할인 선수는 거의 없었다.[9] 즉, 야투율이 높으려면 거의 덩크나 레이업만 하는 빅맨이어야 하는데, 이런 빅맨치고 자유투를 잘 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10] 야투율 6할과 자유투 8할을 동시에 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멕헤일은 슛거리가 긴 빅맨치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야투율이 높았기에 가능했던 기록.[11]
수비력도 좋아서 NBA All-Defensive 1st Team에 3회, NBA All-Defensive 2nd Team에 3회 선정되었다. 신장보다 미친듯이 긴 팔이 상당한 도움이 된 듯.[12] 다만 리바운드는 커리어 평균 7.3개, 커리어 하이가 9.9개일 정도로 레전드 빅맨치고는 상당히 평범했다.[13]
괴물같은 파워나 압도적인 운동능력은 없어도 뛰어난 센스와 매우 뛰어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하던 선수였다. 찰스 바클리는 현역 시절 가장 상대하기 힘든 선수로 맥헤일을 꼽았을 정도.## 사실 스타일 자체가.바클리의 천적일 수 밖에 없는 선수이기도 하다. 바클리는 포지션에 비해 키가 작은 대신 힘이 매우 좋아서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오는 어떤 선수에게도 밀리지 않았으며, 운동능력이 좋아 젊은 시절엔 1대1 수비에서 강점을 보였다.[14] 그런데 맥헤일은 백다운으로 밀고 들어가는 대신 장신이란 점을 살려 페이더웨이나 점퍼를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맥헤일은 하킴이 그랬듯 페이크를 해서 수비수를 낚는데 능했는데, 바클리는 운동능력에 크게 의존하는 수비를 하는데다 수비할 때 도박을 하는 성향이 강해[15] 이런 페이크에 잘 낚였기 때문에 바클리 입장에서 맥헤일을 막는건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3회 (1981, 1984, 1986) NBA 올스타 7회 (1984, 1986-1991) 올-NBA 퍼스트 팀 (1987)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3회 (1986-1988)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1983, 1989, 1990) NBA 올해의 식스맨 상 2회 (1984, 1985)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1) NBA 역사상 위대한 50인 선수 (1996) NBA 75주년 팀 (2022) |
5. 여담
2011년 Inside the NBA All-Star Ultimate Fantasy Draft에서 자신의 팀의 모든 선수들을 보스턴 셀틱스 출신으로 채웠다.## 원클럽맨으로서 아직도 셀틱스에 깊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의외로 실력에 비해 수상실적이 아주 좋은 편이 아닌데, 올NBA팀이 87년 퍼스트팀 1회 뿐이다. 이는 그가 커리어 첫 5년을 식스맨으로 뛰었고, 또한 올NBA팀이 기본적으로 해당 시즌 내 성과에 대한 수상이기 때문에 다른 명예의 전당 멤버 두명과 뛰었던 그가 개인기록이나 팀내 비중 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케이스가 매직, 카림과 같이 뛴 제임스 워디. 그러나 단 한번 있는 올NBA팀이 무려 퍼스트팀이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리그 최고 수준의 실력을 지닌 포워드였으며, 워디와 마찬가지로 다른 팀의 에이스였다면 (비록 우승은 힘들겠지만) 훨씬 화려한 개인기록과 수상실적을 냈을 선수이다.
6. 관련 문서
[1] 맨발 기준 208cm (6'10") / 착화 신장 211cm (6‘11“).[2] 커리어 초반엔 95kg (210 lbs)으로 가벼운 체중이었고, 전성기 시절엔 102kg (225 lbs) 체중이 나갔다.[3] 케빈 가넷과 나란히 서 있을 때 팔 길이가 비슷해 보이지만 어깨가 넓어서 비슷해 보이는 것뿐이다. 가넷도 팔이 긴 편이지만 추정 윙스팬으로 7피트 5인치 정도로 언급된다(공식적으로 밝혀진 수치는 없다). 맥헤일의 팔이 더 긴 것 외에도 체격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어깨가 넓기 때문에 윙스팬이 많이 차이가 나는 것. 한 세대 전 선수였던 필 잭슨처럼 근육이 많이 붙지 않았는데도 타고난 골격 자체가 어깨가 굉장히 넓고 팔이 긴 특이한 체형이다.[4] 1933년 4월 17일 미네소타 주 알페나 출생. 젊은 시절 알페나 고등학교와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55년 육군에 입대해서 주 서독 프랑크푸르트 기지 복무 도중 미식축구 및 농구팀 코치를 했다. 1964년 알페나 커뮤니티 칼리지 체육부장 겸 농구부 감독으로 본격 데뷔, 1966년 이스턴 미시건 대학교로 전근 가서 임기 6년 동안 조지 거빈, 하비 말랏, 케네디 매킨토시, 얼 히긴스, 페리 왓슨(전 디트로이트 머시 대학교 감독) 등을 발굴해냈다. 1972년 모교 미시건대 코치로 옮겨 조니 오어 감독을 보좌하다가 1975년 미네소타 대학교로 또 전근가서 임기 11년 동안 맥헤일 외에 레이 윌리엄스, 마이칼 탐슨, 트렌트 터커, 랜디 브루어, 플립 손더스, 짐 피터슨 등을 발굴/육성했다. 그러나 1986년 1월에 선수 3명이 여성 강간 혐의로 체포되자 대학 측의 기권 결정에 대해 다투다 불명예 사임한 후, 금융설계사로 변신하여 캐나다 왕립은행 계열사인 RBC 데인 라우셔(현 RBC 자산관리) 수석부사장까지 지냈다. 자녀들 중 아들 브라이언(1959년생)은 미네소타대 시절 아버지 밑에서 배워 1983년 일리노이 대학교 수습코치를 시초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사우스다코타 주립대학교(1986~1988)를 거쳐 1989년부터 미시건 대학교로 옮겨 9년 동안 스티브 피셔와 브라이언 엘러비 감독을 보좌했고, 1999년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수석코치로 영입되어 피셔 감독 곁으로 돌아와 18년 동안 함께했다. 2017년에 피셔로부터 샌디에이고 주립대 감독직을 넘겨받아 재직 중이며 임기 6시즌째인 2022-23 시즌에는 NCAA 전국대회 결승까지 이끌었다. 딸 주디(1963년생)는 법조인 출신으로 1995년부터 8년 동안 미네소타 주 감사관을 지낸 후 벤슨 재단 대표로 재직 중이다.[5] 2라운드에서 닥 리버스의 LA 클리퍼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뒤져있다가 벤치 멤버 중용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3연승을 거두며 대역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다만 이건 닥 리버스의 대처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정설.[6] 성적부진 때문에 직접 해임되었다기보다는 전술 능력 부족 등등의 사유로 해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가 잘린 쪽에 가깝다.[7] 당시에는 수비를 안 하다시피 하던 제임스 하든에 대한 비판에 같이 끼어들었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든이 팀의 리더로서 수비를 당부하자 동료들이 실소를 짓던 장면을 묘사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옆에서 보고 있었다고 말을 덧붙인 것. 휴스턴의 감독이었던, 그런 일들에 책임을 져야 했던 위치에 있었던 양반이 마치 구경꾼처럼 행동했던 일화를 떠벌렸으니...[8] 80년대 초중반까지는 로버트 패리시가 팀의 2옵션이었고, 80년대 중반부터는 케빈 맥헤일이 2옵션이 되었다.[9] 끽해야 89-90시즌에 야투율 6할로 25점을 넣은 찰스 바클리 정도. 그런 바클리조차도 자유투 8할을 넘은 적은 없다.[10] 슈팅 능력이 있으면 중거리슛 등 다양한 방법으로 득점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야투율이 자연스레 떨어진다.[11] 사실 이건 그의 팀복도 있다. 맥헤일은 커리어 내내 래리 버드랑 뛰었는데, 버드가 득점왕급에 준하는 득점원이었기에 자연스레 그에게 수비가 몰렸기 때문. 둘의 스탯을 보면 비슷해보이는 시리즈도 있지만, 실제 경기를 보면 버드는 집중수비를 뚫고 하는 반면 맥헤일은 버드에게 수비가 몰렸을때 오픈됐다가 그의 꿀패스를 받아 하는 득점이 많다. 문제는 맥헤일 본인도 전성기 때 에이스급 득점원이었던 것. 안 그래도 득점력이 좋은데 수비를 분산해주는데다 패스까지 좋은 레전드 동료가 있으니 야투율이 높았던 것이다. 만약 맥헤일이 원맨팀의 에이스였다면 5할은 훌쩍 넘기는 높은 야투율을 기록했겠지만 6할까진 힘들었을 수도 있다.[12] 공식 측정치는 아니지만 일설에 따르면 무려 8'0 (약 244cm)의 윙스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윙스팬이 긴 선수들이 신장대비 10%정도 길지만, 맥헤일은 무려 17%긴 수치이다.[13] 같은 팀의 스몰 포워드 버드가 커리어 평균 10개의 리바운드를 찍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다만 버드는 종종 센터를 막기도 할 정도로 당시 스몰 포워드치고도 인사이드 경쟁력이 매우 강한 선수였다. 그보다 리바운드가 강한 스몰 포워드는 역대로 따져도 엘진 베일러 정도 말고는 거의 없다. 버드 자체가 굉장히 강골이고 힘이 쎈 선수이기도 했다.[14] 대신 팀수비는 좋았던 적이 없다.[15] 스틸과 블록을 노린다는 말. 이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수비실수를 크게 한 적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