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문기(정치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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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문기(金文起) |
초명 | 김효기(金孝起) |
자 | 여공(汝恭) |
호 | 백촌(白村), 마암(馬巖) |
본관 | 김녕 김씨[1][2] |
출생 | 1399년(정종 1년) 2월 16일 |
경상도 옥주 이산현 백지리 (現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3] | |
사망 | 1456년(세조 2년) 6월 8일 (향년 57세) |
한성부 서부 황화방 군기감계 군기감골 (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4]# | |
국적 | 조선 |
시호 | 충의(忠毅) |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8일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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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전기의 문관.2. 생애
1399년(정종 1) 2월 16일 경상도 옥주 이산현 백지리(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아버지 김관(金觀)과 어머니 옥천 육씨 육중(陸仲)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426년(세종 8) 식년시 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치르는 3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 병조 참의,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공조 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하려다가 김질, 정창손 등이 밀고하여 발각되었고, 그해 한성부 서부 황화방 군기감계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그의 부인 김봉비(金奉非)와 딸 김종산(金終山)은 노비로 강등되어 각각 당시 도절제사(都節制使)였던 유수(柳洙)와 사헌부 대사헌이었던 최항에게 하사되었다.#
후일 단종에 충절을 바친 세 명의 중신, 삼중신(三重臣)으로 인정받았다.
1731년(영조 7) 복권되었다. 1778년(정조 2)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가계
- 8대조: 김시흥(金時興) - 김녕 김씨의 시조로, 경순왕의 7대손이라 한다.
- 현조부: 김중원(金重源)
- 고조부: 김현(金峴)
- 증조부: 김광저(金光儲)
- 조부: 김순(金順, 1341~?) - 1376년(우왕 2) 문과 급제, 호조 판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 부친: 김관(金觀) - 이조 판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 모친: 정경부인 옥천 육씨
- 서숙부: 김구수(金仇守)
- 서숙부: 김개질지(金介叱知)
- 부인: 김봉비(金奉非)[5]
- 장남: 김현석(金玄錫, 1420~1456)
- 차남: 김인석(金仁錫)
- 3남: 김원석(金元錫)
- 4남: 김의석(金義錫)
- 5남: 김정석(金正錫)
- 6남: 김현동(金玄仝)
- 딸: 김종산(金終山)
한편 김문기의 후예인 김녕 김씨 충의공파 대종회는 사육신묘 근처에 백촌빌딩이라는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 백촌이 바로 김문기의 호이다.
4. 사육신?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 김문기를 무리하게 사육신에 끼워넣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김재규도 높이 평가하는 문중에서는 김재규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6] 사실 김문기는 계유정난 관련 인물로 민신, 조극관과 함께 장릉배식록의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어 있지만, 사육신의 네임밸류가 어마어마한 관계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듯하다.어쨌든 조선도 공식적으로 김문기의 공을 인정하였고, 역사적인 사료에서도 그 근거 자체는 확실히 발견할 수 있으므로,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헌창했다. 그러다가 1982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 합의 사항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표를 하면서 다시 복잡해졌고.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초의 6인에서 변함이 없다고 1982년 합의 사항을 재확인했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김문기는 사육신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공원에선 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1] 9세손.(족보(1)족보(2)족보(3))[2] 당대에는 김해 김씨를 사용하였으며, 후대에 김녕 김씨 충의공파, 김해 김씨 백촌공파, 경주 김씨 백촌공파로 갈라진다.[3] #[4] 조선시대 군기감은 현재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있었다.#[5] 선산 김씨 김효정(金孝貞)의 딸이다. 김효정은 일찍이 생원시에 급제하고 1402년(태종 2)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5위로 급제한 뒤# 1427년(세종 9) 중시(重試) 문과에 을과 2등 6위로 급제하여# 대제학에 오른 인물이다.[6]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전에는 일을 했으나, 된 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