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5:40:01

김기환(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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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활동한 조직폭력배에 대한 내용은 김기환(조직폭력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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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지존파
김기환(리더)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이경숙 송봉우(송봉은)
파일:김기환.jpg
이름 김기환()
출생 1968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사망 1995년 11월 2일 (향년 27세)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중학교 2학년 중퇴 (국졸)
전과 강간치상 전과 1범
종교 무종교기독교(천주교)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학창 시절2.2. 청년기2.3. 지존파 결성 및 이후 행보2.4. 검거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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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범죄 조직 지존파의 두목이다.

2. 생애

2.1. 유년기, 학창 시절

1968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으며 술과 노름을 좋아하다가 에 걸린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치료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김기환이 3세 때 사망한 이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전처가 딸만 셋을 낳고 죽자 후처를 얻어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았는데 김기환은 그 중 막내다. 아버지는 2살 위의 형보다 김기환에게 더 관심을 주었다고 한다.

영광군 불갑면 공지초등학교를 다녔다. 4학년이었던 1977년[1]에 반장을 했으나 이때 준비물이 없다는 이유로 모욕적인 벌을 받은 것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최후 법정 진술 때에도 이렇게 말했을 정도.
재판장님, 저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돈이 없는 것을 뻔히 알 텐데 선생님은 미술 준비를 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으로는 선생님이 왜 공부도 잘하고 반장인 애가 미술시간만 되면 준비를 안 해와서 매를 맞는지 이해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웠습니다. 모두 죽이고 싶었습니다.
저는 집이 너무도 가난하여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 크레파스는커녕 밥도 굶으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고 담임선생은 항상 때리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생들에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니는 7년 동안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참된 제자의 도리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들이 가르친 대로 도둑질을 해서라도 준비물을 챙겨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배운 그대로 그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회가 없습니다. 나는 왜 내가 이 자리에 서서 단죄를 받아야 하며 내 죄가 왜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세상이 가르친 대로 살았습니다.
이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결과적으로 막장 교사가 김기환을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김기환의 말 그대로 교사가 도둑질을 해서라도 챙겨오라고 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해당 교사는 교사 자격이 없는 인간임을 증명한 꼴이다. 도대체 어느 정상적인 교사가 학생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가르치는가? 그리고 집안 형편이 너무나도 안 좋아서 준비물을 못 챙겨 왔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맞을 짓인가?[2][3]

초등학교 학교생활기록부 행동발달사항에는 “지도력이 강하고 급우를 잘 통솔하나 간섭이 좀 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중학교 생활기록부에도 “준법 정신이 낮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을 하기도 했으며 중학교 시절에도 전교 5등[4]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운동 능력과 글짓기 실력도 뛰어났을 정도로 능력은 좋았다.[5]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형마저 병에 걸리자 자퇴 후 돈을 벌기 위해 부산광역시로 떠났다. 부산광역시로 내려간 후 가장 먼저 취직한 곳은 한 신발 공장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을 어머니에게 보냈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도 했다.

2.2. 청년기

청년이 된 이후로는 몇 년간 대한석탄공사에서 잡부 일을 하거나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열심히 일을 했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여 검정고시 준비마저 그만두고 얼마 후에 다니던 직장도 완전히 그만둔 뒤 영광 고향집으로 돌아와 잠시 가족들과 지냈다.

그러던 와중에 도박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후 도박에 빠져 도박으로 인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6]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돈이 필요했던 그는 “가진 자들을 징벌한다”는 명분 하에 ‘부자들의 돈을 갈취하여 살해하는 조직 결성’이라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조직 결성을 위해 각종 범죄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처세 및 대화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을 정도.

1992년 말엽 대한석탄공사에서 광부 일을 하며 알게 된 동료 광부와 도박 동료 몇 명과 함께 범죄 조직을 결성하려 했지만 동료들이 살인을 원치 않아 첫 조직 결성은 실패하고 1993년 초 고향 후배 강동은 등을 끌어들여 두 번째 조직인 지존파를 결성하여 두목이 되었다. 결성 당시의 나이는 25세였다.

2.3. 지존파 결성 및 이후 행보

조직 결성 후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조직원들에게 지리산에서 일주일간 물 한 병과 칼 한 자루로 버티도록 하는 훈련을 시켰고 조직원들과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가 기거하던 집을 아지트로 개조했다. 평소엔 동네 형처럼 조직원을 대했지만 강압적인 지도력으로 조직원들을 복종하게 했으며,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첫 번째 피해자인 최미자[7]와 송봉우 살해를 주도했다. 실제로 조직원들은 송봉우 살해 당시 두목인 김기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송봉우를 경쟁적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했다.

아지트 완공을 얼마 앞두고 실전에 돌입하기 전인 1994년 6월 17일, 김현양의 생일 당일에 조직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그날 밤에 불현듯 “아는 선배의 집에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가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비운 김기환은 선배의 집에 보일러를 고치러 갔다가 방에서 자고 있던 선배의 조카(당시 중학교 1학년)에게 강간을 시도하여 체포되었다. 이때 김기환은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는데 전문가들은 김기환이 직접적인 범행으로부터 손을 떼고 중죄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렇게 김기환은 강간상해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임명하고는 면회를 통해 부하 조직원들에게 범행을 지시했고 수감 중에도 그의 말은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법이었다.

2.4. 검거 이후

선고 공판을 며칠 앞두고 지존파의 살인 혐의로 추가 기소되어 선고가 연기되면서 서울 서초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 전에 형사들이 수감되었던 전남 광주교도소로 찾아갔을 때 사건 내용을 듣고는 이랬다고.
내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바보 같은 녀석들 사고 쳤구나. 여자는 어머니라도 믿지 말라고 그토록 가르쳤는데 후회는 없다. 30~40년 일찍 간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다.[8]
고병천 서울서초경찰서 강력4반장에게는 이렇게 뻔뻔하게 말했다고 한다.
돈만 가지고 세상을 더럽게 만드는 놈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지존파를 조직했습니다. 동생들[9]은 죄가 없습니다. 내가 그러라고 시켰으니까요.

지존파 일당 전원이 검거되어 서울구치소로 이전된 후 1995년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야!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여? 이건 세상 법이 X 같은 것이여!”란 말[10]을 남겼는데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한 것도 모자라 범행 계획 전에는 사람을 죽여 봐야 한다는 호기로운 척 말을 하고 사형집행 당일 날도 자신의 행동을 끝까지 물리지 않고 정당하단 식으로 말할 만큼 세상과 한국에 대한 증오감이 엄청났던 사람이다.

이후 천주교에 귀의하였고[11] 조성애[12] 수녀와 자매결연을 맺고 지도를 받았다. 1995년 11월 2일 서울구치소에서 가장 먼저 사형이 집행되었다.

오전 7시 35분에 입장한 그는 아침식사를 마친 뒤 교도관들에게 붙들려 사형장을 향해 10여 분간 걸어오면서 당황했다고 한다. 이때 입회한 문장식 목사가 말하길, 긴장감 속에서도 비교적 당당한 모습이었다.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두 눈은 부릅뜬 얼굴빛은 비교적 밝았으나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 '얼굴을 똑바로 쳐들고 모든 것을 체념하면서도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 같은, 지존파의 두목다운 기질'이었다고 문 목사는 묘사했다.
죄인이 할 말은 없으나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미소)
죄송합니다.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 주기를 바랍니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문장식 목사는 '그 순간에는 철저히 회개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주장한 말이 옳다고 합리화하려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 후 김우성 신부가 천주교 의식을 거행하고 문장식 목사와 스님도 마지막 작별 인사의 악수를 한 뒤 7시 55분에 집행되어 8시 8분에 절명했다.[13]

3. 기타

지존파 관련 영상으로는 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데 그 이유는 지존파가 검거되기 3개월 전부터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기 때문이다. 체격이 매우 작았는데, 키가 160cm 정도였다고 한다.


[1] 이를 보아 빠른년생일 가능성이 높다.[2]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신창원도 비슷한 이유로 비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가난한 학생을 막말로 인간 말종급으로 취급하고 교육을 빙자한 폭행을 하는 게 매우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이후로도 촌지를 제때 못내는 학생들에게 마구잡이식 체벌을 하는것은 흔해 빠진 일이었다. 즉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당시 학생들 상당수가 범죄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우한 과거는 범죄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교육을 빙자한 폭력 때문에 아이들이 되레 비뚤어지는 케이스가 한둘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폭력부터 근절해야 범죄율을 낮출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일리가 있다.[3] 당시는 군사독재 시기라 사형은 당연, 이로 인한 사법살인도 상당한 편이었고, 경찰들 눈에만 띄어도 끌려가서 고문 받는건 물론, 군대까지 동원하는 그야말로 공권력이 제일 막장이었던 시기다.[4] 김기환이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인 1980년 당시엔 지금보다 학생 수가 훨씬 많았으므로 김기환은 당시 엄청난 엘리트에 속했을 수도 있었을 정도로 똑똑했다.[5] 이렇듯 김기환은 다른 조직원들보다 지능적으로 나았기 때문에 집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6] 김기환에게 '지존'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이때 도박을 하며 포커를 잘 했기 때문. 이 별명은 조직 결성 후 부하 조직원들로 말미암아 ‘두목’을 대신하는 칭호로 쓰이게 되었다.[7] 조직원들에게 “사람은 이렇게 죽이는 것이다.”라고 시범했다고 했다.[8] 정작 본인은 아동 성범죄를 저질러서 징역 5년으로 복역하게 되어 조직원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됐다.[9]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을 의미한다.[10] 둘 다 지존파 사형 선고 하루 전에 구속되었고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개월형 선고는 지존파 사형 후에 일어났다. 게다가 전두환노태우는 나중에 사면되어 나왔을 뿐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아니며 전두환 일가의 엄청난 재산 등으로 인해 크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두 사람 모두 공식적으로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즉 김기환은 자기 딴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셈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였다는 것이다.[11]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어서 지존파 조직원들 중 가장 나중에 종교에 귀의하였다.[1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등장인물인 문 모니카 수녀의 실제 모델.[13] 출처: 문장식 목사,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