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3:25:38

김기택(탁구)

<colbgcolor=#131230><colcolor=#eee156> 김기택
金琦澤|Kim Ki-taek
파일:김기택(탁구).jpg
출생 1962년 10월 3일 ([age(1962-10-03)]세)
충청북도 청주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청주중학교 (졸업)
청주고등학교 (졸업)
한성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 / 학사)
세종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1])
직업 탁구 선수 (오른손 펜홀더 전진 속공 / 은퇴)
탁구 감독
소속 김기택 탁구클럽 (관장)
경력 제일모직 탁구단 코치 (1991~1998)
삼성생명 탁구단 감독 (1999)
가족 배우자, 아들 김도영(1995년생)[2]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수상 기록6. 방송 출연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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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탁구 선수 출신 감독.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남자 복식 은메달리스트, 1988 서울 올림픽 남자 단식 은메달리스트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김완, 김택수, 유남규와 함께 한국 탁구계의 레전드로 불린다.

2. 선수 경력

1980년대 한국탁구 중흥기를 이끌었던 선두주자로, 1980년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되어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시작, 1983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남자 단식에서 세계 강호들을 잇달아 연파하며 한국 남자 탁구 사상 처음 8강에 진입했고 1985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연이어 8강에 진출하며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단식 선수로 인정받았다.

1986년 국내 남자 선수 중 가장 높은 13위까지 세계 랭킹 순위를 끌어올렸지만 목디스크와 팔꿈치 부상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 탈락해 정작 한국 남자 탁구 역사상 최고의 ‘빅 이벤트’였던 서울 아시안 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탁구가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서울 올림픽에서의 재기를 위해 이탈리아 프로팀의 입단 제의를 거부하고 재활과 특훈을 소화한 끝에 아시안 게임 이후 탁구 종별전과 탁구 최강전을 휩쓰는 저력을 보이며 올림픽 대표팀에 당당히 선발됐다.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해서는 8강에서 금메달 확률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던 스웨덴의 레전드인 얀오베 발드네르를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3:2로 물리치는 이변을 일으켰고, 기세를 몰아 4강에서는 본인이 개인적으로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했다는 헝가리의 티보르 클람파를 3-0으로 연달아 물리치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후배 유남규를 상대로 러버의 돌기가 손상되는 등 악재 속에서도 분투했으나, 3:1로 패해 사상 첫 올림픽 탁구 단식 종목 은메달리스트로 기록되었다.

3. 감독 경력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본인이 활동했던 제일모직 탁구단에서 코치로 재직했으며, 이듬해 1999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삼성생명 탁구단의 감독을 지냈다.

이후 2004년부터 생활체육 코치로 변신하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본인의 이름을 내건 김기택 탁구 클럽을 개업해 생활체육으로써의 탁구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김기택 본인이 워낙 레전드인지라 탁구 클럽도 동호인들이 몰려 금방 유명세를 떨쳤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용인시 수지구에 2호점을 오픈했다.
KGC인삼공사 탁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었고 국내에 몇 명 되지 않는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유훈석 코치[3]가 1호점 소속으로 이면타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동호인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덕분에 1호점은 셰이크핸드 전형 일색인 타 구장들과 달리 중국식 펜홀더 전형의 동호인들이 굉장히 많다. 또한 김기택 관장도 직접 레슨을 진행하는데, 김기택 관장은 신규 탁구인들의 유입을 장려하기 위해 일부러 라켓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자들을 위주로 지도하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숏핌플러버라고도 불리는 짧은 돌출러버를 사용하는 전진속공 펜홀더 전형의 대명사로, 테이블에 바짝 붙어 한 박자 빠른 리시브에 이은 정확한 스매싱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마찬가지로 숏핌플을 사용하는 전진속공형 선수인 김완과 현정화가 동일한 유형의 선수였다. 김기택은 여기에 더해 전성기 시절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만큼 상대방에게 쉴 틈 없이 재빠른 공격을 퍼부음과 동시에 노련하면서도 변칙적인 경기운영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는 같은 펜홀더 전형이지만 테이블에서 떨어져 드라이브를 주무기로 활용했던 김택수, 유남규와는 정반대의 스타일로, 유남규에게는 가장 큰 무대였던 올림픽 결승전에서 패한 바 있으나 김택수를 상대로는 은퇴 시까지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4]

5. 수상 기록

올림픽
은메달 1988 서울 단식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82 뉴델리 남자 복식
아시아선수권
동메달 1984 이슬라마바드 남자 복식
동메달 1988 니키타 남자 복식

6. 방송 출연

7. 기타

  • 27세에 출전한 1988 서울 올림픽 결승전에서 당시 21세였던 후배 유남규에게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준결승전에서 클람파를 꺾은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라켓의 러버를 일부러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6] 이는 최악의 수가 되어 돌아왔다. 장기인 속공을 앞세워 1세트를 21-17로 선취했으나, 2세트 경기 도중 핌플러버의 돌기가 그만 손상되는 바람에 경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한다.[7] 운동 선수들이 올림픽 포디움에 올라가 메달을 거는 것은 개인의 욕심보다는 국위선양으로 비춰지던 당시 사회 통념상, 결승전이 한국 선수들끼리의 맞대결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쉽사리 당시의 분위기를 깨고 경기 중단을 요청해 러버를 교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후일 밝혔으며, 이를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러버를 교체했다고 해서 자신이 그 게임을 이겼다고는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최후의 수단, 즉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지도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 아쉽다고 한다. 실제로 1점만 실점하면 메달 색깔이 바뀌는 벼랑 끝에 몰린 4세트 듀스 접전 와중에도 김기택은 라켓의 러버만 쳐다보는 모습을 보였고 러버의 이상은 잊어야 게임을 이길 수 있다며 해설위원들에게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 과묵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굉장히 달변에다가 유쾌한 성격으로, 중요한 탁구 경기들마다 해설 위원으로 섭외되었다.


[1] 석사 학위 논문: 탁구선수들의 스포츠 경쟁불안 수준과 요인 및 주의집중 형태분석(1991)[2] 아버지와 달리 탁구 선수의 길을 걷지 않았다. 아들에게 운동을 권하지 않은 것에 대해 종종 후회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3] 선수 시절 중국에서 직접 이면타법을 전수받은 바 있다.[4] 김택수는 세계구급으로 통했던 위력적인 드라이브와 재빠른 풋워크가 가장 큰 장점이었으나, 드라이브를 시전할 준비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김기택의 경기 운영 방식에는 굉장히 고전했다.[5] 신유빈은 김기택 관장의 조언들을 듣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기는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주었고 상대 선수로 게임을 치르고 있었던 김택수의 감탄을 자아냈다.[6] 탁구 선수들에게 러버의 컨디션은 라켓의 반발력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최적의 반발력으로 경기에 나서기 위해 보통 경기 몇 시간 전에 러버를 교체하거나, 또는 떼었다 다시 붙이는 작업을 한다.[7] 이에 대해 조달환은 배드민턴 라켓의 거트가 끊어진 상황에 빗대어 설명했는데, 이는 무리가 있는 설명이다. 배드민턴 라켓의 거트가 끊어지면 거트의 장력을 이용해야 하는 배드민턴 종목의 특성상 끊어진 라켓으로는 셔틀콕 자체를 타격해도 네트를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텐션이 풀려버리기 때문에 경기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그렇기에 국가대표 선수들은 최소 3자루 이상의 예비 라켓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반면 탁구 속공 전형의 선수들은 핌플러버의 돌기가 손상되었을 경우 손상된 부분으로 공을 타격하면 공의 궤적이 가라앉는 것이 사실이나, 정상적이어야 할 샷에서 미스가 나거나 경기를 온전히 자신의 페이스대로 진행하는 데 무리가 있을 뿐 경기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