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1:58:15

갈매기의 꿈

갈매기의 꿈
Jonathan Livingston Seagull
파일:Johnathan_Livingston_Seagull.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
저자 리처드 바크[1]
옮긴이 공경희 (개정판)
출판사 Macmillan Inc.(미국판)
현문출판사(한국어판)
최초 발행 1970년 (초판)
2014년 (개정판)[2]
국내 출간일 1973년 (한국어판 초판)
2015년 (개정판)
쪽수 ○○
ISBN ○○

1. 개요2. 줄거리3. 4부 (2014년)
3.1. 이어지는 줄거리
4. 지은이의 말5. 작품 해설6. 기타7. 등장인물8. 패러디: 수탉 조나단9. 영화화10. 환상(Illusion)

[clearfix]

1. 개요

1970년에 나온 뒤로 전 세계적으로 6천만 부 이상이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한국에선 1973년에 현문미디어(당시 이름은 현문문고)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뒤 줄곧 계속 나오고 있다. 인기에 걸맞게 패러디 작품도 상당하고,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2. 줄거리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부는 조나단이 갈매기 무리에서 겪는 일에 대한 내용이다. 비행을 그저 먹이를 구하기 위한 용도로만 생각하는 다른 갈매기들과 달리 하늘을 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제대로 먹지도 않고 밤낮으로 비행 연습에 몰두하지만 부모를 포함한 다른 갈매기들은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러 가지 비행 기술을 연습하던 조나단은 특히 고속 비행의 한계를 넘지 못해 괴로워 한다. 갈매기의 긴 날개로 어느 속도 이상으로 활강하고자 하면 저항이 너무 커져 균형을 잃고 곤두박질 치는 것이 문제였다. 조나단은 좌절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어 날개 끝만 펼친 채 활강하는 방법으로 갈매기의 한계를 넘어선 빠른 속도에 도달하지만, 처음 겪어보는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초고속으로 갈매기 무리 쪽을 향하게 된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아무하고도 충돌하지 않고 갈매기 떼를 통과하여 무사히 비행을 마쳤으나, 이 일을 계기로 갈매기 무리는 그가 먹이 문제를 등한시하고 비행에만 열중하는 것을 문제 삼으며 그를 무리에서 추방한다. 조나단은 멀고 외딴 절벽으로 추방당하여 고독한 삶을 살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먹이를 두고 경쟁할 필요 없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편안하게 비행술을 연습하며 늙어간다.

보통은 여기까지만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갈매기의 꿈은 동화 또는 아동 소설로서 알려진 경우가 많은 터라 아이들이 읽고 이해하기 힘든 2, 3부의 내용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애초에 1부의 내용만을 추려서 번역한 판본이 많은 탓에 1부의 내용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1부까지는 꿈을 쫓는 갈매기의 삶을 이야기한 내용으로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2, 3부는 작가 리처드 바크가 자신의 작품 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바탕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얼핏 보면 허황된 무협지 내지는 판타지물처럼 읽힌다.

2부는 어느 날 두 마리의 갈매기들이 조나단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조나단의 비행술을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나단은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최고의 기술들을 선보이지만 새로운 갈매기들이 그 비행술을 똑같이, 심지어 자신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두 갈매기들은 조나단을 머나먼 갈매기들의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이곳에는 조나단처럼 갈매기 무리에서 벗어나 비행을 연습하고 높은 경지에 이르려는 갈매기들이 모여 있었다. 조나단은 천국에 이르자 자신의 육체가 전성기 때보다도 더 수월하게 비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한편으로는 그 새로운 육체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어 실망한다. 조나단은 이곳에서 스승이자 동료인 설리반을 만나 새로운 경지의 비행술을 배우고 교류하며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비행술을 더욱 발전시키게 된다. 설리번은 조나단에게 갈매기 천국에 있는 갈매기들은 모두 수천 수만 번의 인생을 반복하여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되는 것이지만 조나단은 이미 아주 많은 것을 배워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말해준다.[3]

갈매기 낙원에서 제일 높은 경지에 이른 갈매기는 치앙이라는 늙은 갈매기인데, 비행술을 넘어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깨달은 자로 곧 더 높은 차원의 다른 세계로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조나단은 치앙에게 다가가 가르침을 청하고, 조나단의 재능과 열정을 알고 있던 치앙은 그를 지도한다. 치앙은 단순한 비행 기술을 넘어 갈매기라는 존재와 육신의 한계에서 자유로워질 것임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주는데, 조나단은 수련 끝에 그의 가르침을 깨닫고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행성으로 공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된다.[4] 이는 치앙 이외의 갈매기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로, 돌아온 조나단은 낙원의 갈매기 모두에게 축하와 존경을 받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치앙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빛이 되어 새로운 세계로 떠나간다.

조나단은 치앙이 떠난 후 여태와 마찬가지로 수련에 집중하지만, 문득 자신이 떠나온 갈매기 무리 중에도 자기와 같은 존재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나단은 갈매기 무리에게 돌아가 그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만, 설리번은 어리석은 갈매기들을 가르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거니와 만일 치앙이 너와 같은 생각을 가졌더라면 여기서 치앙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겠냐며 조나단을 강하게 설득한다. 하지만 조나단은 만일 자신이 추방당한 날에 치앙이 있었다면 더욱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라 말하며 결국 자신이 머물던 외딴 절벽으로 돌아가게 된다.[5]

3부에서 조나단은 자신과 똑같이 곡예 비행을 연습하다 무리에서 쫓겨난 플레처 린드를 만난다. 조나단의 엄청난 비행술을 보고 감탄한 플레처가 조바심을 내며 비행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조나단은 '우선 수평비행부터 시작하자'는 말과 함께 플레처를 제자로 삼게 된다. 그 후 조나단은 추방당한 갈매기들을 한마리씩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치다가 결국 제자들을 이끌고 갈매기 무리로 돌아가게 된다. 조나단에게 배운 비행 기술로 멋진 편대를 이루어 날아온 조나단 일행을 갈매기 무리는 철저하게 외면하며, 만약 조나단 일행과 교류하는 갈매기가 있다면 그들 역시 추방할 것임을 공표한다.

조나단 일행은 갈매기 무리가 볼 수 있는 곳에서 비행 연습을 계속 하고, 이를 본 갈매기 떼의 젊은 갈매기들은 하나둘씩 조나단 일행에 관심을 갖게 되어 조나단 일행에 합류하는 갈매기도 생기게 된다. 어느 날 날개가 부러져 날 수 없게 된 갈매기 하나가 날개를 절며 조나단을 찾아와 자신도 다시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하자, 조나단은 그가 자유로운 갈매기임을 말해준다. 놀랍게도 이 말이 끝나자 마자 그 갈매기는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6]

이를 계기로 조나단 일행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다른 갈매기들도 점차 조나단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밤이 되먼 멀찌감치 조나단 무리를 둘러싸고 모여든다. 조나단에 대한 갈매기 무리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 조나단을 위대한 갈매기의 자손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나지는 가운데,[7] 조나단은 자기 주위로 모여든 제자들과 익명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자유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전파한다. 문제는 보통의 갈매기는 물론이고 제자들조차 조나단의 이야기가 도대체 비행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어느날 플레처가 고속으로 비행 연습을 하던 중 경로에 뛰어든 새끼 갈매기를 피하려다 바위에 강하게 부딪혀 정신을 잃게 된다.[8] 흐릿한 의식으로 조나단과 문답을 나누던 플레처는 조나단이 일어나라고 말하며 툭 치자 마치 잠에서 깨듯 벌떡 일어나게 되며,[9] 다른 갈매기들은 이를 보고 '죽은 자를 살려냈다' '그는 위대한 갈매기의 아들인가?' '아니, 본인이 아니라고 했어' '그럼 악마다!'라는 놀라운 흐름으로 조나단과 플레처를 공격하려 하나, 조나단은 예의 순간이동으로 플레처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다. 처음 겪는 경험에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도 연습하면 그런 기술을 할 수 있냐고 묻는 플레처에게 조나단은 이 모든 것이 똑같다며 그저 연습하라는 아리송한 말만 남긴다.

다음날 플레처는 자신들을 공격하려 했던 갈매기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데, 조나단은 과거 다른 갈매기들을 미워했던 플레처가 이제는 다른 갈매기들을 인도해가고 있지 않냐고 답한다. 조나단이 다른 세계로 떠나려는 것을 느낀 플레처가 깜짝 놀라며 자신은 다른 갈매기들을 인도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조나단은 플레처에게 다른 갈매기들을 잘 지도해주고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한 자신을 발견하라는 당부와 나는 그저 나는 걸 좋아하는 갈매기일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빛과 함께 사라진다. 플레처는 잠시 당황하지만, 자신의 제자들에게 돌아와 비행 지도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나단의 흉내를 내어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자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플레처는 자신을 처음 봤을 때의 조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우선 수평 비행부터 시작하자'고 말하게 된다. 그 순간 플레처는 조나단이 남긴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먼 훗날 조나단과 더 높은 경지를 위해 경주할 것을 다짐하며 웃음 짓는다.[10]

3. 4부 (2014년)

2012년 8월, 작가 리처드 바크는 비행기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거의 다다를 뻔했다. 이후 2013년에는 작가가 과거에 줄거리에 포함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빼버린 후 그대로 잊어버린 4부의 원고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처드 바크는 2014년에 4부를 포함한 완결판을 출판했으며, 한국에서는 2015년에 공경희의 번역으로 42년 전 한국어판을 처음으로 낸 현문미디어에서 한국어판을 출간했다.

3.1. 이어지는 줄거리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나단이 떠나고 몇년 후, 조나단처럼 한계를 초월해 사라지는 갈매기들도 몇몇 등장하는 가운데 플레처와 동료들은 조나단의 가르침과 비행술을 갈매기들에게 가르치지만, 갈매기들은 조나단의 어록과 생김새 등 그에 대해 낱낱이 알려 하고, 플레처가 조나단 역시 결국 우리와 같은 갈매기였다며 반박함에도 불구하고 점차 조나단을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갈매기들이 비행에 관심을 끊게 되고, 모래밭에서 거룩한 조나단에 대한 복잡한 말들만 읊어대는 지경까지 상황이 악화된다. 이후 조나단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마침내 플레처가 조나단과 처음 만난 후 연습했던 긴 수직 완회전을 하던 중 몸이 사라졌다. 갈매기들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순수한 비행 도중 사라진 플레처가 돌아오지 않자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이를 해소하기 위해 조나단이 내려와 플레처를 승천시켰다는 등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공표했다.

이후 갈매기들은 맹목적인 신앙심을 품은 '고위 부족 제자'라고 불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집단으로 변모했다. 조나단의 가르침은 고위 제자들의 복잡한 암송이 정착되어 굳어진 단단한 교리로 전락했고, 비행은 신성한 행동으로 규정되어 아무도 감히 비행하려 하지 않았고, 몇몇 새들은 비행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이건 비행이 아니라며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새들 중 앤서니라는 새는 조나단에 대한 신화를 믿지 못하겠다며 고위 제자에게 따진다. 고위 제자와의 대화 속에서, 조나단만큼 어마어마한 경지의 비행술을 선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를 숭배하겠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동시에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어느 오후, 앤서니는 삶이 가치없고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바다로 강하해 익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앤서니는 바다로 강하하는데….

갈매기로 보이는 뿌연 것이 그를 지나치며 공중에서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비행술을 선보인다.

앤서니는 감탄하다가 그대로 실속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잊고 다시 실속한다. 앤서니는 맹세컨대 저건 갈매기였다며 그 갈매기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고, 갈매기는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으로 불꽃같이 앤서니에게 돌아왔다. 그 갈매기는 앤서니를 쭉 지켜보았다며, 비행에 대하여 앤서니의 의견을 물어본다. 앤서니는 아름답다고 대답하며, 갈매기 부족 주위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낯선 새에게 누구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낯선 새는 "존이라 부르게"라고 대답하고 소설은 끝난다.[11]

4. 지은이의 말

마지막 장은 놀라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 갑자기 누군가의 마음에 모험들이 나타날까? 작품을 사랑하는 작가들은 미스터리가 마법의 일부라고 말한다. 설명할 도리가 없으니.
상상은 오래된 혼이다. 누군가 정신에 속삭인다. 거기에 있는 빛나는 세계와 희로애락을 가진 인물들에 대해 나직이 말해준다. 글만 없을 뿐 마무리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들은 이미지들을 휘휘 돌려서 아는 행동과 맞추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를 기억해낸다. 간단히 글자, 마침표, 쉼표들을 집어넣으면 이야기는 독자라는 슬로프를 활강할 준비를 마친다.
이야기는 무슨 위원회나 문법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조용한 상상력을 건드리는 미스터리에서 샘솟는다. 오랜 세월 궁금증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데서 해답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본 적 없는 활에서 화살이 날아들듯이.
내 경우는 그랬다. 전에 내가 4장의 집필을 중단하면서 갈매기 조나단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 당시 4장을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조나단의 해답을 추구한 갈매기들이 의례로 비행 정신을 죽일까?
4장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1, 2, 3장에 이야기를 다 했다. 4장은 필요하지 않아. 거의 휑한 하늘, 기쁨을 짓누르는 무미건조한 말들일 뿐. 인쇄될 필요없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부분의 원고를 태워버리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나는 믿지 않았지만 원고 자신은 믿었던 마지막 대목을 치워버렸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거부하는지 알았다. 지배자들과 의식의 힘이 천천히, 천천히 우리가 선택한 삶의 자유를 죽일 터였다.
그 원고를 잊어버린 채 시간이 흘러 반세기가 지났다.
얼마 전 사브리나가 원고를 찾아냈다.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원고는 쓸모없는 서류들 밑에 박혀 있었다.
“이거 기억나요?”
“기억나다니, 뭐가? 아니.”
몇 단락 읽어보았다.
“그래. 기억나, 일부는. 이건…….”
“다 읽어봐요.”
그녀는 찾아낸 골동품이 된 원고에 감동받아 웃음 지었다.
타자한 활자들이 희미했다. 하지만 언어는 그 시절 내 언어의 메아리였고, 지금의 내가 파악되었다. 그것은 내가 쓴 글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그때의 젊은이가 쓴 글이었다.
원고는 끝났고, 그의 경고와 소망이 나를 채웠다.
그가 말했다.
“난 뭘 하고 있는지 알았지! 권위와 의식이 넘쳐나는 당신의 21세기, 이제 꽁꽁 묶여서 자유를 목 조르지. 모르겠어? 그것은 당신의 세계를 자유로운 것이 아닌 안전하게 만들 속셈이거든.”
그는 그의 이야기를, 마지막 가능성을 살려냈다.
“내 시대는 끝났어. 당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다시 그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마지막 장을. 우리 갈매기들은 세상에서 자유의 끝을 바라보고 있을까?
마침내 본래 자리에 인쇄된 4장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무도 미래를 모를 때 쓰였다. 이제 우리는 미래를 안다.

2013년 봄 리처드 바크

5. 작품 해설

그냥 보면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소설 전반에 철학적 색채가 깊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동양철학을 서양식으로 가미한 뉴에이지 철학이 바탕이 되었다. 다만 철학적 깊이가 아주 깊은 것은 아니고 서구인이 인도, 티벳, 중국, 일본 같은 분위기를 짬뽕해 작품을 만들면 그 쪽에서는 신비할 지 몰라도 여기는 그런 면에서 어필하지는 못하고, 마치 스타워즈의 "포스"와 제다이마냥,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이기에 어필하는 경우가 있다.

먼저 초반부에 모든 갈매기들이 먹고사는 일에만 집착한 데 반하여 비행을 추구하는 조나단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깊은 사색거리를 안겨주며, 나중에 조나단이 끊임없이 비행에 몰두하여 초월자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곳에 도달하는 것은 불교해탈과 겹치는 면이 있다.[12] 또 더 높은 경지로 가는 길의 입구에서 되돌아와 우매한 갈매기들을 가르치는 것 또한 도를 행하는 보살의 모습이다. 이어 조나단이 7명의 제자들을 거느리는 것이나 작중에서 계속적으로 '하느님 갈매기의 아들'로 지칭되는 점 등은 명실상부히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갈매기의 삶을 인용해서 지루하지 않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장한 수작으로 꼽을만 하다. 굳이 종교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작중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좀 더 생각해 보면 주제를 알 수 있다. 특히 원로 갈매기 치앙과 조나단의 대화, 그리고 작품 마지막에 나오는 조나단과 플레처의 대화에 집중하면 좋다.[13] 오히려 이러한 접근방식이 훨씬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쉽다.

덧붙여 갈매기의 꿈에 관한 지식전문기자의 칼럼에서 일종의 무협지처럼 읽힐 수 있다고 올라왔다.#[14]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종교적 혹은 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판타지나 무협지로 간주하면 혹여라도 숭고한 갈매기의 꿈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진정한 메시지를 놓칠 우려가 있다.#

6. 기타

논리야 놀자에서는 "다른 갈매기들은 먹지 않고도 비행할 수 없으니 조나단처럼 꿈만 쫓을 수는 없다."는 식의 비평을 했다. 물론 현실의 갈매기는 당연히 먹지 않고 날 수는 없지만, 본문에서 노력 끝에 비행술을 터득한 조나단은 자기 나름대로 먹이를 획득하는 방법들을 얻어냈다.[15]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을 현실을 비유한 우화로 해석한다면 위와 같은 비평을 무시하기 어렵다. 작품 속에서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나단(해석에 따라 조너선을 조나단이라고도 한다. 오히려 조나단 쪽이 더 많은 듯)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면서 동시에 생활(또는 생존) 문제까지 해결하도록 만들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이루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작품 속에서 덕업일치한 주인공을 만들어내기는 쉽지만, 실제로 덕업일치하기란 참 어려운 법인데, 덕질할까 취직할까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그런 작품으로 비유한다면, 그 비유가 적절하겠느냐… 정도면 이해하기 편할 듯. 위 비평의 취지부터가 작품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비판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자는 것이므로 그 정도로 이해하자.

90년대 초등학교(혹은 국민학교)에서는 환경도서와 함께 이 책이 권장도서 혹은 방학숙제 독후감용 도서로 유난히 선정이 많이 되었다. 포털 사이트에 이 책의 제목을 검색할 경우에 나오는 연관검색어(독후감, 느낀 점)로 보아 이후에도 여전하다. 권장도서로 선정한 이유나 초등학생들이 이를 읽고 쓴 독후감 내용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자' 이런 식이다. 근데 얘길 해 보면 이걸 독후감용으로 내 놓는 선생들도 사실 정확한 메시지가 뭔지, 배경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냥 좋다고 하니까 천편일률적으로 푸시하는 거지 뭘…

여담인데 미국 개신교 보수적인 목사들은 이 소설을 사탄의 소설이라고 엄청나게 비난했다.한국도 마찬가지라서 레이디 가가 내한 공연 반대운동에 나서던 개신교 단체 <낮은 울타리>를 이끄는 목사 신상언은 뉴에이지 소설이라고 이 작품을 비난하며 이 작품을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한 것을 취소해야한다고 교과부에 항의했으나 교과부는 듣는 척도 안했던 바 있다. 참고로 신상언은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불쏘시개를 쓴 작자.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갈매기인 조너선이 하계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날고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구도는 예수의 공생활을 강하게 연상시키는데, 정작 조너선은 작중에서 자신을 위대한 갈매기, 혹은 위대한 갈매기의 외아들이라고 칭송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소설 후반부 조너선의 행보가 기독교적인 구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전반에 깨달음과 실천과 수행은 온전히 자력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선불교적인 이상을 도입함으로써 기독교 신학과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되는 셈이다.

왜 이게 문제인지 궁금하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일이 쉽다.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보기에 이 소설은, 예수와 그의 삶을 갈매기 버전으로 치환한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계속 나아간다면, 이 소설은 예수가 본인 입으로 "난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고 너희도 열심히 하면 나같이 될 수 있는 거야."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이단적인 내용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기독교에 대한 안티테제라기보다 오히려 개별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보편 진리(생각으로 자신을 제약하지 않는 것, 자유롭고 즐겁게 노력하고 사랑할 것 등)에 대한 다소 이상주의적인 탐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교와 기독교적 요소가 함께 골고루 배어 있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그러나 공격적인 개신교 인사들이 바라보기에 이러한 통합적인 사고는 사탄의 공작이다.[16]

또 위와 같은 기독교 목사들의 비판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비판받은 사례도 있다. 이 경우 비판의 초점은 이 소설에서 꿈을 찾는 갈매기들(조나단, 조나단의 선배들, 조나단의 제자들)이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즉, 선각자로써 꿈과 이상의 추구자인 갈매기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갈매기들의 지혜로움과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갈매기들의 어리석음을 지나치게 차별화 함으로써 꿈과 이상이나 깨달음이 현실적 욕구나 대중의 이해와는 완전히 분리된 소수의 선각자나 탐구자들만의 전유물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인공인 조나단이 자신이 특별한 갈매기가 아니고, 자신의 깨달음 역시 누구나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나 팬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대중을 꿈이나 이상을 바라는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증오하는 집단으로 묘사하고 그 대중들의 욕망을 깨달음과 상반되는 비루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 그럼으로써 대중과 완전히 유리된 지혜로운 이들만의 공동체 내에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시 대중에게 돌아가 탄압과 적개심에 맞서며 그 깨달음을 전해야 한다고 보는 부분에서는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정당성이 결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뭐, 이 비판을 심화시킨 견해 중에는 이 작품이 민중을 경멸하고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회를 정당화한다는 것도 있긴 한데… 이건 좀 작품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납득하기 어렵기는 하다.

그리고,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는 데 참고가 될 점으로, 이 소설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70년대 초반 미국 서해안의 히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부분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68혁명의 퇴조로 히피문화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고, 이 히피들이 해당 작품의 첫 독자였던 것이다. 당시 히피문화는 명백하게 반체제/반권위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통상적인 반체제/반권위주의적 세력을 대표하는 좌파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히피 특유의 신비주의가 정신적 엘리트주의로 발전한 면도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17]

더불어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가 있다! 그런데 이건 결국 어설픈 다큐멘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7. 등장인물

조나단 리빙스턴(Jonathan Livingston)
소설의 주인공. 먹이만 찾는 갈매기들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멋진 비행을 하다 무리로부터 추방당한다. 허나 더 훌륭한 비행 기술을 갈고 닦아, 치앙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비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사랑의 실천을 깨달아 다시 무리로 돌아와 갈매기들을 가르친다. 이후 플레처에게 다른 갈매기들의 교육을 맡기고 사라진다. 사실 조나단은 거의 신적인 존재에 가까우며 워프를 하거나 죽은 갈매기를 살리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18]
영화판 성우는 배우인 제임스 프랜시스커스(1934~1991). KBS판 성우는 오세홍.

설리번(Sullivan)[19]
조나단이 다른 갈매기들과 함께 도착한 위대한 갈매기들의 세계의 교사. 그에게 그 세계에 대해 설명해주고, 다른 비행법을 가르쳐준다. 조너선과 "사랑"에 대해 약간 언쟁을 빚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뜻을 인정해준다.[20]

치앙(Chiang)
조나단이 도착한 위대한 갈매기들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갈매기. 조나단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비행에 대해 가르쳐주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을 전해준 뒤 사라진다. 영화판의 성우는 안필립이다. KBS판 성우는 설영범.

플레처 린드(Fletcher Lynd)
조나단의 첫 번째 제자. 약간 성질이 급하지만 나는 걸 매우 좋아한다. 다른 갈매기들을 가르치다가 사고로 인해 바위에 부딪혀 죽을 뻔 했으나, 조나단과의 대화 후 깨어난다. 그 때문에 그들을 시기하던 갈매기들에게 죽을 뻔 했으나, 갑작스럽지만 시공을 뛰어넘는 비행법을 깨달아 죽지 않는다. 이후 조나단을 대신하여 갈매기들을 가르치게 된다. 영화판 성우는 배우인 데이비드 래드. KBS판 성우는 윤병화.

아버지
조나단의 아버지지만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족 장로들과 같이 아들을 무리에서 추방하게 만들었다. 원작에선 비중은 그리 없지만 영화 상에선 꽤나 비중이 높아졌고 영화 상에서 아버지 테마 노래까지 있다. 닐 다이아몬드가 부른 <아버지에게(Dear Father)>. 성우는 리처드 크레나, KBS판은 설영범.

갈매기 무리
위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속해 있는/있었던 단체. 인간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다. 특히 우두머리 갈매기가 "넌 우리 규칙에 어긋나게 행동했으니 너 추방"이라고 선언하는 대목은 왕따 선언과 비슷한 면이 있다.[21] 중후반부에서 조나단 무리(예술가들?)를 보고 존중(내지 숭배)하거나 시기하는 점도 비슷하다.

8. 패러디: 수탉 조나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수탉 조나단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9. 영화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갈매기의 꿈(영화)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0. 환상(Illusion)

작가의 다른 소설인 환상(1977년작)은 갈매기의 꿈과 동일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정신적인 속편이라 봐도 될 정도다.
다만 이 작품에서 조나단에 해당하는 도널드 시모다는 인간이며, 플레처에 해당하는 리처드는 작가 자신이다.
두 사람 다 갈매기가 아니라 비행기(복엽기) 파일럿이며, 미국 시골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손님에게 공중 유람을 시켜주고 돈을 받는 떠돌이들이다.
여러 갈매기들에게 비행을 가르치는 조너던과 달리, 도널드는 자신이 계속 메시아로 활동할 경우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에 도중에 그만두고 비행기 조종사로 한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전생에서 친구였던 리처드를 만난 후(리처드는 그 사실을 모른다) 리처드와 함께 여행하며 서서히 그의 능력을 개화시킨다.
조너던과 마찬가지로 도널드 역시 비범한 능력 때문에 메시아로 숭배받거나 악마로 몰리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것은 이들의 능력은 모든 갈매기/인간이 타고 난 본연의 능력이며 신성이나 악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갈매기/인간이 스스로에게 한계를 부여하는 것을 그만두고 진정으로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
즉 조너던/도널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 갈매기/인간에게 깨달음을 줌으로써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석가모니 타입의 스승이다.
[1] 본인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행기광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비행사이며 이 책의 세계적인 대박으로 상당한 부자가 되어 수십대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다.[2] 4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3] 불교의 윤회 사상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4] 단번에 지구를 떠나 초록빛 하늘과 태양 역할을 하는 두 개의 쌍동이 별이 있는 어느 유성에 도달하는 경지가 된다.[5] 이는 이 세계에 사랑과 구원을 주기 위해 내려온 예수 또는 미륵불의 이미지와 일치한다.[6] 이 장면은 단순히 날개가 부러진 갈매기가 날 수 있게 된 우연 같은 일이 아니라 조나단이 직접 기적을 행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예수의 기적의 갈매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리처드 바크의 작품에서 '자유'의 의미를 깨달은 조나단 같은 존재는 실제로 메시아와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으며, 작가의 작품 중 하나인 '환상'에서 조나단과 유사한 존재로 묘사되는 도날드 시모다 역시 휠체어 탄 남자를 말 한마디로 일으켜 세웠다.[7] 노골적으로 예수와 조나단의 유사성을 환기시키는 대목인데, 조나단은 이 질문을 단박에 부정한다. 작품의 세계관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는 특별한 혈통을 가진 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예수 역시 신의 아들 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깨달은 평범한 존재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8] 200마일 넘는 속도로 바위에 부딪힌다. 고깃덩이가 되지 않은 게 다행.[9] 이때 조나단이 농담처럼 바위를 통과하는 연습은 아직 이르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그의 다른 작품 '환상'에서 재림 메시아 취급 받는 도널드 시모다가 직접 행한 기적 중 하나다.[10] 조나단에게 들은 첫 가르침인 '수평 비행'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보니, 그때 조나단이 자신을 보며 느꼈을 마음, 즉 비행을 좋아하는 어린 갈매기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깨달은 것. 또한 이 순간 플레처는 비로소 조나단이 특별한 갈매기가 아니라 끊임 없이 노력하고 비행을 사랑했을 뿐인 갈매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덕분에 플레처는 조나단을 우러러 보던 입장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조나단을 이해하게 되며, 조나단과 무한한 가능성을 겨루는 긴 경주를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11] '존=조나단'이라면 빛이 되어 사라진 치앙, 조나단, 플레처 모두 죽은 게 아니라 정말로 우화등선했다는 얘기가 되는데…[12] 본문에 어떤 갈매기가 이 초월자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땅에 오려면 몇 천, 몇 만 번의 삶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윤회설이다.[13] 두 대화에서 강조되는 부분은 넌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믿어라, 그리고 행동하라.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나눠주어라이다.[14] 이 외에도, 주류는 아니지만, 갈매기의 꿈의 줄거리와 구성이 무협소설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현실의 부조리에 동의하지 않은 괴짜가 열심히 수련을 하고, 그 과정에서 스승을 만나 제자로 들어가고, 스승의 도움을 받으며 수련을 거듭한 결과 득도하여 극의의 경지에 든다는 것은, 굳이 무협이 아니더라도 장르를 초월하여 창작물 전반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다. 즉, 비슷한 전개법이 사용되었을 뿐, 작가가 의도적으로 무협지처럼 쓴 게 아니다.[15] 그는 하루하루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유선형으로 몸을 가다듬고 쏜살같이 날아 내려가면 수면에서 삼 미터 깊이에 떼지어 살고 있는 맛있고 진귀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이제 고깃배와 상한 빵 부스러기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밤에 바다로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질러 항로를 정하고, 해가 진 뒤부터 아침해가 뜰 때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날면서 허공에서 잠자는 법을 그는 익혔다. 그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짙은 바다 안개를 헤치며 날았으며, 안개를 뚫고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기도 했다. 모든 다른 갈매기들이 안개와 비에 휩싸여 아무 일도 못하고 땅 위에 서 있을 바로 그 시각에도 그는 공중 높이 불어가는 바람결을 타고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법을 배웠고, 거기서 맛있는 곤충들을 잡아먹는 것도 배웠다. - 본문 중 일부[16] 굳이 공격적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개신교계에서는 여러 종교의 공통점을 이야기하기보다 '다른 건 다른 거다'라고 구분을 뚜렷이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C. S. 루이스 역시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권에 나오는 타쉴란의 우화를 통해 여러 종교를 동일시하려는 태도를 정면으로 공격한 바 있다.[17] 다만 작가인 리처드 바흐는 히피 세대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고 그 웃세대인 비트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 드러나는 동양 철학적인 모습은, 비트 세대가 이미 먼저 추구한 것이기도 하다. 잭 케루악이 대표적.[18] 워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종의 득도에 가까운 표현이고(다만 "다른 갈매기들은 그것을 보았다"처럼 묘한 서술이 있다), 죽은 갈매기를 살려내는 건 플레처가 바위에 들이박고 나서 혼수상태에 있자 말을 걸어서 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날개가 부러진 새를 날게 해주는 걸 보면……[19]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과 이름이 같다. 리처드 바크가 설리번 선생의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20] 설리번은 "어차피 맨날 권력투쟁하고 먹고 살기에 바쁜 애들인데 네가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냐?"라며 조나단의 의견(내가 배운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깨우쳐줘야 한다)에 반대했다. 이 점은 배운 자들의 오만함(=엘리트주의?)과 비슷한 면이 있다.[21] 물론 인간사회에서 추방되는 경우는 오해말고도 정말 악의적인 짓을 했기 때문에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으니 해석에 주의하자. 작중의 그것은 "예술탄압 및 몰지각"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