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6-12-10 20:03:10

병인양요/전개

1. 한강 탐색2. 강화도 공격3. 결말

1. 한강 탐색

로즈장미 제독은1839년의 기해박해[1]를 항의하기 위해 출병했던 함대가 좌초당했던 전력을 참고하여 조선으로 진입하는 안전한 해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기함 프리모게 함, 포함 타르디프 함, 통보함 데루레드 함 등 3척이 9월 18일에 즈푸 항구를 출발하여 한강 수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데루레드 함이 21일에 한강으로 진입하는 수로를 발견했고 프랑스 해군 함대는 영종 첨사의 항의를 모두 무시한 체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진공했다. 이에 조선이 발칵 뒤집혔다. 김포 군수 정기화가 허겁지겁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하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2] 신부가 조선을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식량 구입 의사를 전했고 이에 정기화는 돼지, 을 전달했다. 이 와중에 프리모게 함이 또 좌초되면서 청나라로 회항했고 남은 두 배 타르디프 함과 데루레드 함은 여유롭게 북상했다. 이들은 행주를 지나 양천에 이르렀고 양천 현령 윤수연도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했다. 프랑스 함대는 김포에서와 같은 대답을 전달한 다음에 소, 닭, 달걀, 청태, 백채를 구입했으며 부평에서도 조선이 전달한 생필품들을 전달받았다.

리델 신부가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기만 하면 전국의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허풍을 떤 탓에 프랑스 함대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강 양안에는 수많은 구경꾼만 나타나서 함대를 구경했을 뿐 아무런 일도 없어 프랑스인들은 당황했다. 한편 회항한 프리모게 함은 영종첨사 심영규가 파견한 병방 이우식에게 프랑스 무기들을 구경시켜주었지만, 이우식이 질의한 프랑스 함대의 목적과 남은 함정들의 행선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한양을 향해 계속 전진했고 조선측이 제공한 신선한 식료품과 질좋은 생사, 호의적인 구경꾼들로 인해서 조선에 대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틀림없었다고 장담했지만 조선의 호의적인 태도에 놀라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프랑스 함대가 한양에 도착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조선은 9월 26일 프랑스 함대를 구경하는 것을 금지하고 염창항에 군선들을 파견해 한강을 봉쇄했다. 이에 프랑스 함대가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즈 제독은 조선측에 90분내에 조선 수군 군선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군선들을 전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조선은 이를 묵살했고 결과 첫번째 교전이 벌어졌다. 양 함대의 포격전은 당연하지만 조선의 참패로 끝났고 조선 함대는 한강 양안으로 퇴각했다. 한강변에 따라 조선군대가 집결해 대규모 포격, 총격을 퍼부었지만 무기의 성능이 형편없던 관계로 프랑스 함대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프랑스 해군의 공격에 와해되었다.

교전에서 승리한 프랑스 함대는 서강에 이르렀다. 도성까지 10여리를 앞둔 지점이었다. 하지만 타르디프 함이 좌초되면서 프랑스 함대의 전진은 중지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9월 27일 한강 하류로 퇴각했다. 조선은 이용희 지휘 하의 병력 1천명을 급파한 상태였으나 프랑스 함대의 철수로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면서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 호가 행패를 부리다 불타버렸단 소식과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군함 1척을 남겨 조선의 박해를 저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로즈 제독은 이를 거부했다. 9월 30일 프랑스 함대는 정박지인 작약도를 떠났고 10월 3일에 즈푸 항에 돌아왔다.

한편 조선은 프랑스 함대의 진입을 수수방관한 지방관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들끓다가 프랑스 함대가 한양의 코앞까지 왔단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백성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혼비백산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즉시 포도청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강화했고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수한 것이 확인된 이후 고종은 3만냥의 내탕금을 하사하며 전국의 수군 전력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고 이 자금으로 노후화된 전선들을 수리했다.

2. 강화도 공격

로즈 제독은 한강 봉쇄령(The Blockade of the Salee River)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먼저 조선으로 떠나기 전인 10월 10일에는 주청 영국 해군 사령관 킹 제독이 직접 참관하여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쿵둥다오(崆峒岛) 일대에서 해상기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다음날인 10월 11일[3] 프랑스 해군은 차푸항에서 군함 7척(전함 게리에르(Guerriere), 순양함 프리모게(primauguet)와 라플라스, 포함 타르디프(Tardif), 르 브레통(Le brethon), 통보함 캉샹(Ken-Chan), 데룰레드(Deroulede)), 해군 육전대 800여명, 장교 약간과 부사관수병 725명의 병력이 참전한 총 1,525명[4]의 군세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9월 6일 프랑스 군함들이 팔미도에 나타났단 보고가 떨어졌고 9월 8일 강화성이 프랑스 해군의 함포 사격에 유린당한다. 강화 유수 이인가와 선봉중군 이용희는 맥없이 강화도를 내주고 달아났고 이에 조정은 그 둘을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흥선대원군이 의정부에 글을 보내 독려하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고 이용희를 선봉장으로 보내 응전하게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9월 11일에 이경하와 로즈 제독은 매우 살벌한 내용의 편지를 교환한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 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順)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입고 우리말을 배워가지고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常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5]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듣건대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있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 나라 선왕(宣王)를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병인년(1866) 9월 11일【술시(戌時)】 조선국 순무영(巡撫營)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전권 대신(全權大臣)은 각초(各哨)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절히 효유(曉諭)한 일을 당신들 순무사(巡撫使)는 다 잘 알라. 나는 본 조정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해에 이 나라에서 무고(無辜)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교사(傳敎士)로 추중(推重)되던 사람이다. 너희는 어질지 못하게 불의(不義)로 그를 죽였으니 공벌(攻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전교사는 매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털끝만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그를 죽였으니 천리를 어긴 것이다. 그러니 죄악은 세상 법에서 온전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지난 몇 해 전에 일어난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들이 불인(不仁)을 행하고 이런 흉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가 우리 대국에서 토벌하니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프랑스 전권 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하였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 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
1. 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 때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마라.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이에 흥선 대원군도 의정부에 군사들을 독려하는 격문을 내린다.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다. 양이(洋夷)들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것은 본래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백 년간 이 적들은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중국이 화친을 허락한 다음부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곱절이나 더해져서 도처에서 포악한 행동을 감행하여 모두 그들의 해를 입게 되었다.

오직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감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옛 성인이 하늘에서 음덕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예의(禮義)이고 우리가 의지할 바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굳게 뭉치는 것이다.

지금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만약 의심하거나 겁을 먹는다면 모든 일은 와해(瓦解)되고 국사(國事)는 그르치게 된다. 나에게 마음속으로 굳게 정한 3가지 일이 있으니, 이 굳은 맹세를 알고 나의 뒤를 따르라.

첫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둘째, 그들의 해악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 적들이 도성에 쳐들어왔다고 해서 만약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가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3. 결말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2척의 함정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150명의 병사로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의 빠른 사격에 조선군은 3명의 전사[6]와 2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에 놀란 조선 군대는 을 버리고 달아났고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을 불살라버렸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60명의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했지만[7] 본인들 스스로도 그들이 자신들이 총을 쏘자 그냥 엄폐한 것인지 부상당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가늠 못하는 처지였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분노한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음독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와 요새, 관청, 창고를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60명의 장병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에 점거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는데 매복하고 있던 양헌수가 기습을 가해 수병 6명을 죽였다고 보고했다[8].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40명 가량의 전사자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계속된 승리에 방심한 프랑스 해군은 당나귀음식을 잔뜩 싣고 거의 나들이를 가듯이[9] 정족산성에 진입했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패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한 로즈 제독의 원정군은 10월 9일부터 축차적으로 퇴각했고, 10월 13일에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한다.

이 때 프랑스 해군의 사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대국 프랑스의 군대가 아시아 깡촌의 소국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격분해서 로즈 제독에게 복수전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제독은 퇴각을 고집했고 이후 프랑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며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다. 특히 복수하려했던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식민지에서 여러 차례 쌓은 실전 경험으로 정예 부대로 꼽히는 편이었기에 프랑스 해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싸우려했었다. 다행히 프랑스군이 별 관심을 두지않아서 실행하지는 않았다. 말단 수병들이나 하급 장교들이나 그랬다는 거지 로즈 제독은 전쟁 이후 잘만 승진했다.

최종 피해
프랑스군 사망3명 부상35명
조선군 사망5명 실종7명 부상2명 + 문화재 약탈



[1] 이때 프랑스인 사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순교했다. 이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항목 참조.[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3] 이 문서는 기본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라 서술했기 때문에 음력이 기본이나 10월 10일 운운은 프랑스의 기록이라 양력이다. 음력으로는 9월 3일에 해당한다.[4]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확실치 않으나 보통 1,500여 명이라고 하므로 여기에 기재한다.[5] 헌종 시절에 신유박해에 항의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프랑스 함대가 홍주 외연도에 고립되었던 사건을 의미한다.[6] 최장근(崔長根)ㆍ김달성(金達城)ㆍ오준성(吳俊成)[7] 프랑스 측 기록엔 이 전투에서 사망자가 3명 발생했다고 쓰여있다. 한 가지 웃기는 점은, 여기서 조선군이 쓴 전술은 뒤에 있는 정족산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성벽 뒤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 일제히 사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똑같은 전술에 2번이나 당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군은 조선군을 만만히 봤던 거다...[8] 그러나,이것은 프랑스외 여러 서양 열강들의 기록인 프랑스측 부상자만 35명에 맞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9] 그 때문에 야포를 갖고 가지 않았다.(...) http://mahan.wonkwang.ac.kr/culture/2013/2/2+4/1-7.htm 이 링크로 가서 정족산성 전투도를 보면 알겠지만, 공격측이 성문을 공격하기 몹시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야사에 따르면 프랑스 해군이 버리고 간 와인과 음식은 조선군이 챙겨서 먹었다고 한다. 전리품이 고급 프랑스 와인?! 땡잡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