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H. 홈스 H. H. Holmes | |
본명 | 허먼 웹스터 머짓 Herman Webster Mudgett |
이명 | 헨리 하워드 홈스 Henry Howard Holmes |
출생 | 1861년 5월 16일 |
미국 뉴햄프셔주 길먼튼 | |
사망 | 1896년 5월 7일 (향년 34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
학력 | 버몬트 대학교 (1879~80) 미시간 대학교 (1882~84) |
배우자 | 클래러 러버링 (1878년 ~ 1896년) 머터 벨냅 (1886년 ~ 1896년) 미니 윌리엄스 (1893년 ~ 1896년) 조지애너 요크 (1894년 ~ 1896년) |
[clearfix]
1. 개요
미국 최초의 연쇄살인범으로 알려진 인물. 다만 기이한 연쇄살인범의 면모는 황색 언론이 홈스를 부풀리고 조작하여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인간말종이다.자세한 사항은 후술.
2. 생애
2.1. 유년기
성명은 허먼 웹스터 머짓이다.허먼의 출생은 1861년 뉴햄프셔 호수 지방의 길먼튼[1]이라는 마을에서, 농가 부부의 셋째로 태어났다. 부부는 매우 독실한 감리교도였고, 특히 잠언 13장 24절의 '매를 들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란 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훈육한다는 명목으로 자식을 학대했다.허먼은 폐쇄적인 성격으로 자랐고,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을 기피하고 혼자 지내기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내내 친구라고는 그보다 연상인 탐이라는 아이 1명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이 아이는 버려진 집에서 놀던 중 2층에서 발을 잘못 디뎌 추락사했다. 어린 허먼은 그 장면을 목격했다.
다른 아이들은 이러한 허먼의 놀리기 쉬운 폐쇄적이고 특이한 성격 때문에 종종 괴롭히곤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에겐 트라우마인 동시에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나이 많은 상급생들이 마을 의사가 왕진을 나가 사무실을 비운 사이 허먼을 불러냈다. 그리곤 허먼을 발로 차며 강제로 끌고 들어가선 사무실 구석에 자빠뜨린 뒤, 사무실에 있는 인체 해골을 그에게 밀어 넘어뜨렸다. 온 몸 위에 부서진 해골을 뒤집어쓴 허먼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소년들은 허먼을 내버려두고 달아났다. 역설적이게도 이 일을 계기로 허먼은 해부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처음엔 개구리나 도마뱀이었지만, 나중엔 토끼, 고양이, 개까지 그 대상이 됐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바로 '머짓 부부의 셋째로 태어났다'는 기록 이외의 모든 이야기는 교차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뢰성을 높여줄만 한 동시대 기록이나 주변인들의 증언은 하나도 없다. 특히나 아동 학대나 해부학에 관심을 가진 계기 등은 1990년대 이후의 사료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2.2. 성인기, 연쇄 살인의 시대
1878년 허먼 웹스터는 클래러 러버링과 결혼하여 2년 후 아들 로버트를 얻는다. 그러나 허먼의 폭력성 때문에 부부 사이는 나빴던 듯하다. 허먼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 클래러는 아들을 데리고 뉴햄프셔로 돌아갔다. 이후 부부는 연락을 끊었고 사실상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별거했다. 나중에 허먼은 재혼을 하기 위해 클래러에게 이혼 소송을 걸었지만 이혼 청구 사유가 터무니 없다는 이유로 소송 자체가 기각되었다. 그는 클래러와 정식 이혼을 못 한 상태로 머터 벨냅, 미니 윌리엄스, 조지애너 요크라는 세 여성과 각각 중혼을 했고 머터와의 사이에선 딸 루시를 두었다. 실질적으로 허먼이 같이 살았던 가족은 머터와 루시였다.허먼은 버몬트 대학에서 1년 간 수학한 뒤 미시간 대학교 의학과에 편입학하여 해부학 연구실 강사 밑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해부학과 묘지에서 시체 훔치는 법을 배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부용 시체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랐기 때문에, 시체팔이 장사꾼들이나 의사, 의대생들이 신선한(?) 무연고자 시체를 몰래 묘지에서 꺼내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허먼은 묘지에서 훔친 시체를 연구용으로도 쓰고 생명 보험금을 타먹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하다가 1884년에 정식으로 의사면허를 얻었다.
1886년 6월, 허먼은 시카고로 이사했다. 허먼 웹스터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명인 헨리 하워드 홈스[2]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그는 잉글우드 교외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약국에 취직한다. 약국은 엘리자베스 홀튼이라는 젊은 여성 약제사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홈스는 수 년간 약국에서 일한 뒤 돈을 모아 매장을 인수했다.[3]
1887년의 시카고 도시 인명록엔 잉글우드에 위치한 약국의 주인이 'H.H. 홈스 박사'라 기록되어 있다. 이 해에 홈스는 약국 건너편의 공터를 구입하여 3층짜리 상가-주거 복합 건물을 짓기 시작한다. 지하실이 하나 있고, 1층은 상가이고 2, 3층은 호텔인 구조였다.
1895년 타블로이드 언론은 홈스의 건물을 '살인의 성(Murder Castle)'이라고 표현하며 가상 평면도까지 신문에 실었다. 현대에 와서 묘사되는 홈스의 살인의 성의 이미지란 대체로 이렇다.
그의 '성'은 겉보기엔 평범한 상가 또는 호텔에 불과했지만, 내부엔 100개가 넘는 비밀 방들이 비밀 통로와 가짜 벽들로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환기구에 각종 함정들도 감춰져 있었다. 벽은 방음을 하기 위해 석면으로 채웠고, 문엔 구멍을 뚫어놓아 홈스가 비밀리에 방 안을 엿볼 수 있게 해놓았다. 방에는 독가스를 흘려보내기 위해 설치한 가스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으며, 건물의 2층과 3층엔 지하실로 이어지는 낙하장치가, 지하실엔 홈스의 연구실이 존재했다. 이 연구실에는 해부용 탁자와 각종 수술 도구들, 그리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아궁이가 있었다.
1893년에 시카고 엑스포가 열리자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도시 내 숙박시설이 모자랐고, 홈스는 이 때 상가 건물을 숙소(호텔)로 관광객들에게 제공했다. 덕분에 많은 관광객들이 그의 집에 묵었지만, 문제는 보험사기도 슬슬 의심을 받을 시점이 됐고, 약국 매상도 무한정 오르진 않는데, 욕심은 끝이 없던 홈스가 새로운 돈벌이 거리를 찾아냈다. 바로 관광객들을 죽여 시체를 의과대학 및 병원에 팔아치우는 것이었다. 물론 다 죽이면 쉽게 발각되니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간 자들도 많았으나, 홈스가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그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 기간 시카고의 의과대학에선 정기적으로 많은 시체와 해골을 공급받는 대가로 홈스에게 많은 돈을 지급했다. 대학은 괜찮은 표본을 얻기 무척 어려웠기에, 공급자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 살인의 성이란 19세기의 기사를 보고 20세기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창작물이다. 저 위에 묘사된 살인의 성 이야기 상당수는 20세기 문헌에만 등장한다. 1890년대 타블로이드 신문에 실린 기사에 다시 살을 붙여 만든 것이 100개의 방이 있는 살인 호텔 이야기이며, '홈스의 살인 호텔 구조'를 묘사한 그림들은 죄다 후대인들이 그린 상상도에 불과하다.
H. H. 홈스는 의사이지 미궁을 설계할 능력을 갖춘 건축가가 아니었다. 저 따위 복잡한 건물을 지을 돈도 없었다. 실제 홈스의 상가-주거 복합 건물은 평범한 크기의 건물이어서 100개의 비밀스러운 방을 수용할 공간 자체가 없었다. 3층은 인테리어 마감이 안 되어 텅텅 빈데다, 건물 안에 숨겨진 몇 안 되는 방은 홈스가 구매하고 돈 떼어먹은 가구를 숨기는 용도로만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잘 사는 동네의 번화가에 위치했기에 애초 규모가 커봤자 한계가 있었고 변칙적인 건축을 하기도 어려웠다. 홈스 체포 후에 해당 건물이 수십 년간 우체국으로 사용된 것만 보아도 이 건물이 미궁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19세기 시카고 경찰이 무능했다고는 해도, 시민들이 한 지역에서 수십 명씩 실종되는데 아무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눈 뜬 장님은 아니었다. 홈스가 죽였다고 자백한/추정되는 희생자 중 실제로 시카고 엑스포가 열리던 해에 호텔을 찾았다가 실종된 사람은 단 한 명(존 데이비스)이며, 이 사람은 홈스가 죽였다고 백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다.
현실의 홈스는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일반인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쾌락 추구형 살인마가 아니라, 개인적 이득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면식범이었다. 살해 혹은 실종된 사람들 대다수는 일반 투숙객이 아니라 홈스의 직원, 애인, 동료였다. 이들이 전부 호텔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
홈스가 죽였다고 확실시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연인 혹은 아내였던 여성들이다. 홈스는 상가에 입주한 후 줄리아 스마이스라는 여성을 계산원으로 채용했었다. 줄리아는 원래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으나 홈스와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임신했고, 이를 적발한 줄리어의 남편 네드 커너는 분개해서 아내와 딸을 놔두고 시카고를 떠나버렸다. 줄리아는 딸 펄과 함께 호텔에 남아 홈스와의 관계를 이어갔는데, 이 모녀는 1891년 12월 돌연 실종되고 만다.
이후 1891~1895년에 홈스의 호텔에서 일했거나 채용 제의를 받은 에멀린 시그랜드, 에멀리 밴 태슬, 미니 윌리엄스, 키티 켈리, 해리 워커가 사라진다. 미니 윌리엄스는 속기사로 일하다가 홈스의 청혼을 받았다. 이후 여동생인 애니 윌리엄스를 불러들여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이 두 명 모두 실종되었다. 홈스의 직원은 아니었지만 그의 건물에 사무실을 두었던 러슬러 박사도 1892년에 실종되어 평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중 줄리어와 에멀린은 홈스의 아이를 불법적으로 낙태하던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고, 줄리아의 딸인 펄은 입막음을 위해, 나머지는 보험 사기나 재산 갈취 문제로 홈스에게 제거되었으리라 추정된다.
2.3. 체포와 사망, 그리고 만들어진 신화
홈스는 동료인 벤저민 파이츨을 살해했다. 그가 저지른 살인 법정에서 인정된 것은 이것이다.벤저민 파이츨은 전과가 있는 목수였는데, 홈스와 친분을 쌓은 후 그의 범죄 실행을 여러 번 도왔다고 한다. 법원은 벤저민이 위에서 말한 희생자들을 처리하고 은닉하는데 도움을 줬으리라 판단했다. 홈스는 1894년에 벤저민 파이츨이 폭발 사고로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사망 보험금을 타낼 계획을 짰다. 이 과정에서 벤저민은 당연히 홈스가 위장용 시체를 구해오겠거니 여기고 가명으로 생명 보험에 가입했지만, 홈스는 진짜로 벤저민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웠다.
이후 그는 사망 보험금을 타낸 다음, 남편이 숨어있는 곳을 안다며 벤저민의 아내를 꾀어내 그 부부의 다섯 자녀 중 세 아이들(하워드, 앨리스, 넬리)을 여행에 동행하도록 만들었다. 홈스는 이 아이들을 계속 북부로 돌리다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살해했다. 아버지의 실종을 의심하고 신고하기 전에 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세 아이가 사라졌다는 신고를 받은 필라델피아 경찰은 홈스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토론토의 한 임대 주택 지하실에서 썩어가는 앨리스와 넬리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어서 인디애나 폴리스에 위치한 홈스의 별장을 수색하여 하워드의 뼛조각과 치아를 굴뚝에서 찾아낸다. 후에 홈스의 증언에 따르면 엘리스와 넬리는 트렁크에 가둔 채 살인 가스를 퍼부어 죽었고, 하워드는 약물로 살해한 듯 하다. 이 중 살인 가스로 죽인 게 위의 '살인 호텔' 설정과 섞여서 홈스가 독가스를 흘려보내 투숙객을 죽였다는 소문이 된 것이다.
1894년 11월, 핑커톤 전미탐정사무소는 미국을 떠나려던 H.H 홈스를 보스턴에서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보스턴 당국은 일단 절도 혐의로 영장을 발부하여 그의 신병을 구속한 다음, 여죄를 밝혀내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살인의 성'이라 불리는 시카고 잉글우드의 호텔로 몰려가 막무가내 취재를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정작 호텔에선 별 거 안 나와서 이 시기에 나온 호텔 관련 찌라시들은 100% 소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홈스의 악명을 널리 알린 것은 이 잉글우드 호텔 뿐이다. 진짜로 시체가 발견된 토론토의 집은 별 주목도 못 받았고 어느 순간 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1895년, 홈스는 벤저민 파이츨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이 시기 그는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 토론토에서 저지른 27건의 살인과 6건의 살인 미수를 추가로 자백한다. 문제는 홈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형수에, 많은 사이코패스들이 그렇듯 관심종자였고, 당시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홈스가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대가로 돈을 줄 준비[4]가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가 자백한 여죄는 몽땅 거짓말이었다. 심지어 홈스가 죽였다고 주장한 27명 중 몇 명은 그 때 멀쩡히 살아있었고 몇몇은 확실히 병으로 죽었다.
기록을 토대로 보면 홈스가 확실히 살해한 사람은 파이츨 가족 4명이며, 증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홈스가 해쳤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5명이다. 더구나 이 모든 살인은 철저하게 이득을 목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시체 수집가가 아니라 그저 돈에 미쳐 4~9명의 사람들을 죽인 사이코패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홈스 본인의 거짓부렁과 황색 언론의 부풀리기 작전에 힘입어, H. H. 홈스는 '최소 수십명, 최대 130명을 죽인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로 변모했다. 19세기 영국에 잭 더 리퍼가 있다면 미국에는 H. H. 홈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대중의 반응은 열렬했다. 결국 그는 사망한지 120여년이 흐른 지금도 미국 연쇄 살인마의 대명사로 인용되고 있으니 어찌보면 관심 종자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
"나는 내 안의 악마와 함께 태어났다. 시인이 영감을 노래할 수밖에 없듯, 나는 살인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악마는 나의 후원자로서 침대 옆에 서있었고 내가 태어나자 세상으로 안내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와 함께 했다. (I was born with the devil in me. I could not help the fact that I was a murderer, no more than the poet can help the inspiration to sing—I was born with the "Evil One" standing as my sponsor beside the bed where I was ushered into the world, and he has been with me since.)"
<내 안의 악마(The devil in me)>가 등장하는 유명한 홈스의 선언. 문제는 이 문구는 홈스가 사람들 앞에서 직접 말한 게 아니라 신문에 기자가 홈스의 선언이랍시고 인용한 것이다.
저 문구에 가장 가까운 문장을 실은 신문은 1896년 4월 11일 <필라델피아 노스 아메리칸>지인데, 상술했듯 19세기 언론 보도의 정확성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나름대로 타블로이드가 아닌 <뉴욕 타임스> 같은 정통지들도 선동과 날조, 어그로를 기자의 덕목으로 강조했고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기삿거리를 지어내는 걸 가볍게 여기던 때였다. 탐사 보도의 준칙은 20세기 중반에나 정립된 것이며 그 이전까지의 언론은 연예 가십지처럼 철저히 흥미본위로 돌아갔다. 실상은 저 홈스의 선언 전체가 기자의 창작품인데, 이게 또 수십년간 와전되다 위의 문구로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홈스는 누군가 자신의 시체를 도굴하여 해부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사형 당하기 전에 관을 시멘트로 감싸서 10m 깊이의 땅 속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896년 5월 7일, 모이어멘싱 교도소(현 필라델피아 카운티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교수대에 결함이 있었는지 목이 제때 부러지지 않아 홈스는 15분 간 몸부림을 쳤고 20분이 지난 뒤에야 사망했다. 사형 직전 그의 태도는 침착했고 불안해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홈스가 잉글우드에 세운 건물은 1895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를 겪고 우체국으로 이용되다 1938년 철거되었다. 현재 그 자리엔 우체국이 다시 세워졌다. 호텔이 있던 부지는 우체국 옆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후 2017년에 시체가 발굴됐다. 홈스 대신 타인이 처형 당했고 홈스 본인은 살아남았다는 루머가 제기되자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인류학 연구팀이 확인 목적으로 관을 꺼낸 것이다. 시멘트 속에 묻혀서인지 옷과 콧수염이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고, 시체의 치아 형태가 홈스의 생전 기록과 일치하여 다른 이의 시체일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3. 대중매체에서
- 에릭 라슨의 논픽션 《화이트 시티》에선 H.H. 홈스의 삶과 시카고 박람회의 총감독 대니얼 H.번햄의 삶을 병치시켜가면서, 1893년 당시의 시카고를 잘 보여준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으로 영화화될 예정이다. 그리고 2015년 8월 홈스 역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맡는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제작에도 참여할 예정이라고 한다. 각본은 영화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에도 참여했던 빌리 레이라는 영화인이 맡는다. 영화 제목은 원작과 같은 《The Devil in the White City(화이트 시티)》. 관련 기사 하지만 실제 제작이 계속 연기되다가 2019년에 훌루에서 드라마화로 기획이 변경되었고 2022년 현재는 디카프리오는 제작으로 물러나고 홈스 역을 키아누 리브스와 협상 중인걸로 알려졌다.
- 《수퍼내추럴》 시즌 2에선 악령으로 등장, 죽어서도 제 버릇을 못 버리고 금발의 젊은 여자들을 골라 감금 및 살해하는 걸 반복하고 있었는데, 조까지 납치하는 등 만행을 계속하다 윈체스터 형제에게 꼬리를 밟히고, 결국 사투 끝에 리타이어한다. 여자들을 납치해 감금해뒀던 지하 감옥 천장 테두리에 미리 설치해둔 소금 주머니를 총으로 터뜨려 그대로 영원히 갇히게 만들었다.
- 골든 카무이의 등장 인물 이에나가 카노가 운영하는 호텔이 H. H. 홈스의 '성'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셜록》 시즌 4, 2화에서 H.H. 홈스의 모방범이 나온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살인범이라면서 셜록 홈즈에게 먼 친척이냐고 묻는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초창기에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방영된 적 있다.
- NBC 드라마 타임리스 11화에서 무대로 등장한다.
- 2018년 영국의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와 결혼한 메건 마클이 홈스의 먼 친척임이 밝혀졌다. 2018년 5월 영국 '채널 4'의 다큐멘터리 <Meet the Markles>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홈스의 증증손자(great-great-grandson)는 메건과 팔촌 관계라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생면부지의 남이다. 유교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사촌까지만 보고 그 이상은 그냥 남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으니.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5의 모티브라고도 한다.
- KBS joy의 차트를 달리는 남자라는 프로그램에서 "사이코패스인가? 소시오패스인가? 최악의 범죄자들(214회, 2020년 12월 12일 방송분)"이라는 주제로 1위에 선정되었다.
- 웹소설 괴담 동아리에서 이를 소재로 한 괴담이 등장한다.
-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American Ripper"에서는 H. H. 홈스의 증손자와 한 CIA 요원이 잭 더 리퍼와 H. H. 홈스의 연관성을 찾아나선다. 총 8화. 끔찍한 장면이 많이 있으니 시청시 주의할 것.
- 게임 타임 프린세스 에서도 이를 소재로 한 '시카고의 악몽'이라는 스토리가 업데이트 되었으나 범죄자 미화와 잔혹한 수위 등의 여러 논란으로 인해 역대 스토리 중에서도 유저들의 비판을 가장 많이 받았다. 결국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미출시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큰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중.
- 뮤지컬 더 캐슬에 등장한다.
- 프리한 19 '영화로 만들어질 현실 공포 19'에서 소개되었다.
- 더 다크 픽처스 앤솔로지의 시즌 1 제4부 더 데빌 인 미에서 소재로 등장한다.
[1] 길먼튼 자체는 주민 4천명 미만의 작은 마을이지만 그레이스 머탈리어스가 집필한 페이튼 플레이스라는 베스트셀러의 무대가 되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이 소설이 영화 혹은 드라마로 각색된 횟수만 무려 6차례.[2] 셜록 홈즈 캐릭터를 오마주하기 위해 쓴 가명이라는 설이 있으나, 시기를 따져보면 전혀 말이 안된다. 코난 도일이 주홍색 연구를 내놓은 시기는 1887년이고 셜록 홈즈 시리즈가 미국에서 히트를 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3] 흔히 엘리자베스 홀튼이 늙은 과부이며 홈스의 첫 희생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완전히 틀린 정보다. 홀튼은 홈스보다 몇 년 앞서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이고, 남편이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당연히 과부가 아니었으며, 홀튼 부부는 1920년대까지 잉글우드에서 살았다. 그녀가 한 일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미시간 대학 동문 직원 홈스에게 약국을 돈 받고 넘긴 다음 정상적으로 은퇴한 것뿐이었다.[4] 허스트 지는 홈스의 자백을 취재하는 대가로 약 1만불을 지불했다. 1895년의 1만불의 가치는 2020년 기준으로 35만불이 넘는다. 단 현재 가치로 1만불에 해당하는 2~300불을 지급한 것인지, 진짜로 당대에 현금 1만불을 지급했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