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배드핑거 Badfinger | |
결성 | 1967년[1] |
영국 웨일스 스완지 | |
전 멤버 | 좌측부터 조이 몰란드 (보컬 · 기타) 마이크 기븐스 (드럼) 피트 햄 (보컬 · 기타 · 피아노) 톰 에반스 (보컬 · 베이스) |
장르 | 파워 팝, 팝 록 |
활동 | 1967년 ~ 1975년 1978년 ~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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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략) 그런데 배드핑거는 더 슬퍼요. 이 배드핑거가... 말하자면 "짝퉁 비틀즈"로 유명한 밴드였는데, 이 배드핑거의 멤버들 얼굴 사진을 보면 그래서 존 레논 닮은 멤버, 폴 매카트니 닮은 멤버도 있어요. 초창기에는 정말 비틀즈 흉내 밴드였어요. 그런데... 이 Carry On Till Tomorrow는 정말... 비틀즈를 능가한다고는, 높낮이를 얘기할 수는 없지만, "비틀즈를 벗어났다"라는 좌우의 측면으로 본다면, 방향에서는 "이건 배드핑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거든요. 그런 면에 이제, 정말 많이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짝퉁 비틀즈", "흉내쟁이들"... 거기다 노골적으로 데뷔 앨범에서부터 "매카트니 1명, 레논 1명 있거든요!" 이랬던 그거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얼마나 쳤겠어요. 어느 날 깨달은 거죠.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매카트니처럼 될 수 없다'는 거... 그러고 나서... 바로... 권총으로...[2]
- 신해철
- 신해철
197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록 그룹이자 팝 역사상 가장 불운한 그룹.
해리 닐슨[3], 정미조[4], 머라이어 캐리 등의 커버로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명곡 Without You의 원작곡자로 유명하며 'No Matter What'등의 곡을 통해 파워 팝 장르를 창시한 밴드라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보통 이들을 설명할 때는 그러한 설명보다 팝 역사상 가장 불운한 그룹이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쓰인다.
여담이지만, 한동안 록계에서 밴드명에 bad를 넣으면 망한다는 도시전설이 촉발되게 한 장본인.
2. 역사
2.1. 활동 초창기: 애플 레코드 시절
1961년 웨일스에서 보컬 겸 기타인 피트 햄을 리더로 베이스에 론 그리피스, 리듬 기타에 데이빗 젠킨스, 드럼에 로이 앤더슨으로 처음 결성되었다. 그들은 The Black Velvets, The Wild Ones 등의 이름으로 무명 활동을 하다가 1964년에 길거리 간판을 보고 밴드 이름을 The Iveys로 확정한다.1965년, 드러머 로이 앤더슨이 탈퇴하고 새 드러머 마이크 기븐스가 합류했고 그들은 더 후, 야드버즈,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무디 블루스 등 당시 유명했던 밴드들의 오프닝 밴드로 서는 등 차츰 인기를 얻는다.
1966년, 밴드는 매니저로 빌 콜린스를 고용했고 멤버들은 빌 콜린스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빌의 집에는 The Mojos라는 5인조 밴드도 같이 살고 있어서 집이 미어터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투 트랙 녹음기만 있는 방만 사생활이 보장된 유일한 공간이었다고. 그렇게 1967년까지 밴드는 모타운, 블루스,소울 음악, 인기곡, 비틀즈 히트곡 등을 커버하면서 활동했고 킹크스의 리더 레이 데이비스에게 오디션을 본 후 여러 싱글들을 낸다. 1967년 8월에는 리듬 기타의 데이빗 젠킨스가 탈퇴하면서 리버풀 출신의 뮤지션 톰 에반스가 들어온다.
1968년 이들은 그 유명한 비틀즈가 설립한 애플 레코드와 계약하고 정식으로 메이저 데뷔를 준비한다. 애플과의 계약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지만 그들을 평생 따라다닌 '제2의 비틀즈' 라는 꼬리표가 대중들에게 붙는 순간이기도 했다. [5]
1968년 말, 밴드는 애플과의 계약 후 데뷔 EP인 <Maybe Tomorrow>를 발매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톰 에반스와의 불화에 지친데다가 마침 첫 아이가 태어나 돈이 궁해진 상태였던 베이시스트 론 그리피스가 밴드 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밴드를 탈퇴한다. 론 그리피스가 탈퇴한 이후, 밴드는 톰 에반스가 베이스로 포지션을 바꾸고 오디션을 통해 리버풀 출신의 기타리스트 조이 몰란드를 영입하여 멤버를 재정비한다. 또한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에서 밴드 이름을 배드핑거(Badfinger)로 바꾼다. 직후 배드핑거는 1969년 폴 매카트니가 작곡한 <Come and Get it>으로 데뷔하게 된다. 폴 매카트니는 1집 Magic Christian Music의 전체 프로듀싱도 맡았다.
1969년 애플 레코드의 협력으로 배드핑거는 링고 스타, 피터 셀러스 주연의 영화 Magic Christian에 출연하고 영화 OST앨범 Masic Christian Music의 전곡을 담당하여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동시에 미국 진출을 위해 미국인 매니저 스탠 폴리와 계약을 맺는다.
다음 해인 1970년에 발매된 No Dice 앨범은 조이 몰란드가 처음으로 참여한 앨범이자 Straight Up과 함께 밴드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되는 명반으로[6]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No Matter What>이 차트 8위에 오르면서 밴드는 본격적으로 락스타의 반열에 합류한다. 그 유명한 Without You 또한 이 앨범에 실려있는 곡이다.
한편, 비틀즈 멤버들의 친구였던 미국의 가수 해리 닐슨은 배드핑거가 Without You를 녹음하는 것을 듣고 "비틀즈의 곡들 만큼 좋은 노래다."라며 배드핑거에게 자신이 해당 곡을 리메이크하여 싱글로 발표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한다. 밴드의 승낙 후 1971년 현악기 세션이 더해진 해리 닐슨의 리메이크 곡이 발매되었고 곡은 발매 후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히트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닐슨과 그의 매니저는 곡이 히트하자 곡의 편곡을 다르게 해서 노래가 성공한 것이라는 이유로 피트 햄과 톰 에반스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하기 거부했으며 배드핑거 측은 해리 닐슨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1972년. 배드핑거는 자신들이 WIthout You의 원곡자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한 TV쇼에 출연해서 원곡을 부르기도 하였다. #
1971년 그들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Straight Up이 발매된다. 이 앨범의 제작과정은 엄청나게 험난했다. 본래 프로듀서로 낙점된 이는 조지 해리슨[7] 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성사된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8] 준비로 인해 앨범 녹음이 한창 진행중인 상태에서 아무런 대처도 안해놓고 하차했고 이에 애플 레코드사는 앨범을 마무리하기 위해 기타리스트 출신의 프로듀서 토드 런그렌을 고용한다. 당시 토드 런그렌은 프로듀서로 경력을 막 시작한 상태였고, Straight Up은 그의 초창기 프로듀싱 앨범이다. 그런데 토드는 앨범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밴드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앨범을 녹음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토드와 배드핑거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여 다음 앨범은 꼭 밴드 스스로 프로듀싱 하게 해달라고 애플 레코드에게 요구하게 된다.[9][10] Straight Up 앨범에서는 <Day After Day>, <Baby Blue>[11]가 싱글커트되어 각각 빌보드 차트 4위와 14위에 랭크되었다.
이렇게 앨범은 성공했지만 오히려 애플 레코드의 재정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12][13] 이에 밴드의 매니저였던 스탠 폴리는 3년간 6달에 한 번씩 앨범을 내는 조건으로 3백만 달러라는 액수의 계약금을 받고 애플 레코드사 몰래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계약에 따르면 저작권료 뿐만 아니라 앨범 판매 수익의 12%를 밴드 멤버들에게 지급하기로 되어있었다. 이 계약을 체결하고 스탠 폴리는 밴드 멤버들에게 "너희들은 이제 부자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워너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애플 레코드는 격노했고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미 밴드 스스로 프로듀싱까지 하여 녹음이 완료되어 있었던 앨범 Ass의 발매를 취소하고[14] 애플 레코드사가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던 피트 햄과 톰 에반스 곡들의 발행을 중단하며 밴드에게 저작권료 지급을 거부하게 된다.
한편, 피트 햄과 톰 에반스가 워너와 애플사이의 계약 문제로 곡을 발표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조이 몰란드는 자신의 곡을 각각 다른 판권업자들과 계약하고 있었고 자금사정이 절박했던 애플 레코드의 관계자들은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하게 해주고 단독으로 주목받게 해주겠다'며 조이에게 밴드를 탈퇴하고 솔로 앨범을 내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밴드의 매니저 스탠 폴리는 계약 조건에 위배된다며 조이 몰란드의 솔로 데뷔를 반대했다. 이후 애플 레코드사와 스탠 폴리의 협상 끝에 조이 몰란드의 자작곡들을 위주로 앨범을 발매하되, 앨범을 배드핑거 명의로 발매할 것, 작곡자 크레딧을 배드핑거 명의로 할 것, 피트 햄의 <Apple of My Eyes>를 앨범 첫 트랙에 실을 것, 앨범의 커버를 원래 계획[15]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1973년 11월 26일[16] 수록곡의 절반 이상을 조이 몰란드의 곡으로 채운 배드핑거의 앨범 Ass가 발매되었다.
2.2. 활동 후반기 : 워너 레코드 시절
한편, 워너 레코드로 새 둥지를 튼 밴드는 당시 신참 프로듀서였던 크리스 토마스[17]를 영입하고 애플 시절보다 빨라지고 복잡해진 사운드를 시도하는 등 당시 이들에게 붙여진 '비틀즈에 의해 키워진 제2의 비틀즈'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노력한다.하지만 1974년 2월에 발매한 워너와의 첫 앨범 <Badfinger>는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고 조이 몰란드와 피트 햄의 관계가 악화되어 밴드는 해체 직전까지 가게 된다. 사실 그전부터 밴드의 리더인 피트 햄과 자유분방한 성격의 조이 몰란드 사이에는 충돌이 종종 있었다.[18] 그러나 결정적으로 매니지먼트 문제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져버렸다. 스탠 폴리와 재계약을 할 시점이 되자 조이 몰란드는 그간 스탠 폴리가 행한 밴드의 매니지먼트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미국 출신의 사업가인 자신의 아내가 직접 밴드의 매니저먼트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밴드의 리더였던 피트 햄은 스탠 폴리를 계속 고용하자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둘의 갈등은 피트 햄이 밴드를 탈퇴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피트 햄의 빈자리는 기타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인 밥 잭슨이 가입함으로써 채워지게 된다. 하지만 워너 측에서 밴드의 리더이자 메인 송라이터[19]인 피트 햄이 밴드에 돌아오지 않으면 밴드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피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솔로 1집 작업 도중 다시 밴드로 돌아와 새 앨범 <Wish You Were Here> 녹음에 참여한다.[20] 하지만 피트 햄과 조이 몰란드의 관계는 계속 좋지 않았고 피트 햄이 밴드로 돌아온 직후 이번에는 조이 몰란드가 밴드에서 탈퇴하게 된다. 이후 밴드는 밥 잭슨을 재가입시켜서 1974년 11월 15일 <Wish You Were Here>를 발매하고 투어를 돌기 시작한다.[21]
그러나 앨범이 발매된 직후인 1974년 12월, 밴드의 매니저였던 스탠 폴리가 워너와의 계약금을 들고 잠적하는 사건이 벌어졌고[22] 이에 분노한 워너 측은 스탠 폴리를 고소하는 한편 발매된지 고작 7주밖에 안된 <Wish You Were Here> 앨범을 절판시키고 밴드와의 계약을 파기한다.[23] 배드핑거의 멤버들은 영문도 모른채 투어를 돌던 도중 갑작스럽게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으며 영국으로 돌아온 밴드 멤버들, 특히 피트 햄은 자신이 신임했던 매니저인 스탠 폴리가 횡령을 저지른 후 잠적했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당시 피트 햄은 서리주 워킹에 3만 파운드를 주고 새 집을 마련한 상태였고 부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후 자신의 팔과 손에 담배빵을 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피트 햄은 28번째 생일의 4일 전인 1975년 4월 23일, 톰 에반스와 함께 펍에서 위스키 10잔을 마시고 다음날인 23일 새벽 3시에 집으로 돌아왔고 그 날 아침, 차고에서 목을 매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유서에는 당시 임신중인 아내에게 자신이 경제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것, 스탠 폴리를 재고용하자고 주장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 밴드를 배신하고 밴드의 돈을 가로챈 매니저 스탠 폴리[24]에 대한 분노, 음악 비즈니스에 대한 억하심정이 담겨 있었다. 유서 말미에는 "Anne, I love you. Blair, I love you. I will not be allowed to love and trust everybody. This is better. Pete. P.S. Stan Polley is a soulless bastard. I will take him with me"라고 적혀있었다.
2.3. 밴드의 재결성, 해체
피트 햄의 자살 이후 나머지 배드핑거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마이크 기븐스는 웨일스에서 세션 드러머로 일했으며 톰 에반스와 조이 몰란드는 음악계를 떠나 톰 에반스는 파이프 수리공으로 일하였고 조이 몰란드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내의 고향인 미국으로 건너가서 카페트를 파는 사업을 하였다. 1978년 조이 몰란드는 톰 에반스에게 연락해서 배드핑거를 재결성하자고 말했고 톰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와 함께 2장의 앨범을 내게 되고 그럭저럭 성공하게 된다.그러나 조이 몰란드와 톰 에반스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면서 그룹은 다시 와해되는데 이 당시 조이는 배드핑거의 이름만 빌리고 그의 미국 동료들과 같이 새 밴드를 결성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톰은 배드핑거의 원년 멤버들로 밴드를 꾸리는 실질적인 재결성을 원했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조이 몰란드의 배드핑거'와 '톰 에반스의 배드핑거'라는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활동하게 된다. 조이 몰란드의 그룹에는 조이 몰란드와 그의 미국인 동료 뮤지션들이 톰 에반스의 그룹에는 배드핑거의 원년 드러머 마이크 기븐스와 워너 레코드 재적 시절에 같이 활동한 키보디스트 밥 잭슨이 가입하였다.
그러나 두 그룹 모두 별다른 성공을 하지는 못했으며 특히 톰 에반스와 그의 밴드는 미국 투어 도중 '제 2의 비틀즈는 필요 없다'며 관객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톰 에반스는 이를 견디다 못해 투어를 도중에 중단하고 영국으로 귀국했는데 미국의 투어 에이전시가 계약 불이행으로 톰 에반스를 고소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렇게 소송으로 힘든 나날을 버티던 톰 에반스는 1983년 11월 18일 저녁, 조이 몰란드와 전화로 <Without You>의 수익 분배와 저작권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25] 조이 몰란드의 뻔뻔한 태도를 보고 몹시 화가 난 톰 에반스는 통화를 마친 후 아내에게 음악 비즈니스에 대한 환멸과 피트가 있는 곳은 분명히 이곳보다 좋은 곳일 거라며 하소연을 한다. 부인은 그를 겨우 진정시키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다음날인 1983년 11월 19일 아침, 톰 에반스는 그의 가족들에 의해 뒷마당의 나무에서 목을 매어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향년 36세였다.
톰 에반스의 사후 마이크 기븐스는 조이 몰란드의 배드핑거에 가입하여 투어를 돌다가 1989년 탈퇴 후 몇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2005년 자택에서 수면 중 뇌동맥류로 사망하였다. 밴드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조이 몰란드는 조이 몰란드의 배드핑거라는 이름으로 2024년 현재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다.
3. 디스코그래피
- Magic Christian Music (1970)
- No Dice (1970)
- Straight Up (1971)
- Ass (1973)
- Badfinger (1974)
- Wish You Were Here (1974)
- Airwaves (1979)
- Say No More (1981)
- Head First (2000)[26]
4. 여담
영화 디파티드에서 Baby Blue 음악이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브레이킹 배드 월터 화이트의 후일담에서 Baby Blue가 피날레를 장식한다. 또한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에서 Day After Day가 사용되었다.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서도 거의 상징에 준할 정도로 많이 언급되었는데, 특히 첫방 엔딩곡을 Badfinger의 Carry on Till Tomorrow로 선곡했을 정도였다. 마지막 시즌에서도 신해철이 언급할 정도면 가히 준 상징적인 밴드라 할 수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에서 배드핑거에 대하여 방영한 적이 있다. #
[1] 사실 1961년에 이미 결성했으나, 그때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2] 틀린 말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멤버들인 피트 햄과 톰 에반스는 자살한 점은 다르지 않지만 자신들의 목을 메달았으며, 마이크 기븐스는 56세의 나이에 수면 중 뇌동맥류로 사망했다. 그리고 햄과 에반스가 자살한 이유 역시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자신들이 평생을 바친 음악 비즈니스에 대해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3]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주제가 Everybody's Talkin과 2015년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 62위, 2020년 개정판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281위에 든 Nilsson Schmilsson 앨범으로 유명하고 존 레논과 링고 스타와 친했던 바로크 팝, 사이키델릭 팝 싱어송라이터[4] 그대 없이는이라는 한국어 번안 버전을 발표했다.[5] 실제로 비틀즈 활동 당시 빽빽한 스캐줄로 녹초가 되어 있었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그들이 보낸 데모 테이프를 녹음실에서 듣고 자신들의 데모 테이프인줄 알고 착각하여 레코딩까지 하려고 했다고 한다.[6] 2000년대까지만 해도 <Straight Up> 앨범이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2010년대 들어서부터 <No Dice> 앨범이 보다 순수하게 밴드의 사운드를 담아낸 앨범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밑의 앨범 설명에도 보여지듯이 <Straight Up> 앨범은 밴드 멤버들보다 프로듀서 토드 런그렌의 영향이 더욱 짙은 앨범이다.)[7] 조지 해리슨은 개인적으로 배드핑거 멤버들을 마음에 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조지 해리슨은 배드핑거의 리더 피트 햄에게 자신의 1964년형 SG 오리지널 기타를 선물로 주기도 했고 자신의 솔로 1집 앨범 All Things Must Pass 녹음을 할 때도,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를 열었을 때도 배드핑거 멤버들을 게스트로 불렀다.[8] 밥 딜런, 라비 샹카르, 에릭 클랩튼, 키스 문 등 조지 해리슨과 친한 음악가들이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과 허리케인으로 인해 집을 잃은 수백만명의 방글라데시 난민들을 돕기 위해 주최한 콘서트이다. 수익금은 전액 방글라데시 난민들에게 기부되었다. 후일 라이브 에이드에도 영향을 주는 등, 자선 콘서트의 시초로 불리고 있다. 참고로 배드핑거도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에 참여했다.[9] 원래 토드 런그렌은 까다로운 뮤지션 &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거의 15년이나 지난 후 영국 밴드 XTC의 Skylarking를 녹음할 당시엔 리더 앤디 파트리지랑 의견 충돌이 심각해 언쟁이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Skylarking은 XTC의 걸작이자 영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자주 거론된다.[10] 조지 해리슨은 토드 런그렌의 프로듀싱 버전에 대해서 "자신이 기껏 배드핑거의 음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켜 놨는데 토드 런그랜이 앨범을 다시 그냥 통속적인 록음악으로 만들어놨다."고 비판했다. 토드 런그랜 역시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지 "앨범은 내가 다 완성했는데 왜 크레딧에 조지 해리슨이 올라와 있냐"고 불쾌해했다.[11] Day After Day는 조지 해리슨과의 작업에서(조지 해리슨은 이 곡에서 직접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Baby Blue는 토드 런그랜과의 작업에서 나온 결과물로 두 프로듀서의 음악 성향이 잘 드러나는 곡들이다. 참고로 모두 피트 햄이 작곡한 곡이다.[12] 설립 목적은 수익을 벌만큼만 벌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자는 좋은 취지였지만 살아생전 그렇게나 많은 돈을 다뤄본적이 없던 비틀즈 멤버들이 돈을 허공에 뿌리는 수준이 되어 점점 재정이 악화되었다. 비틀즈 멤버들, 특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관계가 70년대 초 몹시 험악해진 것 역시 재정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13] 배드핑거는 비틀즈 관련 앨범을 제외하고 애플에게 수익을 안겨주는 유일한 뮤지션이었다.[14] 이 앨범의 커버는 당나귀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는 모습으로 애플의 불합리한 매니지먼트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앨범에는 이러한 애플 레코드와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는 그들의 입장이 담긴 피트 햄의 곡 <Apple of My Eyes>가 실려있다.[15] 애플 레코드는 자신들을 조롱하는 늬앙스의 커버를 바꿀것을 제안했다.[16] 미국 발매 기준. 영국에는 1974년 3월 8일에 발매되었다.[17] 훗날 섹스 피스톨즈와 펄프 등의 앨범을 프로듀스하게 되는 사람이다.[18] 밴드의 리더 피트 햄이 조이 몰란드의 행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나타낸 곡도 있다. (Straight Up의 1번 트랙 Take it All.)[19] <Without You>의 메인 멜로디를 포함하여 <No Matter What>, <Day After Day>, <Baby Blue> 등 밴드의 히트곡 대다수는 다 피트 햄이 작곡한 것들이었다.[20] 결국 피트 햄은 생전에 솔로 앨범을 녹음하지 못했다. 그 대신 피트의 사후, 그의 유족들이 피트가 생전에 녹음해 놓은 데모들을 2장의 앨범으로 나눠서 발매하였다.[21] <Wish You Were Here>에 수록된 <No One Knows>라는 곡에서는 당시 크리스 토마스가 배드핑거와 동시에 프로듀싱하던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카토 미카가 피처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22] 워너사와 밴드의 계약서에는 계약금 3백만 달러 중 250만 달러를 에스크로 계좌(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란 일반적으로 계약에 서명하거나 위탁 상품을 납품했을 때 일정 조건에 이를 때까지 결제금액을 예치해두는 계좌를 말한다.)에 보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스탠 폴리는 밴드 멤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자신이 몰래 이 계좌를 관리하고 있었다.[23] 거기다가 불과 1년후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였던 핑크 플로이드가 동명의 앨범인 Wish You Were Here을 발매해 히트를 치는 바람에, 현재 배드핑거의 Wish You Were Here 앨범은 완전히 묻혀버려서 인지도도 낮고 자료도 찾을래야 찾기 어렵다. 당장 구글에 "Wish You Were Here"을 검색하면 과장이 아니라 배드핑거 관련 자료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24] 스탠 폴리의 사기 행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91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카운티에서 비행기 엔진 제조 회사 설립 명목하에 항공 엔지니어 피터 브록에게 25만 달러를 받고 도주했다가 잡혀서 자금유용 및 돈세탁 혐의로 집행 유예 5년을 선고 받으며 25만 달러를 모두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스탠 폴리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배상금 전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스탠 폴리는 2009년 7월 20일에 87세로 사망했다.[25] 당시 <Without You>에 대한 배드핑거의 저작권이 인정되어 작곡자로 표기된 피트 햄과 톰 에반스에게 저작권료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미 고인이 된 피트 햄의 몫은 유족들에게 돌아갔다.) 이에 대해 배드핑거의 전 멤버 조이 몰란드, The Iveys 시절 매니저인 빌 콜린스가 자신들도 작곡에 참여하였으며 저작권료의 일부를 받아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톰 에반스 사후 ASCAP는 주장의 근거가 부정확하다며 소송을 각하하고 최종적으로 <Without You>는 피트 햄이 메인 멜로디와 소절(Verse)부분을 작곡하고 톰 에반스가 후렴(Chorus)부분을 작곡했다고 정의 내렸다.[26] 피트 햄이 자살하기 4개월 전 녹음한 배드핑거의 앨범으로 스탠 폴리가 워너사의 계약금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도중에 투어를 중단해야만 했던 밴드의 심경이 담겨져 있다. 전반적으로 스탠 폴리와 음악 비즈니스 업계를 대놓고 까는 곡이 담겨져 있다. 파트 햄이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그의 유작 앨범이기도 하다. 당시 밴드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크리스 토마스는 밴드가 너무 앨범을 다작한다며 앨범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고 앨범 녹음도 불과 2주에 걸쳐 급하게 진행되었다.